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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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칩코

 

<음악을 말할 때 반짝반짝 빛나는 산달에게>


산달! 매번 이런 식으로 편지를 시작하는 것 같지만… 지난 편지는 정말 최고였어요! 산달은 아주 어릴 적부터 음악을 좋아했군요. 음악을 이야기하는 산달은 다른 편지에서보다 유난히 더 발랄하면서도 포근하게 느껴져요. 여명이 드는 예배당에서 혼자 드뷔시를 연주하는 산달의 모습은 정말 근사할 거예요. 어린왕자의 구절에서도 무릎을 탁 쳤답니다. 안간힘보다는 오히려 시간에 몸을 맡기면서 해결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장구를 처음 칠 때는 제가 마치 돌돌 쥐어짠 빨랫감이 된 기분이었어요. ‘장구가 내 몸을 파고든다’고 느껴질 만큼 몸에 붙들어 메라고 하거든요. 일 년이 지나고는 장구가 엄청나게 불편하진 않아요. 피아노가 산달을 변화시켰듯이 장구도 제 몸을 길들였나 봐요. 산달의 피아노와 비교하기엔, 전 장구를 너무 게을리 쳤지만…


악기를 배우는 게 어떠냐는 들뜬 질문이 참 반가워요. 악기와의 순간을 이토록 소중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내가 굉장히 특별한 경험을 하는 듯이 설레요. 우쿨렐레는 이제 막 배우는 단계라서 즐겁고 가벼워요. 소리가 형편 없어도 노래 부르는 재미로 치고말죠. 그런데 장구는 워낙 잘하는 분들과 하니 기가 죽기도 해요. 우쿨렐레는 동네의 조그만 동호회처럼 모이는 반면, 장구는 ‘호남여성농악보존회’라는 전문기관에서 배워요. 아마 디스코팡팡을 타면서도 장구를 끄떡없이 치실 듯한 무형문화재 원로 선생님이 계시고요. 


장구수업은 중년 여성 수강생이 압도적인데, 선생님께서는 수강생을 통틀어서 ‘엄마들’이라고 칭해요. “자, 이때 엄마들이 삼채 시작해요.” 이렇게 지시하거든요. 그 ‘엄마들’이 어찌나 장구를 다 잘 치시는지… 대충 흉내만 내다가 집에 돌아오면 진이 쏙 빠져요. 재밌는 게, 우쿨렐레 수업은 나이 많은 이웃들이 저를 ‘애기’라고도 부르시는데요. 두 악기수업 동안 전 애기가 됐다가 엄마가 됐다가 하는 셈이에요. 둘 다 도무지 어리둥절한 호칭이지만, 역시 애기였던 적은 있어도 엄마였던 적은 없어서 그런지 장구수업이 훨씬 어렵게 느껴져요.


지난 편지가 왜 최고였는지는 바로 이제야 말할 참인데요! 산달이 건넨 마지막 질문이 저를 오랫동안 몰두하게 한 까닭이어요. 새들의 목소리가 여러 주파수의 화음일 거라는 말은 참으로 당연하면서도 놀라웠어요. 해가 저물 무렵 마당을 어슬렁대다보면, 새소리 같기도, 고양이 소리 같기도, 곤충 소리 같기도 한 묘한 소리가 들릴 때가 있어요. 누군지 정체를 통 몰랐는데, 어쩌면 그건 그들 모두의 소리였을 지도 모르겠더군요! 저의 진지함도 우리의 유연함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주파수일 지도 모른다는 말 역시, 참으로 당연하다 여기면서도 ‘헉’하고 숨을 절로 들이켰어요. 산달이 꼭 예리한 심리상담사처럼도 느껴졌답니다. 


분명 제 진지함도 어떤 순간엔 화음을 만들어낼 텐데, 실은 잘 모르겠더라고요. 진지함을 미워하기 바빠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나 봐요. 다만 어느 순간에는 진지함도 유연함을 만드는 재료가 될 거라는 그 다정한 말이 참 고마웠어요. 산달 역시 잡담이 어색하다는 맞장구를 쳐주어서 위로도 많이 되었고요.


