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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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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폭력대화 연습모임을 시작한 꼬리의 방구일기
    ‘함께 살아간다’이 말의 첫 느낌은 여전히 참 다정하다. 이 말을 들으면 왠지 의지할 구석이 생긴 것 같고, 더는 외로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끝까지 불러본 적도 없는 ‘손에 손잡고~’로 시작되는 노랫말이 떠오르기도 한다.그러나 곱씹다 보면 전혀 상반된 기억들이 밀려온다.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에게 도저히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그래서 내가 새롭게 찾아낸 공동체에서 지긋지긋하게 싸우면서, 어쩔 수 없이 마주치고마는 무례한 사람들 틈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말은 무섭게 돌변한다. 그러면 상처입을까 두려워 크게 분노하거나 떠나버리곤 했다.방랑단 친구들은 한 지붕 아래 살았던 식구였다가 지붕없이 한 길을 걸었던 동료였다가 지금은 한 마을에 살고 있는 이웃이다. 그리고 방랑단 각자 저마다의 사랑과 우정을 나누며 더 많은 친구들과 연결되어가고 있다. 아무래도 우린 ‘함께 사는’ 쪽을 자꾸 선택하는 것 같다. 그래서 싸우거나 피하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너무 필요해졌다.평생을 일궈온 습관을 단숨에 고치는 건 불가능해도 잠시 멈춰서 내 말 속에 담긴 감정과 욕구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그 마음을 용기있게 마주하는 시간만이라도 꾸준히 가져가고 싶었다. 내가 누군가를 가르칠 형편은 못 되어서, 다만 배웠던 걸 조금 공유하는 수준이지만 고맙게도 글쓰기 모임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마음을 내주어 연습모임을 시작했다. 서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관계 안에서 조금 더 내공이 쌓이면 더 많은 이웃들과 열린 모임으로 진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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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7
  • [우리는 지구를 떠나지 않는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오-붓한 책담!
    여성환경연대 부설 에코페미니즘연구센터 ‘달과나무’에서 방랑단에게 연락이 오셨어요. 지리산의 에코페미니스트들을 만나고 싶어 구례에 놀러오신다고요. 지리산의 많은 얼굴들이 떠오르며 만남이 얼마나 기대됐는지 몰라요. 꽃철에 겹쳐 못오실까봐 부랴부랴 숙소부터 추천드렸답니다. 방랑단도 귀촌하기 전 여성환경연대에서 펴낸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 책에 큰 영감과 용기를 얻었는데요. 이번엔 따끈따끈한 신간 <우리는 지구를 떠나지 않는다>의 공동저자 중 네분(김혜련, 유서연,이현재, 황선애 작가님)을 모셔서 책담도 나눠주실 수 있다니! 이리 좋은 기회를 함께 준비하게 되어 영광이었어요! “지구가 불탄다고 화성으로 떠날 건 아니잖아요? 이 땅에 발붙이고 살고 싶은 여성들이 기후위기시대에 지구를 돌보는 법” 여성주의x환경에 관심있는 지리산의 에코페미니스트들 함께 모여 이야기 나눠요! - 24년 3월 30일 (토) 15-16시반 캄다운파티 - 신청: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오-붓한 책담 신청 (google.com) <신청하러가기! - 참가비: 1만원 (대관료입니다. 음료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음료를 원하시는 분은 영업마감 3시 이전에 오셔서 주문하시면 됩니다) - 참가비 입금 계좌번호 - 카카오뱅크 3333131937387 ㅂㅅ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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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7
  • ♪ 숲(에 나무가 있어야지 골프장이 있냐) 음악회♬
    작년에 구례군 산동면 사포마을 뒷산에서 21만㎡ 너비의 면적의 숲이 사라졌습니다.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부터 지리산 국립공원 경계 인근까지 최소 2만 5천 그루의 나무가 베어졌습니다. 구례군과 시행사는 이 자리에 1000억원을 들여 45만 평 너비의 대형 골프장을 지을 거라고 합니다.골프장 사업을 막아내고 무단 벌목지에 봄을 돌려주기 위해 음악회를 엽니다. 음악회에 앞서 지리산골프장 개발 예정인 벌목지 답사도 준비했습니다.다시 숲으로 돌아갈 날을 위해 음악과 이야기와 마음을 모으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2024년 4월 6일(토)▶ 오후 1시, 벌목지 답사 사포마을회관 (구례군 산동면 사포길 72)에서 시작- 지리산 난개발에 대한 소책자를 읽고나서, 주민분의 안내로 벌목지를 함께 걷습니다.▶ 오후 4시, 숲 음악회사포저수지 옆 공터 (구례군 산동면 관산리 401)♬ 공연자- 오프닝 : 캄캄밴드- 살래 재즈 트리오와 옥수수- 김목인☞ 참가비 20,000 원 이상 (카카오뱅크 3333-11-3005007 이신지원)☞ 주최 : 지리산골프장백지화연대, 지리산방랑단, 동아시아에코토피아포스터배경 사진: @phoma_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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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8
  • 층층집에 나눔해주세요!
    층층집에 모실 입주자를 선정했어요. 구례에 오고 싶은 이유도, 각자의 관심사도 다양한 분들이 신청해주셨어요. 층층집을 온기로 채워주실 분들이 참 반갑고 기대되어요.층층집 프로젝트는 정부나 재단에서 지원금을 받지 않아요. 지리산사람들 시민단체에서 입주자분들의 월세를 일부 지원할 뿐입니다. 보증금 2천만원도 개인 후원자의 도움으로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층층집엔 아직 필요한 물품이 남아있어요. 자세한 품목은 웹자보에 기재해두었습니다. 지리산 곁으로 온 새 이웃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마음을 듬뿍 담아 물품을 나눔해주시길 요청드려요.기재해둔 물품목은 총총이가 생각한 최소필요물품이에요.(감사하게도 여기저기 나눔해주셔서 현재난로와 식탁 의자만 구하면 됩니다!) 이외에 물품도(예: 에어프라이어, 전기포트, 집안을 꾸밀 장식 등) 얼마든지 선물해주실 수 있어요. 다만 불필요한 물건이 너무 많아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연락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품후원 시 연락망: 칩코 010-2구5육-팔115(카톡이나 디엠 선호해요:)후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틀림없이 좋은 일이 생길거예요!! 마음으로 응원해주신 분들도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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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8
  • 캄다운파티의 두 번째 작은 콘서트
    캄다운파티의 두 번째 작은 콘서트 <흙과 바람과 별과 농부_서와콩> # 기획자, 상글로부터의 편지 달콤한 매화 향기에 마냥 설레다가도 매년 빨라지는 봄꽃의 개화 소식과 이상한 흐름이 마냥 반가울 수는 없어요. 올해도 어김없이 호미를 들고 밭에 앉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기후변화에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을까 걱정이 밀려와요. 서와콩은 합천에서 농사지으며 자연이 들려주는 아름다움을 시와 노래로 짓는 남매(서와&수연) 듀오예요. 서와가 쓴 시집 <생강밭에서 놀다가 해가 진다>를 같이 낭송하고 노래하는 자리를 마련했어요. 흙을 만질 때 살아있음을 느끼는 사람들과 이웃들에게,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서와콩의 노랫말이 아직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다는 메시지를 던질 수 있기를 바래요. - 일시 : 3월 17일 일요일 오후 4시 - 장소: 캄다운파티(구례읍 중앙로 25, 2층) - 신청: 인원수와 함께 문자(010-2075-140공) 혹은 DM(@cdp.gurye) 주세요. - 참가비: 어른/ 1만 5천원, 어린이/ 5천원 (음료 포함) ——————————————————————————— *서와콩* 서와콩은 서와&수연 남매듀오로 합천 황매산 기슭에 서식하며 퍼머컬처 방식으로 숲밭을 꾸리고 있는 농부이자 음악가다.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작은 존재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노래를 부른다. 서와는 시집 『생강밭에서 놀다가 해가 진다』를 썼다. ——————————————————————————— # 서와의 시들 “수수밭은 내 마음 같아 키우고 싶은 것만 키울 수 없는 마음 같아” - 「수수밭」 중에서 “나는 쓸모 있는 사람보다 오늘 본 밤하늘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 「오늘부터」 중에서 “그래도 괜찮아 사실 고래는 내 안에 살고 있거든 바다로 이 고래를 풀어 줄 수 있는 바다로 가기만 하면 돼” - 「바다 고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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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5
  • 도림사로 동안거 다녀온 상글이의 방구+단식일기
    #단식 1일차몸이 퉁퉁 부었다. 손가락도 발가락도 퉁퉁, 스마트폰은 어찌나 봤는지 눈도 시렵고, 종아리도 아팠다. 그동안에 쌓인 피로가 올라오는 듯 했다. 이사에, 축제에, 텃밭수업에, 공유회 준비로 하반기에는 쉼없이 달려왔던 까닭이다. 꼬리, 아림, 아라, 주옥쌤, 차라, 칩코 편안한 동지들과 함께 도림사에서의 5일을 보낼 수 있음이 감사하다.우리가 온다고 청소부터 보일러까지 신경을 많이 써주셨다. 방이 지글지글 따뜻해서 들어가자마자 꿀잠을 잤다. 핸드폰도 시계도 없으니 몇시간을 잤는지도 모르겠다. 쓰러져서 잠에 들었다.수행을 삶으로 사는 친구들이 옆에 있으니 이런 호강을 누린다. 덕분에 나를 지극히 살피는 시간이 있음에 감사하다. 이런 시간을 마련해준 친구들에게 나는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단식 2일차시계가 없으니 눈을 뜨면 지금이 몇시일까 생각하다 잠을 뒤척였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눈을 끔뻑이다 옆에서 울리는 첫 알람 소리를 들었다. 4시였다.아침에는 속이 메스꺼렸다.울렁거리는 와중에도 열심히 요가와 명상 일정을 해냈다. 아침일정을 마치고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면 몸이 개운하다.아림, 주옥샘, 아라와 도림사 뒤에 있는 동악산에 올랐다. 동근, 봄이랑 종종 올랐던 길이라 익숙하고 반가웠다. 단식 중인 내 발걸음에 속도를 맞춰주는 동료들 덕분에 산행이 편안했다.마지막 2km는 매우 가파랐다. 배고픔이 많이 느껴졌지만 쉬엄쉬엄 함께 숨을 고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정상에 도착했다. 동악산을 둘러싸고 있는 능선들이 끝없이 펼쳐졌다. 저 멀리 우리들의 지리산도 보였다. 먹을 것이 없으니 그저 아름다운 경치로 점심을 대신했다.산에 다녀와서는 밤 무서운 줄 모르고 내리 잠을 잤다. 저녁을 먹지 않으니 시간이 많다. 고요한 밤이 참 길었다.#단식 3일차4시 알람을 듣고 일어나 공양간으로 오면 주옥쌤이 책을 읽고 계신다. 하루를 시작하며 처음 인사를 나누는 사람. 따뜻한 눈인사로 맑은 기운이 전해진다.속이 울렁거린다. 아침 명상을 하고 한 숨 자고나면 제 컨디션으로 돌아오니 다행이다.여여의 ‘0원으로 사는 삶’을 읽고 있는데 글에서 그녀의 여정이 눈에 선하다. 깨지고 부딪히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이야기에 푹 빠져 읽다보면 여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글이 살아있다.아림이와 108배를 올리기로 했다. 참회문 한구절을 소리내어 읽고 절을 올렸다. 문득 이 순간 평화로운 상태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 감사했다. 종종 비구니스님인 친구를 찾아가 절에서 쉬었다가셨다는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도 잠시 멈추어가는 시간이 필요하셨을까, 눈물이 핑 돌았다. 시야가 흐려져서 글자를 엉터리로 읽는 바람에 잠깐 웃음이 났다. 108배를 마치고 아림이가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아림과 진하게 함께 맞춰보는 첫 호흡이었다.사람들이 저녁예불을 드리는 동안 공양간 설거지를 했다. 몸을 비워내는 시간도 좋지만 함께 맛있게 먹는 시간도 의미가 있다. 그 시간에 함께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잘 먹어주는 이들이 있어 단식에 활기가 넘치니 감사할 일이다.#단식 4일차입이 바짝타고 메슥거림이 심해 힘겹게 요가를 마쳤다. 잠깐 잠든 사이 온갖 꿈을 꾸었다. 살아오면서 만난 인연들이 전부 찾아오는 느낌이다.빨래를 했더니 개운했다. 독소가 나오는 것인지 몸에서 쾌쾌한 냄새가 자꾸 신경쓰였다. 단식할때는 세제가 손에 안닿게하라하여 손빨래는 적게했다.도림사에 있는 동안 내게 가장 많이 찾아 온 메세지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라’였다. 살집이 붙은 내 몸이 맘에 들지 않아서, 다른 동물의 살덩이를 먹고 싶은 내 욕구가 불편해서, 몸이 정화되었으면 해서, 나를 불결하게 바라보는 시선에서 시작된 단식의 동기가 컸다.단식을 진행하는 동안 이만큼 건강할 수 있는 나의 몸에 감사하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완전한 상태로 바라봄에서 나를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더 멋있어져야할, 더 깨끗해져야할 ‘나’가 아닌, 이로써 충분한 ‘나’라는 거. #보식 1일차집에 돌아왔다. 벌써 절에서 지낸 시간이 꿈같다. 배농장에서 동근이와 반가움 입맞춤을 나누고 봄이와 실컷 뛰어노니 집에 온 것이 실감이 난다. 집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어 기분이 참 좋았다. 돌아올 수 있는 따뜻한 보금자리가 있음에 감사합니다 _()_어느새 처리해야할 것, 당장 해야할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이 조급해지니 천천히 주변을 살피는 것을 잊는다. 너그러운 마음상태로 주변을 챙기는 것을 잊지 말아야지, 그리고 나의 몸을 연인처럼 애정해주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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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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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토의 입춘 편지] 내가 직접 지어 입는 전투복
