• 최종편집 2024-05-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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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들레 진 후에
    민들레 진 후에 칩코 (생명평화대학 신입생) 민들레 피는 계절, 나는 산내에 왔다. 들레가 산내에 온 것도 같은 시기였다. 그래서 이름이 들레가 되었다. 들레를 처음 만난 곳은 실상사였다. 사람을 졸졸 쫓아다녔지만, 다가가면 줄행랑을 쳐버리는 겁쟁이 백구였다. 털은 하얗지만 때가 꼬질꼬질했고, 사납지는 않았지만 다리가 튼실한 것이 떠돌이 생활을 오래한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사람만 보면 꼬리를 치며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맞출까. 들레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했다. 나는 인드라망 공동체의 생명평화대학에 다닌다. 나와 같은 신입생들과도 들레는 금세 친구가 됐다. 우리가 밥을 준 것도 아닌데, 들레는 우리를 잘 따랐다. 언덕배기에 있는 대학 숙소까지 따라오곤 했는데, 숨도 안 고르고 폴짝폴짝 노루처럼 뛰어오르며 우리를 앞질러 갔다. 들레 뒷모습을 보면서 헉헉거리며 언덕을 오르자면, 꼭 내가 들레 집에 초대받는 기분이었다. 그 드넓은 언덕을 주인처럼 자유롭게 쏘다녔으니까. 들레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실상사에서는 들레를 내쫓기로 했다. 지금껏 모든 들개에게도 그래왔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점점 들개 친구들을 데리고 올 거라고 했다. 또 들레가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다고 했다. 실상사는 아이들도 많이 오기 때문에 특히 위험했다. 들레는 사람 신발을 물어가는 고약한 버릇까지 있었다. 들레는 그게 놀자는 의미였는데, 사람들은 반기지 않는 방식이었다. 들레가 해우소가 아닌 곳에서 볼일을 본다는 점도 이유가 됐다. 실상사 사람들은 들레를 만나면 손뼉을 치거나 훠이훠이 위협을 하며 내쫓기 시작했다. 갈 곳 없는 들레는 대학 숙소에 더 자주 놀러 오게 됐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대학 숙소 사람들도 들레를 내쫓기로 했다. 절과 대학만이 아니었다. 어느 농장이나 과수원 주인도 들개가 밭을 헤집고 다니는 걸 원치 않았다. 닭을 소유한 농부들은 더 강경했다. 들레는 위험한 시멘트 찻길 외에는 어느 곳에서도 왕래할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동네의 개들이 왜 다리를 절뚝이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들레를 내쫓는 것이 이상했다. 들레는 사람을 좋아했다. 사람들을 보면 반갑게 인사했고, 절에 매일 눈도장을 찍었다. 나는 들레가 우리 공동체에 문을 두드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들레는 이웃으로 받아달라고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한 셈이었다. 공동체에서 사람을 내쫓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내쫓을 권리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개도 당연히 산내의 어느 땅이든 오갈 수 있는 생명이었다. 개가 친구들을 데려오지 말라는 말, 해우소에서 볼일을 보라는 말, 신발을 물지 말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내쫓는 것은 차별이었다. 공동체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내쫓는다면, 규칙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유아나 지적장애인들도 내쫓을 셈인가? 개가 사람을 공격할 수 있어서 내쫓는다면, 사람도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데 왜 내쫓지 않는가? 개에 물려 죽는 사람보다, 사람에게 죽임당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텐데. 들레는 개라서 차별받았다. 우리와 다른 종이기 때문에 차별받았다. 들레와 친구였던 신입생들은 인드라망 공동체에 대화를 시도했다. 먼저 대학 숙소 식구들이 이야기를 나눴다. 논의 주제는 ‘들레는 어디에 있어야 하나?’였다. 들레의 주인을 찾아주자거나 유기견 보호소에 보내자는 의견이 있었다. 산으로 들로 즐겁게 쏘다니는 들레를 갇힌 장소로 보내는 건 납치나 다름없다는 반박이 따랐다. 대부분의 시골 개들은 무료한 시멘트 바닥에서 60센티 남짓한 목줄에 묶여 지낸다. 유기견 보호소도 열악한 곳에서 갇혀 살다가 안락사 되기 일쑤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떠돌이로 살게 놔두는 건 위험했다. 들레는 음식물 퇴비간이나 똥간에서 배를 채우곤 했다. 들레가 오가는 찻길은 로드킬이 잦았다. 다달이 개장수가 마을을 돌 때 잡혀갈 시나리오도 있었다. 그럼 우리가 키워야 하나? 들레를 책임질 수 없으니 키울 수 없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그럼 키우지 않으면 우린 책임에 면죄부를 받을 수 있나? 애초에 이 작은 개 한 마리가 이토록 안전하게 살 곳이 없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개의 먹이를 독점하고, 차로 개를 죽이고, 개를 물건처럼 사고파는 자들이 결국 인간이지 않은가? 해결책을 내지 못한 채 회의시간이 끝이 났다. 논의는 게을러져서 이후 대학 내에서도, 실상사에서도 진전되지 않았다. 그 사이 한 주민이 떠돌이 백구를 잡아가라고 신고를 했다. 개장수 트럭이 오가는 것을 보고 신입생 친구들은 급히 들레에게 스카프를 매어 주었다. 보호자가 있는 개로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날 저녁, 말괄량이 들레는 하루도 못가 스카프를 잃어버린 채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래도 개장수 트럭은 피한 모양이었다. 그즈음 산내에 폭풍 같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어찌나 거센지 양철지붕쯤은 그냥 날려버릴 기세였다. 강풍은 닷새가 지나도록 계속됐다. 들레는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강풍이 끝날 때까지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는지, 산내가 질려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신입생들은 들레를 위한 현수막을 만들고 있었다. 개 로드킬을 방지하기 위해 속도를 줄여달라는 현수막이었다. 회의의 결론 중 확실한 것은 인간이 비인간동물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위해 노력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세월호 참사 때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때도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 나는 언제든 그들이 될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들레를 생각하면, 나는 정말이지 운 좋게 인간으로 태어났다. 우리 사는 곳은 인간이 아닌 생명에게 얼마나 가차 없는 환경인가? 내가 비인간동물로서 한 마을에 문을 두드렸을 때, 누구도 나를 환대하지 않고 나를 죽일 트럭에 몰아넣는 곳. 바람이 그치고 우린 현수막을 걸었다. 들레에게 새로 매어 줄 스카프도 마련했다. 그러나 들레는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들레가 사라진 후에도 개장수 트럭은 여러 차례 마을을 오갔다. 들레는 트럭에 잡혀갔을까? 다른 마을에서 살고 있을까? 들개를 환영하는 마을이 있을까? 들레는 우리를 원망할까? 우린 또 다른 들레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수많은 질문을 남긴 채, 민들레 피는 계절이 지나갔다.
