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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늘
    바늘 김 경 옥 쇠를 갈고 남은 몸이다 매끈한 은빛 몸매 뾰족한 침 끝, 더는 아무것도 없다 저 침에 닿을 때까지 사방 팔방 십이방 모서리 없어지고 이웃마저 사라질 때까지 얼마나 제 몸을 깎아냈을까 이 악물고 덜어내어 물러설 수 없는 절벽에 이르렀을까 갈고 닦는 일의 무한함이여 깎고 덜어내는 일의 은은한 아픔이여 가는 몸속에서 들리는 소리 하나에 기울이며 작은 귀 하나만 열어놓은 세월이여. --------------------------------------------------------------- 죽을 때까지 배우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는 말은 그저 지식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무엇이며 왜 존재하고 있으며 이 세상은 또 무엇인가 하는 궁극적 질문을 안고 사는 존재다. 세상을 살아내는 일의 첫 번째가 나의 존재와 나를 존재하게 하는 이 세상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느티나무의 작은 박새 한 마리도 알에서 깨어나 날개를 퍼덕이며 제가 날짐승인지 들짐승인지부터 가늠하고 바람이 불면 어디로 날아야 한다는 것을 눈치 채며 자란다. 그렇게 모든 생명은 구체적 생활세계 속에서 자기 존재와 세상을 일치시켜내는 것이 세상을 살아내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그 답을 말하고 죽는다. 태어나 죽기까지의 삶 자체가 스스로의 답일 것이니 그렇다. 다시 말하면 삶에는 정답이 없고 우리는 스스로를 살다가 죽을 뿐이다. (박두규. 시인)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11-13
  • 겨울 산에서
    ■ 시 겨울 산에서 이건청 나는 겨울 산이 엄동의 바람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서서 겨울밤을 견디고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큰 그늘 속에 빠져 기진해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작은 암자에 며칠을 머물면서 나는 겨울 산이 살아 울리는 장엄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대개 자정을 넘은 시간에 시작되곤 했는데 산 아래, 한신계곡이나 칠선계곡 쪽을 지나 대원사 스쳐 남해 바다로 간다는 지리산 어느 골짜기 물들이 첫 소절을 울리면 차츰 위쪽이 그 소리를 받으면서 그 소리 속으로 섞여 들곤 하였는데 올라오면서 마천면 농협 하나로마트 지나 대나무 숲을 깨우고 산비탈, 마천 사람들의 오래된 봉분의 묘소도 흔들어 깨우면서 골짜기로 골짜기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오를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곡진한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었는데 산 중턱을 넘어서면서 홍송들이 백 년, 이 백년씩 그들의 가지로 서로의 어깨를 걸친 채 장대한 비탈을 이루고 있는 곳까지 와서는 웅장한 코러스가 되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내가 사순절의 어느 날, 대성당에서 들었던 그레고리 찬트의 높은 소절과 낮은 소절이 번갈아 마주치는 어느 부분과 같았다. 이따금 이 산에 사는 산짐승들이 대합창의 어느 부분에 끼어들기도 하는 것 같았는데 그때마다 그레고리 찬트 속에서 짐승들의 푸른 안광이 빛나곤 하였다. 겨울 산이 울려내는 대합창이 온 산을 울리다가 서서히 함양 쪽으로 잦아들 때쯤 건너 쪽 지리산 반야봉, 제석봉의 윤곽도 밝아오는 것이었는데 날이 밝고 산의 윤곽들이 선연해지면 자작나무도 굴참나무도 그냥 추운 산의 일부로 돌아가 원래의 자리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는 것이었다. 그냥 겨울 산이 되어 침묵 속으로 잠겨드는 것이었다.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02-26

실시간 시를 찾아서 기사

  • 겨울 산에서
    ■ 시 겨울 산에서 이건청 나는 겨울 산이 엄동의 바람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서서 겨울밤을 견디고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큰 그늘 속에 빠져 기진해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작은 암자에 며칠을 머물면서 나는 겨울 산이 살아 울리는 장엄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대개 자정을 넘은 시간에 시작되곤 했는데 산 아래, 한신계곡이나 칠선계곡 쪽을 지나 대원사 스쳐 남해 바다로 간다는 지리산 어느 골짜기 물들이 첫 소절을 울리면 차츰 위쪽이 그 소리를 받으면서 그 소리 속으로 섞여 들곤 하였는데 올라오면서 마천면 농협 하나로마트 지나 대나무 숲을 깨우고 산비탈, 마천 사람들의 오래된 봉분의 묘소도 흔들어 깨우면서 골짜기로 골짜기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오를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곡진한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었는데 산 중턱을 넘어서면서 홍송들이 백 년, 이 백년씩 그들의 가지로 서로의 어깨를 걸친 채 장대한 비탈을 이루고 있는 곳까지 와서는 웅장한 코러스가 되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내가 사순절의 어느 날, 대성당에서 들었던 그레고리 찬트의 높은 소절과 낮은 소절이 번갈아 마주치는 어느 부분과 같았다. 