    디자인.칩코 <가로에게> 와아, 이사 축하해요! 독립한 것도 축하합니다! 지금쯤 방 정리를 마무리하고 아늑한 가로만의 공간을 꾸몄을까요? 산달리기를 다녀왔을 날에는 따뜻한 차와 함께 몸도 녹이고 열 발가락을 쭈욱 뻗고 온전한 한 숨을 깊게 내쉴 수 있는 편안한 시간을 가졌길 바래봅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라니.. 제가 다 기뻐요! 나만의 공간이 생긴다는 것은 참 뿌듯한 일인것 같아요. 문득, 새로 이사간 곳에는 어떤 이웃생명들이 있는지도 궁금하네요. 새로운 주변의 환경에서도 자연의 경이로운 생명을 눈으로, 냄새로, 분위기로.. 하나씩 잘 찾아내는 재미가 있길 바라요. ‘집’이라는 공간은 우리들에게 참 중요한 곳인 것 같네요. 몇년 전 도시에서 살 땐, 가족들과 함께 살던 집과 걸어서 15분 거리에서 따로 살았어요. 따뜻한 밥, 가족들의 온기, 편안함보다 저에게 더 소중했던 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지키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 그땐 나의 마음과 생각들을 공감해주는 이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아.. 너는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겠다' 하는 공감의 언어가 필요했는데 집이라는 공간에서는 외톨이가 된 느낌이었달까. 온전히 나로써 인정받고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했던 것 같아요. 나 역시도 가족들에게 그런 품을 내어주기엔 부족하기도 했구요.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그게 산이 내게 주는 느낌이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문득 높은 곳에 올라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저 바람 소리, 새 소리, 낙엽을 떨어뜨리는 소리로만 내게 말해주는 것 같아 기뻤어요. “있는 그대로의 너는 참 아름다워.” 하고 말이에요. 산은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까요. 지리산으로 이사 온 것도 그런 이유겠지요? 그런 산에게 기대어 산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에요. 그래서 이제는 그 존재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를 줄 아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어요.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내 이웃이 된 그들의 이름을 반갑게 부르며 인사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강아지에게 인사할땐 눈을 마주치지 않고 손 등을 내밀며 매너있게 인사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처럼, 나무 한 그루에게 다가갈 땐 가지 끝에 달린 작은 겨울눈과 눈을 마주치며 이름을 불러보고 있어요. 가까이 다가가 손끝으로 들여다보기도 하고 목을 길게 뻗고 높이 올려다보기도 해요. 새롭게 알아가는 이름이 하나씩 늘고 있는데 꽤 즐거운 일이에요. 서울 회동을 곧 앞두고 입춘 편지의 주제는 ‘나의 전투복’이네요. 전투복이라니! ‘전투'라는 단어는 듣기만해도 무서운 느낌이에요. 적을 만드는 것을 무서워하는 저는 쫄보인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날 만큼은 당당하고 싶고, 멋진 아우라를 뽐내고 싶다하는 날에 입는 옷을 생각해봤어요. 어릴 적 엄마가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모습이 참 아름다워보여서 저도 한참 손으로 만드는 것을 배우는 걸 좋아했는데 그 중 하나가 옷만들기에요. 엄마만큼 솜씨가 좋지는 못하지만 열심히 배워서 흉내는 내보았어요. 스웨터나 가디건을 직접 짜입기도 하고 조끼와 바지를 직접 만들어 입기도 해요. 모자를 짠다던지 안입는 코트를 잘라서 가방을 만들어보기도 했어요. 나에게 전투복이란 내가 직접 만든 옷을 꺼내입는 것인것 같아요. 나의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잘 전해지기를 바라는 그런 날에는 내가 만든 옷들 중에서 하나를 코디해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로 만든 옷이기도 하고, 내게 가장 편안한 감촉과 품으로 만든 옷이기에 입었을때 가장 나다운 느낌이랄까. 옷을 지어입는다는 것은 그런 것인것 같아요. 오롯이 나를 생각하는 시간이에요. 나의 몸을 떠올려보고 나의 몸짓은 어떤지, 나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는지 습관은 무엇인지를 곰곰히 생각해보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나를 위한 옷을 만들기가 어려우니까요. 옷을 만드는 시간은 산만하게 움직이는 마음과 생각들을 잠시 내려놓는 치유의 시간이기도 해요. 그러고 보니 요즘엔 손으로 옷을 만든 적이 정말 뜸했어요. 시골에 살다보니 옷도 가짓수가 많은 것은 짐만 되는 것 같아 필요없는 옷은 사지도 않고 만들지 않으려하는 것도 있어요. 취미라고 생각하고 옷을 만들었는데 가로에게 편지를 쓰면서 옷을 만들어 입는 행위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이 많네요. 나에게 이만큼이나 의미가 있는 일이었구나..! 하고요. 최근엔 바늘을 잡는 시간보다는 누워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던 것 같은데.. 몸이 자꾸 편한 쪽으로 선택이 기울때 나를 탓하기도 하고 지금의 시간들이 불편하고 불안함을 느껴요. 가로의 문장들을 여러번 곱씹어 봐요. 나 자신을 믿고 그대로 인정해주고 싶어요. 천천히 조금씩 쉬어가는 법을 배우고 싶은 것처럼. 종종 아름답고 사랑이 깃든 존재들 곁에서도 나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거든요. 내 안에 두려움을 마주칠 때마다 찾아오는 습인것 같아요. 쫄보여도 괜찮다고 이야기해줄래요. 이 글을 적다보니 지금의 나를 충분히 안아주고 싶어요! 새로운 전투복을 만들어보고 싶은 느낌이 말랑 말랑 찾아오네요. 옷을 만드는 솜씨가 좋지는 못하지만 조금씩 배우는 재미가 있어서요. 편지를 쓰다보면 생각 속 저편에 있는 나를 꺼내게 되는 것 같아요. 편지가 온통 나에 대한 이야기라 부끄럽기도 하네요.. 가로의 전투복 이야기도 기다려져요! 내일은 봄을 세우는 날 ‘입춘’이네요. 가로와의 펜팔 덕에 지난 겨울은 참 포근했어요. 우리는 어떤 봄을 맞이하게 될까요? :) -토토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3-02-27
  • [입춘 편지 : 덕복희와 산달] 사진을 찍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들다니요
    디자인.칩코 <가까운 이웃이 되어주고픈 산달에게> 반가운 산달! 이번 편지는 자중해야겠어요. 웃기다는 말에 살짝 벅차오를 뻔했는데요. 신이 나 적당한 익살의 경계를 넘어버리는 것은 하수들의 흔한 실수죠. 저는 하수라서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되겠습니다. 저는 몇 주 전에 본가에 다녀왔던 터라 설에는 구례를 지켰어요. 귀촌한 첫 해에도 설에 집에 안갔었는데요. 엄청 외롭더라고요. 시골은 명절만 되면 텅 비었던 마을 어귀의 주차장이 가득 차요. 집집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들리지 않던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요. 손자들 놀러왔다고 맛있는 음식을 해주시는가봐요. 벚꽃시즌 다음으로 지리산이 붐비는 때일 거예요. 첫 해는 왁자지껄한 속에 저만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기분이었는데… 해가 쌓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시골인심이 좋다는데 정말이에요. 이번 설에는 이웃께서 나물과 부각을 잔뜩 챙겨주셨어요. 제가 채식하는 걸 알고 일부러 젓갈도 넣지 않으셨다면서요. 저희 집엔 냉장고도 없고 전 먹는 양도 적어서, 그 많은 반찬을 상하기 전에 해치우느라 복에 겨운 고생을 했답니다. 시골은 동지나 새해 같은 날엔 이웃끼리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가봐요. 저 같은 외지인에게도 꼭 한 솥씩 챙겨주시더라고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제게는 매번 놀라운 경험이에요. 작은 방에서 혼자 일어나 외출했다가 다시 혼자 침대로 돌아온다는 산달을 그려보면서 꼭 예전의 제 모습이 겹쳐보였어요. 산달이 제 이웃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 많은 나물 반찬을 나눠먹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요. 동치미랑 김부각은 먹어본 중에 최고였어요. 산달, 대단한 걸 놓쳤다고요. 그렇지만 인심이 푸진 이웃 대신으로, 산달에게는 사랑과 기다림을 허락한 가족들이 곁을 지켜주었나봐요. 오랜 반려자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냈다니 다행한 마음입니다. 산달! 이번 입춘의 주제는 ‘나의 전투복’이에요. 회동을 앞두고 서로를 상상해볼 수 있도록 정하긴 했는데요. 저한테 그닥 이득이 있는 주제인지 모르겠어요. 썩 근사한 전투복은 아니거든요. 저는 계절별로 단벌인 펑퍼짐한 절복을 입고 지내요. 겨울을 제외하곤 나머지 계절은 머리에 터번을 두르곤 해요. 색은 온통 파란색입니다. 지독한 컨셉을 가진 듯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실용성을 중시해요. 절복은 밭일과 환경운동, 어느 때고 편안한 옷이에요. 색이 통일 돼 있어 모든 옷을 돌려입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어요. 외출 준비가 양치질보다 빨리 끝나는 기적의 실용성! 특별한 전투복이라기엔, 딱히 골랐다고 볼 수 없는 단벌이지만… 좀 웃긴 얘기를 해보자면 본의 아니게 이게 환경운동에 먹히더라고요(?) 기자회견 같은 곳에 가면 꼭 기자들이 저를 가운데 세우려고 하세요. 외관이 독특하니까 기사사진으로 쓰기 좋다나 봐요. 그들의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그림이 된다”는 거죠. 뭐랄까… 약간 꼬질꼬질해서 사연이 있어보이고, 시골에서 보기 드문 젊은이에, 방금 밭일을 하다 나온 듯한 현장감… 이게 그림이란 걸까요? 덥수룩한 수염에 떡진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니는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도 저와 같은 신세에요. 사진 찍을 때 어리둥절한 채로 나란히 세워지곤 합니다. 아마 회동에서도 더 멋진 옷을 고르는 덴 실패하고 똑같은 옷을 입을 텐데요. 기자회견 사진처럼 떫은 감을 먹은 표정이진 않을 거예요. 산달의 편지를 읽을 때처럼 활짝 웃고 있을 거예요. 제게도 산달의 편지는 기쁨이거든요. 산달은 한 문단마다 한 번씩은 꼭 저를 번뜩 놀래는 문장을 숨겨놔요. 싣지 못한 산달우드향이 코끝에 덥썩 매달린대도 그 문장들만큼 이목을 끌지 못할 지도 몰라요. 저는 그 문장들 앞에선 일순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다음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서성거려요. 그래서 두번째 산달의 편지는 꼭 여명의 숲길 같았어요. 집 뒤편에 바로 이어진 지리산둘레길이 있어요. 매일 아침, 사물의 푸르스름한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재빨리 집을 나서요. 해가 다 뜨도록 게으름을 피우면 놓치는 것들이 많아요. 숲속은 동틀 무렵이 가장 분주하거든요. 아침 산책을 하며 다람쥐를, 붉은배새매를, 운이 좋으면 담비를 만나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게 제 낙이랍니다. 요즘은 나무 공부에 푹 빠졌어요. 나무의 수피와 겨울눈을 요리조리 살피다 도감에서 본 나무가 딱 등장하면 그때의 환희란! 그 나무를 지나칠 때마다 덩실덩실 손을 맞잡고 아는 체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에요. 그런데도 숲길은 여전히 수수께끼에요. 저는 새들의 ‘송’과 ‘콜’을 구분하지도, 바위 위에 놓인 불그스레한 똥이 누구의 똥인지, 진흙에 찍힌 멧돼지 발자국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알고 싶은 것들 투성인데 다 알 수 없어 숲을 떠나지 못해요. 한동안 서서, 바람의 방향이나 나뭇잎이 흩어진 모양새를 골똘히 노려만 보다가 돌아온답니다. 그 수수께끼의 숲을 지나고 나면 아침 해가 다 차올라있어요. 알쏭달쏭한 공간을 헤매고 제게 남는 건 놀랍게도 고단함보단 아름다움이에요. 신비이고 눈부심이에요. 저는 궁금해요. 산달은 어느 누군가를 닮고 싶어 어떤 색으로 물들어있는지, 갸우뚱한 표정과 미지근한 미소를 짓고서도 어떻게 사랑에 대해선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지, 자신을 감당하기만도 벅찼던 지난 날들은 어땠는지. 저는 산달에게 꼬치꼬치 캐묻지 못해, 수수께끼 같은 문장들 앞에 주춤거리는 발자국을 남기는 걸로 대신해요. 온통 동글동글한 그 문장들의 잔상을 바라보는 걸로 만족하기로 해요. 산달의 편지가 제게 남긴 것 역시 아름다움이에요. 산달의 전부를 알지 못해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어요. 신비와 눈부심이 있어요. 산달의 사진을 보고 신기했어요. 어디인지 모를 그 숲이 제가 늘 걷는 숲과 꼭 닮았거든요. 저도 모르게 마치 산책하는 것처럼, 그 사진 속 어린 나무의 겨울눈과 낙엽 틈에 있을지 모를 고라니 똥을 찾고 있더라고요. 산달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먼 곳에서도 비슷한 풍경들을 눈에 담고 있잖아요. 산달이 작은 방에서 혼자라고 느낄 때면, 저라면 이 사진을 건네겠어요. 산달이 이 사진을 찍으려 시선을 낮출 때부터, 아마 사진 속의 존재들이 산달을 따라왔을 거예요. 생강나무꽃 색의 햇살자국이 작은 방까지 비춰주지 않나요? 그럼 이만 산달, 입춘대길입니다! 김부각 혼자 다 먹은 덕복희 올림 p.s. 새벽마다 시 한 편 읽으면서 하루를 시작해요. 타로카드를 뽑듯이 설레는 마음으로 시집의 아무 쪽이나 펼치거든요. 오늘은 달복의 예쁜 노랫말이면 충분하겠어요. 다음에 선율을 들을 행운이 오길. <봄을 전해준 복희에게> 어느덧 입춘이군요! 복희의 편지가 제게 봄처럼 도착했어요. 많이 기뻤답니다. 복희가 올해에는 제게 봄의 전령처럼 봄의 소식을 전해주었으니까요. 저뿐 아니라 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봄이 올 때 풍기는 향긋한 내음과 걸음 소리를 놓친 채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봄 속에 들어와 있을테니까요. 아,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요? 저는 얼마나 많은 손짓들을 놓쳐왔던 걸까요? 현대인들이 무릇 그렇듯, 살아가기 위해서 도시 사람들은 너무 많은 정보들을 끌어 안고 살고 있어요. 매일 새로운 이야기들을 접하면서도 어제 들은 이야기들을 내려놓지 않아요. 아니, 그건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환상 덩어리일 뿐이에요. 사람을 마비시키는 환상 덩어리. 그것들 때문에 우리는 만성적인 신경과민에 시달려요. 저만 해도 덜렁거리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는걸요. 매일을 메모장에 기록하고 계획하고 신문을 읽고 새로 나온 책은 뭐가 있는지 살펴보고 저기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내키지 않지만) 지켜봐야 하고,, 놓치지 않는 정보들이 없는지 늘 긴장하게 돼요. 매일을 자극적인 음식들을 먹다보면 혀가 얼얼해지듯, 귀에 전자 음악을 늘 꽂고 살면 점점 귀가 들리지 않듯, 도시는 사람들을 무뎌지게 만들어요. 오직 어떤 의미인지도 모를 숫자들과 시곗바늘들과 정신없는 글자들이 어떤 의미인지 파악할 수 있게끔 훈련되죠. 어떤 감각들을 잃어버렸는지도 알지 못하고 저는 오늘도 버스에 탑니다. 지리산을 넘어가는 동백처럼 붉은 태양이 어떤 시를 만들어낼지 우리는 알 수 없어요. 도시라고 부를 수 없는 곳이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다가 복희의 편지를 받았어요. 창문을 대뜸 넘어와 피아노 위에 자리잡은 생강나무꽃 색의 햇살자국을 전해 준 복희를 읽다 보니 지리산이 제가 더듬어보던 그런 곳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지리산에 사는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니 조심하셔야 해요. 다만 생명이 사는 모든 곳이 그리 아름답고 연약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지리산 숲길의 숨을, 그 생경한 시들을 편지에 한아름 담아줘서 진심으로 고마웠어요. 저는 이번 주 내내 무엇을 담아 보낼지 고민하다가 봄소식을 늦게 전해버리고 말았네요. 미안함을 전합니다. 그런데 복희가 김부각을 혼자 다 먹었으니 조금 덜 미안해하도록 할게요. 저는 명절을 끝내고 다시 본가로 돌아왔어요. 제가 살고 있는 곳, 화순은 참 걷기 좋은 곳이에요. 집을 나서서 천변을 따라 쭈욱 내려가다 보면 마른 갈대가 우거진 습지가 있어요. 그곳에서는 늘 오리들이 떼를 지어 유유히 물장구를 치고 있기도 하고 큰 백로가 기지개를 펴고 날아가는 것을 볼 수도 있어요. 어제는 잿빛 두루미를 만나 얼마나 기뻤는데요. 다시 발걸음을 돌려 집을 지나치면 무등산자락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우리 전라도의 산들은 침엽수와 활엽수가 함께 살고 있어 충청도나 강원도의 외로운 산들보다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대요. 따뜻한 기운과 차가운 기운이 만나는 곳이라고들 하더라구요.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저의 하늘을 따스하게 덮어주던 나무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어요.