    • 우리마을
    • 남원
    2021-06-01
  • 툇마루 수다
    한승명 (지리산생명연대 사무처장) 저는 지리산(산내면)에 깃들어 어머니를 모시고 두 아이를 키워내고 이제는 <지리산생명연대>에서 함께 지리산이 되자고 총총 걸음을 걷고 있는 아낙입니다. 봄볕 따사로운 툇마루에서 봄나물 다듬듯 잘 아시는 이야기 하나 풀어놓을게요. 한 농부에게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어느 날 더 많은 황금알을 갖으려고 거위배를 갈라보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거위는 죽고 뱃속에는 창자와 똥뿐이였습니다. 농부는 울상이 되었습니다. '지리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우리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황금(돈)인줄 알던 때도 있었고 성공인줄 알던 때도 있었고 사랑인줄 알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리산에 깃들면서 진정 내게 소중한 것은 '생명'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리산을 우러러 어머니의 산, 여신(마고)의 산이라고 칭송하는 것은 모든 것을 내어주고 살려주고 품어준 '생명의 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리산을 나의 이기와 편리로 파헤치고 자르고 베어 거위 죽이듯 지리산을 죽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곳에 태어나 지리산 덕분에 잘 살아왔고,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어려움과 직면하거나 어지러운 세상, 환란을 맞아 살아보고자 깃들은 지리산이건만 그 고마움을 망각한 채 그 지리산이 죽어가고 있는 것은 나와 상관없는 듯 침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은 이 땅을 지키고자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았으며, 모든 생명이 함께 살아야한다고 거리에서 외치고, 어린 자식들을 잃고 슬피 우는 어미들을 안아 주었고, 병든 세상에 맞서 서로를 살리기를 기꺼이 해낸 지리산 같은 이들 덕분입니다. 나는 그들을 주저 없이 '지리산'이라고 부릅니다. 지리산은 제일 높이 솟은 천왕봉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높으니 낮으니 어깨를 걸고 있는 모든 봉우리가 모두 '지리산'입니다. 자신을 내어놓고 서로 돌보고 살리면 내 자신의 생명도 건강하고 풍성하게 살수 있다는 지혜를 지리산은 가르쳐주었습니다. 오늘도 멍청이 잠을 자는 나를 흔들어 깨우는 것들이 있습니다. 기지개켜는 흙, 개구리 울음에 흔들리는 바람, 소녀의 숨소리처럼 달뜬 냇물, 온갖 생명들이 저마다 부르는 노래... 지리산이 이 봄에 내 귀를, 내 눈을, 내 온 몸을 흔들어 깨웁니다. 쑥개떡이나 빚어 이웃과 나눠 먹어야겠네요. 이만 총총.
    • 이야기
    • 지리산자락 사람들
    2021-06-01
  • 지리산 아래(下)
    김창승 (섬진강 수해극복 구례군민 대책본부 상임대표) 지리산과 함께 사는 기쁨을 아십니까. 큰산과 더불어 살고 싶다는 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는 없습니다. 갈망하면서도 가까이 갈 수 없는 산, 누구나 어느 때나 다가갈 수 있는 산이지만 특별히 허락된 자에게만 자신의 몸 한자리를 내어주는 산이기에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참배하듯 산을 보며 어떤 인연과 행운으로 지리산 아래(下)로 왔을까? 자문해봅니다. 그건 내 의지와 희망으로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래 전 부터 한 인간의 외로움과 허기 같은 갈증을 지켜보며 그의 자락, 어머니 같은 그의 품으로 불러준 지리산의 호명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지리산이 '김창승' 이름 석 자를 불러주었던 2014년 1월 14일, 그날은 지리산 하(下)에서 새로운 인생의 여정을 시작한 생일 같은 날입니다. 트럭에 짐을 싣고 오는 욕망의 덩어리를 지리산은 두 팔 벌려 그의 품에 안아주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시린 등을 토닥토닥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날로 부터 지리산은 내 영혼의 안식처가 되었고 그의 곁으로 한 발 한 발 다가설수록 쉼표와 느낌표를 주었습니다. 산의 깊은 숨소리에 위안과 기쁨을 느꼈고 둘이서만 나누는 은밀한 대화는 달콤했습니다. 그를 떠나 멀리가면 왠지 어린아이처럼 불안했고 산이 도망가 버릴 것 같은 마음에 서둘러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무지개 터널을 지나 지리산과 구례가 한 눈에 보이는 언덕에 서면 나도 몰래 안도의 한숨이 나오곤 했습니다. 지리산중(中)을 돌면서 사람을 만났습니다. 마을 이름도 산을 닮은 그곳에는 야생화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상죽, 내죽, 상용, 중용, 하용, 상유, 중유, 하유, 상무, 하무… 산에 기대어 살며 산 하나씩을 내면에 끼고 있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무심해 보였지만 인사를 건내면 물 한 잔이라도 하고가야 한다며 옷 소매를 붙드는 속정 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햇볕 드는 마루에 앉아 몇 시간이고 살아온 얘기, 먼저 가신 서방님 얘기, 아이들 모두 잘 됐다는 얘기를 오래된 지인처럼 하시다가 다시 꼭 오라며 손을 흔드는 고향 같은 사람들을 이었습니다. 이런 인연들을 하나씩 쌓으며 지리산 들꽃 같은 사람들 이야기를 마음속 앨범에 저장하면서 7년이란 세월을 꿈처럼 보냈습니다. 지리산 꼭대기(上)에는 흰 눈이 내렸습니다. 산에 기댄 사람들은 눈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추억을 더듬고 산짐승은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백옥의 산을 올려다 봅니다. 아, 깨끗하고 때 묻지 않으며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세상을 봅니다. 지리산으로 오기 전에는 높이 높이 올라가려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래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 헛된 꿈과 욕심을 내려놓고 이제는 소박한 꿈을 꿉니다. 봄이 되면 들꽃, 산꽃 가득한 마을로 가는 꿈을 꿉니다. 마당에 들어서며 '이모님, 어르신' 그간 잘 계셨는지 안부를 묻고 손을 덥석 잡는 꿈을 꿉니다. 낮은 곳에서 산을 보는 기쁨, 지극히 겸손하나 산을 닮은 옹골진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 목숨걸고 지켜온 그들의 깨알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특별함, 작은 꽃 하나와도 눈맞춤을 하며 대화하는 여유… 이 모두가 지리산의 선물입니다. 가장 평화롭고 생명력 넘치는 것들은 낮은 곳에 있었습니다. 하늘처럼 높고 존귀한 것들은 장엄한 산을 바라보며 기도하듯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있었습니다. 잔잔한 평화로움이 무엇인지, 더불어 함께 가는 삶이 무엇인지, 작은 것 하나라도 함께 나누면 내가 먼저 행복해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준 어머니의 산, 높지만 낮은 곳을 사랑하는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 지리산입니다.
