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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원 작은변화포럼
    남원 작은변화포럼 김양오 (작은변화포럼 대표) 이름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무슨 회의 이름이나 행사이름 같으니. 그래도 우린 우리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왜냐하면 하나의 독립된 단체가 아니고 확고한 결사체도 아니며, 그야말로 ‘느슨한 연대’로 한 달에 한번 주제 토론 비슷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기 때문이다. 남원에 작은 변화를 천천히 은근히 오랫동안 만들어 내자는 뜻에 합의한 여러 단체가 달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벌써 4년째다. 그럼 4년동안 뭘 했을까? 처음에 2년 동안은 회원 단체를 만들어 나가는 데 집중했다. 15개에서 20개 사이의 단체가 들어왔고 혹은 나갔다. 1년 이상 남원에서 활동한 건강한 시민단체라면 어떤 단체든 다 들어올 수 있으니 정말 다양한 성격의 단체가 모였다. 마을모임, 교사 모임, 교육공동체, 농민회. 청년 단체를 비롯해 공무원 노조와 의료원 노조까지 들어와 있다. 정말 이렇게 다양한 단체가 한 자리에 모여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의아스럽기도 했다. 특히 공무원은 우리의 공격 대상이 될 확률이 높은데 한 자리에서 회의를 하고 있으니 신기하기도 하다. 1년동안 저녁밥을 함께 먹으면서 친해지는 시기가 지나자 드디어 이제 우리도 뭔가를 해 보자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뭘 하지? 다들 답답해 하는 게 의정이었다. 의원들이 뭘 하는 지 어떻게 하는 지 직접 보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서 꾸렸다. 의정모니터링단. 회원 한 분이 단장을 맡고 모니터링단을 꾸려 1년동안 의회 회기 기간에 방청을 꾸준히 진행했다. 회의가 다 평일 낮 시간에 이루어져 직장인들이 참여하기가 힘들고 시간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단장님과 몇 분이 거의 희생에 가까운 노력으로 모니터링을 꾸준히 해 나갔다. 그 덕분에 의원들은 작은변화포럼의 존재를 확실히 알았고 회의에 참여하는 태도도 많이 개선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하지만 전문 지식도 부족하고 사안에 대한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회의만 참관하는 것은 많은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더 많은 공부 특히 예산에 대한 공부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거기까지 품을 낼만한 회원들이 없었다. 우린 모두 바쁜 사람들이니. 또 하나 작은변화포럼이 세간의 집중을 받은 활동이 있었다. 작년 국회의원 선거 기간에 후보들을 초청해 토론회를 진행했고 그것을 유튜브로 방송했다. 코로나19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선거운동을 하기가 무척 힘들어진 후보들에게 시민단체에서 주최하는 토론회는 꽤 반가운 일이었다. 회원들은 후보들에게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 깊이 토론하고 질문을 만들어 보냈다. 방송 며칠 전에 후보 캠프의 담당자들과 현장에서 방송 진행에 대한 실무 회의도 했다. 촬영팀은 남원 청년들이 만든 회사로 정했고 사전에 장소, 동선, 소품, 배경, 의상까지 신경쓰며 진짜 전문 방송국처럼 준비했다. 그리고 이틀에 걸쳐 촬영, 며칠 동안 편집, 또 며칠 동안 자막 써넣기, 유튜브 송출, 홍보, 조회수 올리기까지 정말 간단하게 시작한 일이었는데 말도 못하게 일이 많았고 시간도 매우 많이 걸렸다. 당시 대표였던 유지선회원은 토론 내용을 모두 자막 처리하느라 며칠동안 날을 샜다. 이렇게 힘든 일인 줄 알았으면 아무도 하자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증명되는 사건이었다. 2020년은 정말 다사다난했던 해다. 특히 남원은 더 그랬다. 코로나19 확진자가 하나도 없었는데 대구 확진자들이 대거 남원의료원에 입원하면서 회원 단체들이 큰 활약을 했고 여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큰 수해가 나서 시민단체들이 역량을 총동원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뒤였다. 비는 그쳤으나 몇 달이 지나도록 피해 보상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뿐이 아니다. 