전에는 함경도에 있는 나무나 제주도에 있는 나무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여러 조건들이 만나 이곳에서만 살 수 있는 나무님들을 내가 보고 있다는 생각에 저는 참 감사했어요. 복희가 만나는 새벽녘의 나무들은 어떤 분들일지 문득 궁금해져요. 지리산에 가게 된다면, 제게도 그 분들을 소개시켜 주세요. 복희에게도 제가 만난 나무님들을 소개시켜 줄게요. 함께 나무 앞에서 환희를 나누는 날을 상상해봐요. 복희, 적당한 익살의 경계를 넘어버리는 것이 하수들의 실수라면서요. 복희가 덥수룩한 수염의 소유자와 함께 절복을 입고 기사 사진을 찍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들다니요. 조금 더 긴장의 끈을 붙들어 매어야 되겠어요 복희. 아니, 근사하지 않다니요! 그만큼 근사한 전투복이 어디있나요? 절복과 터번을 걸치고 환경운동을 하다니. 제게도 남는 절복이 있다면 하나만 나눠 줄 수 있나요? 부탁하고 싶을 정도로 탐이 나요. 휴, 도시에서 기후운동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답니다. 동물들이 저마다의 보호색으로 자신의 몸을 주변 환경에 맞추듯, 도시생활자들 또한 마찬가지거든요. 다만 자신 주변의 색을 닮아 물들어가는 것이 섭리인 두꺼비와 달리 도시에 사는 존재들은 때를 묻히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거리 어딜 가나 서로 나서 자신이 아름답다 우기는 옷들이 돌아다녀요. 가련한 사람들은 그것들을 너도나도 가지지 못해 안달이고요. 아마 복희도 모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스 신화에서는 헤라클레스가 독 묻은 옷을 입고는 고통스러워 불에 뛰어 들죠. 수천 년이 지난 오늘에서는 사람들이 피부가 두꺼워져서 독을 입고서도 끄떡없는 존재가 된 것만 같아요. 아,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독을 흘려보내는 방법을 기어코 터득한 걸까요? 흠흠 샛길로 잠깐 샜던 것 같습니다. 제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궁금하신가요? 그렇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겨울의 저는 늘 무릎부터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코트를 입고 다닙니다. 도시인처럼 보이기 딱 좋은 옷이죠. 하지만 그 속에는 기후운동을 하는 사람다운 옷을 입고 있답니다. 많은 옷을 가지고 있지 않아 갈색 면바지와 청바지를 돌려 입구요. 몸통은 찻빛이나 하늘빛을 담은 니트를 주로 두른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양말이에요. 꽃이 수놓아진 양말을 입고 지하철을 탈 때면, 어느 때보다도 신난 상태로 기후악당들을 무찌르러 출동하는 기후운동가로 변신하곤 합니다. 그게 왜 기후운동을 하는 사람다운 복장인지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답은 간단하답니다. 그런 옷을 입은 제가 기후운동을 하기 때문이에요 히히. 사실 어떤 옷을 입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저마다의 맥락 속에서 자신의 전투복들을 선택하니까요. 옷뿐만일까요? 우리는 각자가 가진 욕망이 허락되는 만큼 자신의 관계 방식을 만들어내요. 맨날 검은색 옷만 입는 사람도, 파란색 옷만 입는 사람도, 말을 하다가 말고 숨어버리는 사람도, 몸짓 발짓 다 해가며 온 맘 가득 표현하는 사람도, 다 저마다의 살아가는 방식이죠. 그건 선택과 의지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주어지거나 휩쓸리기 쉬운 종류의 것인 것 같아요. 사랑조차도요. 운명이란 말의 존재 가치가 분명히 있답니다. 그래서 중요한 건 저 사람이 왜 저런 옷을 입고 다니는지 이해하고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너가 삶을 사랑하는 방식은 이렇고, 내가 사랑하는 방식은 이런데, 우리가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함께 삶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물음 말이에요. 거기서부터 창조적인 것이 시작된다고 믿어요. 저도 궁금해요. 복희는 언제부터 절복을 입게 되었는지, 도시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왜 지리산에서 살기로 결심했는지, 나무 공부는 복희에게 어떤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지. 아침에 지리산 둘레길에 들어서면 어떤 숨들이 복희의 몸을 그렇게 벅차게 만드는지. 복희를 읽어가는 것은 참 편안하고 기분좋은 일이에요. 곧 있을 복희와의 만남을 상상해요. 이럴 것이다 쉽게 그려지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들이 또 오고 갈 지 잘 떠오르지 않기도 해요. 그치만 우리가 이렇게 서로를 향한 질문을 품고 있으니, 턱끝까지 벅차오를 시간이 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아요. 내일 복희가 매일 걷는 숲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영혼은 누구일까요? 새롭게 꺼내 읽을 시는 누구의 말들일까요? 그동안 또 어떤 숨들을 모아 보내올까요? 저는 그 무한한 마음을 새롭게 받아 안으며 기다릴게요. 봄이에요. 함께하는 봄이네요. 안녕. 여전히 궁금함이 많은 산달 올림 p.s. 메리 올리버의 ‘마침 거기 서 있다가’라는 시를 아나요? 내일 아침에는 이 시를 읽으면 어때요? “해바라기는 눈부시게 빛나. 어쩌면 그게 그들의 방식이겠지. 어쩌면 고양이는 곤히 잠드는지도. 아닐 수도 있고.”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3-02-16
  • [입춘 편지 : 참새와 돌] 이 계절이 힘을 실어주길 바라며
    디자인.칩코 <돌에게> 입춘이네요 돌. 추운 대한 무사히 보냈는지 궁금해요. 지난 편지에서도 말했다 시피 저는 산책을 무척 좋아하는데요. 지난 영하 15도까지 떨어졌던 추운날씨에 집에만 있기가 갑갑해서 나갔다가 허벅지가 시뻘개진 것을 보고는 엄청 놀라고, 가벼운 동상인가 싶어 전전긍긍했었어요. 그런데 편지를 쓰는 지금 벌써 봄기운이 살짝 내려온 것 같은 날씨에요. 벌써 몸이 근질거리는 것 같달까요? 매 년 왠지 모르게 설레는 감정이 제게 봄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데 그게 참 신기해요. 겨울동안에는 그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쉬고 있는데도 더욱 열렬히 쉬고 싶은 마음이 들기에 ‘아 내가 번 아웃이 온 건가?’했거든요? 그러면서도 괜히 불안했어요. 이렇게 영영 무언가를 하고 싶은 의욕이 사라져 암울하게만 지낼까봐요. 그치만 계절처럼 제 마음도 매 순간 변하고 있었네요. 돌의 편지를 읽고, 돌에게 궁금한 것들이 더 많아졌어요. 돌이 굴러온 삶 속에서 의식적으로 공동체를 구성하는 행위는 무엇이었을까요? “원래의 방식대로 살면 참 편한데 그렇게 살면 같이 살 수 없을 것 같아”라는 말을 나도 들어보지 않았던가 떠올렸어요. 제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보기도 했고요. 돌이 말한 것과 꼭 같은 의미는 아닐 수 있겠지만요. 우리는 변해야 하고, 그것은 불편한 일이 될 테고, 그걸 감수하면서도 나와 함께 하겠느냐고. 그런 얘기를 들었던 저는 ‘지금의 내 모습으로는 부족하다는 거야?’ 하면서 실망해 떠나는 시늉을 하기도 했던 것 같아요. 시늉이라고 얘기한 이유는 내가 그래서 원래의 방식을 고집하며 살고 있나? 하면 그렇지 않고, 결국 그와 나는 따로가 되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기 때문이에요. 마치 모든 관계가 지구와 인간의 관계 같아요. 우리가 쓴 반려고양이, 반려다육이 얘기만 보아도 질병과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중요하게 담았던 것 같아요. 그만큼 지구의 위기, 아픔, 고통이 머지않아 나의 피부로 와 닿는 것은 우리에겐 너무 당연한데요. ‘불편하게 사느니 같이 살지 않겠어.’하고 지구 밖으로 날아가 버릴 궁리를 하는 사람도 꽤 많아 보여요. 지구도 떠나버릴 생각을 하는데 지구 품에 사는 우리들끼리는 또 얼마나 쉽게 자기를 고집하고, 이별을 고하며 사는가요. 저도 별반 다르지 않아요. 외면하고, 뒤돌아버릴 수 있는 그 순간에 직면하고, 나의 생김새를 돌아보고, 손을 잡고, 변화의 길목에 들어서는 돌이 참 용감해요. 입춘의 주제는 ‘나의 전투복’이에요. 저는 싸우는 걸 싫어해요. 근데 또 목청껏 ‘투쟁!’하고 외칠 때나 텅 빈 넓은 차도를 뛰어다닐 때면 속이 뻥 뚫린 듯 후련해서 집회 나가는 데 거부감이 없었어요. 최근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집회에 도통 가보질 못했는데요.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고, 지리산에 내려오면서 큰 규모의 운동을 할 기회가 많지 않았거든요. 개인적인 일상을 생태적으로 꾸리고, 또 누리는 데 더 많은 관심과 에너지를 쏟았던 것 같아요. 작년 9.24 기후 행진이 참 오랜만인 대규모 환경운동 집회 현장이었죠. 여기저기서 알음알음 사귀었던 친구들이 전부 다 모이는 만남의 장이 되기도 하고, 풍물패, 퍼커션, 댄서들이 흥을 올려놔서 이게 지금 집회에 온 건지 축제에 온 건지 헷갈리기도 했어요. 나도 모르게 두 팔과 엉덩이를 앞뒤좌우로 미친 듯이 흔들고 있더라고요. 홍대 클럽도 이만큼 재밌지는 않았어요. 쓰다 보니 재미보다 ‘즐거움’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 같네요. 집회를 나갈 때 어떻게 하면 만만하게 보이지 않을까 궁리하던 때도 있었어요. 어디선가 공격이 훅 들어와 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항상 긴장되어있었죠. 지금은 운동을 하러 나갔을 때 즐겁고, 행복한 모습이고 싶어요. ‘나는 지더라도 두 번 세 번 이 자리로 나올 거야! 왜냐하면 나는 당당하고, 즐거우니까!’라고 말하고 싶고요. 아무래도 제가 노는 걸 너무 좋아하나 봐요. 때때로 밀려오는 무력감과 절망감에 실컷 우는 만큼 또 실컷 웃을 수 있길 바라요. 락 페스티벌에 가기 전날 밤 무슨 옷을 입어야 화끈하게 놀 수 있을지 고민하며 이 옷 저 옷을 꺼내 입듯이 환경 운동하러 가기 전날 밤에도 잔뜩 설레며 옷을 고를 거예요. 봄을 기다리듯이 돌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럼 이만! 짹짹. <참새에게> 참새, 돌이에요. 많이 늦었어요. 미안하다는 말부터 전해요.. 밤낮이 바뀐 채로 지냈어요. ‘띵동! 돌에게 입춘 편지가 도착했어요:)’라는 메일이 알림창에 열흘을 떠있었는데, 매일 새벽 감기는 눈으로 바라만 봤어요. 어떤 얘기가 있을까, 나는 어떤 얘기를 이번에 담을까.. 생각하다 잠들었어요. 기다리며 지치고 실망할 마음이 걱정되는데, 그동안 제가 지나온 시간을 잘 나누면 괜찮을까 하는 바람을 담아 편지를 열어요. (빨개진 허벅지는 잘 회복되었나요? 참새가 느꼈을 얼얼한 기운이, 아직 남아있는 겨울의 흔적을 따라 느껴져요.) 온도가 영상에 머무는 날들을 지내며 입춘의 시간도 꽤 지나왔음을 느껴요. 저는 아직 봄이라는 계절이 주는 ‘새로움’에 진입하기 전인 것 같아요. 헐레벌떡이 일상이거든요. 활동을 제 일상의 안정보다 우선하고 있어요. 활동이 일이고 일이 곧 저와 제 관계에 구성한다고 생각하며, 지금의 우선 순위를 유지해왔어요.(참새가 물어봐준, 공동체를 의식적으로 구성하는 행위는 이런 마음을 배경해왔을 거예요) 그런데 스스로 선 다음, 서로를 살릴 수 있잖아요. 연말부터 연초까지, 겨울잠처럼 넘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사이 시간’동안, 스스로 서는 법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찾고 싶었어요. 저에겐 나름 큰 깨달음이고 다짐이었답니다ㅎㅎ 그래서 먼저 해오던 것들을 잘 매듭짓고 싶은데. 끝이 따로 없나봐요. 나와 서로를 분리하고 싶지 않은 마음, 두려운 마음이 섞였어요. 그렇게 헐레벌떡이 누적되고, 매듭짓기는 유예시키고 있어요. 약속들이 자꾸 지연되는 와중에 편지도 한참이 지나 열게 되었어요. 아직 새로운 시간에 접어들지는 않았지만, 참새가 말한 설렘의 기운은 느껴요. 계절이 바뀌는 건 제가 지연할 수 있는 약속이 아니니까요. 계절을 따라, ‘아직 덜 된 거 같은데..!’하는 마음을 가져도 넘어가야만 하니까요. 아쉽더라도, 그 덕에 한발짝 내딛어요. 무겁고 미련도 정도 많은 ‘돌’을 굴리는 이 계절을, 참새의 편지 덕분에 감각해요. 그치, 설렘의 계절이지. 산책하기 좋지 하며 봄맞이를 준비하는 2월이 될래요. 전투복이라니! 전투라는 단어랑 친하지 않아서 바로 생각나지는 않아요. 방랑단분들이 주신 이야기를 힌트 삼아 고민해봤어요. ‘쎄보여야 할 때’라.. 저는 각진 옷을 자주 찾아요. 어깨가, 소매 끝이, 깃이 반듯한 옷을 입으면 위풍당당하게 걸을 수 있어요. 서울에 사는, 바삐 활동하는, 개인의 능력을 계속 질문받는다고 느끼는 저는,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그런 마음가짐을 필요로 하더라고요. 나를 지키고 유지하려면 선을 긋고 경계를 만들어야 해요. 저의 방이나 산 그늘, 숲, 농촌 길거리에서는 그런 반듯함이 오히려 어색하고요. 참새가 지리산에서 보낸 시간, 일상을 생태적으로 꾸리고 누리는 일을 할 때는 경계 짓기가 아닌 허물고 스며드는 방법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밭일용 바지의 엉덩이와 무릎에 든 흙빛과 내음은 어떻게 털고 빨아도 잘 안 사라지잖아요.ㅎㅎ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환경운동은 ’인디언들의 마지막 전투‘였군요. 그렇게 생각하면 전투라는 단어가 조금은 이해돼요. 참새는 싸우는 걸 싫어한댔죠. 저도 그래요. 해결하고 대화를 제안하고 중간에 끼는 편이에요. 그렇지만 투쟁이라! 저는 왜 싸울까요. 곁을 관계를 생명을 터전을 잃는 일이 더 두렵고 절박해서 ‘지키는 싸움’을 하는 것 같아요. 924기후행진이 즐거운 축제였다는 것, 어떤 공격을 걱정하며 긴장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정말 반갑고 감사해요. 다행이에요, 924 때 행진을 담당해 준비했거든요! 축제를 바랬어요 정말로. 해방의 순간에 우리는 이런 기분일까 하고 느낄 수 있는 틈새를, 장을 만드는 것이 행진에 담은 여러 마음 중 하나였어요. 투쟁은 뭘까, 어때야 할까 라는 고민에 머리 아팠는데 해방과 축제의 장소를 지키는 것도 투쟁의 중요한 이유라는 걸 참새 덕에 확신해요. 그런 면에서 저에게 또 다른 전투복은 퀴퍼 옷 같기도 해요. 즐거운 긴장을 주는 화끈함과 무지갯빛의 화려함과 편안함을 주는 옷들요. 나의 투쟁과 싸움은 해치고 짓밟는 힘의 논리가 아니라 지키고 나와 너를 연결해 살리는 일이라는 걸 새기고 나니, 전투복도 자랑스러워요! 일상이 투쟁인 서울살이지만 옷장을 열 때, 긴장보다 용기를 얻겠어요. 진짜 봄맞이와 함께 다음 편지를 나누고 싶어요. 나중으로 미뤄둔 일들을, 계절의 힘을 빌려 ‘지금’으로 끌고 올래요. 오래된 우선순위를 바꾸는 일이, 부분적이라도 활동을 떠나는 것 같고 충분한 것 같지 않고 오히려 내 의미를 잃는 것 같아 두려웠는데요. 구르는 돌도 땅과 떨어지진 않으니까요. 더 오래 같이 걸어가기 위함이라는 것을 새기며. 구석에 박힌 돌을 바람이 밀어주길 바라며! 참새의 설레는 산책과 축제같은 투쟁을 만드는 일에도 이 계절이 힘을 실어주길 바라며, 편지를 닫을게요! 데구르르~ 돌이, 2월 13일에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3-02-14
  • [입춘 편지 : 유우야와 갈토] 한 철만 입지 않는 전투복