    • 이야기
    • 지리산자락 사람들
    2021-06-01
  • 남원시 산내면 청년의 이야기
    남원시 산내면 청년의 이야기 지음 (생명평화대학 학생)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인생 스무 해 째를 살고 있는 지음입니다. 인드라망 공동체 안에 있는 청년 인생학교 ‘생명평화대학’의 학생으로, 올 봄부터 남원시 산내면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저는 이웃도 잘 모르는 도심의 아파트에서 살다가 올해 산내에 와서 ‘마을’, ‘공동체’라고 하는 것들을 경험하며 새롭고 가득한 순간들을 많이 만나고 있어요. 제가 뭐 남다른 통찰력이나 글솜씨가 있는 건 아니지만, 감탄하던 마음 되살려서 그 순간들 중 최근의 일 두 가지를 같이 나눠보려고 해요. 지난 11월 9일 산내에서는 올해의 마지막 ‘살래장’이 열렸어요. 4월부터 매달 둘째 주 토요일마다 뱃속은 물론 눈과 귀, 마음까지 두둑하게 채워주던 장터에요. 저는 살래장을 ‘다른 장에 없는 건 있고, 있는 건 없는 특별한 장터’라고 설명하고 싶어요. 주점, 벼룩시장, 전시, 공연, 창작물 판매 등 진짜 별의 별게 다 있고요, 포장 비닐, 일회용 젓가락 이런 건 찾아보기가 어려워요. 일단 살래장에 제일 많은 건 사람인데, 적게는 150명에서 많게는 250명까지 다녀간다고 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공간인데도 쓰레기가 50L 종량제 봉투도 다 안 찰 만큼 적게 나온다니 대단하죠. 여기에는 ‘비니루 없는 점빵’이라고 하는, 몇몇 이모들이 만든 어떤 캠페인 같기도 하고-교육 기관 같기도 하고-김밥 집 같기도 한 부스의 영향이 커요. 이 점빵의 이모들은 미리 사람들에게 속닥속닥 하시는 거예요. “(작은 목소리로)비닐이나 플라스틱 포장재 없이 물건을 사고 팔아보자, 빈 그릇과 텀블러, 수저 등을 들고 살래장 나들이를 오시라.”고 말이에요. 그럼 정말로 마을사람들은 포장재 없이 생산물들을 선보여요. 구경 오시는 분들도 장바구니는 물론 반찬통, 텀블러까지 들고 와서 소풍 도시락 까먹듯 즐기다 가시고요. 그게 진짜 가능한 일이더라고요! 제가 살래장에서 가장 사랑했던 음식은 샌드위치인데요, 이것 말고도 여름엔 팥빙수, 겨울엔 군고구마, 계절에 상관없이 커피, 쿠키, 스프, 반찬, 파전 등 정성어린 손길이 가득 담긴 다양한 음식들을 맛보거나 냄새 맡을 수 있어요. 또 제 예민한 피부를 감싸주던 수제 쌀겨 비누, 실상사 작은학교 친구들이 만든 스킨, 샴푸 등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아이템들이었죠. 저는 아쉽게도 살래장에서 한 번도 뭘 팔아본 적은 없지만, 제가 되게 열심히 했던 게 한 가지 있어요. 바로 친구들과 함께 한 공연이에요. 살래장의 무대는 실력을 따지지 않고 마을 청중들 앞에서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아낌없이 주세요. 생각해 보니 제 데뷔무대였네요. 이것 말고도 마을분이 수집하신 램프 전시, 플라스틱을 먹은 새 다큐멘터리 상영, 아이들의 손 떼 묻은 딱지 판매 등 기억에 남는 게 많아요. 매달 마을 사람들과 만나서 목소리든 음식이든 물건이든 주고받을 수 있는 마당이 있다는 것, 누구든 무엇이든 내놓으면 서로 봐주고 들어주고 받아주는 품이 있다는 것이 좋고 재미있어서 항상 살래장이 기다려졌던 것 같아요. 또 내가 뭔가를 작당해서 만들었을 때 선보일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은 참 든든하고 신이 나죠. 살래장이 있기 일주일 전, 대학 친구들과 남원 시내로 진출했어요. 바로 ‘남원시 청년창업 한마당’에 참여하기 위해서였죠. 이 자리는, 남원에 있는 청년 단체 22곳, 마을 공동체 18곳이 모여 서로 어떤 일들을 꾸미고 있는지 알리고 구경하는 자리였어요. 청년들과 마을 공동체가 잘 정착하고 나아갈 수 있도록, 남원시에서 주최하고 남원시 공동체 지원센터에서 주관하는 커다란 행사였어요. 이 행사에서 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청년’이라는 이름, ‘마을’이라는 이름을 달고 뭉쳐서 다양한 것들을 시도하고 노력하고 있는지 똑똑히 보고 느낄 수 있었어요. 저희도 생명평화대학 홍보도 할 겸, 털실로 따뜻한 귀마개를 만들어 실 값만 받고 나누겠다고 나섰지요. 행사를 준비하기 전에 저희는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어요. ‘우리가 어떤 것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 갈까?’에서 시작하여 ‘우리는 사회에 나가서 뭘 해서, 먹고 사는 동시에 더 따뜻한 사회로 나아가는데 걸음을 보탤 수 있을까?’하는 물음까지 이어졌어요. ‘우리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밥도 먹여주고 이 사회에 도움도 되는 일이면 좋겠다.’, ‘마치 캠페인처럼, 우리가 행동하고 존재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돈 외에는 따뜻함이 널리널리 퍼져나가는 데에 쓰이면 좋겠다.’고 생각을 모았어요. 그래서 함께 열심히 뜨개질해서 만든 귀마개를 드리고 털실 한 뭉치 값의 후원금을 받기로 했어요. 그렇게 모인 돈은 이 활동을 위한 식비와 차비로만 쓰고, 그 외에는 다음 귀마개를 만드는 데에 쓰자고 했지요. 털 실 하나에 두 개의 귀마개가 나오니까, 우리는 이 캠페인을 두 배, 네 배로 늘려갈 수 있겠다 싶어 들뜨기도 했어요. 막상 실전에서는 사람들에게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어려움이 컸어요. 상품과 자본의 교환으로만 흘러가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만들고 나누는 것은 분명 즐겁고 뿌듯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이 시도에 필요한 재료비는 남원시에서 지원을 받았어요. 