이따금 이 산에 사는 산짐승들이 대합창의 어느 부분에 끼어들기도 하는 것 같았는데 그때마다 그레고리 찬트 속에서 짐승들의 푸른 안광이 빛나곤 하였다. 겨울 산이 울려내는 대합창이 온 산을 울리다가 서서히 함양 쪽으로 잦아들 때쯤 건너 쪽 지리산 반야봉, 제석봉의 윤곽도 밝아오는 것이었는데 날이 밝고 산의 윤곽들이 선연해지면 자작나무도 굴참나무도 그냥 추운 산의 일부로 돌아가 원래의 자리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는 것이었다. 그냥 겨울 산이 되어 침묵 속으로 잠겨드는 것이었다.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02-26
  • 세석고원을 넘으며
    세석고원을 넘으며 고 정 희 아름다워라 세석고원 구릉에 파도치는 철쭉꽃 선혈이 반짝이듯 흘러가는 분홍강물 어지러워라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고 발아래 산맥들을 굽어보노라면 역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산머리에 어리는 기다림이 푸르러 천벌처럼 적막한 고사목 숲에서 무진벌 들바람이 목메어 울고 있다 나는 다시 구불거리고 힘겨운 길을 따라 저 능선을 넘어야 한다 고요하게 엎드린 죽음의 산맥들을 온몸으로 밟으며 넘어가야 한다 이 세상으로부터 칼을 품고 그러나 서천을 물들이는 그리움으로 저 절망의 능선들을 넘어가야 한다 막막한 생애를 넘어 용솟는 사랑을 넘어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저 빙산에 쩍쩍 금가는 소리 들으며 자운영꽃 가득한 고향의 들판에 당도해야 한다 눈물겨워라 세석고원 구릉에 파도치는 철쭉꽃 선혈이 반짝이듯 흘러가는 분홍강물 어지러워라 고정희 시인(1948~1991) 본명 성애, 전남 해남 출신, 5남 3녀의 장녀로서 거의 독립적으로 성장.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75년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광주 YMCA 대학생부 간사,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판부 책임간사를 거치는 동안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그 이상의 어떤 본질 문제를 환기시키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김주연 평) 시들을 써왔다.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평민사, 1979), {실락원}(인문당, 1981 절판), {초혼제}(창작과 비평사, 1983), {이 시대의 아벨}(문학과 지성사, 1983), {눈물꽃}(실천문학사, 1986), {지리산의 봄}(문학과 지성사, 1987),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창작과 비평사, 1989), {Sister's We Are the Path and the Light}(둥지, 1989), {광주의 눈물비}(동아, 1990), {여성해방출사표}(동광출판사, 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들꽃세상, 1990), {뱀사골에서 쓴 편지}(미래사, 1991),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창작과 비평사, 1992) 등을 통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쉽게 절망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함께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했다. 그는 5.18 광주 항쟁을 계기로 전통적인 남도 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어 민중의 아픔을 드러내고 위무하는 장시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으로 일하면서 여성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 1984년 대안 문화 운동 단체인 [또 하나의 문화] 창립에 참여, 이후 적극적인 동인 활동과 함께 한국 여성 해방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 1989년에는 여성 해방을 지향하는 여성들의 자발적인 출연으로 창간된 여성 정론지 {여성신문}의 초대 주간을 맡아 1년간 그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하였으며,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1990)에서는 여성의 삶과 수난을 통하여 인류 해방의 비전을 제시하는 등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1991년 6월 8일, 한국 여성 해방 문학의 정립을 위한 작업의 하나로서, [또 하나의 문화] 월례 논단에서 "여성주의 리얼리즘과 문체 혁명"을 주제로 발표를 마치자마자 평소 그의 시의 모태가 되어 온 지리산 등반을 감행, 이튿날 뱀사골에서 실족, 43세를 일기로 불타던 삶을 마감하였다. ( 또 하나의 문화 자료 참조)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01-26