    디자인.칩코 <갈토에게> 입춘이네요~ 벌써 저희가 편지를 나눈지 세 절기가 지나가요. 저는 그 사이 실내 마스크가 의무로부터 해제되어 너무 반갑고 홀가분한 기분이었답니다. 지리산이었다면 큰 의미 없는 이야기겠지만 수도권에는 사람이 워낙x100 많기도 하고, 늘 마스크를 껴야만 해서 지쳤거든요. 제 마스크는 직접 만든 건데, 매일 손세탁을 하다 보니 바느질이 너덜너덜해져서 별로 정이 안 가기도 했구요... 하핫 갈토의 반려 생물 이야기 잘 들었어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관심과 정성으로, 생기를 되찾는 은행목을 상상하니 덩달아 흡족하고 뭉클했어요. 쉬이 회복할 수 있도록 영양분을 꽂지 않은 것도 인상적이었고요. 저도 편지를 읽은 후 일터의 식물들과, 집에서 키우는 식물들이 어떤 색으로 신호를 보내는지 관찰했어요. 반짝 윤이 나는 초록 잎이나, 노랗게 변해버린 잎을 바라보면서 내가 무엇을 해 주길 바랄까 신호를 읽어보려고도 했고요. 어떤 색이든 그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인 듯한 식물들을 보면서 생각이 깊어지기도 했습니다. 갈토의 말대로 '어떤 상태든 함께 살아가주는 이 존재들이 귀하고 감사하다'는 마음이여요. 갈토가 주제 선정을 맘에 들어 해주어서 기뻤어요. 기획팀이 같이 선정하는데 이번 펜팔 주제는 '나의 전투복'이 되었어요. 나의 전투복... 갈토는 바로 떠오르는 것이 있나요? 저는 시간을 들여 곰곰이 생각하고 솔직한 제 안을 들여다봐야 했어요. 환경 운동을 할 때 제가 늘 장착하는 아이템은 E유형과 상의 멋내기에요. 요즘 mbti유형 많이 찾아보잖아요. E가 밖에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 I가 자신 안에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저는 E와 I가 반반인 사람이에요. 평소엔 I유형으로 살다가 환경 운동할 때 E로 갈아 끼워요. 주변 친구들과 같이 어울리고 싶고, 큰 소리를 내고 싶은 마음이에요. 환경 운동을 하러 가면, 늘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있어서 반갑게 인사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해요. 하지만 정작 큰 소리를 내는 타입은 아니에요. 앞에 나서서 마이크를 쥐는 사람도 아니고, 재밌는 아이디어를 제안할 줄 아는 특기도 딱히 없지요. 그 자리를 채우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나도 당신들처럼 산악열차 반대하는 사람이야!'라고 어필하기 위해 제 상의를 아주 튀는 옷으로 고릅니다. 나름대로 지리산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자연섬유의 알록달록 상의를 걸치고, 말로는 표현을 못하겠으니 겉모습으로 인정 해달라 존재를 내세우는 거지요. 아, 저는 크게 나누면 두 가지 환경 운동을 하고 있어요. 첫째로 일상 생활을 뒤바꿨어요. 샴푸 대신 자투리 비누나 노푸를 해요. 미니멀 라이프로 바꾸면서 대체로 소비는 안 하지만, 옷을 사게 될 경우엔 중고나 공정무역 비건 소재를 고르기로 했어요. 식사도 비건으로 하고 휴지 같은 일회용품은 최소한만 사용하고요. 어려운 듯 보이지만 마음만 조금 바꿨다고 금방 익숙해졌답니다. 둘째로는 지리산에서 개발 사업 반대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방식이에요. 그런 곳을 가면 즐기는 에너지가 좋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고, 저처럼 뒤바뀐 일상을 가진 이들과 공감을 나눌 수 있어서 자꾸 가고 싶어요. 하지만 저는 어릴 적부터 제 주장을 잘 해오지 않아서 그런지 단 몇 명의 앞이어도 매우 신중한 사람인양 아무 말도 안해요. 할 말은 많지만 못하는거지요. 그래서 마이크를 잡고 재밌게 어울리고 싶고, 그걸 해내는 사람이 대단해 보여요. 그들은 입보다 귀를 더 많이 쓴다고 저를 좋게 봐주기도 하지만요:) 갈토는 어느 쪽에 가까운가요? 사실 이런 얘기는 처음 꺼내 봐서 쓸까 말까 고민하다가 제 펜팔 취지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어요. 내가 나를 이해하고, 다른 활동가들에게는 온전히 기대고 싶어요. 활동가들이 환경을 사랑하는 마음은 같지만 각각의 목적과 실천하는 정도가 다르다는 걸 존중하고 싶고, 그럼으로써 서로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도록 말이에요. 솔직한 이야기 들어주는 갈토가 있어서 정말 감사해요. 갈토도 펜팔을 하면서 좋은 치유가 되길 바라봅니다. 설레는 봄이 얼른 왔음 좋겠네요! 그럼 입춘편지 여기서 마칠게요. 다음 편지로 또 만나요! <유우야에게> 평소보다 20분 눈을 일찍 떴어요. 그래서 무엇을 했는지 아세요? 이메일을 체크했어요. ^^ 원래는 이메일 체크 안 하는데, 최근에 생긴 습관 중 하나입니다. 유우야가 이른 아침에 메일을 보내시더라고요. 그래서 아침에 체크를 하게 돼요. 누군가의 편지를 기다리는 설렘이 이 프로젝트가 저에게 주는 큰 기쁨인 것 같아요. 이번 주제는 어렵네요. 전투복이라. 저에게 생소한 단어에요. 평화주의자가 입는 전투복은 어떤 걸까. 평화롭게 싸울 수 있을까. 제가 환경운동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서, 환경운동을 할 때는 초록색 옷을 입으려고 노력하는데, 초록색 옷이 별로 없어서 딱히 전투복이라고 할 만한게 없네요. 다만 다른 집회에 갈 때 입고 가는 옷이 겨울에는 있다는 게 떠올랐습니다. 검정색 후드티인데요 “yes, im the feminist”라고 앞에 쓰여있고 뒤에는 “from the hell”이라고 적혔어요. 안감이 기모라서 따뜻하고 후드라 추울 때 모자를 쓰면 귀까지 따수워서 집회용으로 아주 좋아요. 이 후드티는 2017년 페미캠프때 입었던 옷이에요. 이 옷을 입으면 저에겐 갑옷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나는 실천하는 페미니스트이고, 오늘도 멋지고 즐겁게 다녀오자의 마음 가짐이 생기는 것 같아요. 물론 지하철에서는 페미니스트가 보일랑 말랑하게 가리지만, 집회 현장에서는 친구들을 만나면 당당한 페미니스트가 되려고 해요. 글을 쓰다 보니, 저는 전투복보다는 함께하는 친구가 더 중요한 사람 같아요. 전투복은 갑옷이라 전투에 나가기 전에 필요하지만 막상 전투 현장에서는 저의 전투복은 방한용 외에는 기능이 없어요. 제가 무지 쫄보거든요. 경찰이 불법집회 어쩌고 저쩌고 방송을 하면 바로 보도에 올라가서 구경하는 ‘선량한’ 시민인 척을 합니다. 근데 친구들이 있으면 혼자 살겠다고 보도에 올라갈 수도 없고 더 용감해져요. 그리고 친구들이 다칠까봐 그 자리를 지켜야 되는 의무감이 생기기도 하고. 전투복 이야기가 어느새 동지들,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로 흘렀네요. 유우야의 전투복에 대해 읽으며, 나도 유우야처럼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는 싶은데, 입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부끄러움 많아서 집회에서는 못 입을 것 같아요. 유우야의 전투복이 너무 궁금하네요. 나중에 옷을 한 번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 이번 주제가 전투복이니까, 각자 옷들을 사진으로 모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각자 다 다를 것 같아요. 저는 옷으로 나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패션감각도 좀 없는 편이고, 친구들이 안 입는 옷을 주면 입는 편이다 보니, 딱히 내 스타일이라는 것도 없어요. 제가 최근에 다큐 영화 한 편을 보고, 패스트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정말 지구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더라고요. 한 철만 입고 버리는 저렴한 옷들. 저는 옷을 거의 구입하지 않아서 패션 산업에 관심이 없었는데, 내가 안 사 입으면 뭐하나, 다른 사람들이 10벌씩 사고 버리면 지구는 의류 쓰레기장이 되는데 싶더라고요. 패스트 패션이 단지 쓰레기문제가 아닌 것도 저에게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개발도상국의 여성노동자들이 착취당하고, 독성화학물질로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불평등의 문제까지 보고 나니 이 문제를 좀 해결하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친구들과 사부작 뭐좀 해볼까 싶긴 한데, 아직은 시동만 걸고 있답니다. 저는 혼자는 못해요. 가끔 외향적인 리더가 되보고 싶기도 하네요. 그거 어떻게 하는 건가요? ㅋㅋ 나는 왜이리 혼자일 때 작아지는가. 근데 혼자 이렇게 잘사는게 참 다행입니다. 저는 이번 주에 일이 좀 많아서 바짝 긴장해야 하는 한 주가 될 것 같아요. 무사하게 한 주를 잘 보내고 다음 편지를 기다릴게요~ 봄이 슬슬 다가오는게 느껴지는 것 같지 않아요? 지난주보다 포근해졌어요. 그럼 잘지내세요. 갈토 드림.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3-02-10
  • [대한 편지 : 토토와 가로] 뭐가 그렇게도 불편하고 불안했을까요?
    디자인.칩코 <가로에게> 안녕하세요.다가오는 대한을 맞이하며 가로에게 편지를 띄워요.잘 지내고 있나요? 지난 소한에는 봄이 왔나 싶을정도로 이상하리 따뜻했던 날이 계속됐는데 다행히도 다시 추운 겨울바람이 불어오네요. 가로 덕분에 마늘들도 귀를 쫑긋 세운 초록 토끼들처럼 잘 자라고 있어요. 답장을 늦게 보낸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해주어 고마워요. 편지를 쓰는 일은 저에게도 여전히 낯설은 감각이라 부담이 되었을 가로의 마음이 꼭 내 마음같기도 했어요. 오늘도 타자를 치는 손가락이 쭈뼛쭈뼛 망설임이 가득해요. 부디 생각했던 이야기들을 잘 써내려갈 수 있기를 바라며 적어볼게요. 편지를 받고서 가로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던 것들이 참 반가웠어요. 무 씨앗을 심으며 흙을 만지는 가로, 나물비빔밥을 입안 가득 맛있게 먹는 가로, 새하얀 겨울산을 신나게 달리는 가로, 추위를 견디며 침낭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가로의 표정들을 상상하게 되어요. 보드랍고 사랑스러운 그렇지만 생명력을 응축한 단단한 씨앗의 느낌이에요. 꽁꽁 숨어있는 나를 기다려주고 아껴준다는 표현이 참 좋아요. 차가운 바람이 가로에게 묻고 있는 이야기들이 무엇인지 잘 들어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언젠가 자연스레 그 이야기들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 저는 지리산 자락 중에서도 섬진강 가까이에 살고 있어요. 매일 강을 따라 걷는 일과로 하루를 시작해요. 제가 살고 있는 이 마을은 강과 가깝게 위치해있어 몇년 전에는 수해로 큰 피해를 입기도 했대요. 강은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고요한 모습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흔적들을 종종 만나기도 해요. 강변에 떠내려온 커다란 쓰레기라던가, 수해로 인해 생을 마감한 오래된 나무도 있고요. 많은 이들의 추억과 이야기가 담긴 강이에요. 강은 지리학적으로 어떤 차원에서는 단절을 만들기도 하지만 또 많은 존재들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신기하게도 지난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같이 사는 친구와 고마운 것들을 적어보았을때, 우리는 공통적으로 섬진강을 적었어요. 신기하게도 강을 따라 걷는 산책길에서 힘들때마다 위로를 참 많이 받았더라구요. 마음이 시끄러운 날엔 산책을 나갔다가 하룻밤 사이에 하얗게 만개한 벚나무 꽃들을 보면 마치 깜짝 선물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어요. 반려생물을 떠올리다보니, 섬진강 산책길에서 만나는 존재들이 떠올라 적어봐요. 어느 날엔 못보던 새가 찾아와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길래 찾아보니 말똥가리가 겨울을 보내러 남쪽으로 찾아왔더라구요. 화려한 날개를 활짝 펼치며 높이 비행하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한참 그곳에 서있었던 적도 있어요. 황금빛 햇살이 강물에 부서지는 따뜻한 날엔 우연히 수달 두 마리도 기분이 좋았는지 배를 내밀며 사이좋게 수영하는 모습도 보았어요! 설레는 마음으로 눈으로 열심히 수달들을 쫓으며 강을 따라 걸었던 기억도 있어요. 귀촌해서 살면서 때로는 내가 살아왔던 도시, 친구들, 가족들, 편리한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어요. 가끔 친구들이 저를 자연인(?)이라는 단어로 표현할때 이런 느낌이 드는데요.. 이렇게 시골에서 계속 살아도 괜찮은걸까? 하고 불안감이 올라온 적도 있었구요. 아름다운 섬진강과 경이로운 존재들을 매일 만나는 호사를 누리면서도 말이에요. 그래서 섬진강을 바라보는 시간이 저에겐 참 소중한 것 같아요. 고맙기도 하고요. 자연의 생명들은 하나같이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잖아요. 말똥가리는 하늘을 비행하는 삶에서 행복해보여요. 물장구 치는 수달을 부러워하거나 비교하는 마음없이 다르게 사는 다른 생명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각자 자기답게 살아가는 것 같아요. 나다운게 무엇인지, 나답게 사는 것은 어떤 모습인지.. 가로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까요? 대한이 지나면 꽁꽁추위가 지나고 포근한 겨울이 온대요. 가로와 함께 마음을 나누며 추위와 겨울을 잘 지나보내고 새싹이 돋아나는 봄을 맞이하고 싶네요. 그럼 다음 편지에서 또 만나요! 건강하게 잘 지내요. 끝추위 대한을 맞이하며 -토토 <토토에게> 안녕하세요 토토! 가로예요. 인사가 조금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사실 저는 연휴동안 이사를 했어요. 이제야 진정한 홀로서기를 시작하려나봐요. 뭐랄까 기분은 굉장히 덤덤하고, 마음이 무척 편안하네요. 자유다! 하며 소리를 지르거나 신이나 춤바람을 부리지는 않았어요 :) 사실 저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홀로서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혼자가 되었다는 것이 저에게는 전혀 낯설지가 않네요. 어쩌면 그동안은 내 자신이 반려 생물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보살펴야 했던 유일한 것이었고, 참 많이 의지하고 제일 가까운 친구였어요. 반려생물하니까 생각 나는게 예전의 저는 자연의 주어진 모든 것들이 저의 반려 생물이었던 것 같아요.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궤적과 흔적들을 보면서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마치 뭐랄까, 땅 위에 무작위로 흩어져 있는 나뭇잎들도, 나무의 거친 껍데기도, 바람에 흔들리는 자연의 그림자들도, 도시의 길고양이들과 자연의 야생동물들, 심지어 어느 날은 쓰레기 더미마저 작품으로 보일 때 가 있어요. 저한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아요. 하하. 그냥 저는 거짓되지도 않은, 과장되지도 않은 존재 그대로의 삶의 흔적이 참 아름다워보였나봐요. 지금도 그래요. 나한테 반려생물은 나 자신, 그리고 주변의 자연 그대로의 모든 것들이에요. 아직 방에는 가구가 없어서 제 방은 옷과 책으로 정신이 없어요. 하지만 머릿속으로 다 정리된 저만의 방을 상상하면 저만의 공간이 완전 해져요. 그 아늑하고 완전한 작은 공간에서 조용히 쉬고 있었어요.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온함과 따듯함이에요. 저는 늘 집이라는 공간이 불편하고 불안하고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거든요. 이상하죠? 나는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편리한 집도 있고, 모든 게 다 있는 것 같은데도 이런 투정을 부리고 있잖아요. 나는 뭐가 그렇게도 불편하고 불안하고 무서웠을까요. 그런데 그거 알아요? 불편하고 불안한 것도 적응이 된다는 것, 끔찍하게 벗어나고 싶어도 방법을 찾지 못하면 마침내 적응한다는 것. 문득 토토가 처음 지리산으로 떠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편지에 토토를 자연이라고 부르는 친구들이 있는 걸 보면 도시생활을 했던게 맞죠? :) 집을 떠나는 참 수많은 이유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저와 토토가 집을 떠나온 이유는 같지 않겠지만, 거기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거에요. 그 이유만큼은 아무도 몰라줘도 내가 알고 있잖아요. 저처럼 꾸역꾸역 버티고 버티다 드디어 마음의 준비가 다 되어서 떠나는 사람도 있지만, 마음을 빨리 알아차려서 떠날 수 있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요. 토토처럼. 감히,,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토토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토토! 우리 자신의 행복을 의심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남의 행복이 부러워 보여서 내 행복을 저버려봤는데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행복도 참 다른 것 같아요. 나는 그랬어요. 그래서 누구보다도 자신을 잘 알고, 자신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안다면, 그대로 믿어줬으면 좋겠어서요. 만약 아무것도 잘 모르겠다면.. 그땐 잠깐 쉬어가요. 항상 마음이 제일 바빴잖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흠, 저는 비록 지금의 집 근처에 숲과 산과 강은 보이지 않지만, 다시 한 번 상상을 해봐요. 언젠가 눈을 뜨면 바로 아름다운 자연의 경이로운 생명들을 매일 만나며 행복해하는 나를요. 겨울이 겨울 다워야 안심이 되는 하루를 우리는 보내고 있는 것 같아요. 오늘 서울은 겨울이 겨울 다워서 기뻐요. 얼어붙은 겨울에게 감사하며 그리운 봄을 기다려봐요 우리. 안녕 토토, 가로가.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3-02-06
  • [대한 편지 : 덕복희와 산달] 혹시 이게 사랑일까요?