이번 주제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인데요. 저를 싫어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대체로 저를 재수 없어 했던 것 같아요. 이게 참 표현이 모자란데... ‘재수 없다’는 말 밖에 생각이 안 나네요. 어디서 진단해준 건 아니지만, 전 완벽주의 강박이 있는 모양이에요. 제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보여줄 용기가 안 나요. 어릴 적에 전 그림 그리기를 아주 좋아했는데요. 사람을 그리면 꼭 얼굴에 눈, 코, 입을 안 그렸대요. 머리칼이나 옷차림은 섬세하게 그리는데 얼굴만 텅 비어있는 거죠. 부모님은 좀 섬뜩하기도 하셨겠어요. 제 딴에는, 얼굴은 너무나도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거길 실수했다간 그림 전체를 망칠까 봐 손도 못 대는 거였어요. 요즘도 전 비뚤어진 커텐과 색조합이 영 맞지 않는 침대시트를 잘 견디지 못해요. 컴퓨터의 가득 찬 휴지통과 정렬되지 않은 폴더도 마찬가지고요. 늘 다른 사람들에게도 정돈되고 절제된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해요. 완벽주의는 아마 겁이 많은 사람들의 질병일 거예요.


저는 이런 강박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이 저를 재수 없어 한다고 느껴요. 사람들에게 잘보이고 싶어 생긴 강박일 텐데 참 역설이죠. 다른 건 사소한 걸로 꼬투리를 잡으면서도, 제 허점은 보여주기 싫어하니 진짜 재수 없긴 한 것 같아요. 그런데도 제 교우관계가 썩 나쁘지 않은 것은, 아마 아무리 허점을 가려도 남들 눈엔 훤히 보이기 때문일 지도 몰라요. 정말로 완벽해 보이면 진짜 재수 없을 텐데, 전 허점투성이라 별로 재수 없을 것도 없는 거죠. 벽에 비뚤어진 커텐은 못 견디면서, 제 얼굴은 씻지도 않아서 하루 종일 눈꼽을 달고 다니는 식이에요. 말이 샜는데, 제가 세수를 안 하는 걸 고백하려 한 말은 아니고... 제 진지함도 아마 이 완벽주의 강박에서 기인한 게 틀림없다는 말이었어요. 이쯤 되면 ‘진지함’도 억울할 것 같아 화음을 만드는 순간을 요리조리 골똘했는데요. ‘진지함의 순기능 찾기’ 숙제를 풀지 못한 변명만 들고 왔습니다.


최근 열흘 간 아주 골치 아픈 일이 있었답니다.  제가 매번 진지한 꿈만 꾼다고 했던 말을 취소해야겠어요. 어느 날 똥꿈을 꾸었어요. 김밥김에 단무지까지 넣어서 똥을 돌돌 말아먹는 꿈이었는데요. 똥꿈이면 복권을 사야한다고들 하길래 좋은 일을 기대했어요. 그날 새벽 어스름한 부엌을 지나다가 발바닥에 촉촉하고도 바삭한 무언가가 닿았어요. 소스라치는 느낌에 펄쩍 뛰어올랐는데… 바나나만한 지네님이었답니다. 밟았다기보다 스친 정도라서 제가 해를 끼친 것 같진 않은데 이미 어디가 아픈지 몸을 또아리를 틀고 힘이 없었어요. 만약 이 정도 통통한 지네님이 팔팔한 상태로 절 물었다면 아마 그 새벽에 응급차를 불러야 했을 지도 몰라요. 제 복권꿈은 그렇게 지네님이 절 살려준 목숨값으로 퉁쳐버린 것이죠. 그날은 하루종일 발바닥에 지네 화석이 박힌 양 그 감촉이 가시질 않고 오소소 소름이 돋았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물리진 않았으니 촌인식은 아직이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414기후정의파업 전날 일이 터졌어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수상한 날갯짓 소리에 새벽 2시에 잠에서 깼는데요. 집안이 날개달린 흰개미떼로 뒤덮인 거죠. 새벽에 흰개미떼와 전쟁을 벌이다 일단 세종시로 후퇴했는데요. 일주일 뒤, 3배가 되는 흰개미떼가 정말이지 모래알처럼 나무기둥에서 쏟아져 나왔어요. 이 흰개미님들은 나무를 먹고사는데요. 주로 동남아에서 서식하는데, 우리나라 남부가 아열대기후로 변하면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고 해요. 죽은 나무가 주요 먹이라니, 생태순환을 위해 없어선 안될 분들이지만… 저희 집을 순환시키려고 나서실 줄은 몰랐어요. 실로 동남아나 호주에선 이 흰개미 때문에 집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대요. 기사를 검색해보니 우리나라 남부지역 목조문화재들도 여럿 흰개미님들의 공격에 맥을 못 추나봐요. 


