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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전 환타 맛이 나는 새로운 품종 윈터 프린스
2010년 어느 날 햇살이 좋던 날에 남원 금지면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포도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농장엔 온갖 허브가 자라고 있었다. 허브가 가득한 포도 농장이라니 생각만 해도 근사했다. 잘 익은 포도 향기와 향긋한 허브향에 가득했던 농장을 그와 함께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또 몇 해가 지났고 그는 포도 농장을 정리했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로메인과 생채였다. 당시만 해도 생소한 채소였다. 로마인의 상추라고 불리던 로메인은 흔히 담배 상추라고 알려진 상추다. 상추보다 크고 깊은 맛이 있다. 생채는 양상추와 비슷한 맛이 나는 상추다. 당시엔 로메인과 생채가 꽤 인기가 좋았다. 많이 나가는 날에는 하루에 100상자 200상자가 판매되기도 했다. 그리고 또 몇 해가 지났고 상추를 더이상 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무농약 호박 농사를 했고 몇 번 호박을 팔기도 했다.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나 작년쯤 연락을 했다. 요즘엔 레드 향을 키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연락이 왔다. 새로운 품종 윈터프린스를 키운다고 한다. 윈터프린스는 국내에서 개발한 신품종이다. 지난 12월12일 남원 금지면에 있는 농장을 찾았다. 겨울인데 겨울 같지 않은 날이었다. 따뜻했다. 구례에서 금지를 가는 길은 섬진강을 역으로 올라가면 된다. 구례구역 압록 그리고 곡성을 지나 섬진강을 건너면 남원 금지면이 나온다. 한 때는 거의 사무실처럼 매일 다녔던 곳이다. 금지농민들이 사용했던 금지농민들의 사무실은 남원 원협에서 인수를 했다. 그의 농장은 그 사무실에서 멀지 않았다. 농장에 가보니 한 쪽엔 레드향이 한 쪽엔 윈터프린스가 자라고 있었다. 레드향은 작년부터 출하를 했다고 한다. 맛을 보니 아직 출고할 때가 아닌 데도 향과 맛이 좋았다. 제주도 과일 보다 육지에서 출하한 것들이 맛이 더 좋다고 한다. 레드향을 둘러보고 윈터프린스 하우스에 들어가 봤다. 가지 마다 예쁜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올해 4년생 나무라고 한다. "어쩌다가 변경했어요?" "호박 농사가 지겨웠는데 남원에서 신규 사업으로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시작했어요" "바꾸기를 잘 한 것 같아요?" "채소농사보다 쉽고 수익도 좋은 것 같아서 만족해요" "나무를 심는 동안 수익이 줄어서 힘들기는 했죠" 열매를 먹어보니 까기가 쉽고 맛이 좋았다. "맛이 좋은데요" 네 환타 맛이 난다고 하더라고요. 진짜로 먹어보니 환타처럼 상큼했다. 맛이 청량하니 좋았다. 국내에서 재배하는 만감류 레드향 한라봉 같은 품종들은 모두 일본품종이다. 우리 나라에서 개발한 품종이 일본 품종보다 맛이 좋다니 기분이 좋았다. 재배는 어떤 가요? 재배는 다른 귤 키우는 것과 차이가 없어요. 비슷하게 재배하면 됩니다. 윈터프린스가 수세가 좋아서 잘 커요. 귀농귀촌하시는 분들에게도 추천할 만 한가요? 네. 키워보니 좋은 것 같습니다. 200평 기준으로 천만원에서 1500만원 정도 수익이 난다고 보면 됩니다. 일도 채소에 비하면 수월 하고요. 나무 관리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채소보다 쉬운 편입니다. 출하는 언제부터 하죠 12월 중순부터 수확하면 될 것 같아요. 맛은 다 들었는데 산을 조금 더 빼야 할 것 같아요. 신맛이 좀 남은 것 같기도 하고요. 그는 비파괴 당도 측정기로 측정을 해서 판매한다고 하다. 과일은 맛이 좋아야 하니까요. 매년 많은 농민들이 새로운 품종을 심는다. 많은 품종들이 실패하고 소수만 성공한다. 한 때 인기가 넘치던 샤인 머스켓은 과도한 재배와 품질하락으로 고전하고 있다. 만감류도 요즘 여기저기 많은 재배면적이 늘고 있다. 농산물은 넘치면 가격이 급락한다. 적절한 규모의 재배로 가격과 품질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의 농사가 그의 마음처럼 잘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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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마루금인 운봉고원 수정봉 산행 이야기
남원시 주천면 노치마을(해발 550m)은 예로부터 억새가 많아서 갈재(가재)라 하였다. 백두대간 마루금의 수정봉 남쪽 산기슭에 위치한 이 마을은 백두대간이 마을의 중앙에 뚫린 돌담 고샅을 통과하며 섬진강과 낙동강의 분수계를 형성한다. 수정봉을 향해 볼 때 이 마을에서 왼쪽은 섬진강으로, 오른쪽은 낙동강으로 빗물이 흘러간다. (백두대간 노치마을 노거수와 호랑이 조형물, [사진] 이완우) 10월 하순, 노치마을에서 북쪽으로 백두대간 마루금을 1.8km 오르는 수정봉(804.7m)을 찾아갔다. 이 마을 앞에는 수령 500년 된 할머니 당산 느티나무 한 그루와 마을 뒤편에 수령 250년 된 할아버지 당산 소나무 4그루가 당당하게 서 있다. 당산 느티나무 아래에는 백두대간과 14 정맥의 조형석이 놓였으며, 호랑이 두 마리의 조형물이 백두대간을 지키고 있다. 바위에 뿌리를 내린 아름드리 육송인 당산 소나무는 소나무 가지가 땅에 닿을 듯한 낙락장송으로 운치가 그만이다. (백두대간 노치마을 샘, [사진] 이완우) 노치마을의 공동우물이던 노치샘은 고려시대에는 절터의 청량한 우물이었다고 한다. 이 샘에서 물을 뜨다가 물이 부족해지면 우물 속의 바위틈에 물이 고이게 되는데, 그때는 이 마을의 엄전한 처녀가 정성껏 퍼 올렸다고 한다. 예전에 이 마을은 정월 초하루에 우물을 깨끗이 하고 금줄을 쳤다. 당산제 날 이른 새벽에 정화수를 뜨러 가면 호랑이가 이 샘을 지키다가, 제사의 첫물을 올린 후에 수정봉으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백두대간 노치마을 위 수정봉 산기슭 다랑논 흔적, [사진] 이완우) 수정봉을 향하여 한참을 오르면, 한때 다랑논이었을 계단식 지형을 지난다. 다랑논의 수평을 유지하며 아래 논과 윗논의 경계가 되는 논두렁의 석축 흔적이 보인다. 평평한 땅에 소나무와 활엽수 둥치가 크게 자랐다. 빗물에 의존하여 농사짓던 수십 두락의 천수답 다랑논이 숲으로 돌아가는 풍경이었다. 수정봉으로 향하는 백두대간 마루금은 바위들이 우뚝 솟고 토양이 척박한 환경인데, 울창한 소나무 숲의 행렬이 이어진다. 졸참나무 등 활엽수의 세력에 밀려 소나무들이 바람결 강한 산등성이에 군락으로 버티고 있다. (백두대간 수정봉 등산로 보라금풍뎅이, [사진] 이완우) 등산로를 가로지르는 소나무 뿌리의 거칠게 마른 거죽을 3cm 크기의 보라금풍뎅이가 힘겹게 넘어가고 있다. 보랏빛 금속광택이 빛나는 이 곤충을 거북이 모양으로 보았는지 한자로는 금귀자(金龜子)라고도 한다. 