    디자인.칩코 <사랑을 탐구하는 산달에게> 산달! 답신을 고대했노라고 점잖게 전할 작정이었어요. 편지를 보자마자 홀라당 읽어내려갔다가, 눈을 감아도 문장이 아나운서의 프롬프터처럼 동동 떠다니도록 수차례 다시 보았답니다. 어찌나 기뻤는지 앞니가 다 건조해졌느니, 꼭지점댄스를 출 뻔했느니 덧붙이다가, 적다보니 글이 주접스러워 그만 체통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제 예상과는 달리 썩 고상하게 답신을 읽은 모양새는 아니었으나 무척 기뻤다는 말이어요. 산달이 ‘Sandal wood’였다니! 신년에 친구에게 인센스를 선물 받았어요. ‘포트메리온’ 접시를 ‘포토샵’이라고 부르는 엄마와 닮은 저라면, 한번 듣고 곧장 잊어버릴 어려운 이름의 향들이었답니다. 그중 제가 딱 기억하는 것이 바로 산달우드였어요. 향을 잘 아는 친구에게 이건 어떤 향인지 설명을 구할 정도로 기억에 남았지요. 그때 왜 산달을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산달의 편지를 받고 얼마나 신기했는지 몰라요. 향 이름만큼이나 향 냄새도 좀체 구분하지 못하는 제가 산달우드만은 꼭 기억하게 되길 바라요. 산달의 편지는 꼭 어린시절 읽던 잡지 귀퉁이에 적힌 낱말 퀴즈 해답지 같았어요. 특히 ‘기후운동은 어쩌면 기다리는 일인지도 모르겠어요’라는 문장에서는 엉덩이를 걷어차인 것처럼 눈이 번쩍 뜨였어요. 마치 “인생은 왜 이리 고통스럽습니까!”하는 제자들에게 “인생은 원래 고해다!”라고 설파하는 싯다르타의 법문처럼 들렸답니다. “환경운동은 왜 이리 수신자가 없이 고독합니까!”하는 저에게 “기후운동은 원래 기다림이다!”라는 말이었으니까요. 지구가 저를 기다려준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지금은 부족하지만 더 지구답게 살아가도록 인내해주신다고요. 자식을 천 번 만 번 가르치는 어머니처럼요. 어미늑대는 어린 자식에게 처음엔 음식을 토해서 준다고 해요. 당신이 반쯤은 소화시켜서 주는 거죠. 식사를 물어다주는 일이 천 번 반복되고 나면 이젠 사냥법을 천 번... 이토록 친절한 커리큘럼이 있을까요? 지구가 제게도 똑같이 그러고 계시겠죠? 산달의 말마따나, 제가 그 특훈을 경청하고, 수집하고, 마침내 번역할 수 있도록요. 지난 편지에서 ‘못말리는 돈벌레’를 이야기했었죠. 전 어릴 적부터 늘 벌레를 혐오했어요. 이사를 해마다 다녀서 거친 집이 많거든요. 어찌나 싫은 기억이 강렬했는지 저는 ‘불개미가 모퉁이마다 있던 집’, ‘주먹만한 바퀴벌레가 날아다니던 집’ 등으로 집의 역사를 기억해요. 돌이켜보면 벌레는 언제나 반려자였으면서도 언제나 박멸의 대상이었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요? 길가의 비둘기에게 더는 욕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어깨에 올라온 거미를 세게 밀쳐내지 못하게 되었을 때?언제부턴가 지구가 상냥함을 제게 가르쳐준 거예요. 벌레는 반려고양이랑 다를 게 없다고요. 벌레를 죽이지 말고, 지긋이 관찰해보라고요. 그들은 한밤중 별안간 불빛에 침범 당했을 때조차 고요함을 지킬 줄 알아요. 제 발걸음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숨죽이는 솜씨 좋은 은닉자에요. 살충제 따위로 누를 수 없는 한겨울 배추같은 생명력도 있고요. 지리산에 오니 반려벌레가 다양해졌어요. 지네, 곱등이, 콩벌레, 노래기 등등… 지은 업이 많아서인지, 지금의 제게 벌레라는 종족은 유난히 애틋해요. 물론 아직 벌레와 악수할 만큼 친하지는 않지만, 제법 그들이 귀엽게 보여요. 단 지네만큼은 아직 매력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발바닥만한 지네가 성큼 집에 들어왔을 때 꼭 지네가 제게 장풍이라도 쏜 것처럼 놀라 나자빠졌답니다. 시골에 오래 산 사람치고 지네에 안물려봤다는 사람을 못만났어요. 너무 공포스럽죠? 다행히 전 아직 지네에 안물려봤는데, 지네에 물린다면 아마 ‘성인식’처럼 ‘촌인식’을 무사히 마쳤다고도 볼 수 있겠어요. 그땐 꼭 축하해주세요(?). 저는 지네의 깜찍함마저 발견하는 법을 연습하고 있을게요. 아아, 산달! 혹시 이게 사랑일까요? 저는 ‘사랑은 어떤 걸까요?’하는 산달의 물음에 한동안 어름거렸어요. 매일 아침 고구마를 우물거리면서, 창밖의 쌓인 눈을 구경하면서, 고양이와 난로 앞을 지키면서, 재차 떠올렸지만 뾰족한 답을 몰랐거든요. 지금 편지를 쓰자, 목욕탕에서 벌떡 일어나는 아르키메데스처럼 돌연 답이 튀어나온 것 같아요. 천 번의 기다림 속에는, 다정함과 희망과 강인함과 상상력이 있잖아요! 저를 향한 지구의 기다림이 느껴질 적마다 명치에 성냥불 하나만한 따뜻함이 생기거든요. 제가 벌레에게 굴어온 무례를 꾹 참고 끈질기게 천 번 만 번 알려주었잖아요. 지구가 그토록 아끼시는 벌레를 우리집에 또 다시 보내주었잖아요. 그걸 사랑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지구처럼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겠어요. 다음 편지가 올 쯤이면 열흘은 흐른 후일 거예요. 그때의 산달은 “사랑의 새로운 길을 찾았어요!”하고 말을 걸까요? 아니면 새로운 화두에 몰두하고 있으려나요? 산달의 반려생물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다음 편지까지 꼼짝없이 저는 소한의 편지에 머물러요. ‘음…’, ‘뭔가…’라며 말을 고르는 습관을 가진 사람을,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입을 꾹 붙이고 선 사람을, 그런 사람이 거듭 다듬어낸 문장의 무게를 돌아봐요. 오래 손 안에 쥐어 미지근해진 조약돌 같은 온도를 떠올려요. 대한의 편지를 보채고 싶지만, 저도 산달처럼 차분하게 바로보면서 산달의 세계를 만나볼게요. 가을에 담근 밤조림을 세 달 꾹 참고 겨울에 맛보는 마음으로, 기다림 속에서 비로소 숙성되는 산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게요. 자신의 편지를 기다리느냐고 물었죠? 몹시 기다려요. 그러니 다음 편지까지 명랑한 나날들 보내세요! 목욕탕에서 벌떡 일어난 덕복희 올림 p.s. 새파란 잠자리는 벼가 호박빛으로 물드는 초가을 논둑길에 마지막 남는 푸른빛이에요. 여름색 옷으로 경의를 표하며, 여름이 무사히 떠나도록 마차를 준비하는 기사랍니다. 지리산에선 참새만큼 흔한데, 서울에선 ‘밀잠자리’를 만나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어요. 올 여름 산달이 지리산에 온다면 만날 수 있을까요? <지구처럼 기다려주는 덕복희에게> 왜 이렇게 웃기죠. 나 참, 웃기다는 말로 편지를 시작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복희의 말들은 마치 단내를 잔뜩 머금은 한라봉의 알갱이처럼 톡톡 튀어요! 향긋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복희의 말들을 잔뜩 따버릴 뻔 했어요. 우리는 좋아하는 대상을 한 번 닮아보고자 서로의 색을 문지르려는 존재들이잖아요. 저만 그런 걸까요? 복희가 아직 세상에 내보이지 않은 문장들을 조르고 싶은 마음이 새록새록 올라와요. 그러나 매 겨울이 제각기 다르게 매섭고 매 봄이 저마다 유달리 포근하듯이, 복희가 찬찬히 재잘거릴 수 있도록 기다려야겠어요. 아, 연필이나 펜으로 편지를 쓴다면, 산달우드 향을 종이에 발라서 보낼텐데요. 그럴 수 있다면 제 서성거리는 말 대신 산달우드 향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발랄하게 인사를 할 거에요. 답답할 수도 있는 제 말들의 빈틈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복희가 혹여나 지루해하지 않게요. 엇, 혹시 제가 지금 걱정하고 있나요? 염려라는 것을 하고 있나 봐요. 제 말이 복희에게 어떻게 들릴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해 말이에요. 복희는 분명 제 이야기를 목욕탕에서 벌떡 일어나면서까지 기쁘게 읽어주었는데 저는 왜 복희의 마음을 앞서서 걱정할까요? 이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인걸까요? 복희, 복희가 먼저 제게 말을 걸어 주었잖아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하루를 살아가고 있을지 알 겨를이 없는 낯선 사람에게 첫 편지를 적는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상상해봤어요. 저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산달씨와 산달님과 산달쌤 사이를 널뛰며 어색해하던 그 마음을요. 늘 수신자가 없이 독백을 일삼던 제게도 침묵은 아직 낯설고 무섭더라고요. 활동가는 늘 낯선 만남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텐데 말이에요. 매번 하는 회의에서도,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은 늘 갸우뚱한 표정과 미지근한 미소를 견딜 용기를 마련해야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복희가 제게 뻗어준 말들은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어요.’ 라고 온몸으로 반기는 윙크같았어요. 복희의 격한 손짓을 따라 글씨를 적어내리다 보니 저의 단어들도 생생하게 빛나는게 느껴지는 거 있죠. 춤을 추는 복희의 모습이 어떨지 그려보기라도 했는지 제 문장들도 못 참고 리듬을 타더라고요. 그때 저는 조금이나마 알아차렸어요. 지루함이나 따분함이나 시시콜콜하거나 그런 마음들은 모두 제가 그이들의 말들을 받아들이고 제 삶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요. 저는 어쩌면 그렇게 늘 누군가의 입을 막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벌레들도 늘 그들만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겠죠? 복희는 이미 그들의 조잘거림을 귀엽게 주워담고 있나 봐요! 나중에는 제게도 그 방법을 가르쳐주세요. 아마 시간이 걸리는 일일거에요. 곧 지네와도 반갑게 악수할 수 있길 바래요. 복희가 그랬잖아요. ‘천 번의 기다림 속에는, 다정함과 희망과 강인함과 상상력이 있다’고요. 복희가 지네를 기다려준다면 (지네가 복희를 기다려준다면) 지네의 오밀조밀한 다리 사이사이에서도 그 모든 새싹들이 자라날 거에요. 그리고 제게도 그 마음은 전염될거에요. 꼭 촌인식 때 불러주세요. 함께 자라나는 그 마음들을 환영하고 축하하기로 해요. 슬금슬금 다가오는 존재들과 눈을 맞대고 호흡을 맞추고 함께 천 번 만 번 춤을 춰요. 그리고 우리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도록 해요. 복희, 저는 안타깝게도 벌레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에 살고 있지 않아요. 벌레도 새들도, 나무들도 온종일 옴싹달싹 못하고 끙끙 앓는 것처럼 느껴져요. 늘 내가 사는 곳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기도해요. 그렇다보니 우리 종족조차도 만나는 일이 쉽지 않답니다. ‘그럴리가요!’라고 되묻는 복희의 얼굴을 상상하며 대답을 하자면 삶을 함께 꾸려갈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렵달까요. 작은 방에서 혼자 일어나 사람들을 만나고 다시 혼자 지하철을 타고 침대로 돌아올 때면, 어떤 사람에게든 늘 기다려주고 사랑해주는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돼요. 우리는 그렇게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요. 그러다가 겨울이 되어 집에 돌아왔어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엄마와 아빠, 동생,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만났어요. 그렇게 감격스러운 일은 아니에요. 저는 집이 마냥 편하지는 못하거든요. 늘 저 자신을 감당해내기에만도 벅찼던 날들을 보냈으니까요. 어떻게 함께 사는 서로를 이해할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겠어요? 엄마와 아빠는 이제 눈을 마주치지 않고 동생도 많이 차가워졌어요. 하지만 꿋꿋이 기다리려구요. 왜냐하면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그들은 저를 기다려주었거든요. 제가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제 이야기들을 쌓아가는 동안 그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무심했거든요. 얼마 전에는 설 명절이였죠!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세배를 드리고 세뱃돈을 받았는데, 세뱃돈 봉투에 ‘할아버지는 너를 믿는다.’라고 적혀있는 거에요. 그 사랑 가득한 말을 보자마자 저는 눈물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답니다. 그들이 기꺼이 견뎌온 기다림의 무게를 모를 수가 없으니까요. 멀리 떨어져 있던 서울에서 가족과의 전화가 가끔 귀찮다고 느껴질 때에도 그들은 제게 전화를 걸어 저를 사랑한다고 늘 고백해주었으니까요. 제게는 이들이 어떤 다른 존재 이전부터 저와 함께해온 반려생물들이에요. 이제는 많이 늙었고, 아프고, 상처받은 사람들이지만, 이젠 제가 그들을 기다려보려고요. 전에 사랑에 대해 질문했잖아요. 누구에게나 이런 사랑과 기다림이 허락되었으면 좋겠어요. 내쳐지기를 염려하지 않고, 서로의 입을 막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돌아보면 토닥토닥 꼭 안아줄 수 있는 존재들이 모두의 곁을 이루었으면 좋겠어요. 복희의 곁에도요. 복희, 지구처럼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했죠. 꼭 배워서 제게도 알려줘야해요. 서로에게 그 사랑을 탐구하는 존재가 되어주기로 해요. 아, 어쩌면 우리가 지금 그 공부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더 들여다보고 내보이고 싶어요. 복희의 안에서 자라나는 온갖 무화과와 석류와 한라봉들이 궁금하지만, 저도 차분히, 제 마음들을 모아가며 기다릴게요. 복희의 세계가 그럼에도 평온하길 바래요. 새파란 잠자리를 만나게 해달라고 지구에게 기도하며, 복희의 열매들을 상상할게요. 과일을 좋아하는 산달 올림 P.S. 달복이라는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가 만든 그 노래 중 일부를 나누어요. 그리고 제가 찍은 사진도 한 장 나누어요. “시작과 끝에서 나는 기도했지 저들의 시간을 붙잡아 달라고 흐르지 못하게 끝이 오지 않게 저들의 마음을 붙들어 매라고 뿌리를 내려주고 숨을 내뱉어주는 것을 잊지 말라고 가지를 뻗어주고 열매를 내어주는 것을 잊지 말라고 흙으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잊지 말라고 베푸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절대 놓지 말라고
    • 지리산 오늘
    2023-02-02
  • [대한 편지 : 참새와 돌] 신세지며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수밖에 없겠어요