이렇게 우리가 무슨 일을 꾸미고 실현해볼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자리를 만들어준 시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같이 배우고 생활하는 친구들과 함께 사회에 나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고, 해보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지점은 무엇인지 경험해볼 수 있는 값진 기회가 되었어요. 나의 인생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방황이 뒤섞인 이 시기에, ‘함께’ 살아가고자 궁리하고 노력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큰 행운 같아요. 방법과 목적에 대한 힌트를 얻고, 따뜻한 경험과 배움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어요. 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우리마을
    • 남원
    2021-06-01
  • 시민으로 살아가기
    박형규 (기후위기남원시민모임 대표) 2016년 봄, 15년 간 살던 경북을 떠났다. 애초부터 딱히 정해진 곳이 있어서 움직인 건 아니었다. 산정호수 시절부터 20년이 넘게 산골생활을 한 아내는 아이들도 다 나갔으니 이젠 좀 따뜻한 남쪽나라에 가서 살자고 했다. 따뜻한 남쪽나라? 그래 그러면 아예 이참에 쿠바로 가서 살까? 했더니 그건 또 아니라 한다. 그러더니 친정인 무주 안성면에서 1시간 거리 정도면 된다면서 한계를 정해 준다. 임실, 곡성, 장수, 진안, 완주 등 몇 군데 찾아봤지만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러던 10월 어느 날 지리산 산내 사는 후배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강변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쉬고 있는 데, 흐르는 강물이 편안하면서도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바로 전화를 해서 “여보, 남원은 어때요?” “시내인가요?” “응, 그래” “그럼 거기서 한번 찾아 봐요.”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순식간에 남원으로 결정되었다. 박근혜 탄핵운동이 한창인, 11월 중순 경에 세를 얻어 요천가, 죽항동에 살기 시작했다. 이사한 그 주일 박근혜 탄핵운동 남원집행부를 찾아 갔다. 내 소개를 하고 집행부에 함께 동참하면서 남원살이가 시작되었다. 2017년 박근혜 탄핵 직후부터 <직접민주주의 시민남원회의>, <시민참여제도연구회>, <기후위기남원시민모임>의 이름으로 광치동화력발전소 반대투쟁 승리, 남원시민참여기본조례 제정운동을 해왔고, 현재는 기후위기운동과 지리산산악철도 반대운동을 진행 중에 있다. 대부분의 지역 소도시들이 그런 것처럼 남원에도 역시 ‘구체적인 민주주의’가 없다. 남원행정은 지역 주민들의 행복?을 위한 일을 한다면서 전혀 주민, 시민들에게 제대로 묻지 않는다. 남원시엔 16명의 시의원들이 있다. 그런데 이 16명 전부가 다 민주당이다. 게다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은 임실, 순창, 남원 지역위원장이 현 이환주 남원시장이다. 어찌 이런 파행적인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시행정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자들의 공천권, 그러니까 생사여탈권을 현직 시장이 쥐고 있는 거다. 이건 시장도, 시의원들도 남원시민을 기만하고 무시하는 처사다. 올바르게 돌아가는 지역이라면 행정과 의회, 그리고 시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어떤 일이든지 정당한 ‘공론화 과정’을 통해서 진행되어야 하고, 그것은 마땅히 민주적인 사회의 바탕이 되는 기본이다. 남원의 실정이 이런데 시의회가, 시의원들이 제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을까? 시장도, 시의원들도 시민을 존중하기는커녕 시민의 뜻과 의사를 전혀 개의치 않는 곳이 남원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가 없다. 2주 전에 남원시 의회가 ‘기후위기조례 입법예고를 했다. 이는 매우 환영받을 고무적인 일이다. 그런 와중에도 남원시청 기획실에서는 9월 2일에 <지리산 친환경 전기열차 시험노선 유치를 위한 전략분석 및 정책성 수립용역> 심의회 결과보고 공문을 냈다. 처리기간은 1일이다. 매사가 이런 식이다. 지리산산악전기열차는 현재 여러 가지 논란이 일고 있다. 지리산은 남원사람 만의 재산이 아니다. 지리산은 전 국민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까지 함께 누리고 보전해야할 소중한 공유자산이다. 이미 이웃지역 하동에서는 이른 바 ’하동알프스 프로젝트(산악열차, 케이블카, 모노레일)를 반대하는 대대적인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 엄혹한 기후위기 시대에 개발과 토건을 중지하고 근본적인 정책전환을 도모 하지는 못할망정 이명박의 4대강과 다름이 없는 국립공원을 개발을 하겠다고 하는 망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 이야기
    • 지리산자락 사람들
    2021-06-01
  • ‘17년 지리산 살이’