남원으로 귀농한 청년들은 큰 사기를 당해 억울하다며 유튜브를 통해 남원시청을 공격했고 급기야 남원 불매운동까지 벌였다. 남원시는 여기저기 개발한다며 산을 깎고 아름드리 나무를 무참히 베어냈다. 또 남원시와 의회는 반대 의견은 한번도 듣지 않은 채 지리산에 산악열차를 놔야 남원이 잘 살고 지리산이 산다고 신념에 차서 일을 추진했고, 춘향 영정문제, 태양광 문제를 비롯해 너무나 많은 문제로 남원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2021년 지금도 그렇다. 사람들이 작은변화포럼에게 뭔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너네 뭐 좀 해야 하는 거 아냐? 남원이 요 모양 요 꼴인데 뭐라고 목소리 좀 내야 하는 거 아냐? 나도 그러고 싶다. 그러나 작은변화포럼은 너무나 다양한 단체가 모여 있다. 대략 스무 개의 단체장들이 같은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현안에 대한 인식 차이도 크고 문제의식의 깊이도 너무나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현안마다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건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회의 때마다 이런 것을 다 논의하다가는 밤을 새도 모자란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1년동안 함께 하기로 한 것에 대해서 조금씩이라도 우직하게 함께 가기로 하고 나머지 현안에 대해서는 그 문제에 심각성을 느낀 단체들이 모여서 성명서를 내든 뭘 하든 하기로 했다. 한 단체든 두 단체든 그렇게 하는 게 서로 부담이 없다는 판단이다. 그동안 남원에 이런 시민단체 연합 조직이 여러 번 결성됐다 없어졌다고 한다. 1년을 넘긴 적이 없다는 얘기도 있다. 그렇다면 작은변화포럼은 남원에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당장 행동하지 않아서 답답해 하는 회원들도 있지만 한번도 1년을 넘기지 못했다는, 그 어렵다는 연대 활동을 이렇게 오래 하고 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멀리 볼 일이다. 연합조직은 각 단체 회원들을 긴밀히 연결하고 새로운 활동의 플랫폼을 만들어 시민 활동의 진보를 위해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래서 ‘지역이 필요로 하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 조직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 눈 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표 지향성 조직이 아니라 그야말로 ‘지역이 필요로 하는 조직’으로 커나가야 한다. 올 해 작은변화포럼은 ‘내가 살고 싶은 남원, 내가 바라는 남원’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마당을 꾸려나가기로 했다. 5-6명 정도의 구성원들이 5회 이상 만나서 같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냥 바라는 것을 툭 던져놓고 마는 것이 아니라 회를 거듭할수록 세밀하게 토론을 진행해서 나중에는 정책으로 만들어질 수 있도록 끌어나가 보자는 구상이다. 필요하면 해당 전문가를 초빙해서 조언을 들어볼 수도 있다. 이렇게 이야기 나누는 팀 20개를 조직해 ‘살고 싶은 남원’에 대해 꿈을 꾸고 구체화시켜 정책으로 만들어서 내년 선거 때 후보들에게 제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좋은 정책이 많이 나오면 연말 작은변화포럼의 날 때 정책 박람회를 열어도 좋겠다. 좋은 꿈은 꿀수록 행복하다. 마구마구 꿈을 꿔보자. 작은변화포럼, 신박하지만 쌈박하지는 않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지금은 이 모습이 최선인 것을. 지역이 필요로 하는 조직으로 잘 성장해 나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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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원
    2021-06-01
  • 마고를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