    디자인.칩코 <돌에게> 돌, 추운 겨울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지난 주만해도 벌써 봄같은 날씨에 소한이 이렇게 따뜻해도 되나 걱정했는데 이번주는 이불밖으로 나오기가 무서울정도로 춥네요. 돌의 편지를 받고 몇번이고 읽어보았어요. 가만히 멈춰있는 돌이 아니라 데구르르 구르는 돌을 상상하니 묵직한 에너지가 느껴져요. 돌의 습관은 일기군요. 저도 제 이야기에 귀기울여줄 누군가가 너무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부터 그림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누군가의 필요와 요청에 ‘반응’하며 살아온, 별명마저 누구나 부르기 쉽게 정했다는 돌의 존재가 참 귀하게 느껴집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나타났다면 너무 큰 행운이었겠죠. 홀로있는 외로움을 자신과의 대화로 채워온 시간만큼 다른 이에게 기대거나, 신세지는 일이 어색하고, 부담스러웠어요. 지금은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일기쓰는 시간보다 수신자가 있는 편지를 쓸 때 더 설레고 기뻐하는 저를 보니, 혼자 견고히 살아가는 법보다 더불어 신세지며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수밖에 없겠어요. 그래서 나의 펜팔 짝꿍인 돌이 “더 적극적으로 서로 기대는 삶의 방식을 바래요.”라고 말해주어서 참 반가웠어요. 제가 돌의 이야기에 응답할 수 있는 수신인이 되어서 정말 기뻐요. 마침 이번 펜팔 주제가 나의 반려생물이네요. ‘반려’라는 단어를 사전에 찾아보니 ‘짝이 되는 동무’라고 합니다. 짝이 된다는 건 평생 서로에게 신세를 지고, 기댈 곳이 되는 걸까요? 반려자, 반려동물을 넘어 반려식물, 반려돌멩이까지도 들어봤어요. 반려돌멩이.. 무척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반려머시기들 중에 저는 저의 6년차 반려고양이를 소개해주고 싶어요. 처음 고양이를 데려왔을 때 저는 주중에 서빙알바를 하고, 주말에는 집회나 세미나 등을 쏘다니며 서울의 원룸에 살고 있었어요. 덜컥 고양이를 데려오기엔 너무 불안정한 삶이었는데요. 같이 서빙알바를 하던 언니가 매일같이 안타까운 유기묘 사연과 그보다 더 안타까운 고양이 학대사건을 말해줬어요. 그러면서 너는 비건이니까 고양이를 입양하면 그 누구보다 잘 키울거라며.. 지금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논리입니다. 어찌되었든 저는 제대로 바람이 들어서 이 친구를 데려와버렸어요. 한 달 벌어서 겨우 다음 한 달을 버티며 살던 때였는데 각종 고양이 용품에 사료에 병원비 등등 감당하기가 벅찼던 것 같아요. 근데 또 내 새끼 좋은 거 해주고 싶다고 나도 안 쓰는 원목 용품과 유기농사료로 싹 구비했었죠. 언젠가 나갔다 들어오니 애가 뭘 잘못 주워먹었는지 눈이 띵띵 부은채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거에요. 심장이 덜컹해서 바로 케이지에 넣어 병원까지 울면서 뛰어갔어요. 동물병원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흥분한 목소리로 “선생님! 애기 눈이 왜 이러죠! 어떡하죠?”하고, 케이지를 번쩍 들어 선생님 코 끝에 닿을 정도로 들이밀었어요. 그런데 “음..알레르기 같네요? 잠시 앉아계세요.”하는 차분한 목소리가 돌아왔고, “아..네.”하고 머쓱해진 기억도 있습니다. 잠든 고양이의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보다 돌연 ‘돈 많이 벌어서 아주 호화로운 고양이로 만들어줄게.’하는 이상하리만치 낯선 열의가 타오른 적도 있습니다. 오래 집을 비워야해서 부모님께 잠시 맡기거나, 어디가 아프거나, 어쩐지 무료해 보일 때면 ‘내가 부족해서 미안해.’라는 생각에 괴로웠어요. 속이 타는 것 같은 고통이 진짜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철이 들었다며 좋아했어요. 쉽지 않았어요 고양이의 반려인이 되는 거요. 지금도 여전히 도전중인 것 같아요. 저는 여전히 가진 게 없는데 한 생명을 책임져야 하니까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죠.알바를 하면서 살 때 노동자에게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달라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돈을 달라고,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외치며 살았어요. 현실에 맞설 힘은 점점 줄어드는데 세상의 반응은 잘 돌아오지 않고, 돈은 점점 더 커보이고, ‘가난한 삶은 참 불행구나’하고 단정지을 참이었어요. 나 하나 먹고 살기도 바쁘고 힘든 재정 상태를 이제 반려고양이에게도 나눠야 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이상하게 일상은 더 좋아지더라고요. 제 반려고양이가 돈 버는 것보다 중요한 게 뭔지 잃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준 것 같아요. 내가 누군가를 돌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고양이를 사랑하는 또 다른 반려인들과 그 시간을 함께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고, 고양이를 가만히 바라볼 때, 같이 놀 때는 금세 초집중 상태가 되어서 어떤 걱정과 불안도 끼어들 틈이 없어요. 작은 몸짓만으로도, 제가 사랑스러움을 느끼고 웃음짓게 만들어요. 돈을 줄지만 일상은 즐거워지는 무언가 자본주의의 논리에 맞지 않는 이상한 인과성을 발견하게 해준 게 제 반려고양이입니다. 어쩌면 그게 반려의 힘인지도 모르겠어요. 역시 내 새끼 자랑은 시간이 모자라요. 너무 편지가 길어진 것 같아 걱정입니다. 돌의 반려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럼 이만 짹짹! <참새에게> 참새, 돌이에요. 두 번째 인사네요! 겨울의 큰 추위 ‘대한’다운 날씨예요. 사실 참새의 편지가 도착하기 직전 즈음부터 말도 안되게 춥다며 호들갑 떨었는데, ‘대한’이라고 말하고 나니 그럴만 하달까, 괜찮은 것도 같아요. 별명을 지을 때의 태도랑 닮았는데요. 저는 나를 믿기보다는, ‘나를 믿는 너’를 믿어요. 그래서 ‘돌’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을 때보다, “데구르르 구르는 돌을 상상하니 묵직한 에너지가 느껴져요”라고 답해주는 참새의 말을 들으며, 정말 제가 돌이 되었다고 느껴요. 고마워요. 별명을 지을 때도 나를 정의할 때도, 누군가 저에게 기대어주기를, 그것으로 저의 가치와 의미를 인정해준 시간이었어요. 혼자 있는 게 익숙한 참새가 다른 이에게 기대고 신세지는 게 어색하고 부담스러웠다는 것처럼 저도 그랬어요. ‘기대는 나’는 민폐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지? 몰랐거든요. 살면서 좋은 관계 속에서 주로 지내왔다고 생각해요. 공동체를 의식적으로 구성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익숙하고요.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삶과 그 의미에 대해 자주 말해왔어요. 우리의 관계로서 나라는 존재가 가능하다고요. 그런데 사실 아주 최근에서야 저는 이 말의 무게를 실감하는 것 같아요. 희망차고 이상적이고 뿜어나는 기운을 만드는 순간도 ‘관계로서 함께 하는 삶’이지만, 내가 무너지고 다시 태어나도록 요청하는 그런 ‘관계로서 함께 하는 삶’도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거든요. 근래 저는 제가 속한 어떤 관계가, “원래의 방식대로 살면 참 편한데 그렇게 살면 같이 살 수 없을 것 같아”라고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누군가의 용기로 또는 예민하게 받아낸 다른 친구의 감수성으로 감각되었죠. 이전의 관계들이 이상하다는 걸 알았고 이 불편함을 가지고 잘 살 수 있으려면 바뀌어야만 하는 거예요. 저한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저에게, 지난 모든 관계와 기대온 방식과 익숙해지고 무감해지던 불평등-폭력의 모습들을 직면하기를 요청하고 있어요. 기후운동도 그런 모습인 것 같아요. 아픈 만큼 바뀔 수 있는 것 같아요. 아프지 않고 살아왔다면 아픈 이의 옆에 함께 서봐야겠죠. 아픔의 모습을 조금 보고나면, 아픈 건줄 몰랐던 나와 우리의 어떤 생김새가 또 보일 거예요. 그런 용기는 손잡고 있는 이가 있을 때나 가능한 것 같아요. 손을 잡고 있으면, 무서워서 내빼고 싶을 때 잡아주고, 앞으로 달려나가고 싶을 때 속도를 낮추며 따라갈 수 있게 되니까요. 저는 요즘 그런 용기를 내보며, 비로소 ‘기대어 있는 나’를 상상하고 그 의미를 감각해요. 이런 시기에 ‘반려생물’이라는 주제는 또 한 번 질문하게 해요. 제가 반려식물이라 불렀던 이는 있는데요, 이런 무게와 책임을 나누며 ‘반려(짝이 되는 동무)’가 되었나? 생각해보면 자신이 없어서요. 식목일 행사에서 나눔 받은 것이 첫 만남이었어요. 다육식물이고요, 작은 화분이에요. 농사는 지어봤는데, 작물이 아닌 화분은 처음이었어요. 물을 많이 주어 뿌리가 썩는 바람에 죽는 경우가 많다는 말에, 잎이 바짝 마를 때까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기다리며 챙겼어요. 쪼글쪼글 얇게 줄어든 잎이, 물을 준 다음 날이면 아주 팽팽하게 단단하게 커져 기세를 보이는 게 신기했어요. 줄기의 힘보다, 늘어난 잎의 무게가 커지면서 끈으로 묶어도 줬고요. 그렇게 늦봄부터 여름, 가을을 잘 지나 이번 겨울이 왔어요. 날이 건조한데도 물을 자주 필요로 하지 않길래 또 쪼글쪼글해지는 날을 기다렸죠. 그러다 때가 되어 물을 듬뿍 줬고, 물이 잘 빠지도록 바깥에 내놨어요. 그런데 생각이 짧았어요. 저는 외투도 입고 난방되는 실내에서 지내니 기온이 5도인지 0도인지 크게 상관 없는 사람이지만, 물을 잔뜩 먹은 식물 입장에서 0도는 어는 점이었던 거예요. 얼어서 까맣게 된 줄기와 잎을 보면서 너무 속상했어요. 샤워 후에 수건으로 닦지도 않고 바깥에 내놓은 거구나. 얼었던 잎도 금방 녹이면 회복되는 경우도 있다길래 뜨끈한 바닥에 두고 담요도 둘러줬어요. 얼어서 힘이 빠진 줄기가 다시 살아날 때 도움이 되라고, 흙에 연필을 꽂아 지지대도 마련했고요. 하지만 며칠 뒤 연필을 빼는데 아무 힘도 없이 줄기가 제 손 위로 툭, 떨궈졌어요.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났어요. 아 정말 힘을 다 잃었구나. 세심치 못해, 몇 달 간 함께 한 이가 한 순간에 이렇게 된 게 미안했어요. 슬픈만큼 그래도 애정했던 스스로를 도닥이며 인사했어요. 다육식물의 위치에서 세상을 보고 한 달을 세어보기도 했지만, 다육식물처럼 흡수하고 바람 맞는 법은 몰랐어요. ‘반려’하는 존재가 있다는 건, 그 존재가 되어보는 일인가보다 어렴풋이 배웠어요. 덕분에 당위적으로 ‘생태적 존재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생명으로 연결되어 기대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은 느끼고 있어요. 저의 반려생물 이야기는 이렇게 일단락해보아요. 두서없이 펼쳐놓은 이야기를 담아, 약속한 날의 마지막 순간에야 편지를 부쳐요. 참 급하죠. 그렇지만 너무 바쁘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잠을 쪼개 답하고 싶은, 그런 손내밀기를 해줘서 꼬옥 충분하게 풀어내고 싶었어요. 다음 편지를 받을 때는 변화의 기점에 있는 제 상황이 어느 정도 정돈되어 있을 예정이에요. 그때는 조급함보다 제 일상의 여유를 담을 수 있기를, 그런 마음과 힘을 전할 수 있기를 바라며 닫을게요. 따뜻한 밤이길요, 참새! 데구르르 돌 2023.1.26.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3-01-30
  • [대한 편지 : 유우야와 갈토] 처음 보는 식물이 너무 예뻐서
    디자인.칩코 <갈토에게> 갈토~ 대한을 맞이하며 두번째 편지를 보내요! 먼저, 늦었지만 갈토의 속상했던 마음을 사르르 녹여주고 싶을 만큼 생일 축하해요. 제가 생일 전날 편지를 보낸 건 1월 중 가장 잘 한 일이 되었어요. 뿌듯합니다... 그간 잘 지내셨나요? 저는 갈토가 던져 준 '느긋하게 산다는 게 어떤건지' 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던 오늘, 문득 창 밖에 내리는 눈들을 보다가 반짝 떠올랐어요. 생명력이 있는 자연과 현재 이 순간 함께 있음을 느낄 때가 바로 느긋함 아닐까! 하고요. 그 순간이 선처럼 이어진다면 느긋하게 일상을 보낸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될까요? 지리산을 떠나 본가인 인천에서 지내는 요즘엔, 주로 하늘에 뜬 것들로 자연을 만나요. 그래서 그런지 눈과 함께 현재를 느끼는 소중한 경험도 해보네요. 인천이라니, 갈토와 꽤나 가까이 살아서 놀랐지요? 설명을 드리자면, 저도 지리산에서 살고 싶은데 인연이 닿는 집이 좀체 나오질 않아요. 산내라는 마을을 통해 지리산을 만났고, '지리산방랑단'을 하면서 그 외에 다른 지역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던 중 구례에서 느꼈지요.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다... 구례는 읍내가 있는데 적당히 상점이 늘어진 거리와 뒤에 펼쳐진 산들이 한적하고 맘에 들었어요. 저는 어느정도 번화된 곳을 좋아해요. 도시와 시골의 중간 느낌이랄까요. 시골집에서 흔히 만나는 벌레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제가 유독 무서워 해요. 게다가 마을 곳곳에는 풀려 있는 개가 정말 많은데요. 개의 레이더에 걸렸다, 심지어 나를 향해 달려온다... 이러면 뭐ㅎㅎ 평소 위아래로 뛰던 심장이 앞뒤로, 몸 밖으로 뛰쳐나왔다 들어갔다 해요. 지난 날 개가 공격하지 않고 겁만 주고 간 것에 감사합니다... 인간동물들은 '말'하면서 서로 의사를 확인 할 수 있잖아요. 근데 저와 소통 방식이 다른 생물과는 제가 그들을 해칠 의사가 없다는 걸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두려운 것 같아요. 제가 두려워하기엔 그 작은 생물들보다 덩치가 훨씬 큰 게 아이러니지만 벌레와 닿는 촉감이 낯설어서 소스라치게 돼요. 외딴 시골일수록 자주 마주치더라구요. 그래서 어느정도 자연과 단절된(...) 읍내에서 살고 싶은가봐요. 갈토의 말처럼 '서울 중심으로 자원과 권력이 집중되는 것'에 깊이 공감했어요. 서울은 또 자연과 단절된 부분이 많지요. 제 안에는 도시에서 나고 자라면서 경험한 권력의 익숙함 또는 자연과의 단절감이 있고, 그 도시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꿈틀대는 대자연을 향한 본능, 간절함이 있어요. 이 두 감각 속에서 딜레마를 겪고 있지요. 아무튼 읍내에 있는 집 중에서도 아파트는 돼야 벌레나 풀린 개와의 만남을 회피할 수 있겠죠. 결국 아파트 살 돈이 없는 저는 방랑 이후 안성맞춤 보금자리를 못 구한 채 본가로 돌아왔답니다..ㅎㅎ 아쉬운 대로 지리산에는 자주 내려가는 방법으로 작년을 보냈어요. 약 한 달에 한 번씩 내려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여러 활동에 참여하는 식으로요. 큰 맘 먹고 여름 한동안은 구례 작은 마을의 친구 집에서 지냈는데요, 그 집엔 많은 곱등이 가족들과 애집개미 군단이 있었어요. 부러운 점이 있었어요. 그 집에는 저처럼 여름 한 철 놀러 온 개가 있었거든요. 그는 애집개미들이 우르르 있는 벽면에 철썩 기대어 잠을 자거나, 바삐 움직이는 거미 뒤에 코를 바싹 대고 따라 다녔어요. 강아지 시절부터 봐와서 저와 퍽 가까운 사인데 그땐 거리감이 살짝 들었어요. 결코 따라할 순 없었지만 벌레와 다정할 수도 있는 모습에 뭔지 모를 안도도 했어요. 풀린 개들과 벌레는 아마 오래오래 제 반려생물이 되어 줄 것 같아요. 제가 그들과 언어로 소통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겠지요. 나름대로 해마다 두려움의 크기가 작아지고 있기에 앞으로도 기꺼이 기회로 받아 보려고요! 갈토도 궁금해요. 어떤 반려 생물이 계실지요! 편지를 마무리 할 때가 되었네요. 갈토의 편지를 읽고 한 문장 한 문장 모두 답변하고 싶은 충동과 앉은 자리에서 바로 편지를 쓰고 싶은 들뜬 마음이 있었어요. 갈토가 감사 일기 쓰는 멋진 습관이 부러웠구요. 저도 그 이후 열심히 써 보는 중이랍니다! 오늘은 일기를 적극 추천해준 갈토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이곳에 적어 볼게요. 1. 갈토가 제 편지를 읽어주어서 고맙습니다. 2. 오늘 눈이 내려 고맙습니다. 3. 비건 꼬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서 고맙습니다. (어디서 파나요..?) 그럼 갈토, 다음 편지에서 만나요! 조금 느긋해진 유우야 드림 <유우야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 오늘은 일찍 깼어요. 꿈 속에서 엄청 헤매다가 ‘이건 꿈이야’라는 생각을 하면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잠에서 깨버렸어요. 