이 곤충은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 2급 곤충인 소똥구리처럼 소똥을 굴리지 못하지만, 보는 위치와 빛의 강도에 따라 번쩍이는 색깔이 다르게 보여서 귀한 대접을 받는다. 수정봉은 이 산의 암벽에 수정 광산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지역 주민들은 어린 시절에 이 산에 올라가 육각 기둥의 수정을 주워서 놀던 추억이 있다고 한다. 수정은 석영의 큰 결정 광물이며 주성분은 이산화규소로 모래와 같은 성분인데, 동굴, 암석의 균열, 단층 지역에서 결정으로 성장한다. 이산화규소가 적정한 공간과 온도 등 조건이 충족되면 기나긴 지질시대를 거쳐 맑고 아름다운 수정 결정이 응축되어 자란다. 백두대간의 맑은 기상을 간직한 수정봉 봉우리의 보라금풍뎅이는 마치 보라색 자수정 같다. (백두대간 수정봉 등산로 구절초, [사진] 이완우) 수정봉으로 향하는 마루금 등산로에 소나무 마른 잎인 가리나무가 떨어져 쌓인 메마른 길섶에 구절초 한 그루가 싱싱하게 꽃을 피웠다. 국화과 산국속의 여러해살이풀로 산과 들에 널리 자생하는 구절초는 뿌리줄기를 땅속으로 뻗어나가며 세력을 키워 무리 지어 피기 마련이다. 구절초꽃은 연한 분홍색으로 피어나서 흰색으로 변하는데, 구절초 군락이 꽃피우는 향연은 가을의 계절에 때 이른 설국(雪國)이 펼쳐진 듯하다. 백두대간 등산로 길섶에 오롯한 꽃 한 송이의 자태로 자신의 그림자를 친구 삼아 피어 있는 한 포기의 구절초는 고고하며 장엄했다. 고독하지만 산뜻한 생명력으로 충실한 이 구절초를 한참 바라보다가 꽃 사진을 설레는 마음으로 찍었다. 산길을 동행하며 지리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류요선(남원시 주천면)씨가 구절초의 그림자까지 사진에 담으라고 충고해 준다. (백두대간 수정봉 바위 능선의 소나무와 고인돌 바위, [사진] 이완우) 수정봉으로 향하는 능선길의 서쪽 기슭 소나무 숲은 가을바람이 솔솔 불기 시작하면 송이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구룡폭포로 가는 갈림길을 지난다. 이 구룡폭포 방향의 산줄기는 지질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구룡폭포 방향의 산줄기가 몇 만 년 전에는 원래의 백두대간 마루금이었다. 원래의 백두대간의 마루금이었던 운봉고원의 외륜을 섬진강 지류인 주촌천이 수만 년 동안 파고들어 와서 3km를 하천쟁탈로 낙동강의 수계를 침식하였다. 그 결과로 현재의 수정봉 아래 노치마을에서 정령치 아래 고기삼거리까지의 도로가 곡중분수계(谷中分水界)로서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형성한 특이한 지형이다. 수정봉으로 접근하는 능선길에 고인돌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형태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흡사하여 이렇게 이름이 붙여졌는데, 이 바위는 자연적인 토르(Tor)인데 희귀한 형태이다. 지표의 바위가 풍화되면서 기반암 위에 단단한 바위가 쌓인 형태로 탑 모양의 흔들바위 등과 같은 유형이다. (백두대간 수정봉의 무등산 조망 원경, [사진] 이완우) 수정봉 정상에 이르렀다. 이 수정봉의 9부 능선에 삼국시대 축조 추정 테뫼식 노치산성(蘆峙山城)의 돌무더기 흔적이 남아 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주능선의 장엄한 원경은 고리봉에서 덕두산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 능선에 가려졌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무등산(1,187m)이 희미하게 보였다. 백두대간의 맑은 기상을 품은 수정봉에서 만난 보라금풍뎅이와 한 포기의 구절초는 오래 기억될 가을 산의 생명력이었다. (백두대간 수정봉 정상의 지리산 서북능선 원경, [사진]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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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숲 명소인 산줄기, 임도공사로 숲생태 훼손
[임도공사 현장과 만행산 원경 : 사진 이완우] 남원시 보절면 도룡리에 만행산(909.6m)의 동북쪽에 칠상동 산줄기가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남원 지역 4대 명당의 하나인 북장군 명당이 있는 풍수지리의 명소이며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절경이다. 이 칠상동 산줄기는 매년 한식이나 추석 때면 자손들이 조상의 묘소를 찾는 성묘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지난 추석 연휴 기간에 이곳 칠상동의 조상 묘소를 찾은 성묘객들은 낯선 임도공사 현장을 마주해야 했다. 이곳 칠상동 산줄기인 남원시 보절면 도룡리 산1-1 일대에 2023년 도유림 도룡지구 간선임도 1.34km의 신설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공사 현장에 설치된 안내판에 의하면 임도공사(공사 기간: 23.04.20.~23.10.16)의 시행처는 남원산립조합이고, 발주처는 전라북도 산림환경연구소이다. [임도공사 현장 : 사진 이완우] 기반암이 암석으로 경사가 급한 산줄기의 골짜기를 지그재그 형태로 돌아가면서 넓은 임도가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 중 파헤쳐진 토사와 깨어진 암석이 널려 있고, 임도 아래의 골짜기와 비탈면으로 토사와 암반이 안식각을 찾아서 흘러내렸다. 이곳 칠상동 산줄기에는 산줄기의 좌우로 임도가 이미 개설되어 있었다. 이 산줄기를 올려다 보면 용평저수지 상부에서 칠상동 계곡 아래 하부 지점까지 왼쪽의 임도가 있고, 용평저수지 위쪽의 보현사 뒤쪽에서 칠상동 산줄기 중부 지점까지 오른쪽의 임도가 이미 있었다. 두 임도가 오른쪽 임도의 끝이 왼쪽 임도의 끝보다 상당한 높은 위치에 있다. 임도가 칠상동 산줄기를 우상향으로 횡단하지 못하고 미설치 되어 있었다. 경사가 급하고 바위 산줄기인 풍수지리의 명당이 보존되고 삼림이 울창하게 유지되어 있었던 셈이다. [임도공사 흙쌓기 비탈면의 기울어진 소나무들 : 사진 이완우] 현재 진행되는 간선임도공사는 이미 개설된 두 임도의 끝을 연결하고 있다. 경사가 급한 암반 석질의 칠상동 산줄기를 가로로 횡단하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려오는 임도공사이다. 100년 이상된 수많은 소나무가 울창했던 삼림이 광범위하게 훼손되었다. 임도 도로면 높은 쪽의 흙깎기비탈면에서 절취한 토토사와 암석이 임도 도로면 낮은 쪽의 흙쌓기 비탈면으로 밀려 내려져 임도 아래의 계곡과 비탈면 너른 지역 덮여 이 지역에 동식물이 살 수 없는 생태계 훼손이 발생하고 있다. 임도 아래쪽 비탈면에 많은 소나무들이 안식각을 찾아 밀려 내려온 토사와 암석의 압력으로 기울어진 자세로 정상적인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고 미관상 불편한 형태로 황폐된 상황이다. 