    마고를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 칩코 (지리산에 사는 퀴어) 사진.하진용 “오늘 여기엔 어떤 변태들이 모였죠?” “농촌 변태!” “얼쑤!” 째쟁째쟁- 꽹과리 소리가 울렸다. 이내 북과 장구, 징 소리가 어우러지고 사람들은 커다란 원을 그리며 어깨춤을 추었다. 날씨는 적당히 심술궂었다. 먹구름이 온종일 무거운 엉덩이를 틀고 앉은 하늘이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으니 되었다. 산내에서 성다양성 축제가 열리는 날이다. 우리는 알록달록 한복들로 저마다 꾸며 입었다. 두루마기에는 타이트한 치마를 함께 입고, 남성용 마고자와는 핑크색 아얌을 썼다. 한복 치마를 무지개색으로 리폼하거나, 외투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거나! 농촌에서 퀴어 축제를 한다는 건 말도 되지 않게 들리지만, 산내라면 달랐다. 처음 애인을 만났을 때, 우린 산내 이야기를 하며 친해졌다. 지리산 속 산내라는 마을에는 페미니스트들이 잔뜩 산다더라, 하는 이야기였다. 산내에서 활동하던 여성주의 단체 ‘문화기획달’이 발행하는 잡지를 둘 다 즐겨보고 있었다. 언젠가 지리산에서 살겠노라고 생각하면서. 처음 애인과 여행을 갔을 때에도 지리산으로 향했다. 우린 한시도 빼놓지 않고 손을 잡고 다녔다. 여자 둘이 3박 4일 내내 손을 잡고 다니는 걸, 민박집 아주머니가 이상하게 생각하시지 않을까 내심 두렵기도 했다. 아주머니는 우리가 떠나는 날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10년 전에 소중한 친구가 생겼다고 했다. 남편이 없어도 그러질 않는데, 이 친구만 곁에 없으면 한국이 통째로 텅 비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이 친구를 조금만 더 빨리 만났더라면 당신의 인생이 더 반짝였을 거라면서. 그리고 우리 둘에게 그 손 꼭 잡고 행복하게 살라고 하셨다. 이듬해 봄, 우린 정말로 산내에 왔다. 산내는 듣던 대로 페미니스트들이 잔뜩 사는 마을이었다. ‘성폭력 근절을 위한 지리산 여성회의’가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인지 감수성 교육을 했고, 마을 삼거리에선 N번방 성착취 사건을 주제로 1인시위 릴레이가 이어졌다. 또래 친구들은 대부분 ‘아주 작은 페미니즘 학교: 탱자’의 열정적인 수강생들이고, 마을 카페와 도서관엔 페미니즘 서적이 책장 가득했다. 길 가다가 페미니즘 구호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중년 남성을 본 건 도시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그렇다고 산내가 마냥 천국이라는 건 아니다. 산내 성다양성 축제를 기획한 건 전 생명평화대학 신입생이다. 신입생들은 총 8명이었는데, 그중엔 이성커플도 있고 동성커플도 있었다. 실상사에서는 쉬는 시간에도 여자와 남자가 함께 방에 있으면 안 되고, 혼숙도 금지였다. 이성커플은 성적인 관계로 간주하여 이런 규칙을 따라야 했지만, 동성커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성 간의 관계를 아예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대에도 없던 ‘퀴어패스권(?)’을 얻었지만, 그닥 기쁜 일은 아니었다. 생명평화대학이 끝나고 나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여전히 젊은 여자만 보면 어르신들은 옆동네 노총각과 맺어주려 하고, 노총각이 없으면 ‘처녀가 시골에서 남자도 없이 괜찮냐’는 염려도 해주신다. 귀촌해서 집을 구할 때는 무조건 결혼과 임신 계획이 있다고 하라던데, 그 두 계획 모두 불가능한 커플을 위한 조언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여자들끼리만 사는 집엔 밤에 대문을 꼭 잠가야 한다는 조언 정도일까. ‘남자나 부부 세입자만 받는다’며 집을 못 구한 적도 있었다. 농촌엔 공개적인 퀴어 커뮤니티도, 선배 퀴어 부부도 없다. 중매를 자처하시는 어르신들에게 퀴어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도 곤란한 일이다. 이런 농촌 문화 안에서 “있는 그대로 우리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즐거운 자리를 마련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으로 성다양성 축제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한 친구가 기획을 총괄하고 나는 포스터를 주로 맡았다. 지리산에는 창세여신 마고할미가 산다는 신화가 있다. 산내는 마고할미 품에 쏙 안긴 마을이었다. 성다양성 축제 포스터에는 주홍색 삭발머리에 입술엔 피어싱을 하고 어깨엔 타투를 새긴 마고여신이 그려졌다. 털복숭이 팔뚝으로 사랑스러운 손키스를 날리면서. 축제는 ‘성폭력 근절을 위한 지리산 여성회의’에서 사무실을 무료로 대관해주셨다. 전야제에는 카페 ‘히말라야’에서 공간을 베풀어주셨다. ‘비온 뒤 무지개 재단’에서 지원금을 보내주셨고,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도 무지개 깃발을 대여해주셨다. 