열흘 가까이 집에 못가고 인근 빈집에 피난을 와있어요. 방역업체에 문의해보니 왜 이렇게 늦게 연락을 했느냐고… 이 정도 크기의 성충과 유충의 양이면 이건 최근 일이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꽤 오래 전부터 집을 갉아먹고 있었을 거라더군요. 개미떼가 나온 나무 기둥을 통통 쳐보면 텅 빈 드럼통 같은 소리가 나요. 흰개미떼가 나온 이후론 아무리 씻어도 몸이 간지러운 기분이고, 검은깨가 박힌 쿠키를 보면 개미가 박힌 줄 알고 흠칫 놀라고, 꿈에서도 내내 개미 꿈만 꿔요. 산달이 지난 편지에 ‘내가 생각할 때, 나는 내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된다’는 멋진 문장을 전해주었는데, 전 개미 생각을 하도 많이 해서 개미가 된 게 분명해요.


근래 식욕이 없고 무기력한데, 제 짝꿍도 상태가 비슷해요. 일이 도무지 손에 잡히질 않는 와중, 이웃 개를 산책시키고 모종들 물 주는 일은 멈출 수가 없으니 무거운 몸을 힘겹게 일으켜 겨우 움직이고 있어요. 지리산엔 골프장을 짓겠다고 해서 또 그 관련 자료를 며칠간 정리하다보니 영 어깨와 목이 아파서 편지를 쓰러 노트북 앞에 앉기가 어려웠어요. 그래도 저희 사정을 아는 친구들이 안부를 물어오고, 탱자쌤은 ‘이건 기후재난이다! 기사로 써야한다!’며 노발대발 해주셨다니 마음이 조금 위로가 되기도 해요. 어쨌거나 촌인식을 거하게 치룬 것 같죠? 바나나만한 지네님보다 새끼손톱만한 흰개미님이 더 무섭더군요.


기가 막히고 우울한 이야기로 마무리가 돼서 난감하네요. 편지가 늦어 미안한 마음을 전해요. 제가 존경하는 영성가 에크하르트 톨레가 이런 말을 했어요. ‘삶은 생각보다 진지하지 않다!’고요. 전 기차를 놓치기 직전이나,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이 문장을 주문처럼 외우곤 해요. 생각보다 별일 아닌 것들에 우린 너무 크게 상심하고 침울하잖아요. 흰개미님에게 집을 뺏긴 순간에도 이 주문을 외웠어요. 이건 별일이 아니다! 낙관적으로 생각하자! 하고요. 그런데 역시 기운이 쪽쪽 빠지는 걸 보면, 아무래도 삶이 진지하지 않다는 걸 배우기 전에, 진지함과 화해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산달! 숲도 마을도 새소리로 가득해요. 제비가 돌아왔고요. 아주 가까이서 할미새와 오목눈이와 팔색조를 본 행운을 자랑하고 싶어요. 썩어서 한바탕 죽었던 감자는 또 다른 새순이 올라와서 다들 번듯하게 자라나요. 요즘은 산 전체가 소나무 꽃봉오리가 된 양 노란 꽃가루를 안개처럼 뿜어내요. 고단했던 열흘 남짓 안에, 산달의 따스한 청명 편지를 포함해서 좋은 소식도 꽤 많았군요! 전 흰개미님을 너무 많이 죽여서 위령제를 지내야겠어요. 산달도 멀리서 물 한그릇 떠다놓고 기도해주세요.