이렇게 토사와 암석으로 덮인 구역에 야생동식물은 서식할 수 없는 형태이고, 임도 위쪽 흙깎기비탈면의 넓게 드러난 암석 비탈면도 생태계가 복원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임도공사 계곡 배수로 현장과 계곡 개울을 덮은 토사와 암석 : 사진 이완우] 이 지역 만행산은 천황봉, 상사바위, 칠상동, 투구바위(바람바위), 용평저수지, 귀정사와 보현사를 포함하여 소나무가 울창한 산림의 경관이 우수한 곳이다. 칠상동 산줄기와 나란히 내려오는 서쪽 보절면 사촌리의 풍암산 산줄기에는 바람바위(투구바위)가 있다. 이 바람바위는 남원 지역의 4대 명당인 칠상동 북장군 명당을 함께 이루는 투구 형상의 풍수지리상 장군대좌혈(將軍臺座穴)이다. 남원의 4대 풍수지리의 명소로 동복호(東伏虎), 서선령(西仙嶺), 북장군(北將軍), 남선녀(南仙女)를 꼽고 있는데, 이 중에 한 곳인 북장군 명소가 칠상동 산줄기를 횡단하는 간선임도공사로 경관이 크게 훼손되었다. [임도공사 비탈면 현장 : 사진 이완우] 현재 칠상동 산줄기를 횡단하여 시공하는 1.34km의 간선임도공사는 산림경영 기반 조성, 산림 투자비 절감, 대형 산불 예방과 병충해 방제 수월, 주민 교통 편익, 농촌 소득원 증대와 도로 활용 등 다목적으로 지역 사회의 균형 발전을 목적으로 한다고 공사 안내판에 명시되어 있고, 공사의 중심 공정은 거의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간선임도는 산림의 경영관리 및 보호상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임도로서 도로와 도로를 연결한다. 간선임도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이용하는 영구적 공공시설로서 산림정비와 목재생산을 추진하는 간선이 되는 도로이다. 이러한 기능을 하는 간선임도는 지선임도, 작업임도, 산불예방임도보다 역할 비중이 크다고 한다. 앞으로 이곳의 간선임도공사가 수로와 배수관 등의 마무리 공정에서 환경과 생태계가 더 훼손되지 않게 보호 대책을 세우고, 임도 비탈면에 토사와 암석의 압력에 밀려 기울어진 많은 소나무는 구제하여 정상적인 성장이 가능하도록 조치할 필요가 있겠다. 흙깎기 비탈면과 흙쌓기 비탈면의 불안정한 경사면을 잘 안정시켜 토사유출 등의 2차 피해가 없어야 하겠다. [임도공사 현장 : 사진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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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작은변화포럼
- 남원 작은변화포럼 김양오 (작은변화포럼 대표) 이름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무슨 회의 이름이나 행사이름 같으니. 그래도 우린 우리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왜냐하면 하나의 독립된 단체가 아니고 확고한 결사체도 아니며, 그야말로 ‘느슨한 연대’로 한 달에 한번 주제 토론 비슷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기 때문이다. 남원에 작은 변화를 천천히 은근히 오랫동안 만들어 내자는 뜻에 합의한 여러 단체가 달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벌써 4년째다. 그럼 4년동안 뭘 했을까? 처음에 2년 동안은 회원 단체를 만들어 나가는 데 집중했다. 15개에서 20개 사이의 단체가 들어왔고 혹은 나갔다. 1년 이상 남원에서 활동한 건강한 시민단체라면 어떤 단체든 다 들어올 수 있으니 정말 다양한 성격의 단체가 모였다. 마을모임, 교사 모임, 교육공동체, 농민회. 청년 단체를 비롯해 공무원 노조와 의료원 노조까지 들어와 있다. 정말 이렇게 다양한 단체가 한 자리에 모여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의아스럽기도 했다. 특히 공무원은 우리의 공격 대상이 될 확률이 높은데 한 자리에서 회의를 하고 있으니 신기하기도 하다. 1년동안 저녁밥을 함께 먹으면서 친해지는 시기가 지나자 드디어 이제 우리도 뭔가를 해 보자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뭘 하지? 다들 답답해 하는 게 의정이었다. 의원들이 뭘 하는 지 어떻게 하는 지 직접 보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서 꾸렸다. 의정모니터링단. 회원 한 분이 단장을 맡고 모니터링단을 꾸려 1년동안 의회 회기 기간에 방청을 꾸준히 진행했다. 회의가 다 평일 낮 시간에 이루어져 직장인들이 참여하기가 힘들고 시간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단장님과 몇 분이 거의 희생에 가까운 노력으로 모니터링을 꾸준히 해 나갔다. 그 덕분에 의원들은 작은변화포럼의 존재를 확실히 알았고 회의에 참여하는 태도도 많이 개선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하지만 전문 지식도 부족하고 사안에 대한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회의만 참관하는 것은 많은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더 많은 공부 특히 예산에 대한 공부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거기까지 품을 낼만한 회원들이 없었다. 우린 모두 바쁜 사람들이니. 또 하나 작은변화포럼이 세간의 집중을 받은 활동이 있었다. 작년 국회의원 선거 기간에 후보들을 초청해 토론회를 진행했고 그것을 유튜브로 방송했다. 코로나19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선거운동을 하기가 무척 힘들어진 후보들에게 시민단체에서 주최하는 토론회는 꽤 반가운 일이었다. 회원들은 후보들에게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 깊이 토론하고 질문을 만들어 보냈다. 방송 며칠 전에 후보 캠프의 담당자들과 현장에서 방송 진행에 대한 실무 회의도 했다. 촬영팀은 남원 청년들이 만든 회사로 정했고 사전에 장소, 동선, 소품, 배경, 의상까지 신경쓰며 진짜 전문 방송국처럼 준비했다. 그리고 이틀에 걸쳐 촬영, 며칠 동안 편집, 또 며칠 동안 자막 써넣기, 유튜브 송출, 홍보, 조회수 올리기까지 정말 간단하게 시작한 일이었는데 말도 못하게 일이 많았고 시간도 매우 많이 걸렸다. 당시 대표였던 유지선회원은 토론 내용을 모두 자막 처리하느라 며칠동안 날을 샜다. 이렇게 힘든 일인 줄 알았으면 아무도 하자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증명되는 사건이었다. 2020년은 정말 다사다난했던 해다. 특히 남원은 더 그랬다. 코로나19 확진자가 하나도 없었는데 대구 확진자들이 대거 남원의료원에 입원하면서 회원 단체들이 큰 활약을 했고 여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큰 수해가 나서 시민단체들이 역량을 총동원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뒤였다. 비는 그쳤으나 몇 달이 지나도록 피해 보상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뿐이 아니다. 