전국 각지에서 노래, 춤, 낭독회, 드랙쇼, 토크쇼, 전시를 기꺼이 해주겠다는 연락들이 왔다. 이 모든 덕으로, 축제날 여성회의 사무실 앞 좁은 골목은 온통 무지개빛으로 북적거렸다. 퍼레이드 때는 쩌렁쩌렁 울리는 ‘born this way’ 노래와 함께 무지개 깃발을 휘날리면서 온 동네를 뛰어다니기도 했다. 퀴어 축제를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마을을 만들어 온 멋진 이웃들에게도 빚을 진 행사였다. 사진. 임송학 전야제에서 <런던 프라이드>를 상영했다. ‘광부들을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Lesbians and Gays Support the Miners ; LGSM)’에 대한 내용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광부와 성소수자 두 집단이, 사회적 약자로서 서로의 연결고리를 발견해간다. 산내 성다양성 축제도 부스 판매 수익금 일부를 ‘지리산 산악열차반대 대책위’에 기부했다. “그럼 우리도 ‘LGSM’이네! 마고를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Lesbians and Gays Support Mago).”하는 우스갯소리도 했다. 성소수자들과 지리산도 광부들만큼이나 엉뚱한 조합일까? 성소수자들이 ‘있는 그대로’ 존재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지리산도 개발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재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무엇보다, 무지개는 서울광장뿐 아니라 지리산 자락 마고할미의 이마에도 떠오르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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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1
  • 다정한 원주민
    다정한 원주민 칩코 (전 생명평화대학 학생) 삼색 고양이가 또 왔네.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 달이 뜨면 슬렁슬렁 와서는 마당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는다. 먹을 것을 찾지도 않고, 딱히 관심을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가 보거나 말거나 그냥 누워서 쉬다 간다. 그날은 별도 달도 밝았다. 마지막 입주한 친구의 이삿짐을 나른 뒤, 친구들과 나는 마당에서 재잘대고 있었다. 삼색 고양이는 우리를 심드렁하니 보고는 마당에 기대 누웠다. 꼭 제집 같다. 하긴 저 고양이가 우리보다 여기 훨씬 오래 살았을걸. 그 날은 이 집을 ‘들레네’라고 이름 붙인 날이기도 했다. 매동 마을의 빛바랜 파란 대문 집에 온 지 한 달이 되었다. 내가 들어오고 이주 뒤에 한 명이 더 오고, 다음 주에 한 명이 더 오고, 그 다다음 주 두 명이 또 오는 식이었다. 왜 이런 식이었냐 하면, 다들 오기 싫어했으니까. 이 낡은 집은 쉽게 말하자면 유배지였다. 우린 산내 인드라망 공동체에서 운영하는 생명평화대학에 다니던 신입생들이었다. 학생들과 공동체와의 갈등이 깊어져, 공동체는 결국 학생들에게 거리를 두자고 했다. 생명평화대학은 중단되었고, 학생들은 대학숙소에서 쫓겨났다. 올해 봄, 떠돌이 백구 ‘들레’를 실상사에서 처음 만났다. 민들레가 필 무렵이라 이름이 들레가 되었다. 들개라는 이유로 실상사와 대학숙소에서 모두 쫓겨났던 개였다. 학생들과 퍽 친했는데, 지금은 행방을 모른다. 그때 학생들은 ‘공동체에서 사람을 쫓지 않는 것처럼, 개도 쫓아서는 안 된다’라고 했었는데, 지금은 사람도 쫓겨난 웃지 못할 상황이었다. 공동체는 이주 안에 대학숙소에서 짐을 비워달라고 했고, 그 대신으로 이 집을 내주었다. 대학숙소에서 한 달을 가까이 버티던 학생들까지 압박에 못 이겨 모두 들레네로 온 날이다. 우리가 꼭 들레 같았다. 도대체 죄명이 뭐길래 유배를 당한 거니? 이 사태를 궁금해하는 마을 분들이 많은데 다들 윤곽을 모른다고, 마을에 오래 산 청년들이 이를 전해주었다. 마을에 학생들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는 자리를 마련해보자는 제안을 해주었다. 마을에 오래 살면서, 해마다 공동체를 떠나는 청년들을 내내 안타깝게 지켜보던 친구들이었다. 인드라망 공동체는 산내에 청년들이 유입되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대학 졸업생들도 신입생들을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결국 간담회를 열기로 했다. 앞으로 살 집도 필요하고, 가을 농사를 지을 땅도 필요했으니까. 간담회의 이름은 “우리 산내에서 살 수 있을까?”였다. 학생들과 공동체와의 대립은 청년-기성세대의 차이기도, 이주민-원주민 간의 갈등이기도 했다. 