흰개미가 된 덕복희 올림

 

 

<조금은 안쓰런 나의  웃음보따리 복희에게>


복희, 오랜만이에요! 제가 곡우 편지를 받은지 3주가 넘도록 답신을 못해 어느새 입하를 지나 소만이 가까워졌네요. 오기로 한 날에 편지를 받지 못해 서운했죠.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과 염려를 했을 복희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해요. 


사실 번아웃이 왔었어요. 왜 뒷감당도 하지 못할 많은 일들을 모조리 손에 쥐었는지, 욕심이 많아 탈이 났던 거죠. 하나를 겨우 끝내면 다른 하나가 떡하니 앞에 서 있고, 그렇게 몇 개의 산을 넘는 과정에서 숨을 편히 내쉬기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기도 어렵게 느껴졌어요. 그러다가 결국 몸에 무리가 오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깊이 있는 대화를 집중해서 나누는게 가장 어려웠던 것 같아요. 자꾸 이런 모습을 반복하는 저의 이유는 무엇일까 고민하는데, 늘 뾰족한 해법은 잘 생각나지 않아요.


어제 하루는 일부러 여유로운 척을 해보려 노력했어요. 친구와 전화도 하고, 볕을 쬐면서 산책도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저녁 식사도 함께 했어요.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렇게라도 숨을 내쉴 틈이 필요했던 건가 싶어요. 그렇게 더 잠시 시선을 돌려 주변을 돌아보니까 주변에 과로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더라고요. 스스로에게 쉴 공간을 마련해주지 않으면서 자신을 혹사시키는 모습을 많이 보는데, 그게 바로 다른 사람들이 보는 제 모습이겠거니 싶었어요. 


그러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복희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답장을 바로 하지 않았더니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더 막막하더군요. 갓 받은 편지를 읽고 난 후의 기쁨을 소중한 줄 모르고 흘려보낸 제가 원망스러웠어요. 이대로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복희와 제가 한 계절을 몽땅 주고받은 이야기들을 다시 읽었어요! 그건 마치 맛좋은 음식을 먹는 것만 같았어요. 식은지가 한참 되었는데도 변함없이 감질나는 그런 음식이요. 물론 밥이나 빵을 막 했을 때의 그런 따끈따끈함은 찾아보기가 어려웠지만, 몇 날 며칠을 묵혀 두면서 먹는 발효 음식처럼 예전에 못 보았던 것들을 찾을 수 있었어요.


돌이켜보면 저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지각도 밥 먹듯이 하고, 그러다보니 복희에게 준 말들도 충분히 정성을 들이지 못했던 것 같아요. 늘 다른 일을 하다가 식사 시간이 다 되어서 급하게 하는 요리들은 망하기가 십상이잖아요. 마치 제 글이 그렇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가끔은 투정도 부리고, 이해해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요. 반면에 복희의 글은 정말, 뭐랄까요. 마치 지리산 같았어요! 제가 어떤 말을 편지에 담아서 보내든 그저 그것대로 품어서 새로운 모습으로 되돌려주는 그런 지리산이요. 복희가 편지에서 묘사해주었던 사랑 가득한 지리산 말이에요. 복희는 모든 편지에서 저를 있는 그대로 ‘기다려주고’ ‘감싸 안아주고’ 있었어요. 


제가 어떻게 이 편지를 써왔는지에 대해서 후회하고 자책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건 큰 의미가 없다고 느끼거든요. 다만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펜팔을 충분한 감사와 온전한 솔직함을 담고 싶었어요. 저는 늘 그 두 가지가 참 어려워요. 내 삶에 온 모든 것들을 하염없이 감사해보려고 노력하는데, 늘 거짓감사를 드리는 것만 같아요. 누군가에게 솔직하려고 노력하는 제 모습은 늘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져요. 