남원으로 귀농한 청년들은 큰 사기를 당해 억울하다며 유튜브를 통해 남원시청을 공격했고 급기야 남원 불매운동까지 벌였다. 남원시는 여기저기 개발한다며 산을 깎고 아름드리 나무를 무참히 베어냈다. 또 남원시와 의회는 반대 의견은 한번도 듣지 않은 채 지리산에 산악열차를 놔야 남원이 잘 살고 지리산이 산다고 신념에 차서 일을 추진했고, 춘향 영정문제, 태양광 문제를 비롯해 너무나 많은 문제로 남원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2021년 지금도 그렇다. 사람들이 작은변화포럼에게 뭔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너네 뭐 좀 해야 하는 거 아냐? 남원이 요 모양 요 꼴인데 뭐라고 목소리 좀 내야 하는 거 아냐? 나도 그러고 싶다. 그러나 작은변화포럼은 너무나 다양한 단체가 모여 있다. 대략 스무 개의 단체장들이 같은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현안에 대한 인식 차이도 크고 문제의식의 깊이도 너무나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현안마다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건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회의 때마다 이런 것을 다 논의하다가는 밤을 새도 모자란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1년동안 함께 하기로 한 것에 대해서 조금씩이라도 우직하게 함께 가기로 하고 나머지 현안에 대해서는 그 문제에 심각성을 느낀 단체들이 모여서 성명서를 내든 뭘 하든 하기로 했다. 한 단체든 두 단체든 그렇게 하는 게 서로 부담이 없다는 판단이다. 그동안 남원에 이런 시민단체 연합 조직이 여러 번 결성됐다 없어졌다고 한다. 1년을 넘긴 적이 없다는 얘기도 있다. 그렇다면 작은변화포럼은 남원에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당장 행동하지 않아서 답답해 하는 회원들도 있지만 한번도 1년을 넘기지 못했다는, 그 어렵다는 연대 활동을 이렇게 오래 하고 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멀리 볼 일이다. 연합조직은 각 단체 회원들을 긴밀히 연결하고 새로운 활동의 플랫폼을 만들어 시민 활동의 진보를 위해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래서 ‘지역이 필요로 하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 조직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 눈 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표 지향성 조직이 아니라 그야말로 ‘지역이 필요로 하는 조직’으로 커나가야 한다. 올 해 작은변화포럼은 ‘내가 살고 싶은 남원, 내가 바라는 남원’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마당을 꾸려나가기로 했다. 5-6명 정도의 구성원들이 5회 이상 만나서 같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냥 바라는 것을 툭 던져놓고 마는 것이 아니라 회를 거듭할수록 세밀하게 토론을 진행해서 나중에는 정책으로 만들어질 수 있도록 끌어나가 보자는 구상이다. 필요하면 해당 전문가를 초빙해서 조언을 들어볼 수도 있다. 이렇게 이야기 나누는 팀 20개를 조직해 ‘살고 싶은 남원’에 대해 꿈을 꾸고 구체화시켜 정책으로 만들어서 내년 선거 때 후보들에게 제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좋은 정책이 많이 나오면 연말 작은변화포럼의 날 때 정책 박람회를 열어도 좋겠다. 좋은 꿈은 꿀수록 행복하다. 마구마구 꿈을 꿔보자. 작은변화포럼, 신박하지만 쌈박하지는 않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지금은 이 모습이 최선인 것을. 지역이 필요로 하는 조직으로 잘 성장해 나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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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를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
- 마고를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 칩코 (지리산에 사는 퀴어) 사진.하진용 “오늘 여기엔 어떤 변태들이 모였죠?” “농촌 변태!” “얼쑤!” 째쟁째쟁- 꽹과리 소리가 울렸다. 이내 북과 장구, 징 소리가 어우러지고 사람들은 커다란 원을 그리며 어깨춤을 추었다. 날씨는 적당히 심술궂었다. 먹구름이 온종일 무거운 엉덩이를 틀고 앉은 하늘이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으니 되었다. 산내에서 성다양성 축제가 열리는 날이다. 우리는 알록달록 한복들로 저마다 꾸며 입었다. 두루마기에는 타이트한 치마를 함께 입고, 남성용 마고자와는 핑크색 아얌을 썼다. 한복 치마를 무지개색으로 리폼하거나, 외투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거나! 농촌에서 퀴어 축제를 한다는 건 말도 되지 않게 들리지만, 산내라면 달랐다. 처음 애인을 만났을 때, 우린 산내 이야기를 하며 친해졌다. 지리산 속 산내라는 마을에는 페미니스트들이 잔뜩 산다더라, 하는 이야기였다. 산내에서 활동하던 여성주의 단체 ‘문화기획달’이 발행하는 잡지를 둘 다 즐겨보고 있었다. 언젠가 지리산에서 살겠노라고 생각하면서. 처음 애인과 여행을 갔을 때에도 지리산으로 향했다. 우린 한시도 빼놓지 않고 손을 잡고 다녔다. 여자 둘이 3박 4일 내내 손을 잡고 다니는 걸, 민박집 아주머니가 이상하게 생각하시지 않을까 내심 두렵기도 했다. 아주머니는 우리가 떠나는 날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10년 전에 소중한 친구가 생겼다고 했다. 남편이 없어도 그러질 않는데, 이 친구만 곁에 없으면 한국이 통째로 텅 비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이 친구를 조금만 더 빨리 만났더라면 당신의 인생이 더 반짝였을 거라면서. 그리고 우리 둘에게 그 손 꼭 잡고 행복하게 살라고 하셨다. 이듬해 봄, 우린 정말로 산내에 왔다. 산내는 듣던 대로 페미니스트들이 잔뜩 사는 마을이었다. ‘성폭력 근절을 위한 지리산 여성회의’가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인지 감수성 교육을 했고, 마을 삼거리에선 N번방 성착취 사건을 주제로 1인시위 릴레이가 이어졌다. 또래 친구들은 대부분 ‘아주 작은 페미니즘 학교: 탱자’의 열정적인 수강생들이고, 마을 카페와 도서관엔 페미니즘 서적이 책장 가득했다. 길 가다가 페미니즘 구호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중년 남성을 본 건 도시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그렇다고 산내가 마냥 천국이라는 건 아니다. 