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박두규 (시인)

 

예전에는 봄이 오면 꽃들이 그래도 순리대로 피었다고 할까,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피었다. 매화가 피면 산수유 꽃이 따라서 피었고 이어서 벚꽃이 길가에 가득 피어나면 개나리가 그리고 자두꽃 살구꽃이 피고 복숭아꽃이나 사과꽃 배꽃이 이어서 피어나면 산 위에선 산벚이 가로등처럼 꽃을 달고 군데군데 피어났다. 그렇게 2월이 지나며 피기 시작한 꽃이 3월과 4월에 걸쳐 절정을 이루고 5월까지 그 모습을 이어갔다. 그렇게 봄은 꽃들이 온 동네를 감싸니 가히 꽃대궐이라고 노래할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거의 한꺼번에 꽃들이 피어난다. 산벚꽃 마저도 산 아래 꽃들과 함께 피니 간극의 차이로 피던 꽃들의 질서가 문란해졌다. 기후위기라는 것도 그렇지만 흡사 도리가 무너진 인간세상의 무질서를 따라오는 듯하여 마음이 그냥 즐겁지만은 않다.

몇 년 전의 이야기다. 벚꽃이 흐드러져 절정에 이른 어느 봄날 강아지 새끼 한 마리를 기르게 되었는데 뱃속에서 나와 지금껏 꽃 구렁의 세상을 두리번거렸을 것이니 꽃돌이라 이름 지었다. 사실 나는 개를 기른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고 있던 때였다. 어느 날 지인의 개가 새끼를 8마리 낳았는데 한 마리만 맡아달라고 부탁을 해서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개는 사람처럼 강한 에고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웬만한 일에 섭섭해 하거나 슬퍼하거나 절망하는 일도 없을 것이니, 이것도 팔자려니 하며 개 닭 보듯 그냥 데리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넘겨받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녀석이 너무 나만 바라보고 산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는데 목줄을 안 했으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그냥 혼자 놀았으면 했다. 그런데 내가 안에 있을 때면 문 앞에서 낑낑대고 나가면 정신없이 달려들었다. 비가 와서 땅이 젖은 날에도 그렇게 달려드니 옷이 엉망이 되곤 했다. 툇마루도 그 녀석 차지가 되어 온통 더럽혀져 있어서 그곳에 앉아 먼산바라기를 하던 즐거움도 잃게 되었다. 게다가 텃밭 일을 하면 따라다니며 밭의 작물을 온통 짓밟고 다니니 점점 귀찮은 존재가 되어 갔다. 그렇다고 목줄을 매자니 저도 한 생명인데 23m 정도로 행동반경을 좁혀 감옥생활을 시키는 것은 할 짓이 못되었다.

그러다보니 꽃돌이 때문에 내가 몇 년 동안 공들여 얻어낸 일상의 평화가 깨지게 되었다. 아내의 지청구를 들어가며 고집을 부려 이 집을 지었고 본가를 오가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두텁나루 숲의 공간을 나름대로 즐길 수 있게 되었는데 꽃돌이 녀석 때문에 이 집에서 보내는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매우 아쉬웠다.

하지만 개를 넘겨받는 순간 모든 걸 스스로 받아들이기로 한 이상 꽃돌이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그 녀석은 그 녀석대로 제 주어진 삶을 살고 있는 것이고 나는 나대로 이 상황을 인정하고 수용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아이든 아내든 친구든 손님이든 강아지든 함께 한다는 것은 한 생명을 모시는 일이기도 해서 스스로를 그만큼 내려놓지 않고서는 도대체 해볼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처럼 벚꽃이 절정에 이르러 꽃터널을 이루는 화사한 봄이 오면 그래도 정이 들었었는지 수년 전 우여곡절 끝에 헤어진 꽃돌이가 가끔 생각난다. 지금 어디서 살고 있는지. 살아있기는 한지. 사람이건 동물이건 사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서로의 마음을 진정으로 주고받았다면 그것도 사랑인지. 멀지도 않은 그 옛날, 담장 너머로 주고받던 눈빛 하나, 손을 마주잡던 한 순간의 기억으로 한 생을 버티기도 했을 사람들. 그 순정이 있어 삶은 아름답다는 생각도 한번 해보는 것이다. 꽃돌이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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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봄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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