전날 꽤 피곤해서 잘 자야했는데, 다시 잠에 들지 못했습니다. 뒹굴뒹굴하다가 문득 이렇게 어둠속 에서 잡생각을 할 바에는 유우야에게 답장을 하자,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제부터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 났거든요. 유우야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서 깬건가 싶기도 하네요. 하하하. “생명력이 있는 자연과 현재 이 순간 함께 있음을 느낄 때가 바로 느긋함 아닐까!”라는 문장이 좋아서 곱씹어 읽었습니다. 제가 작년에 이사를 했는데 그 전에는 지층에서 오년간 살았어요. 지층에 살면, 날씨가 좋고 쉬는 날이 참 귀해요. 햇볕이 좋을 때 빨래 해서 밖에 널어야 하고 현관문을 열고 그 앞에 앉아 따뜻한 태양의 기운을 느끼곤 했거든요. 그 문장을 읽으며 그 때 느꼈던 느긋함이 기억났어요. 온전히 나의 몸이 밝은 빛과 따스함으로 연결되는 순간의 느긋함. 그 집이 그립지는 않지만, 그 순간은 그립네요. 얼른 날씨가 따뜻해져서 좀더 가벼운 옷차림으로 햇볕을 만나고 싶어집니다. 저의 반려생물은 수경식물들과 은행목이에요. 내가 어떻게 이들과 살게 되었나를 생각해보니, 대단한 인연이구나 싶어요. 제가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 대표 취임 축하 화분들이 여러 개 있었어요. 작은 화분들 말고 대형 화분들이었는데, 대표가 변경이 되면서 이전 대표가 받은 축하 화분들을 치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어요. 멀쩡하게 자라고 있는 식물들을 버리는게 너무 아까워서 혹시 내가 좀 가져가도 되는지 물었더니 가져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행운목과 홍콩야자를 만나게 되었어요. 모두 흙에 심어져 있었는데, 제가 차도 없고 큰 화분을 둘 수가 없어서 가지를 잘라서 가져와 행운목은 수경으로 키우기 시작했어요. 홍콩야자는 흙에 키우려고 흙까지 가져와서 심었는데 잘 적응을 못하길래 수경으로 바꿨더니 잘 자라더라고요. 그래서 이 집이 흙보다는 수경식물이 잘 자란다는 것도 발견했습니다. 은행목도 사연이 있는데요. 제 자리 뒷 편에 입사하신 분께 지인으로부터 입사 선물로 은행목이 배달되었어요. 저는 처음 보는 식물이고 너무 예뻐서 사랑에 빠질 것만 같았어요. 소비욕이 별로 없는 제가 하나 구입할까 인터넷을 검색할 정도로 참 예쁘더라고요. 선물 받으신 분은 선물을 보고 당황해 하셨는데 자신이 똥손이라 키우는 식물마다 결과가 좋지 않았고, 예쁜데 잘 키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겨울이 되고, 은행목은 점차 잎이 하나 둘 떨어져 갔고, 나중에는 나무 가지조차 말라버렸어요. 그 분이 퇴사하시게 되었는데, 그 예쁘던 은행목 입사귀가 모두 떨어졌고 죽은 나무처럼 보였어요. 그 분이 은행목을 보시면서, 몇 달간 너무 소진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며 화분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셨어요. 자신은 잘 키울 자신이 없다고 하셔서 제가 한 번 키워보겠다고 해서 은행목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몇 달간 은행목을 정말 정성스럽게 보살폈어요. 인터넷에서 은행목 키우는 법을 찾아보고 아침에 출근하면 햇빛을 많이 볼 수 있도록 밖에 놔두고 오후에 햇볕 자리를 보고 위치를 바꿔 줬습니다. 정말 신기하게 초록빛깔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잎이 나기 시작했어요. 물론 처음 은행목을 만났을 때 만큼 풍성하지는 못했지만, 조금씩 살아났어요. 생명체는 신비롭고 아름다워요. 잎이 사라지고 죽은 건가 쉬는 건가 도통 알 길이 없었는데, 이렇게 짜잔하고 다시 생명의 힘을 보여주잖아요. 3개의 잎이 자라고 열 개가 되는 과정을 보며 마음이 흡족해졌어요. 화분에 영양분을 줘서 더 빨리 자라게 하고 싶기도 한데, 겨우 다시 살아난 은행목이 쉬엄 쉬엄 회복하도록 천천히 시간을 주려고요. 저와 함께 첫 겨울을 맞이하였는데 아직도 푸른 잎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만족스러워요. 은행목이 초록 빛을 내기까지 저의 특별한 집중 관심을 받았지만 저는 게을러서 관리를 많이 해줘야 하는 반려 식물은 잘 못 키워요. 가끔 물을 주면 되는 다육이라던가 수경식물이 잘 맞는 거 같아요. 저의 적절한 무관심이 이 식물들과 잘 맞아요. 하루에 한번 볼까 말까 하다가 좀 시들해보이면 물이 없어서 말라 있으면 새 물을 채워줍니다. 물을 갈아 줄 때 홍콩야자의 새끼잎사귀가 자라는 거 보면 신기하고 너무 귀여워요. 저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이들과 지냅니다. 집에 초록이 들이 많아서 좋고 특히 수경식물이 가습 효과가 좋고 여름에 집 온도 낮추는데도 좋다고 전기도 덜 쓰게 됩니다. 반려 생물 자랑이 너무 길었네요. 하하하 반려 생물과 지내면서 생명체와 살기 위한 책임감에 대해서 종종 생각해요. 제가 너무 게을러서 물을 못 주면, 식물들은 색깔로 신호를 보내요. 나의 게으름을 반성하게 되고 미안한 마음을 담아 물을 줍니다. 저에겐 딱 이 정도의 생명체가 맞는 것 같아요. 밥을 챙겨주고, 소통도 해야하고, 놀아주기도 해야하는 동물 생명체를 키우기에는 저는 너무 게으른 사람이고. 그 책임감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편지를 쓰며 저와 반려생물들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게 되어 좋았습니다. 예전에 어떤 분께서 식물구입과 동물구입이 비슷한 맥락이기 때문에 식물구입보다는 식물입양을 해야한다고 말씀하신 걸 들은 적이 있어요. 공장에서 예쁜 화분들이 만들어지고, 식물들이 시장에서 비싼 값에 팔리고 사람들은 이들을 키우죠. 근데 제가 만난 식물들은 그렇게 선물받은 식물들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질 때 저와 만나게 되었잖아요. 최근 반려 식물이 유행이 되면서 관련 전자제품, 비싼 식물들로 재테크를 하고 시장이 과열되는 게 좀 우려스럽더라고요. 물론 반려 식물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니, 다른 취미보다는 쓰레기가 덜 나오겠지만 생명체를 만나는 것에 대한 고민을 좀더 하면 좋겠어요. 저에게 반려 생물들은 혼자 사는 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존재들이네요. 나의 게으름을 참아주고 나와 함께 살아가주는 이 존재들이 참 귀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오늘 편지는 여기까지 입니다. 세 번째 편지 기다릴게요~ 추가: 편지 주제는 함께 정하시는 건가요? 진짜 주제 선정 너무 좋다. 박수X 1,000 저는 대체육 별로 안 좋아하는 넥스트밀에서 나온 불구이 꼬치는 진짜 맛있게 먹었어요~ 2023년 1월 19일 갈토 드림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3-01-26
  • [소한 편지 : 토토와 가로] 올 겨울, 잘 자라다오
    디자인.칩코 <가로에게> 안녕하세요. 올 겨울은 유난히 추운 날이 많은 것 같아요. 아직 햇님이 닿지 않은 지붕은 아직도 하얀 눈이 두텁게 쌓여있어요. 쉬이 녹지 않은 눈들이 여기 저기 묻어있는 겨울이에요. 얼마나 추운지 작년에는 하얀 눈 속에서도 초록 초록했던 마늘 싹들이 올해는 시들해보여요. 새싹에 보랏빛이 돌아서 걱정이에요. 지난 가을에 심었던 마늘이 이대로 괜찮을까 하며 매일 아침 살짝 들여다 봐요. 아 참, 마늘은 추위에 강한 친구래요. 가로는 알고 계셨나요? 영하 7,8도의 온도에서도 거뜬히 살아남는다고 해요. 뽀록하고 튀어나온 기다란 새싹이 하얀 눈 밭에서 숨구멍을 만든 걸 보면 참 신기하더라구요. 마늘싹 주변으로 마치 따뜻한 온기라도 있는 것처럼 눈이 녹아있는 걸 보면 살아있는 생명의 힘이 느껴져요. 마늘의 매콤하고 알싸한 그 맛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닌가봐요. 눈도 쉽게 녹지 않는 이 혹독한 추위 속에서 새싹을 키우는 저 집념! 모든 것이 잠들어있는듯한 이 겨울에도 초록 생명을 잃지 않는 마늘을 보면 내 안에도 생기가 돋아나는 것을 느껴요. 저는 지리산에 와서 처음 호미를 손에 잡아봤어요. 그래서인지 밭에서 싹을 틔우고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는 이 생명들의 위대함이 참 새롭고 신비해요. 정신없이 마늘의 겨울나기 이야기를 하느라 제 소개가 늦었어요. 저는 토마토를 사랑하는 토토에요! 눈치채셨겠지만, 농사지으며 살고 있어요. 아직 이것도 저것도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한 초보 농부에요. 토마토는 제게 특별한 채소인데요, 직접 심었던 첫 작물이기도 해요. 언젠가 가로에게 토마토의 신비로운 세상도 이야기해드릴 수 있는 날이 올까요? 가로가 이미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원하신다면 제가 만난 알록달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토마토들도 소개해드릴게요. 산달리기와 계절을 통해 위로받는다고 적어준 가로의 글을 보았어요. ‘앗, 내 이야기인가...!’ 싶었지요. 속으로 반가운 마음에 가로와 꼭 펜팔을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운이 참 좋았어요. 이렇게 가로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니! 가로는 지금 어떤 겨울을 만나고 있나요? 이 겨울이 어떤 위로를 건네주고 있는지, 제가 느끼고 있는 것들과 닮아있을지 또 어떻게 다를지 궁금해요. 아주 어렸을적부터 1월 1일 새해는 가족들과 해맞이를 하러 다녔던 것이 여전히 제 삶에 의식처럼 새겨져있어요. 아마 그때 떠오르는 햇님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가족들의 행복한 얼굴이, 다정한 새해 인사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새해에는 한번도 빠짐없이 해맞이를 하러 어딘가로 떠났는데 올해는 금강에서 시간을 보냈어요. 새해 소원을 빌며 가로와도 그 순간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금강과 미호천, 두 강이 만나며 자연스레 형성된 습지가 있어요. 신비스러운 물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모든 것의 시간이 갑자기 멈춰버린 것 같은 마법같은 곳이였어요. 나무들은 늘어뜨린 가지마다 새하얀 눈꽃이 활짝 피어있고, 하얗게 서리가 앉은 갈대들은 흔들릴때마다 반짝거렸지요. 겨울왕국에 초대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새벽 안개로 가득한 하늘에 새해 첫 햇님은 만나지 못했지만 경이로운 풍경에 충분히 축복받는 한해가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올 한해는 겨울에게 받은 특별한 선물로 시작했어요. ‘가로와도 이 축복을 나누어야지’ 하고 그 모습을 저장했는데 그 사진을 함께 보내요.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는 순간에 가로가 떠오른 것, 아직 얼굴도 목소리도 만나보지 못한 이를 떠올린다는 것이 참 신기했어요. 편지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고 아름다운 것을 나누고 때론 시린 마음들도 나눌 때가 있겠죠? 비행을 하는 느낌같기도 해요. 이렇게 커다란 구름을 가까이에서 만나는 것이 그저 신기해 한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가로와 펜팔을 시작하는 것은 설레고 기쁜 마음이에요. 비행기가 도착했을때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여정에 발걸음을 내딛어보는 것처럼 용기를 가지고 시작한 일이기도 해요. 편지를 쓰는일이 익숙한 일이 아니라 어렵게 느껴진 것도 있거든요. 펜을 들고 끄적였던 엽서를 친구에게 보내지 못하고 그대로 서랍에 간직한 일이 종종 있어요. 잘 쓰지 못한 것 같아서 부끄럽게 느낀 적도 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산의 깃든 생명의 이야기를 전하고, 어쩌면 만나지 못했을 가로와의 인연을 만들어가는 펜팔의 기회를 꼭 붙잡고 싶었어요. 아주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나봐요. 한동안 비행기를 타본 적은 없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낯선 공항에서 처음으로 게이트를 걸어나와 느끼는 냄새, 공기, 온도, 풍경들이 주는 신선함 그리고 그 곳에서의 경험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그런 펜팔 여정을 떠나고 싶어요. 왠지 가로가 ‘토토 환영합니다’ 라는 팻말을 들고 나와 서있어줄 것 같아요. 처음 보는 가로를 나는 운명처럼 느낌만으로.. 발견하고 반갑게 달려가는 그런 상상을 해보며 이 편지를 마칩니다. 다시 한번 반가워요! 2023년 1월 5일 토토가 <토토에게> 토토 안녕하세요! 저는 가로예요. ( ) 정성스러운 토토의 소중한 편지를 며칠 동안 읽고 또 읽으면서 토토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지웠다 하며 마음의 부담을 키우다가 약속한 일자를 넘겨 편지를 보내게 되었어요...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을 토토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이 커요... 마음과 다르게 하루에 주어지는 개인 업무들과 숙제들은 마음의 많은 여유들을 쉽게 사라지게 하는 것 같아요... 편지를 주고 받아본지가 언제인지, 편지 한 장 쓰는 일이 이렇게나 어려운 일인 줄 몰랐네요. 편지가 어려운 건지, 마음을 꺼내는 일 자체가 어려운 건지, 표현에 많이 익숙지 못한 탓도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제 마음을 잘 담고 싶은데, 숨을 고르고,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보기 위해 노력해 볼게요. 토토처럼 정성스러운 편지가 되지 못해도 너그러이 읽어주었으면 좋겠네요. 약속날짜를 넘긴 건 정말 미안해요.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그럼 진짜 토토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을 적어볼게요! 우선 저는 이번 겨울 마늘 친구들이 시들해 보여 걱정이 많았을 토토를 생각하니 토토를 잠시 위로해주고 싶었어요. 토토 말대로 마늘은 영하 7,8 도에서도 거뜬히! 살아남는 강한 친구라고 하니까 씩씩하게 잘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이번 겨울 토토를 든든하게 지켜줄 마늘 친구들에게 안부인사 전해줄 수 있죠? :) 저는 농사를 해본 적은 없지만 아버지가 농사를 하는 모습을 계절마다 종종 곁에서 보았던 적이 있어요. 이번 가을즈음에는 함께 무 씨앗도 심었어요 :) 아버지는 농사를 하면 하루가 한 달이 1 년이 정말 쉴 틈 없이 바쁘다고 하셨어요. 아버지가 직접 기른 나물들로 가득한 비빔밥을 한 그릇 뚝딱하면 어찌나 맛이 있는지, 나중에 토토의 음식들도 맛볼 수 있는 날이 있을까요? 저는 씨를 심고 기르고 거두는 모든 과정이 마음 밭을 가꾸는 일 같기도 해요. 토토가 씨앗들을 심고 싹을 틔우는 데까지 기다리는 마음을 배우고, 또 계절의 변화를 누구보다도 더 많이 느끼며 매일 아침 섬세하게 식물들을 보살피면서 토토 자신의 마음의 밭도 다정하게 보살펴주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그 과정이 모두 서툴고 때론 너무 느리고 때론 너무 급하기도 하고 그래요. 내가 바라는 하루의 모양은 토토의 하루인 것 같은데 여기는 늘 정신이 없네요. 새해에는 저도 제 마음의 밭에 소중한 다짐 씨앗들을 뿌렸어요.이 번 겨울 잘 자라주길 바라요. 그 씨앗들 중에는 잃고 싶지 않은 나도 있어요. 무엇을 잃고 싶지 않은지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꽁꽁 숨어버린 나를 다시 기다려주고 그때는 정말 소중히 아껴주고 싶었어요. 어쩌면 처음 방랑단을 보고 그런 나를 다시 되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토토는 혹시 마늘처럼 추위에 강한가요? 저는 추위에 무척이나 약해요. 많이들 가을을 탄다고 하는데 저는 겨울을 타는 것 같아요. 매년 추운 겨울이 되면 평소보다 체력이 많이 약해지고 계속 잠만 자고 싶고 조금은 무기력해진다고 해야 할까요. 다행히도 이번 겨울은 그런 저를 극복하고 싶어서 혹독한 추위에 밖에서 캠핑도 해보고, 산 달리기도 더 열심히 하고, 사람도 많이 만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산 달리기는 정말 저에게 특별한 취미인데 다음 번에는 산달리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아 그리고 제 '가로'라는 이름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요! :) 세로 가로 할 때 가로는 아니고요!( ) 괄호를 빠르게 말해서 가로예요! 저는 가로 안이 비어있는 게 참 맘에 들었어요. 언제든 가로 안에 무언가를 넣을 수도 뺄 수도 있는데 지금은 오랫동안 빈 가로예요. 이름은 또 다른 나를 표현해 주는 일이기도 한데, 어느 날 내가 규정한 나에 갇혀서 스스로 숨이 막힐 때가 있었어요. 그게 정답도 아닌데... 그래서 뭐랄까, 저 가로 안에 텅 비어 있는 모양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덕분에 오랫동안 비어있던 가로 안에 오늘은 토토의 따듯한 온기가 채워졌네요. 고마워요 토토, 오늘은 여기서 글을 마무리할게요. 좋은 하루 보내어요! 가로가.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3-01-23