늘 인력난에 시달리는 ‘대안 판’의 진부한 문제이기도 했다. 신입생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기존의 위계적 질서들이 있었다. 이를 문제 제기했을 때 ‘일단 순응하라’는 답변이 따랐다. 신입생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공동체는 해결하고자 여러 시도를 해주었다. 그러나 공동체 활동가들은 이미 자신들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바빴다. 학비도 받지 않는 대안 대학에 애써 투자할 시간은 없었던 것 같다. 대학을 중단하고 학생들을 내보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간담회를 열고 싶지 않았다. 대학을 중단하는 것과, 숙소에서 나가는 것을 원한 신입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우리의 의견을 일절 반영하지 않고 또 수직적인 결정을 내린 공동체가 미웠다. 한편으로는 공동체의 질서를 존중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선 깊이 뉘우치고도 있었다. 간담회에서 할 말들이 정리도 안 된 상태였다. 이제 막 마을 살이를 시작하는데, 서러운 이야기로 마을 분들을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대학숙소는 마을과 동떨어진 위치에 있었으나, 들레네는 마을에 있다). 무엇보다, 정말 우리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의문이 컸다. 아무도 안 올까 봐, 그냥 우리끼리 졸업식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괴상한 장마가 길어지고 있었다. 마을에 오래 산 친구들이 홍보를 맡았다. 졸업생들은 여는 공연과 사회를 해주기로 했다. 신입생들이 다과, 발표자료, 포스터 등등을 나누어 준비했다. 간담회 당일에도 비는 내렸다. 내 예상과는 달리, 간담회는 북적였다. 남원의 한 청년협동조합에서도 촬영을 하러 왔고, 산청과 해남 등 멀리서도 찾아왔다. 대부분은 마을 사람들이 자리를 채웠다. 공동체 구성원 중에서도 몇 분이 와 주셨다. 신입생들은 아쉬움 없이 실컷 말하기로 했다. 몇몇은 눈물도 찔끔 흘렸다. 신입생들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기에 졸업생들도 발언을 했다. 간담회는 예정보다 훨씬 지체되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말을 들어주셨다. 뒤풀이 후원금까지 거하게 쥐어주고 가셨다. 앞으로 마을에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말하는 자리도 마련해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간담회는 페이스북에 라이브로 방송을 하고 속기록도 올렸다. 간담회에 참석하지 못한 마을 분들도 그 긴 라이브 방송을 다 보시고 격려를 해주시곤 했다. 나는 좀 얼떨떨했다. 우리가 뭐라고 이렇게 다정하실까. 보답을 바라시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산내에서 함께 살자는 게 다였다. “우리 산내에서 살 수 있을까?” 우리는 질문밖에 없었는데. 장마가 끝나고도 태풍이 여러 차례 왔다 갔다. 하늘은 맑은가 싶다가도 자주 흐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삼색 고양이는 맑은 날에만 왔다. 비가 오면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서늘하게 마른 마당에 눕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공동체에선 올해까지만 이 집을 빌려주었다. 겨울이 지나면 또 다른 들레네를 찾아 떠나야겠지. 삼색 고양이는 오래오래 여기 살았으면 좋겠다. 오늘도 마당 한가운데 은은한 달빛조명이 내린다. 우릴 내쫓지 않는 무심하지만 다정한 원주민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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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1
  • 민들레 진 후에