    문미랑 (경상남도환경교육원) 대학을 졸업하고 빛나는 20대 시절에 나는 지리산에 살고 있었다. 구례 화엄사 황전마을 부근에서 5만 원 짜리 월세를 살면서 적은 월급이었지만 우체국의 이자율 9% 짜리 적금을 넣으면서 현재보다 더 빛나는 미래를 꿈꾸며 살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드라마 속 밝고 긍정적인 주인공처럼 살아갔던 것 같다. 새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파이팅!’을 외치며 일어나, 어제 보았던 야생화의 꽃봉오리가 폈겠지 하는 설렘으로 카메라를 챙겨 출근을 하여, 동료들과 탐방로를 올라 식물 공부를 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환상적인 직장 생활이었고 주변에는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지리산국립공원관리공단(현 국립공원공단)에서 근무하는 것이 행복했다. 해설을 하거나 외부 강의에 나가면 자랑처럼 나는 이야기했다. 하고 싶은 일,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잘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사는 삶이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실로 그 시절에는 그랬다. 현재 나는 43살이다. 중년이라고 불리는 나이이고 조심하지 않으면 꼰대라고 뒷담화를 들을 수 있는 나이이다. 현재 나는 지리산국립공원 중산리에서 근무하고 있다. 나의 소속은 국립공원공단에서 경상남도 소속으로 바뀌었고 그 사이 하동군 소속으로 7년간 하동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나는 평생 지리산 부근에서 돈을 벌고 생활을 하고 사람을 사귀며 살아가고 있다. 지리산을 무대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은 일들을 했다. 그리고 나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도 지리산권 마을마다 몇 명씩은 생겨났다. 지리산 어느 동네를 지나더라도 밥 먹을 사람, 차 한 잔 같이 할 사람이 생겼다. 하지만 3번의 직장을 옮기며 구례, 하동, 산청으로 다니면서 한곳에 정착을 하지 못했다. 지리산권 어디를 가더라도 아는 사람이 있고 만날 사람이 있는 나지만 나는 17년이라는 시간동안 어느 지역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이곳이 내가 사는 곳이다 고 아직 말할 곳이 없다. 지금 근무하는 산청으로 온지는 이제 일 년 하고 6개월이 지났다. 아직도 적응기이고 아직도 누군가를 사귀기에 낯을 가리고 있다. 아주 오래전 천은사에서 가졌던 모임에서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진행자가 유도 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리산에서 살게 된 이유를 자신의 소개와 함께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나도 그때 그 모임에서 내가 지리산에서 살게 된 이야기를 소설처럼 이야기 했던 것 같다. 그런 와중 뒤에서 누군가의 삐죽거림이 들렸다. “다들 지리산 병에 걸렸구나. 와서 망치지나 말았으면” 그분은 내가 아는 누구보다 지리산을 사랑하시는 분이셨다. 그 모임 이후로 나는 그분을 볼 때 마다 주눅이 들어 은근 피하게 되었다. 그때 내 나이 30대 초반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내 양심을 찔리게 한 건지 나는 오랫동안 그 이유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작년부터 번아웃(burnout)도 왔고, 20대의 마음처럼 내가 하는 일이 마냥 즐겁지도 않고 지리산 살이가 완전히 행복하지도 않다. 그리고 나는 가끔 직장을 탓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주변 사람들을 혼자 미워하기도 한다. 제발 좀 쉬고 싶다는 생각과 26살의 나로 돌아 갈순 없지만 43살의 지금의 나로 계속 살아가는 것은 참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이다. 나는 천은사 회의 때 이야기했던 지리산 살이 찬양을 지금까지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를 비롯해 그저 왔다갈 사람들이 영원히 살 것처럼 이야기하며 지리산을 망쳐놓고 떠나버리는 모습이 야속해서 그분은 독설을 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양심에 그분의 독설에 눈치를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지리산인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원고 펑크도 냈었고 매번 원고마감이 다되어서야 편집자의 속을 썩이며 원고를 냈었다. 모자란 글 솜씨로 열심히 쓰려고 노력은 했지만 바쁜 직장생활 핑계를 대며 정성들여 쓰지를 못했다. 일이 바쁘고 원거리 인터뷰의 험난함을 이유로 나는 5월 편집회의에서 편집위원 자리를 내어 놓았다. 그리고 17년 동안 지리산 살이에 정착하지도 못한 내가 ‘지리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나간다는 것도 나에겐 모순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뭐 하나라도 들어내고 쉬고 싶다. 이제는 좀 쉬면서 내가 정착할 곳에 정을 들여야겠다. 정착할 마음의 끈을 다잡아야겠다. 글하나 안 쓴다고 내 생활이 엄청나게 편해지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일을 하나씩 줄이고 17년 지리산 살이의 결론을 좀 내려야겠다.