  • [소한 편지 : 덕복희와 산달] 서로에게 익숙함을 선물할 수 있을 거예요
    디자인.칩코 <잘 보이고 싶은 산달에게> 산달! 어떻게 편지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 첫문장을 쓰기까지 어찌나 오래 걸렸는지. 산달씨라고 해야 할지, 산달님이라고 해야 할지, 산달쌤이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산달이라고만 적었습니다. 소리내어보면 참 어색한데,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으면 퍽 자연스럽게도 들린답니다. 저는 덕복희예요. 된소리로 읽는 것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 필명을 짓기까지도 아주 오래 걸렸는데… 방금 속으로 좀 구리다고 생각하셨나요? 호기롭게 결정한 이름 치고는 저도 마음에 쏙 들진 않지만, 세상에 이미 있는 이름일 수도 있으니 말을 가리겠습니다. 제가 참 존경하는 분이 있는데요. 그분에게 존함을 물었을 때 ‘똥폼’이라는 별칭을 알려주셨어요. ‘똥폼’이라니…. ‘방구뿡’도 아니고… 전 그렇게 멋진 분을 제가 감히 그런 외람된 이름으로 불러도 되나, 아주 당황스러웠는데요. 다행히도 이름이란 건, 습관처럼 익숙해지니까요. 이젠 똥이 그분처럼 멋지게 보이기에 이르렀어요.(농담 아닙니다) 똥폼! 아주 멋진 이름이죠. 덕복희란 이름도 그리 되길 바라요. 산달에게도 제게도. 쪼그려 앉은 채로 글을 적고 있어요. 오래 있으면 다리에 쥐가 나는, 낮은 변기에 앉은 모양으로요. 제가 이런 꼴로 글을 종종 쓴다는 걸, 주위 사람이 ‘편하게 앉아서 해’라고 말해주기 전까지는 잘 모르곤 합니다. 제겐 불편하지 않거든요. 내친 김에 하나 더 고백하자면, 저는 요리할 때 발꿈치를 드는 습관이 있습니다. 평생 모르고 살다가, 삼년 전 애인이 ‘그거 알아?’라면서 말해주고서야 깨달았습니다. 글쎄, 이 요상한 발동작은 뭐라하면 좋을까요? 긴장의 증거일까요? 오늘도 요리하며 어김없이 발꿈치를 들고 칼질하다가, 이젠 도리어 발꿈치를 내린 채로 요리하는 게 더 불편하다는 걸 새삼 느꼈답니다. 산달은 발꿈치를 들고 칼질을 하실 수 있으신가요? 언젠가 제게 도전을 해보셔도 좋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습관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요? 습관으로 나를 설명하는 건, 늘 망설이게 됩니다. 변명할 거리가 많아지기 때문이에요. 습관이란 익숙함을 너머 무의식의 영역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요? 코를 후비거나, 웃을 때 코를 찡긋하거나, 걸음걸이가 둥실둥실한다거나, 전화를 받을 때 순식간에 성대를 갈아끼우는 습관들. 습관을 나열하자면 그게 절대로 저라고는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나의 아주 일부만을 설명할 뿐이라고 매정히 선을 긋지만, 사실은 언제나 그렇지 않은가 싶어요. 언제나 작은 조각만을 보고 나를 이해하고, 오해하고, 그 조각이 나를 대신하고, 나 자신조차 나를 착각하고 마는 일들 투성이라고요. 올해 저와 쌍둥이처럼 붙어다니며 활동한 친구가 있는데요. 하루는 제게 이런 말을 했어요. “너 이젠 스스로를 환경운동가라고 하네?”라고요. 전 솔직히 ‘내가 환경운동가라고 말하길 꺼려했던가?’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했답니다. 분명 돌이켜보면 전 작정하고 환경운동가가 된 건 아니었어요. 여느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어릴 적부터 재능을 갈고 닦아서 꿈을 이룬 직업은 아니란 뜻이에요. 그냥… 어느 날 그렇게 된 거죠. 마침 제가 만사를 제쳐두고 자꾸 몰두하던 일들을 다들 환경운동이라고 불렀을 뿐인 거죠. 여전히 환경운동가라는 이름은 무겁기는 해요. 누가 실버버튼을 주는 것도 아닌데 괜히 ‘내가 뭐라고…’하는 위축감이 들어요. 그래도 매순간 제가 습관처럼 내린 선택이 모여 저를 이런 삶으로 이끌었다고 여겨요. 부피만 크고 구멍은 숭숭 난 뽁뽁이 포장지처럼 느껴져도 어쩔 수 없죠. 제가 발꿈치를 드는 줄도 모르고 칼질하는 것처럼, 환경운동을 하는 줄도 모르고 환경운동가가 되버린 것처럼, 제 삶은 저를 자꾸 어떤 모양으로 주물러 놓고는 해요. 저는 시시때때로 무언가를 돌보아야만 한다고, 그게 어느 새파란 잠자리 모습을 한 지구용사가 제게 심어놓은 사명이라고도 여기면서 살아요. 제 삶을 꼭 흥미로운 영화를 분석하듯이, 사사로운 일상의 모든 조명과 배우와 사건의 단서를 집요하게 주워담으려고 해요. 알쏭달쏭하게 들리지만, 한 마디로 삶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거죠. 이 근사한 말을 산달이 해주었잖아요. 산달이 이 펜팔을 신청할 적에요.“모든 것이 사라지고 무너지는 시간 속에서 굳건히 경이로운 우리를 돌보고 싶다”고요. 익숙함은 일상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듯이 보이지만…실은 익숙함이야말로 경이로움인것 같아요. 작은 물방울이 모여 커다란 바위를 쪼개고, 가벼운 눈송이가 쌓여 기어코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듯이요. 삶이 습관처럼 내게 보여주는 장면들을 새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거죠. 집구석에서 돈벌레를 만나면, 혹은 두 번이나 만나면 지독한 운명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씨익 웃고는 ‘못말리는 녀석이군’하는 거죠. 마치 어린 시절 좋아하던 애와 어쩌다 눈만 마주쳐도 ‘뭐지? 나 좋아하나?’하던 양, 이마에 빗방울만 떨어져도 ‘뭐지? 계시인가?’하는 거죠. 조금 오바해버렸지만… 경이롭다는 말이예요. 저는 산달의 이 문장이 반짝 윤이 난다고 느꼈어요. 이 문장 때문에 제가 지금 쪼그린 자세로 ‘산달쌤’과 ‘산달님’과 ‘산달씨’를 썼다 지웠다 하는 거겠죠. 잘 보이고 싶어서요. 누군가가 제가 뱉은 한 마디로 저를 단단히 오해한다면 말리고 싶을 텐데, 제가 그러고 있으니 아마 산달도 부담스럽겠죠? 그래서 밑밥을 깔아둔 거예요. 언제나 결국 그렇지 않느냐고요. 작은 조각으로 한 사람을 향한 이해와 오해를 견주는 일이요. 그러나 이해도 오해도 실은 ‘바라봄’이 바탕이 되는 법이니까요. 반 년간 제게 깊이 바라볼 문장이 되어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휴… 드디어 첫 편지를 채워가요. 아직은 낯선 분에게 보내는 편지가 어색해요. 그래도 환경운동을 하다보면, 꼭 군중 속에서 메가폰 없이 떠든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수신자가 없는 거죠. "아무나 들어라!!! 누가 내 말에 동의해줄진 모르겠는데 일단 떠들겠다!!!" 그래도 이 편지는 수신자가 있어 좋아요.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이 편지가 닿을 발끝에 서 계셔서 고맙습니다. 어색한 편지도 시나브로 편안한 습관처럼 나누게 되길 바라요. 앞으로 겨울과 봄을 지나면서, 우체통에 찾아올 산달의 문장들을 새파란 잠자리처럼 바라보기를 약속할게요. 단단히 오해한 덕복희 올림 <익숙함을 약속해준 덕복희에게> 복희! 벌써 저에게 그 이름은 아주 멋진 이름이 되어 버린 것 같아요. 얼굴도 목소리도 알 수 없는 편지에서 저는 오직 복희가 쓰는 단어들로 복희의 윤곽을 상상하게 되거든요. 글이란 건 사실 굉장히 솔직하기도 하죠. 평소에 그 사람이 어떤 낱말들을 수집해왔는지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기 때문이에요. 복희의 말들에는 사랑을 고민해 온 흔적들이 화석처럼 남아 있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저는 그 화석에 덕복희라는 이름표를 붙일 뿐이겠죠. 저는 한 번도 제 이름을 다른 방식으로 불러 본 적이 없는데요. 그래서 이번에 새 이름을 찾는 것도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생각나는 이름만 많아서 6가지를 펼쳐놓고 친구들에게 뭐가 좋을까 같이 고민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러다가 한 친구가 정해준 이름을 골랐는데, 끝내 입에 붙지 않아서 편지를 시작하기 직전에 다른 이름으로 바꿨고, 그게 ‘산달’이라는 이름이에요. 이름을 고민하던 중 제 눈 앞에 있던 트리트먼트의 향, SANDAL WOOD에서 따온 이름이랍니다. 향이 참 좋더라고요. 그러고나서 생각해보니 ‘산처럼 달처럼’ 이라는 뜻도 붙여볼 수 있었어요. 그 이름이 지리산과 그곳에 사는 반달가슴곰을 연상하게 만든다는 것은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에요. 그렇게 짓고 나니 참 흡족하더군요. 가벼운 고민일지도 모르지만, 이름을 짓는다는 건 꽤 의미있는 일일지도 몰라요. 우리의 언어 세계에서 무언가로부터 이름을 가져다 쓴다는 것은 그 기표에 대해, 표상에 대해 책임지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니까요. 저는 앞으로도 떡볶이를 먹을 때마다 자신의 이름을 된소리로 발음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는 복희의 당부를 떠올리겠죠. 복희가 이제 똥을 멋진 존재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처럼요. 복희는 어떤 순간에 저를 떠올리게 될까요? 아무튼, 제게 대체할 수 없는 하나의 의미가 되어주어 고맙습니다. 휘영청 달 밝은 날 지리산에서 복희와 떡볶이를 노나 먹을 수 있기를. 이름 하나 정하는 것 가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네요. 어쩌면 이게 제 습관일지도 몰라요! 언어를 지나치게 세심하게 쓰려고 하는 버릇 말이에요. 저는 대화할 때 ‘음,,,’, ‘뭔가,,,’ 라는 추임새들을 자주 붙이는데, 그런 저를 세심히 지켜봐 준 한 친구는 ‘또 말들을 고르는 중이구나?’ 라고 얘기해줘요. 생각해보면 저 스스로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를 모르겠어.’라는 말을 자주 하거든요. 제 문장들이 종종 준비되지 않아 투박하고 거칠다고 느껴요. 제 안에 스며든 여러 생각의 조각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전달하는 일은 제게 아직 어려운 일이에요. 저도 누군가가 저를 오해하는 일이 정말 무섭거든요. 늘 충분히 이야기할 시간이 제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이 서툰 우리의 이야기를 조금씩만 기다려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요새 저는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 하는 상황에서 그냥 입을 닫고는 합니다. 그래서 기후 운동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기다리는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사람들에게 나의 말이 가닿기를 기다리는 일이기도 하고요. 기후위기를 만들어낸 세상에게 입을 가로막힌 생명들이 충분히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기다리는 일이기도 해요.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차분히 듣고, 수집하고, 번역하는 거죠. 복희의 말처럼, 이해와 오해를 넘나들지만 차분히 바라보며 기다리는 거에요. 그들의 말들이 우리에게 충분히 익숙해질 때까지요.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가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닐까요? 복희가 또 그런 말을 했잖아요. “익숙함이야말로 경이로움”인 것 같다고요. 참으로 그래요. 무엇이 익숙해진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에요. 낯설고 생경한 것들이 내게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것이 익숙해질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있었다는 말이잖아요. 오늘 좀 어색했지만, 내일 다시 만나고, 모레 또 인사하고. 그렇게 하루하루에 이해와 오해를 반복하다 보면 결국 우리는 친구가 되겠죠. 처음이 어렵지, 익숙해지면 어렵지 않을 거에요. 우리는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잖아요! 그런데 복희, 사랑은 어떤 걸까요? 우리는 우리가 사랑을 받은 방식대로 다른 존재들을 사랑하잖아요. 저는 궁금해요. 사랑이 과연 그런 형태만 있는 것인지, 우리는 사랑이 아닌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을지. 제 고등학교 때 문학 선생님이 이런 문장을 전해주셨거든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상상력이다.” 라고요. 우리는 또 다른 사랑의 방법을 상상해볼 수 있을까요? 사랑의 새로운 길들을 찾아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이야기는 기회가 있다면 다시 제대로 하기로 해요. 복희에게 사랑은 어떤 것인지도 궁금해요.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어느덧 우리의 말들이 소복히 쌓인다면, 복희는 제게, 저는 복희에게 그런 익숙함을 선물할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그곳에서 또 하나의 세상이 열린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어요. 제가 복희의 이야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복희도 저의 이야기를 기다릴까요? 제가 복희의 글을 읽고 침대 위에서 깔깔 웃었던 것처럼 복희도 그럴까요? 궁금한게 참 많지만, 조급하지 않으려고 해요. 차분하게 바로보고 기다리면서 복희의 세계를 만나볼래요. 사랑해보려구요. 그럼 또 이야기 나눌 때까지 건강하세요. p.s. 새파란 잠자리는 어디서 날아오나요? 궁금한 게 많은 산달이.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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