    민들레 진 후에 칩코 (생명평화대학 신입생) 민들레 피는 계절, 나는 산내에 왔다. 들레가 산내에 온 것도 같은 시기였다. 그래서 이름이 들레가 되었다. 들레를 처음 만난 곳은 실상사였다. 사람을 졸졸 쫓아다녔지만, 다가가면 줄행랑을 쳐버리는 겁쟁이 백구였다. 털은 하얗지만 때가 꼬질꼬질했고, 사납지는 않았지만 다리가 튼실한 것이 떠돌이 생활을 오래한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사람만 보면 꼬리를 치며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맞출까. 들레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했다. 나는 인드라망 공동체의 생명평화대학에 다닌다. 나와 같은 신입생들과도 들레는 금세 친구가 됐다. 우리가 밥을 준 것도 아닌데, 들레는 우리를 잘 따랐다. 언덕배기에 있는 대학 숙소까지 따라오곤 했는데, 숨도 안 고르고 폴짝폴짝 노루처럼 뛰어오르며 우리를 앞질러 갔다. 들레 뒷모습을 보면서 헉헉거리며 언덕을 오르자면, 꼭 내가 들레 집에 초대받는 기분이었다. 그 드넓은 언덕을 주인처럼 자유롭게 쏘다녔으니까. 들레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실상사에서는 들레를 내쫓기로 했다. 지금껏 모든 들개에게도 그래왔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점점 들개 친구들을 데리고 올 거라고 했다. 또 들레가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다고 했다. 실상사는 아이들도 많이 오기 때문에 특히 위험했다. 들레는 사람 신발을 물어가는 고약한 버릇까지 있었다. 들레는 그게 놀자는 의미였는데, 사람들은 반기지 않는 방식이었다. 들레가 해우소가 아닌 곳에서 볼일을 본다는 점도 이유가 됐다. 실상사 사람들은 들레를 만나면 손뼉을 치거나 훠이훠이 위협을 하며 내쫓기 시작했다. 갈 곳 없는 들레는 대학 숙소에 더 자주 놀러 오게 됐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대학 숙소 사람들도 들레를 내쫓기로 했다. 절과 대학만이 아니었다. 어느 농장이나 과수원 주인도 들개가 밭을 헤집고 다니는 걸 원치 않았다. 닭을 소유한 농부들은 더 강경했다. 들레는 위험한 시멘트 찻길 외에는 어느 곳에서도 왕래할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동네의 개들이 왜 다리를 절뚝이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들레를 내쫓는 것이 이상했다. 들레는 사람을 좋아했다. 사람들을 보면 반갑게 인사했고, 절에 매일 눈도장을 찍었다. 나는 들레가 우리 공동체에 문을 두드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들레는 이웃으로 받아달라고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한 셈이었다. 공동체에서 사람을 내쫓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내쫓을 권리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개도 당연히 산내의 어느 땅이든 오갈 수 있는 생명이었다. 개가 친구들을 데려오지 말라는 말, 해우소에서 볼일을 보라는 말, 신발을 물지 말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내쫓는 것은 차별이었다. 공동체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내쫓는다면, 규칙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유아나 지적장애인들도 내쫓을 셈인가? 개가 사람을 공격할 수 있어서 내쫓는다면, 사람도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데 왜 내쫓지 않는가? 개에 물려 죽는 사람보다, 사람에게 죽임당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텐데. 들레는 개라서 차별받았다. 우리와 다른 종이기 때문에 차별받았다. 들레와 친구였던 신입생들은 인드라망 공동체에 대화를 시도했다. 먼저 대학 숙소 식구들이 이야기를 나눴다. 논의 주제는 ‘들레는 어디에 있어야 하나?’였다. 들레의 주인을 찾아주자거나 유기견 보호소에 보내자는 의견이 있었다. 산으로 들로 즐겁게 쏘다니는 들레를 갇힌 장소로 보내는 건 납치나 다름없다는 반박이 따랐다. 대부분의 시골 개들은 무료한 시멘트 바닥에서 60센티 남짓한 목줄에 묶여 지낸다. 유기견 보호소도 열악한 곳에서 갇혀 살다가 안락사 되기 일쑤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떠돌이로 살게 놔두는 건 위험했다. 들레는 음식물 퇴비간이나 똥간에서 배를 채우곤 했다. 들레가 오가는 찻길은 로드킬이 잦았다. 다달이 개장수가 마을을 돌 때 잡혀갈 시나리오도 있었다. 그럼 우리가 키워야 하나? 들레를 책임질 수 없으니 키울 수 없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그럼 키우지 않으면 우린 책임에 면죄부를 받을 수 있나? 애초에 이 작은 개 한 마리가 이토록 안전하게 살 곳이 없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개의 먹이를 독점하고, 차로 개를 죽이고, 개를 물건처럼 사고파는 자들이 결국 인간이지 않은가? 해결책을 내지 못한 채 회의시간이 끝이 났다. 논의는 게을러져서 이후 대학 내에서도, 실상사에서도 진전되지 않았다. 