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20201119, 지리산 산악열차에 반대하며 국회 앞 농성을 시작하던 날, 서울로 올라오지 못한 하동 분들은 하동군청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기획재정부가 한걸음 모델우선 적용과제로 논의했던 알프스하동 프로젝트’(지리산 산악열차 사업)한걸음 모델에서 제외하고, 삼호(현 대림건설)가 하동군과 맺었던 알프스하동 프로젝트 추진 양해각서 효력 만기 종료를 통보한 후에도 하동 분들의 1인 시위를 계속하였다. 중앙정부도 사업자도 아니라고, 하지 않겠다고 손을 떼었지만 윤상기 하동군수(이하 윤 군수)는 계속하겠다고 똥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2021, 2022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빠지지 않고 1인 시위를 하던 하동 분들은 2022314일 하동군청 앞에서 지리산 산악열차 백지화를 위한 농성에 들어갔다. 61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군수, 도의원, 군의원 등에 출마하는 후보자들과 하동군민에게 지리산 산악열차의 불편한 진실을 알리고, 후보자들이 지리산 산악열차 백지화를 공약으로 채택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북한산국립공원 관통도로, 국립공원 케이블카 등으로 여러 차례 농성했던 나는 하동군청 앞 농성장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짐작은 되었으나, 그래도 분주하면서도 더딘 시간의 흐름, 오가는 사람들 때문에 든든하다가도 외롭고, 작은 일에 날카로워지는, 일반적인 농성장과 다른 어떤 분위기가 있는지 궁금했다.

 

2022425일 월요일, 지리산 산악열차 백지화 농성 31일째 날, 농성은 아침 75분 시작되어, 저녁 715분 마무리되었다. 일반적인 농성장과 다르게 지리산 산악열차 백지화 농성장은 매일 아침 75분 설치했다가, 저녁 7시 철거한다. 나름 농성 경험이 있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는 이런 번거로운 농성장 운영이 낯설게 느껴졌다.

 

# 아침 75

농성장에 도착한 최지한 지리산 산악열차 반대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이하 최집장)은 그늘막을 치고, 현수막을 걸고, 피켓을 세우고, 농성일자를 수정한다. 농성장 붙박이 활동가인 최집장은 농성장 설치를 마친 후 책을 읽다가, 735분 하동군청으로 들어오는 윤 군수 차가 보이자, 입구로 뛰어나가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지른다. 윤 군수 차가 사라지자 최집장은 다시 책을 읽고 차를 마신다.

IMG_0892.JPG

 

# 10

차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농성장의 또 다른 붙박이 활동가 감자가 도착했다. 감자는 보통 9시쯤 오는데, 오늘은 다른 일이 있어서 좀 늦게 도착했다고 한다. 최집장과 감자는 대화라고 하기엔 모호한 말들을 쏟아낸다. 농성장에 어떤 일이 있는지 묻는 전화가 여기저기서 오고, 하동경찰서에서도 뭔 일 없냐는 전화가 온다. 오늘이 뭐 특별한 날일까?

 

오늘 아침, 하동군청에 도착한 최집장은 그늘막을 설치할 곳에 놓인 녹차 화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급조된 것이 확실한 녹차 화분 9개가 사람들이 다니는 보행로에 놓여 있어, 그늘막을 칠 장소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농성을 방해하려는 목적이라고밖에 안 보였다.

IMG_0896.JPG

 

# 1130

민주노총 소속 전국요양서비스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직장갑질, 임금체불, 업무감시, 노조탄압 등을 멈추라는 집회를 시작했다. 집회는 1시간 정도 진행된다. 불나비, 연대투쟁가, 또다시 앞으로, 가자 노동해방, 민들레처럼 등이 확성기를 통해 나온다. 농성장이 설치되고, 민중가요가 울려 퍼지는 하동군청 앞은 민주주의의 실험장이 되어가는 걸까?

오늘 낮밥은 김밥이다. 농성을 지지하는 하동 분이 김밥과 고구마를 가져오셨다. 농성을 하다 보면 밥을 대충 먹게 된다. 활동가들은 농성 초기에는 하동군청 구내식당에서 낮밥을 먹었는데, 산악열차 반대 몸자보를 벗고 들어오라고 하여, 요즘은 근처 밥집에서 먹는다고 한다.