산내 성다양성 축제를 기획한 건 전 생명평화대학 신입생이다. 신입생들은 총 8명이었는데, 그중엔 이성커플도 있고 동성커플도 있었다. 실상사에서는 쉬는 시간에도 여자와 남자가 함께 방에 있으면 안 되고, 혼숙도 금지였다. 이성커플은 성적인 관계로 간주하여 이런 규칙을 따라야 했지만, 동성커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성 간의 관계를 아예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대에도 없던 ‘퀴어패스권(?)’을 얻었지만, 그닥 기쁜 일은 아니었다. 생명평화대학이 끝나고 나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여전히 젊은 여자만 보면 어르신들은 옆동네 노총각과 맺어주려 하고, 노총각이 없으면 ‘처녀가 시골에서 남자도 없이 괜찮냐’는 염려도 해주신다. 귀촌해서 집을 구할 때는 무조건 결혼과 임신 계획이 있다고 하라던데, 그 두 계획 모두 불가능한 커플을 위한 조언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여자들끼리만 사는 집엔 밤에 대문을 꼭 잠가야 한다는 조언 정도일까. ‘남자나 부부 세입자만 받는다’며 집을 못 구한 적도 있었다. 농촌엔 공개적인 퀴어 커뮤니티도, 선배 퀴어 부부도 없다. 중매를 자처하시는 어르신들에게 퀴어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도 곤란한 일이다. 이런 농촌 문화 안에서 “있는 그대로 우리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즐거운 자리를 마련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으로 성다양성 축제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한 친구가 기획을 총괄하고 나는 포스터를 주로 맡았다. 지리산에는 창세여신 마고할미가 산다는 신화가 있다. 산내는 마고할미 품에 쏙 안긴 마을이었다. 성다양성 축제 포스터에는 주홍색 삭발머리에 입술엔 피어싱을 하고 어깨엔 타투를 새긴 마고여신이 그려졌다. 털복숭이 팔뚝으로 사랑스러운 손키스를 날리면서. 축제는 ‘성폭력 근절을 위한 지리산 여성회의’에서 사무실을 무료로 대관해주셨다. 전야제에는 카페 ‘히말라야’에서 공간을 베풀어주셨다. ‘비온 뒤 무지개 재단’에서 지원금을 보내주셨고,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도 무지개 깃발을 대여해주셨다. 전국 각지에서 노래, 춤, 낭독회, 드랙쇼, 토크쇼, 전시를 기꺼이 해주겠다는 연락들이 왔다. 이 모든 덕으로, 축제날 여성회의 사무실 앞 좁은 골목은 온통 무지개빛으로 북적거렸다. 퍼레이드 때는 쩌렁쩌렁 울리는 ‘born this way’ 노래와 함께 무지개 깃발을 휘날리면서 온 동네를 뛰어다니기도 했다. 퀴어 축제를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마을을 만들어 온 멋진 이웃들에게도 빚을 진 행사였다. 사진. 임송학 전야제에서 <런던 프라이드>를 상영했다. ‘광부들을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Lesbians and Gays Support the Miners ; LGSM)’에 대한 내용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광부와 성소수자 두 집단이, 사회적 약자로서 서로의 연결고리를 발견해간다. 산내 성다양성 축제도 부스 판매 수익금 일부를 ‘지리산 산악열차반대 대책위’에 기부했다. “그럼 우리도 ‘LGSM’이네! 마고를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Lesbians and Gays Support Mago).”하는 우스갯소리도 했다. 성소수자들과 지리산도 광부들만큼이나 엉뚱한 조합일까? 성소수자들이 ‘있는 그대로’ 존재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지리산도 개발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재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무엇보다, 무지개는 서울광장뿐 아니라 지리산 자락 마고할미의 이마에도 떠오르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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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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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를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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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원주민
- 다정한 원주민 칩코 (전 생명평화대학 학생) 삼색 고양이가 또 왔네.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 달이 뜨면 슬렁슬렁 와서는 마당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는다. 먹을 것을 찾지도 않고, 딱히 관심을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가 보거나 말거나 그냥 누워서 쉬다 간다. 그날은 별도 달도 밝았다. 마지막 입주한 친구의 이삿짐을 나른 뒤, 친구들과 나는 마당에서 재잘대고 있었다. 삼색 고양이는 우리를 심드렁하니 보고는 마당에 기대 누웠다. 꼭 제집 같다. 하긴 저 고양이가 우리보다 여기 훨씬 오래 살았을걸. 그 날은 이 집을 ‘들레네’라고 이름 붙인 날이기도 했다. 매동 마을의 빛바랜 파란 대문 집에 온 지 한 달이 되었다. 내가 들어오고 이주 뒤에 한 명이 더 오고, 다음 주에 한 명이 더 오고, 그 다다음 주 두 명이 또 오는 식이었다. 왜 이런 식이었냐 하면, 다들 오기 싫어했으니까. 이 낡은 집은 쉽게 말하자면 유배지였다. 우린 산내 인드라망 공동체에서 운영하는 생명평화대학에 다니던 신입생들이었다. 학생들과 공동체와의 갈등이 깊어져, 공동체는 결국 학생들에게 거리를 두자고 했다. 생명평화대학은 중단되었고, 학생들은 대학숙소에서 쫓겨났다. 올해 봄, 떠돌이 백구 ‘들레’를 실상사에서 처음 만났다. 민들레가 필 무렵이라 이름이 들레가 되었다. 들개라는 이유로 실상사와 대학숙소에서 모두 쫓겨났던 개였다. 학생들과 퍽 친했는데, 지금은 행방을 모른다. 그때 학생들은 ‘공동체에서 사람을 쫓지 않는 것처럼, 개도 쫓아서는 안 된다’라고 했었는데, 지금은 사람도 쫓겨난 웃지 못할 상황이었다. 공동체는 이주 안에 대학숙소에서 짐을 비워달라고 했고, 그 대신으로 이 집을 내주었다. 대학숙소에서 한 달을 가까이 버티던 학생들까지 압박에 못 이겨 모두 들레네로 온 날이다. 우리가 꼭 들레 같았다. 도대체 죄명이 뭐길래 유배를 당한 거니? 이 사태를 궁금해하는 마을 분들이 많은데 다들 윤곽을 모른다고, 마을에 오래 산 청년들이 이를 전해주었다. 