그 사이 한 주민이 떠돌이 백구를 잡아가라고 신고를 했다. 개장수 트럭이 오가는 것을 보고 신입생 친구들은 급히 들레에게 스카프를 매어 주었다. 보호자가 있는 개로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날 저녁, 말괄량이 들레는 하루도 못가 스카프를 잃어버린 채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래도 개장수 트럭은 피한 모양이었다. 그즈음 산내에 폭풍 같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어찌나 거센지 양철지붕쯤은 그냥 날려버릴 기세였다. 강풍은 닷새가 지나도록 계속됐다. 들레는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강풍이 끝날 때까지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는지, 산내가 질려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신입생들은 들레를 위한 현수막을 만들고 있었다. 개 로드킬을 방지하기 위해 속도를 줄여달라는 현수막이었다. 회의의 결론 중 확실한 것은 인간이 비인간동물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위해 노력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세월호 참사 때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때도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 나는 언제든 그들이 될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들레를 생각하면, 나는 정말이지 운 좋게 인간으로 태어났다. 우리 사는 곳은 인간이 아닌 생명에게 얼마나 가차 없는 환경인가? 내가 비인간동물로서 한 마을에 문을 두드렸을 때, 누구도 나를 환대하지 않고 나를 죽일 트럭에 몰아넣는 곳. 바람이 그치고 우린 현수막을 걸었다. 들레에게 새로 매어 줄 스카프도 마련했다. 그러나 들레는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들레가 사라진 후에도 개장수 트럭은 여러 차례 마을을 오갔다. 들레는 트럭에 잡혀갔을까? 다른 마을에서 살고 있을까? 들개를 환영하는 마을이 있을까? 들레는 우리를 원망할까? 우린 또 다른 들레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수많은 질문을 남긴 채, 민들레 피는 계절이 지나갔다.
    • 우리마을
    • 남원
    2021-06-01
  • 남원시 산내면 청년의 이야기
    남원시 산내면 청년의 이야기 지음 (생명평화대학 학생)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인생 스무 해 째를 살고 있는 지음입니다. 인드라망 공동체 안에 있는 청년 인생학교 ‘생명평화대학’의 학생으로, 올 봄부터 남원시 산내면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저는 이웃도 잘 모르는 도심의 아파트에서 살다가 올해 산내에 와서 ‘마을’, ‘공동체’라고 하는 것들을 경험하며 새롭고 가득한 순간들을 많이 만나고 있어요. 제가 뭐 남다른 통찰력이나 글솜씨가 있는 건 아니지만, 감탄하던 마음 되살려서 그 순간들 중 최근의 일 두 가지를 같이 나눠보려고 해요. 지난 11월 9일 산내에서는 올해의 마지막 ‘살래장’이 열렸어요. 4월부터 매달 둘째 주 토요일마다 뱃속은 물론 눈과 귀, 마음까지 두둑하게 채워주던 장터에요. 저는 살래장을 ‘다른 장에 없는 건 있고, 있는 건 없는 특별한 장터’라고 설명하고 싶어요. 주점, 벼룩시장, 전시, 공연, 창작물 판매 등 진짜 별의 별게 다 있고요, 포장 비닐, 일회용 젓가락 이런 건 찾아보기가 어려워요. 일단 살래장에 제일 많은 건 사람인데, 적게는 150명에서 많게는 250명까지 다녀간다고 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공간인데도 쓰레기가 50L 종량제 봉투도 다 안 찰 만큼 적게 나온다니 대단하죠. 여기에는 ‘비니루 없는 점빵’이라고 하는, 몇몇 이모들이 만든 어떤 캠페인 같기도 하고-교육 기관 같기도 하고-김밥 집 같기도 한 부스의 영향이 커요. 이 점빵의 이모들은 미리 사람들에게 속닥속닥 하시는 거예요. “(작은 목소리로)비닐이나 플라스틱 포장재 없이 물건을 사고 팔아보자, 빈 그릇과 텀블러, 수저 등을 들고 살래장 나들이를 오시라.”고 말이에요. 그럼 정말로 마을사람들은 포장재 없이 생산물들을 선보여요. 구경 오시는 분들도 장바구니는 물론 반찬통, 텀블러까지 들고 와서 소풍 도시락 까먹듯 즐기다 가시고요. 그게 진짜 가능한 일이더라고요! 제가 살래장에서 가장 사랑했던 음식은 샌드위치인데요, 이것 말고도 여름엔 팥빙수, 겨울엔 군고구마, 계절에 상관없이 커피, 쿠키, 스프, 반찬, 파전 등 정성어린 손길이 가득 담긴 다양한 음식들을 맛보거나 냄새 맡을 수 있어요. 