    • 이야기
    • 지리산자락 사람들
    2021-06-01
  • 나의 주인은 나
    문미랑 (경상남도환경교육원) 언제부턴가 차 안에서 음악을 듣는 대신 명사의 강의나, 읽어 주는 라디오 책을 듣게 되었다. 나는 음악을 참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나는 음악을 들으며 멜로디를 통해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고독을 즐기기도 하고 고민의 답을 찾아내기도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이것들이 스트레스로 느껴져서 명사가 ‘이렇게 해라’, ‘저것은 틀렸다’ 하는 가르침을 받는 편이 편해져 버렸다. 예전처럼 음악을 삶에 담고 있지 않는 것이 나이듦의 시작인가 하는 씁쓸한 생각도 들지만 이제부터는 마음도 몸도 편안하게 살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마음이다. 구례에 사는 김동관씨를 만났다. 그와는 조금의 친분이 있는 사이이다. 그는 집짓는 목수, 철학을 논하는 명상가이다. 나는 명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내가 아는 명상은 가부좌를 틀고 손을 무릎 위에 올려 눈을 감고 마음을 평온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김동관씨는 무척 말라 있었다. 내 기억 속에 그는 덩치가 꽤 크고 노래를 잘불렀던 사람이었는데 왜소한 그를 만나니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1991년에 지리산살이를 시작한 그는 구례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다. 그를 유명하게 한 것 중 하나는 목수 일이다. 나도 그가 지은 집과 집주인을 몇 분 아는데 그가 지은 집은 대부분 그 집에 사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가 지은 집을 보고 느껴지는 것들의 공통점은 집이 사람과 닮아있다는 것이었다. 시인의 집은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이고 외로운 홀아비의 집은 사랑을 찾는 이의 쓸쓸함이 느껴졌던 것 같다. 그리고 자연속의 일부인 듯한 자연스러운 어울림이 그가 공정에 참여한 집들이 갖는 공통점이었다. 그와 ‘명상과 삶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솔직히 나는 간간히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도 했고, 어느 부분에서는 그가 몽상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 혼란 속에서 한 시간이 금방 가버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음악듣는 것을 즐기지 않게 된 후에는 생각의 늪에 사로잡히는 것이 귀찮은 나였는데 그와 대화를 이어 갈수록 나는 내 속의 질문과 고민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나온 로드킬 이야기를 하면서는 로드킬의 공포로 밤길 운전이 두려워 밤에 활동하지 않는 나의 문제도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가 했던 말 중에 기억에 남는 구절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똑바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살자. 나는 어디에서든지 명상을 한다. 일상 속에서도 명상을 하고 지금처럼 대화를 하면서도 명상을 한다. 나는 스트레스가 전혀 없어요. 생명의 본질을 깨닫고 매 순간 내 삶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로 살아가면 그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이루면 스트레스는 자연히 없어집니다. 자신의 껍데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많아요. 육체는 노예처럼, 감정은 하인처럼, 생각은 지나가는 바람처럼 살아 가다 보면 내 자신의 주인은 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 아이들에게 늘 강조했던 말은 다섯 가지입니다. 무해(無害), 남에게 절대로 해를 끼치는 일을 하지마라. 진실(眞實), 진실로 상대방을 대하라. 성실(誠實),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라. 매순간 내 인생에 충실해야 후회가 없다. 절제(節制), 지나치지 말고 절제하라. 성찰(省察), 자신을 돌아 보고 반성하며 살아라.” 명상을 하든 일을 하거나 음악을 듣든, 로드킬이 염려되는 길을 운전해가든지 우리는 껍데기를 위해 살지 말고 내 자신의 주인으로 나를 사랑하고 살면 필요없는 염려를 버리고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그는 나에게 끊임없이 힘주어 강조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어두웠다. 강 옆에 있는 시골길을 운전해 가면서 나는 음악을 틀었다. 12월 U2공연이 서울에서 있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본 것이 기억나서 U2의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했다. 나는 음악을 들으면서 너무 고민하지 않았고 운전을 하며 사고가 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천천히 조심스레 운전했다. 더 이상 음악은 스트레스가 아니었고 시골길 로드킬에 대한 공포도 시나브로 사라져갔다. 나는 그와 인터뷰를 하는 내내 명상으로 깨달음을 얻었음을 알 수 있었다.
    • 이야기
    • 지리산자락 사람들
    2021-06-01
  • 지리산 마루금처럼 고운 자연주의자
    문미랑 (경남환경교육원) 내가 일하는 경상남도 환경교육원은 지리산 중산리 산 속에 위치해 있다. 퇴근을 하고 인터뷰를 하기 위해 산을 내려가는 길가에 노란 꽃들이 풍성하게 피어 있다. 무슨 야생화일까 궁금하여 잠시 차를 세울까 고민하다가 피나물이겠지 하고 지나쳤다. 산청 중산리 버스주차장에서 계곡의 다리를 건너 최문옥님네 집으로 갔다. 숲길을 가다가 우연히 쉬어가고 싶은 아늑한 집을 만난 듯한 느낌의 집에서 그녀가 나왔다. 그녀의 집은 모든 소품이 이쁘고 특색 있고 아름다운 조명과 자연을 담은 창이 집과 조화를 이루어 숲속 카페에 놀러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최문옥님은 2001년 지리산 산청 고향마을에 32세의 나이에 남편과 함께 귀촌해서 지리산에 정착했다. 그녀와 남편의 집은 중산리 계곡 옆에 위치해 있는데 귀촌했을 당시 부부의 집만 있고 주변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고 한다. 지리산을 찾은 사람들이 차도 마시고 정답게 쉬어 갈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한 부부는 ‘나무와 집’이라는 유명한 건축 회사에 가진 돈 전부를 들고 가서 본인들이 생각하는 집을 지어달라고 했다 한다. ‘나무와 집’에서는 그 돈으로는 집을 지을 수가 없으니 돈을 더 벌어오라고 했지만, 부부는 모두가 찾고 여행오고 싶어 하는 지리산에 작품같은 집을 지으면 도시 뿐만 아니라 지리산권에도 홍보가 되어 회사의 이미지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며 회사를 설득해 집을 지었다고 한다. 30대 초반의 부부가 눈을 반짝이며 열정을 뿜어내 이야기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녀는 지리산국립공원의 자원활동가다. 19년째 자원활동가로 일하고 있으며 식물, 곤충, 기후모니터링, 해설활동까지 하는 다재다능한 시민과학자이기도 하다. 2014년에 지리산국립공원의 시민대학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로부터 지속가능발전교육(ESD) 공식 프로젝트를 인정받았다. 