마을에 학생들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는 자리를 마련해보자는 제안을 해주었다. 마을에 오래 살면서, 해마다 공동체를 떠나는 청년들을 내내 안타깝게 지켜보던 친구들이었다. 인드라망 공동체는 산내에 청년들이 유입되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대학 졸업생들도 신입생들을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결국 간담회를 열기로 했다. 앞으로 살 집도 필요하고, 가을 농사를 지을 땅도 필요했으니까. 간담회의 이름은 “우리 산내에서 살 수 있을까?”였다. 학생들과 공동체와의 대립은 청년-기성세대의 차이기도, 이주민-원주민 간의 갈등이기도 했다. 늘 인력난에 시달리는 ‘대안 판’의 진부한 문제이기도 했다. 신입생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기존의 위계적 질서들이 있었다. 이를 문제 제기했을 때 ‘일단 순응하라’는 답변이 따랐다. 신입생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공동체는 해결하고자 여러 시도를 해주었다. 그러나 공동체 활동가들은 이미 자신들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바빴다. 학비도 받지 않는 대안 대학에 애써 투자할 시간은 없었던 것 같다. 대학을 중단하고 학생들을 내보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간담회를 열고 싶지 않았다. 대학을 중단하는 것과, 숙소에서 나가는 것을 원한 신입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우리의 의견을 일절 반영하지 않고 또 수직적인 결정을 내린 공동체가 미웠다. 한편으로는 공동체의 질서를 존중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선 깊이 뉘우치고도 있었다. 간담회에서 할 말들이 정리도 안 된 상태였다. 이제 막 마을 살이를 시작하는데, 서러운 이야기로 마을 분들을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대학숙소는 마을과 동떨어진 위치에 있었으나, 들레네는 마을에 있다). 무엇보다, 정말 우리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의문이 컸다. 아무도 안 올까 봐, 그냥 우리끼리 졸업식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괴상한 장마가 길어지고 있었다. 마을에 오래 산 친구들이 홍보를 맡았다. 졸업생들은 여는 공연과 사회를 해주기로 했다. 신입생들이 다과, 발표자료, 포스터 등등을 나누어 준비했다. 간담회 당일에도 비는 내렸다. 내 예상과는 달리, 간담회는 북적였다. 남원의 한 청년협동조합에서도 촬영을 하러 왔고, 산청과 해남 등 멀리서도 찾아왔다. 대부분은 마을 사람들이 자리를 채웠다. 공동체 구성원 중에서도 몇 분이 와 주셨다. 신입생들은 아쉬움 없이 실컷 말하기로 했다. 몇몇은 눈물도 찔끔 흘렸다. 신입생들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기에 졸업생들도 발언을 했다. 간담회는 예정보다 훨씬 지체되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말을 들어주셨다. 뒤풀이 후원금까지 거하게 쥐어주고 가셨다. 앞으로 마을에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말하는 자리도 마련해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간담회는 페이스북에 라이브로 방송을 하고 속기록도 올렸다. 간담회에 참석하지 못한 마을 분들도 그 긴 라이브 방송을 다 보시고 격려를 해주시곤 했다. 나는 좀 얼떨떨했다. 우리가 뭐라고 이렇게 다정하실까. 보답을 바라시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산내에서 함께 살자는 게 다였다. “우리 산내에서 살 수 있을까?” 우리는 질문밖에 없었는데. 장마가 끝나고도 태풍이 여러 차례 왔다 갔다. 하늘은 맑은가 싶다가도 자주 흐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삼색 고양이는 맑은 날에만 왔다. 비가 오면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서늘하게 마른 마당에 눕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공동체에선 올해까지만 이 집을 빌려주었다. 겨울이 지나면 또 다른 들레네를 찾아 떠나야겠지. 삼색 고양이는 오래오래 여기 살았으면 좋겠다. 오늘도 마당 한가운데 은은한 달빛조명이 내린다. 우릴 내쫓지 않는 무심하지만 다정한 원주민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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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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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원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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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진 후에
- 민들레 진 후에 칩코 (생명평화대학 신입생) 민들레 피는 계절, 나는 산내에 왔다. 들레가 산내에 온 것도 같은 시기였다. 그래서 이름이 들레가 되었다. 들레를 처음 만난 곳은 실상사였다. 사람을 졸졸 쫓아다녔지만, 다가가면 줄행랑을 쳐버리는 겁쟁이 백구였다. 털은 하얗지만 때가 꼬질꼬질했고, 사납지는 않았지만 다리가 튼실한 것이 떠돌이 생활을 오래한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사람만 보면 꼬리를 치며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맞출까. 들레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했다. 나는 인드라망 공동체의 생명평화대학에 다닌다. 나와 같은 신입생들과도 들레는 금세 친구가 됐다. 우리가 밥을 준 것도 아닌데, 들레는 우리를 잘 따랐다. 언덕배기에 있는 대학 숙소까지 따라오곤 했는데, 숨도 안 고르고 폴짝폴짝 노루처럼 뛰어오르며 우리를 앞질러 갔다. 들레 뒷모습을 보면서 헉헉거리며 언덕을 오르자면, 꼭 내가 들레 집에 초대받는 기분이었다. 그 드넓은 언덕을 주인처럼 자유롭게 쏘다녔으니까. 들레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실상사에서는 들레를 내쫓기로 했다. 지금껏 모든 들개에게도 그래왔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점점 들개 친구들을 데리고 올 거라고 했다. 또 들레가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다고 했다. 