어느 바이올리니스트의 소리가 몹시도 아름다워 흉내내려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의 몸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고, 그런 상태로 겉으로만 소리를 흉내내려니 당연히 될 리가 없었어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만들어내기까지의 여유로움과 꾸준함을 따라해고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그래야 한 음을 낼 때도 곧고 맑은 소리가 나고, 다른 악기들의 소리와도 듣기 좋게 어우러지더라구요. 언제나 가장 어려운 적은 조급함이에요. 지금의 나의 행동이 앞으로의 나를 어떻게 쌓아가고 있는지 상상할 줄 아는 것이 현명함이더라고요.


저의 말들은 어쩌면 그런 조급함으로 자아내어진 문장들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저의 하루도요. 그러니 그렇게 모든 일을 혼자 다 해내려고 하고, 하루도 쉬지 않고, 나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도 허락하지 않고서 헛된 것들을 좇아 흉내내었던 거에요. 그런데 그런 제 말들을 싯다르타의 법문으로 만들어준 건 바로 복희가 섬세하게 들어주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복희를 보면 저는 제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희같은 사람이 되주었나 돌아보게 돼요. 흉내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걸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져요. 더욱 옹골진 진심을 담아 다른 존재를 대하고 싶다는 말이에요. 나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어요.


복희가 전해준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저도 그 말을 같이 새겨보려고요. “삶은 생각보다 진지하지 않다.” 식욕이 없고 무기력할 때도 번아웃이 왔을 때도 그 말을 되새기면서 산책하고 음악을 들어볼게요. 그나저나 이제는 식욕도 기력도 다시 돌아왔나요?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지금쯤이면 돌아왔어야 할텐데 말이죠. 흰개미님과 집을 공유한 경험도 지금 돌아보니 조금 웃기기도 하나요? 물론 복희의 고생은 유감입니다… 그래도 복희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늘 재밌어요.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거리가 많은지! 누가 복희더러 진지하다고 했나요?


참, 그리고 위안이 될 만한 사실 하나 알려줄까요? 제가 초등학교 때 친구들이 저를 싫어했던 적이 있었어요. 잘난 척 한다고, 재수없다고요. 성적도 좋고 발표도 잘했던 제가 샘이 났던 모양이에요. (제가 생각해도 조금 재수없긴 했어요.) 제게는 그게 큰 상처였던지 그 이후로 겁이 많이 생겼는데요. 사실 지금까지도 그래요. 누군가가 저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감각이 제게 트라우마처럼 남아 불쑥불쑥 튀어나오거든요. 그때와 지금이 다른 점은 사람들이 그때처럼 대놓고 제 욕을 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대놓고 욕을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애정을 담아서요..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이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해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흠흠, 같은 욕을 들었다는 것에서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는데, 위안이 되었을지 모르겠네요. 


복희, 아마 이게 제가 드리는 마지막 편지일 수도 있겠어요. 그동안 저는 괜찮은 펜팔 짝꿍이었나요? 그랬든 안 그랬든, 복희는 제게 최고의 펜팔 짝꿍이었어요. 복희가 제게 보여준 기다림과 진지함에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해요. 저는 지금 보슬보슬 봄비가 내리는 제주도에 와 있어요! 이곳은 바람도 많이 불어 마치 하늘에서 누군가가 계속 분무기를 뿌리는 것만 같아요. 내일이면 바다를 만나겠어요. 먹먹하고 향긋하지만은 않은 바다를요. 사랑하는 공간이 될 것만 같아요. 이 곳을 가득 담아 지리산으로 갈게요. 복희에게 보여드릴 햇살 담긴 웃음을 들고 갈게요. 안녕, 곧 만나요. 


양팔 들고 벌서고 있는 산달이, 사랑과 솔직함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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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우 편지 : 덕복희와 산달] 그저 그것대로 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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