이는 지리산권의 마을과 주민을 대상으로 생태, 환경, 인문학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국립공원관리공단과 마을주민들 간의 소통의 장을 마련하게 되었다. 아울러 환경인식 변화, 자연훼손 방지 및 복원사업 등의 성과를 낳게 된 것도 시민대학의 힘이었다. 12년동안 이어져 오고 있는 자원봉사활동과 시민대학의 중심에 그녀가 자리하고 있다. 예전에 국립공원 직원과 탐방로를 가는데 분뇨 냄새가 나니까 직원 왈, 사람들이 산에 와서 화장실이 급하니 아무데서나 볼일을 본다고 말하길래, “아니에요. 이 냄새는 금마타리라는 식물에서 나는 냄새예요. 그래서 패장이라고도 해요.”라고 알려줘서 지역의 신문에 특색 있는 식물 소개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한다. “‘꿩의 바람’이라는 꽃을 아세요? 중태마을에만 있는 식물인데요. 봄에 꿩이 울 때 핀다고 이름을 ‘꿩의 바람’이라고 부른데요.” 둘레길에 도로공사를 한다고 중태마을에만 있는 ‘꿩의 바람꽃’이 없어질 위기에 놓여서 그녀가 ‘숲길’에 소식을 전해 다른 곳에 옮겨 복원중이라고 전한다. 식물을 전공한 나지만 그녀 앞에서 식물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다. 그리고 좀 전에 산을 내려 올 때도 노란 군락의 꽃을 보며 짐작만 하고 지나쳐 온 내가 아니었던가. 자연생태사업과 환경교육이 본업인 내가 그녀의 열정 앞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귀촌해서 지금까지 자연이 소통의 장이었고 취미생활이었으며 가장 소중하게 지켜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녀의 지리산 사랑은 끝이 없다. 부드러운 목소리 속에 그녀가 생각하는 자연 사랑이 너무도 대단하여 만난 후 질문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체 대화가 이어져 나갔다. “식물 공부를 하고 자원활동을 하면서 지역의 숨은 인재들을 만나고 국립공원과 마을 주민들을 만나서 인연을 쌓아가고 소통해 가며 살아갈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아요. 제가 자원봉사활동을 하면서 고맙고 도움받은 일들이 외려 많아요.” 라고 말하는 그녀. 내면이 꽃보다 아름다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몇 달 동안 일에 치여 개인생활도 없이 살았던 나의 현실에 위로와 힐링이 되었다. 인터뷰도 끝나지 않았는데 나는 “저 다음에 또 놀러 와도 될까요?” 하고 사적인 질문을 했다. 그녀는 본인이 없으면 뒷마당에서 책이라도 읽고 가라고 고운 미소로 웃어 준다. “해설을 처음 시작할 때는 식물 공부에 너무 심취해서 식물 위주로 했는데 요즘은 자연과 삶의 소통을 가져올 수 있는 쪽으로 하고 있어요. 지리산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치유해주고 모든 것을 받아주잖아요. 산 중의 어른산이 지리산이잖아요. 이런 지리산이 삶의 공간이라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따뜻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는 그녀를 보니 마치 지리산의 능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바쁜 일상으로 모나고 각졌던 내가 그녀로 하여금 오늘은 잠시나마 부드러워지게 되었다.
    • 이야기
    • 지리산자락 사람들
    2021-06-01
  • 꽃 피는 봄이 오면
    박두규 (시인) 예전에는 봄이 오면 꽃들이 그래도 순리대로 피었다고 할까,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피었다. 매화가 피면 산수유 꽃이 따라서 피었고 이어서 벚꽃이 길가에 가득 피어나면 개나리가 그리고 자두꽃 살구꽃이 피고 복숭아꽃이나 사과꽃 배꽃이 이어서 피어나면 산 위에선 산벚이 가로등처럼 꽃을 달고 군데군데 피어났다. 그렇게 2월이 지나며 피기 시작한 꽃이 3월과 4월에 걸쳐 절정을 이루고 5월까지 그 모습을 이어갔다. 그렇게 봄은 꽃들이 온 동네를 감싸니 가히 꽃대궐이라고 노래할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거의 한꺼번에 꽃들이 피어난다. 산벚꽃 마저도 산 아래 꽃들과 함께 피니 간극의 차이로 피던 꽃들의 질서가 문란해졌다. 기후위기라는 것도 그렇지만 흡사 도리가 무너진 인간세상의 무질서를 따라오는 듯하여 마음이 그냥 즐겁지만은 않다. 몇 년 전의 이야기다. 벚꽃이 흐드러져 절정에 이른 어느 봄날 강아지 새끼 한 마리를 기르게 되었는데 뱃속에서 나와 지금껏 꽃 구렁의 세상을 두리번거렸을 것이니 꽃돌이라 이름 지었다. 사실 나는 개를 기른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고 있던 때였다. 어느 날 지인의 개가 새끼를 8마리 낳았는데 한 마리만 맡아달라고 부탁을 해서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개는 사람처럼 강한 에고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웬만한 일에 섭섭해 하거나 슬퍼하거나 절망하는 일도 없을 것이니, 이것도 팔자려니 하며 개 닭 보듯 그냥 데리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넘겨받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녀석이 너무 나만 바라보고 산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는데 목줄을 안 했으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그냥 혼자 놀았으면 했다. 그런데 내가 안에 있을 때면 문 앞에서 낑낑대고 나가면 정신없이 달려들었다. 비가 와서 땅이 젖은 날에도 그렇게 달려드니 옷이 엉망이 되곤 했다. 툇마루도 그 녀석 차지가 되어 온통 더럽혀져 있어서 그곳에 앉아 먼산바라기를 하던 즐거움도 잃게 되었다. 게다가 텃밭 일을 하면 따라다니며 밭의 작물을 온통 짓밟고 다니니 점점 귀찮은 존재가 되어 갔다. 그렇다고 목줄을 매자니 저도 한 생명인데 2~3m 정도로 행동반경을 좁혀 감옥생활을 시키는 것은 할 짓이 못되었다. 그러다보니 꽃돌이 때문에 내가 몇 년 동안 공들여 얻어낸 일상의 평화가 깨지게 되었다. 아내의 지청구를 들어가며 고집을 부려 이 집을 지었고 본가를 오가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두텁나루 숲’의 공간을 나름대로 즐길 수 있게 되었는데 꽃돌이 녀석 때문에 이 집에서 보내는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매우 아쉬웠다. 하지만 개를 넘겨받는 순간 모든 걸 스스로 받아들이기로 한 이상 꽃돌이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그 녀석은 그 녀석대로 제 주어진 삶을 살고 있는 것이고 나는 나대로 이 상황을 인정하고 수용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아이든 아내든 친구든 손님이든 강아지든 함께 한다는 것은 한 생명을 모시는 일이기도 해서 스스로를 그만큼 내려놓지 않고서는 도대체 해볼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처럼 벚꽃이 절정에 이르러 꽃터널을 이루는 화사한 봄이 오면 그래도 정이 들었었는지 수년 전 우여곡절 끝에 헤어진 꽃돌이가 가끔 생각난다. 지금 어디서 살고 있는지. 살아있기는 한지. 사람이건 동물이건 사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서로의 마음을 진정으로 주고받았다면 그것도 사랑인지. 멀지도 않은 그 옛날, 담장 너머로 주고받던 눈빛 하나, 손을 마주잡던 한 순간의 기억으로 한 생을 버티기도 했을 사람들. 그 순정이 있어 삶은 아름답다는 생각도 한번 해보는 것이다. 꽃돌이 때문에.