실상사는 아이들도 많이 오기 때문에 특히 위험했다. 들레는 사람 신발을 물어가는 고약한 버릇까지 있었다. 들레는 그게 놀자는 의미였는데, 사람들은 반기지 않는 방식이었다. 들레가 해우소가 아닌 곳에서 볼일을 본다는 점도 이유가 됐다. 실상사 사람들은 들레를 만나면 손뼉을 치거나 훠이훠이 위협을 하며 내쫓기 시작했다. 갈 곳 없는 들레는 대학 숙소에 더 자주 놀러 오게 됐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대학 숙소 사람들도 들레를 내쫓기로 했다. 절과 대학만이 아니었다. 어느 농장이나 과수원 주인도 들개가 밭을 헤집고 다니는 걸 원치 않았다. 닭을 소유한 농부들은 더 강경했다. 들레는 위험한 시멘트 찻길 외에는 어느 곳에서도 왕래할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동네의 개들이 왜 다리를 절뚝이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들레를 내쫓는 것이 이상했다. 들레는 사람을 좋아했다. 사람들을 보면 반갑게 인사했고, 절에 매일 눈도장을 찍었다. 나는 들레가 우리 공동체에 문을 두드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들레는 이웃으로 받아달라고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한 셈이었다. 공동체에서 사람을 내쫓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내쫓을 권리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개도 당연히 산내의 어느 땅이든 오갈 수 있는 생명이었다. 개가 친구들을 데려오지 말라는 말, 해우소에서 볼일을 보라는 말, 신발을 물지 말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내쫓는 것은 차별이었다. 공동체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내쫓는다면, 규칙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유아나 지적장애인들도 내쫓을 셈인가? 개가 사람을 공격할 수 있어서 내쫓는다면, 사람도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데 왜 내쫓지 않는가? 개에 물려 죽는 사람보다, 사람에게 죽임당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텐데. 들레는 개라서 차별받았다. 우리와 다른 종이기 때문에 차별받았다. 들레와 친구였던 신입생들은 인드라망 공동체에 대화를 시도했다. 먼저 대학 숙소 식구들이 이야기를 나눴다. 논의 주제는 ‘들레는 어디에 있어야 하나?’였다. 들레의 주인을 찾아주자거나 유기견 보호소에 보내자는 의견이 있었다. 산으로 들로 즐겁게 쏘다니는 들레를 갇힌 장소로 보내는 건 납치나 다름없다는 반박이 따랐다. 대부분의 시골 개들은 무료한 시멘트 바닥에서 60센티 남짓한 목줄에 묶여 지낸다. 유기견 보호소도 열악한 곳에서 갇혀 살다가 안락사 되기 일쑤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떠돌이로 살게 놔두는 건 위험했다. 들레는 음식물 퇴비간이나 똥간에서 배를 채우곤 했다. 들레가 오가는 찻길은 로드킬이 잦았다. 다달이 개장수가 마을을 돌 때 잡혀갈 시나리오도 있었다. 그럼 우리가 키워야 하나? 들레를 책임질 수 없으니 키울 수 없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그럼 키우지 않으면 우린 책임에 면죄부를 받을 수 있나? 애초에 이 작은 개 한 마리가 이토록 안전하게 살 곳이 없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개의 먹이를 독점하고, 차로 개를 죽이고, 개를 물건처럼 사고파는 자들이 결국 인간이지 않은가? 해결책을 내지 못한 채 회의시간이 끝이 났다. 논의는 게을러져서 이후 대학 내에서도, 실상사에서도 진전되지 않았다. 그 사이 한 주민이 떠돌이 백구를 잡아가라고 신고를 했다. 개장수 트럭이 오가는 것을 보고 신입생 친구들은 급히 들레에게 스카프를 매어 주었다. 보호자가 있는 개로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날 저녁, 말괄량이 들레는 하루도 못가 스카프를 잃어버린 채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래도 개장수 트럭은 피한 모양이었다. 그즈음 산내에 폭풍 같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어찌나 거센지 양철지붕쯤은 그냥 날려버릴 기세였다. 강풍은 닷새가 지나도록 계속됐다. 들레는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강풍이 끝날 때까지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는지, 산내가 질려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신입생들은 들레를 위한 현수막을 만들고 있었다. 개 로드킬을 방지하기 위해 속도를 줄여달라는 현수막이었다. 회의의 결론 중 확실한 것은 인간이 비인간동물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위해 노력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세월호 참사 때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때도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 나는 언제든 그들이 될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들레를 생각하면, 나는 정말이지 운 좋게 인간으로 태어났다. 우리 사는 곳은 인간이 아닌 생명에게 얼마나 가차 없는 환경인가? 내가 비인간동물로서 한 마을에 문을 두드렸을 때, 누구도 나를 환대하지 않고 나를 죽일 트럭에 몰아넣는 곳. 바람이 그치고 우린 현수막을 걸었다. 들레에게 새로 매어 줄 스카프도 마련했다. 그러나 들레는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들레가 사라진 후에도 개장수 트럭은 여러 차례 마을을 오갔다. 들레는 트럭에 잡혀갔을까? 다른 마을에서 살고 있을까? 들개를 환영하는 마을이 있을까? 들레는 우리를 원망할까? 우린 또 다른 들레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수많은 질문을 남긴 채, 민들레 피는 계절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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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진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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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산내면 청년의 이야기