IMG_0899.JPG

 

# 1137

윤 군수 차가 나가는 것이 확인되자, 김밥을 먹던 활동가들은 뛰어나가 손을 흔들며 윤상기를 연호한다. 이 장면만 본다면 윤상기 지지자로 오인 받기 십상이다. 그런데 윤상기 하동군수는 본인 이름이 불리는 이 순간을 가장 싫어한단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상황이랄까.

IMG_0900.JPG

 

# 1150

농성을 지지하는 하동 분들 3(1명은 어린이)이 농성장을 방문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오늘 농성장 이야기의 핫이슈는 녹차 화분이다. 선거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하동군청 앞을 지나가던 어르신이 옳은 일 하시네요. 수고하십니다.’라며 박수 치신다. 농성장 앞을 지나는 분들은 대부분 지리산 산악열차 반대에 공감을 표한다.

 

# 130

활동가들이 하동군청 부속실과 재정관리과에 전화하여 녹차 화분 설치 이유에 대해 질문한다. 재정관리과에서는 ‘2023년 세계 차 엑스포의 성공 기원을 위해 설치하였다 하고, 활동가들은 성공 기원을 위해 설치한 화분 치고는 너무 허접하다고, 와서 보면 왜 이렇게 문제제기하는 지 이해할 거라고 말한다.

 

하동군청 앞에 와보면 알겠지만, 차 엑스포 성공 기원을 위한 녹차 화분이라고 하기엔 너무 정성이 없는, 그래서 성공 기원을 원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동군 공무원들이 X맨으로 활동하는 건 아닐텐데..

IMG_0906.JPG

 

# 25

재정관리과 직원 2명이 녹차 화분을 보러 나왔다. 직원들은 활동가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보행로를 확보해달라는 말에는 무척 난감해한다. “녹차 화분”,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겠지만 하동군의 수준이 참 유치하고, 천박하다.

 

# 220

농성장 오후 담당자가 왔다. 대책위는 붙박이 활동가 말고도, 원하는 분들이 오전과 오후로 나눠 농성장에 나온다고 한다. 농성장에 모인 사람들은 오늘 있었던, 특히 녹차 화분 이야기를 나눈다.

IMG_0908.JPG

 

# 252

윤 군수 차가 나가자 활동가들은 손을 흔들고, 윤상기를 연호한다. 윤 군수 차 뒤에서 누군가가 사진 찍는 것이 확인되자 최집장이 부속실에 전화하여 왜 사진을 찍느냐며 항의한다.

 

# 330

최집장이 지리산사람들이 515, 16일 기획하는 불편한 진실 캠프, 섬진강 둑길을 걸어 하동군청까지 오는 길을 안내하겠다고 하여, 옛 하동철교와 하동송림, 하동공원 등을 돌아봤다.

 

# 54

하동읍을 한 바퀴 돌아본 후 농성장에 돌아오니 오후 담당자는 떠났다고 하고, 다른 특별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 저녁 640

붙박이 활동가 감자가 집에 갈 버스 시간에 맞춰 농성장을 떠났다.

 

# 저녁 7

농성장을 설치할 때와 같은 순서로 농성장을 철거한다. 의자와 책상을 접고, 현수막을 떼고, 그늘막을 접고, 피켓을 정리한다. 하동군청 위 하늘이 어둑해지는 시간, 길고 길었던 지리산 산악열차 백지화 농성장의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오늘 농성장에서의 주요활동은 윤 군수 차량이 들어오고 나갈 때 손 흔들며 소리 지르기, 녹차 화분 설치에 항의하기, 차 마시며 이야기 나누기 등이었다.

IMG_0921.JPG

 

오늘(426, 농성 32일째 날) 나는, 새벽 330분에 일어나 몇 가지 서류를 정리하고, 이 글을 쓴다. 아침 75, 농성장이 설치되는 장면을 상상하며, 아침밥을 먹는다. 오늘은 농성장에 별일이 없기를 바란다

 

농성장을 방문한 사람들은 차를 마시며 지리산과 섬진강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지구에서 비인간 생명들과 함께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이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탐욕을 멈출 수 있는지를 이야기할 것으로 생각된다.

전체댓글 0

  • 21091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지리산 산악열차 백지화 농성장의 하루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