    • 이야기
    • 여기저기 민들레
    2021-06-01
  • 익산 오리온공장 청년노동자 구례의 딸 고서지현을 추모하며
    익산 오리온공장 청년노동자 구례의 딸 고서지현을 추모하며 왕해전 (청년노동자 서지현 사망 진상규명을 위한 구례시민 모임 공동대표) “지현아! 너무 힘들면 그냥 와버려.” “아니야 엄마, 그래도 왔으니까 힘들어도 3개월만 참아볼래” 오리온 제과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현이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습니다. “힘들다고 할 때 가서 그냥 데려오지 못하고,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집에 오지 말고 공장에 그냥 있으라고 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되었습니다.“라고 울부짖는 지현이 어머님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하고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함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같이 입사한 사십여 명의 친구들이 일주일 만에 회사를 떠났어도 마음이 여리디 여린 지현이는 쉽게 회사를 그만 두지 못했고 나이도 어리고 예쁜데 뭐한다고 공장에서 일하고 있냐고 비아냥거리는 선배 노동자들의 언어폭력과 따돌림에 지현이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또한 본인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시말서를 강요하였고 심지어는 사내연애를 한다고 수군거리고 신체접촉을 하고 입에 담지 못할 성적 농담으로 수치심을 불러일으킨 관리자들의 행위를 참고 참아야만 했습니다. 구례 청천초, 구례여중, 순천전자고를 졸업한 서지현 청년이 익산 오리온제과에 취업하고 1년 6개월 만에 ‘진짜, 어지간히 괴롭혀라. 오리온은 다닐 곳이 아니다.’ 등의 직장 괴롭힘과 따돌림, 성추행 당한 의혹의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지 3개월이 다 되어 갑니다. 이런 지현이의 억울한 소식을 접한 지리산 구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구례출신 청년 후배들 중에서 누구라도 억울하고 잘못된 일로 어려움을 겪는다면 구례의 선배 후배들이 나서서 지켜주어야 한다는 취지로 구례의 20여개 단체 및 개인이 참여한 구례시민사회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노동현장에서의 억울한 사고와 죽음이 있었다면 그 회사가 구례에 있건 타 지역에 있건 간에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억울함을 풀어주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노동이 존중되고 노동인권이 지켜지는 나라다운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구례시민사회모임은 오리온제과에게는 진상규명과 사과를 요구하고 고용노동부에게는 특별근로감독으로 책임자를 처벌하고 재발방지를 요구하는 현수막을(구례군체육회,읍체육회,재경마산면향우회등 25개 단체 이름으로) 부착하였으며, 6월 3일에는 오일장에서 구례군민들의 요구를 담은 기자회견을 진행하였고 지금은 매일 1인 시위를 읍내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습니다. 사진. 구례오일장에서 진행된 “청년노동자 서지현 사망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대책을 요구하는 구례시민사회 기자회견” (황영필) 연일 언론(언론보도: sbs Y 궁금한이야기 4월3일방송, JTBC 및 KBS 뉴스, 전주KBS 심층, 각언론사 5월19-20일 뉴스, 다수언론사 6월3-4일 뉴스)에 보도가 되고 여성누리꾼들은 오리온을 여성혐오기업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럼에도 회사는 자체조사결과 지현이의 죽음은 개인적인 이유가 원인이었다고 하면서 다소 경직된 조직문화가 있었지만 회사의 잘못은 아니라는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시민사회모임에서는 회사에게 요구했습니다. 자체조사를 했다면 어떻게 했는지,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등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유가족에게 공개하고 관계자 처벌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 등 적절한 조치를 요구했습니다. 또한 고용노동부 익산지청에는 직장 괴롭힘과 따돌림을 호소하며 생을 마친 고인에게 한 점 부끄럼 없이 특별근로감독을 포함한 철저한 수사로 관련자를 처벌해야 된다고 촉구하였습니다. 고졸, 여성, 취업, 노동자라는 4중주의 사회적 약자였던 지현이를 지켜주는 울타리가 없었습니다. `직장내 괴롭힘 방지법`이라는 법이 있긴 합니다.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할 경우 조사 및 심사요청을 할 수가 있지만 단순 인사조치만 내려지는 등의 단순 권고조항이기에 괴롭힘 예방을 위해서 시작된 금지법이 있으나마나 한 법이 되어 `직장괴롭힘방치법`이라는 오물을 뒤집어쓰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 사회는 우리의 아들, 딸들이 노동현장에서 괴롭힘과 따돌림 그리고 여전히 못된 습관으로 이루어지는 성희롱, 성추행 같은 이유로 고통 받을 때도 업무상재해 즉 중대재해가 아닌 일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단순히 개인의 적응력이나 인내력부족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노동현장에서 김용균 청년이 업무상재해로 사망한 것이나 괴롭힘과 따돌림, 성추행의 스트레스를 죽음으로 밖에 멈출 수 없었던 지현이의 경우가 본질적으로는 다른 점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따라서 서구유럽처럼 사측에 강력한 의무를 부과하고 가해자인 동료에게는 형벌이 가해져야하는 입법이 필요한 강력한 이유이기도 합니다.(보도에 의하면 1년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 중 업무상관련 관련 사망자가 무려 487명입니다.) 노동의 현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유서 다섯 장에 다 못 할 청춘의 사연을 숨기고 ,직장의 이름을 적으며 선배노동자들과 회사의 부정과 불법으로 만신창이 된 인권 앞에 죽음으로 항거했던 지현이가 우리 어른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지금 묻고 있습니다. 다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우리마을
    • 구례
    202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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