- 남원시 산내면 청년의 이야기 지음 (생명평화대학 학생)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인생 스무 해 째를 살고 있는 지음입니다. 인드라망 공동체 안에 있는 청년 인생학교 ‘생명평화대학’의 학생으로, 올 봄부터 남원시 산내면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저는 이웃도 잘 모르는 도심의 아파트에서 살다가 올해 산내에 와서 ‘마을’, ‘공동체’라고 하는 것들을 경험하며 새롭고 가득한 순간들을 많이 만나고 있어요. 제가 뭐 남다른 통찰력이나 글솜씨가 있는 건 아니지만, 감탄하던 마음 되살려서 그 순간들 중 최근의 일 두 가지를 같이 나눠보려고 해요. 지난 11월 9일 산내에서는 올해의 마지막 ‘살래장’이 열렸어요. 4월부터 매달 둘째 주 토요일마다 뱃속은 물론 눈과 귀, 마음까지 두둑하게 채워주던 장터에요. 저는 살래장을 ‘다른 장에 없는 건 있고, 있는 건 없는 특별한 장터’라고 설명하고 싶어요. 주점, 벼룩시장, 전시, 공연, 창작물 판매 등 진짜 별의 별게 다 있고요, 포장 비닐, 일회용 젓가락 이런 건 찾아보기가 어려워요. 일단 살래장에 제일 많은 건 사람인데, 적게는 150명에서 많게는 250명까지 다녀간다고 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공간인데도 쓰레기가 50L 종량제 봉투도 다 안 찰 만큼 적게 나온다니 대단하죠. 여기에는 ‘비니루 없는 점빵’이라고 하는, 몇몇 이모들이 만든 어떤 캠페인 같기도 하고-교육 기관 같기도 하고-김밥 집 같기도 한 부스의 영향이 커요. 이 점빵의 이모들은 미리 사람들에게 속닥속닥 하시는 거예요. “(작은 목소리로)비닐이나 플라스틱 포장재 없이 물건을 사고 팔아보자, 빈 그릇과 텀블러, 수저 등을 들고 살래장 나들이를 오시라.”고 말이에요. 그럼 정말로 마을사람들은 포장재 없이 생산물들을 선보여요. 구경 오시는 분들도 장바구니는 물론 반찬통, 텀블러까지 들고 와서 소풍 도시락 까먹듯 즐기다 가시고요. 그게 진짜 가능한 일이더라고요! 제가 살래장에서 가장 사랑했던 음식은 샌드위치인데요, 이것 말고도 여름엔 팥빙수, 겨울엔 군고구마, 계절에 상관없이 커피, 쿠키, 스프, 반찬, 파전 등 정성어린 손길이 가득 담긴 다양한 음식들을 맛보거나 냄새 맡을 수 있어요. 또 제 예민한 피부를 감싸주던 수제 쌀겨 비누, 실상사 작은학교 친구들이 만든 스킨, 샴푸 등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아이템들이었죠. 저는 아쉽게도 살래장에서 한 번도 뭘 팔아본 적은 없지만, 제가 되게 열심히 했던 게 한 가지 있어요. 바로 친구들과 함께 한 공연이에요. 살래장의 무대는 실력을 따지지 않고 마을 청중들 앞에서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아낌없이 주세요. 생각해 보니 제 데뷔무대였네요. 이것 말고도 마을분이 수집하신 램프 전시, 플라스틱을 먹은 새 다큐멘터리 상영, 아이들의 손 떼 묻은 딱지 판매 등 기억에 남는 게 많아요. 매달 마을 사람들과 만나서 목소리든 음식이든 물건이든 주고받을 수 있는 마당이 있다는 것, 누구든 무엇이든 내놓으면 서로 봐주고 들어주고 받아주는 품이 있다는 것이 좋고 재미있어서 항상 살래장이 기다려졌던 것 같아요. 또 내가 뭔가를 작당해서 만들었을 때 선보일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은 참 든든하고 신이 나죠. 살래장이 있기 일주일 전, 대학 친구들과 남원 시내로 진출했어요. 바로 ‘남원시 청년창업 한마당’에 참여하기 위해서였죠. 이 자리는, 남원에 있는 청년 단체 22곳, 마을 공동체 18곳이 모여 서로 어떤 일들을 꾸미고 있는지 알리고 구경하는 자리였어요. 청년들과 마을 공동체가 잘 정착하고 나아갈 수 있도록, 남원시에서 주최하고 남원시 공동체 지원센터에서 주관하는 커다란 행사였어요. 이 행사에서 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청년’이라는 이름, ‘마을’이라는 이름을 달고 뭉쳐서 다양한 것들을 시도하고 노력하고 있는지 똑똑히 보고 느낄 수 있었어요. 저희도 생명평화대학 홍보도 할 겸, 털실로 따뜻한 귀마개를 만들어 실 값만 받고 나누겠다고 나섰지요. 행사를 준비하기 전에 저희는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어요. ‘우리가 어떤 것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 갈까?’에서 시작하여 ‘우리는 사회에 나가서 뭘 해서, 먹고 사는 동시에 더 따뜻한 사회로 나아가는데 걸음을 보탤 수 있을까?’하는 물음까지 이어졌어요. ‘우리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밥도 먹여주고 이 사회에 도움도 되는 일이면 좋겠다.’, ‘마치 캠페인처럼, 우리가 행동하고 존재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돈 외에는 따뜻함이 널리널리 퍼져나가는 데에 쓰이면 좋겠다.’고 생각을 모았어요. 그래서 함께 열심히 뜨개질해서 만든 귀마개를 드리고 털실 한 뭉치 값의 후원금을 받기로 했어요. 그렇게 모인 돈은 이 활동을 위한 식비와 차비로만 쓰고, 그 외에는 다음 귀마개를 만드는 데에 쓰자고 했지요. 털 실 하나에 두 개의 귀마개가 나오니까, 우리는 이 캠페인을 두 배, 네 배로 늘려갈 수 있겠다 싶어 들뜨기도 했어요. 막상 실전에서는 사람들에게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어려움이 컸어요. 상품과 자본의 교환으로만 흘러가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만들고 나누는 것은 분명 즐겁고 뿌듯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이 시도에 필요한 재료비는 남원시에서 지원을 받았어요. 이렇게 우리가 무슨 일을 꾸미고 실현해볼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자리를 만들어준 시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같이 배우고 생활하는 친구들과 함께 사회에 나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고, 해보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지점은 무엇인지 경험해볼 수 있는 값진 기회가 되었어요. 나의 인생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방황이 뒤섞인 이 시기에, ‘함께’ 살아가고자 궁리하고 노력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큰 행운 같아요. 방법과 목적에 대한 힌트를 얻고, 따뜻한 경험과 배움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어요. 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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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산내면 청년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