또 제 예민한 피부를 감싸주던 수제 쌀겨 비누, 실상사 작은학교 친구들이 만든 스킨, 샴푸 등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아이템들이었죠. 저는 아쉽게도 살래장에서 한 번도 뭘 팔아본 적은 없지만, 제가 되게 열심히 했던 게 한 가지 있어요. 바로 친구들과 함께 한 공연이에요. 살래장의 무대는 실력을 따지지 않고 마을 청중들 앞에서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아낌없이 주세요. 생각해 보니 제 데뷔무대였네요. 이것 말고도 마을분이 수집하신 램프 전시, 플라스틱을 먹은 새 다큐멘터리 상영, 아이들의 손 떼 묻은 딱지 판매 등 기억에 남는 게 많아요. 매달 마을 사람들과 만나서 목소리든 음식이든 물건이든 주고받을 수 있는 마당이 있다는 것, 누구든 무엇이든 내놓으면 서로 봐주고 들어주고 받아주는 품이 있다는 것이 좋고 재미있어서 항상 살래장이 기다려졌던 것 같아요. 또 내가 뭔가를 작당해서 만들었을 때 선보일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은 참 든든하고 신이 나죠. 살래장이 있기 일주일 전, 대학 친구들과 남원 시내로 진출했어요. 바로 ‘남원시 청년창업 한마당’에 참여하기 위해서였죠. 이 자리는, 남원에 있는 청년 단체 22곳, 마을 공동체 18곳이 모여 서로 어떤 일들을 꾸미고 있는지 알리고 구경하는 자리였어요. 청년들과 마을 공동체가 잘 정착하고 나아갈 수 있도록, 남원시에서 주최하고 남원시 공동체 지원센터에서 주관하는 커다란 행사였어요. 이 행사에서 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청년’이라는 이름, ‘마을’이라는 이름을 달고 뭉쳐서 다양한 것들을 시도하고 노력하고 있는지 똑똑히 보고 느낄 수 있었어요. 저희도 생명평화대학 홍보도 할 겸, 털실로 따뜻한 귀마개를 만들어 실 값만 받고 나누겠다고 나섰지요. 행사를 준비하기 전에 저희는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어요. ‘우리가 어떤 것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 갈까?’에서 시작하여 ‘우리는 사회에 나가서 뭘 해서, 먹고 사는 동시에 더 따뜻한 사회로 나아가는데 걸음을 보탤 수 있을까?’하는 물음까지 이어졌어요. ‘우리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밥도 먹여주고 이 사회에 도움도 되는 일이면 좋겠다.’, ‘마치 캠페인처럼, 우리가 행동하고 존재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돈 외에는 따뜻함이 널리널리 퍼져나가는 데에 쓰이면 좋겠다.’고 생각을 모았어요. 그래서 함께 열심히 뜨개질해서 만든 귀마개를 드리고 털실 한 뭉치 값의 후원금을 받기로 했어요. 그렇게 모인 돈은 이 활동을 위한 식비와 차비로만 쓰고, 그 외에는 다음 귀마개를 만드는 데에 쓰자고 했지요. 털 실 하나에 두 개의 귀마개가 나오니까, 우리는 이 캠페인을 두 배, 네 배로 늘려갈 수 있겠다 싶어 들뜨기도 했어요. 막상 실전에서는 사람들에게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어려움이 컸어요. 상품과 자본의 교환으로만 흘러가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만들고 나누는 것은 분명 즐겁고 뿌듯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이 시도에 필요한 재료비는 남원시에서 지원을 받았어요. 이렇게 우리가 무슨 일을 꾸미고 실현해볼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자리를 만들어준 시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같이 배우고 생활하는 친구들과 함께 사회에 나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고, 해보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지점은 무엇인지 경험해볼 수 있는 값진 기회가 되었어요. 나의 인생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방황이 뒤섞인 이 시기에, ‘함께’ 살아가고자 궁리하고 노력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큰 행운 같아요. 방법과 목적에 대한 힌트를 얻고, 따뜻한 경험과 배움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어요. 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우리마을
    • 남원
    202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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