  • 호중별천(壺中別天)
    호중별천(壺中別天) - 최치원 동방 나라 화개동은 항아리 속의 별천지라네 선인이 옥 베개를 권하니 이 몸과 이 세상이 문득 천년이라 봄이 오니 꽃이 땅에 가득하고 가을이 가니 하늘에 낙엽 흩날리네 지극한 도는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이는 눈앞에 있었다네. 자연에 흥취 있다고 말들 하지만 어느 누가 이 기미를 알겠는가 무심히 달빛을 쳐다보며 묵묵히 앉아서 돌아가는 것도 잊어버리네 천지의 비밀을 말해 어찌 혀를 수고롭게 하겠는가. 강물이 맑으니 달그림자 비추네 장풍은 수많은 골짜기에서 일어나니 붉은 잎 가을 산과 하늘이라네. 東國花開洞 壺中別有天 仙人推玉枕 身世欻千年 春來花滿地 秋去葉飛天 至道離文字 元來是目前 擬說林泉興 何人識此機 無心見月色 默默坐忘歸 密旨何勞舌 江澄月影通 長風生萬壑 赤葉秋山空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2-11-15
  • 생계부
    생계부(生計簿) 이 중 현 오늘도 시간의 재고가 겹겹이 쌓여 녹슬어갑니다. 시장이나 영화관, 길바닥이나 산자락에다 폐기하자니 걸음마다 비용이 청구됩니다. 시간이 나를 버릴 때까지는 시간의 무게를 견뎌야 합니다. 잔고가 아슬아슬한 사랑은 헤프게 소비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사랑이 마이너스로 내려가면 슬픔의 잔고가 올라올 것 같아서요. 꽃이나 길고양이에게 몇천 원 정도의 사랑은 지출할 수 있지만 과소비하는 것 같아서 가슴 두근거리는 요즘입니다. 월정액의 스마트폰으로 세상을 독서하는 것도 마감할 것입니다. 실은 스마트폰이 돈 받으며 나를 독서했는데 모른 척했습니다. 이제 고독을 적립하면서 이자까지 챙기며 나를 꾸리겠습니다. 유행 따라 환호했던 의상들이 옷장에 숨어 지냅니다. 유행이 알몸으로 나를 껴안을지라도 단호하게 거부하고 유행을 외면하는 유행으로 그와 거래하겠습니다. 헬스장에서 가슴 근육을 꿈틀거리게 하고 허벅지를 키우려고 땀 흘리며 지출하지 않겠습니다. 꿈틀거리고 싱싱한 사랑의 신상품을 꿈꾸기엔 대출받아 연명하는 헐벗은 목숨에게 부끄러움만 연체할 뿐입니다. 이중현 시인 * ‘소설문학 신인상(시)’, ‘세계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 * 시집 : ‘물끄러미 바라본 세상’ ‘아침 교실에서’ ‘사람을 보면 눈물이 난다’ * 동시집 : ‘공부 못하는 이유’ ‘힘도 무선전송 된다’ ‘나는 나’ * 동화집 : ‘나의 비밀친구’ ‘여울각시’ ‘마지막 은어낚시’ ‘운동장에 멧돼지가 나타났다’ 외 다수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2-10-13
  • 그 날, 그 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날, 그 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여순사건 관련 구례경찰서 집단총살 사건 [김인호 시인] 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그 날, 그 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 나이 여든일곱 이 날 이때껏 먹도록 소원하지 않는 날이 없었네 아버지를 저승길로 안내한 열세 살 소년의 그날, 1948년 11월 18일 그 날, 그날, 그날로 돌아 갈 수만 있다면 내 원도 한도 없겠네 친구들과 놀고 있던 주조장 앞마당에 나타난 헌병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아는 사람을 찾을 때 자랑스럽게 손을 들었던 열세 살 소년의 그 날, 앞장서서 헌병들을 집에까지 안내했던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바랐네. ‘나는 아무 죄없응게 금방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경찰서로 끌려간 아버지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그 날 그날, 하필이면 반군들의 구례경찰서 장악을 위한 총공세의 밤이었네 콩 볶듯 볶아대는 총소리가 무서워 할아버지와 마루 밑에서 이불을 둘러쓰고 숨죽이며 밤을 지새웠던 그날 밤 반군들의 공습에 대비한 경찰들에 의해 그날 밤 아버지는 *경찰서 공터에서 총살을 당하고 말았다네. 반군들이 산으로 쫓겨 가고 거리가 쥐 죽은 듯한 아침 용기를 내어 넘어다본 경찰서 공터에는 시체가 즐비하였지만 더 가까이 가볼 수 없어 멀리서만 눈물만 훔쳤었네 경찰들이 마을사람들을 동원해 그 시신들을 봉성산에 묻었다는데 무 묻듯이 구덩이 세 개에다 죄다 묻었다는데 그 자리 빙 둘러 철조망 치고 군인들이 지켜서 달려가 시체를 찾아올 수도 없었네 한 세 달이 지나고서야 군인들이 철수해 할아버지가 아들을 찾으러 갔는데 송장냄새 어찌나 지독하고 알아볼 수도 없어 찾지를 못했다네 그날 이후 할아버지는 화병으로 아들 뒤를 따라가시고 나는 아버지를 저승길로 내몬 자식이란 멍에를 쓰고 한평생을 한으로 살아왔네 새끼줄에 묶여 사람을 죽이려면 조사나 하고 죽이라고 억울하다고 절규를 하며 즉결처형 당했다는 아버지를 가슴에 묻고 한 날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는 한 많은 삶을 살았네 내 나이 여든일곱 이날 이때껏 소원하지 않는 날이 없었네 아버지를 저승길로 안내한 열세 살 소년 적 그날, 1948년 11월 18일 그 날, 그날, 그날로 돌아 갈 수만 있다면 내 원도 한도 없겠네 [김인호 시인] -박덕서씨 이름을 찾았다 ▲ 구례읍 봉성산 밑에 있는 여순사건희생자위령탑. ⓒ김인호  프레시안 신문 기사 보기 ☛ https://v.daum.net/v/20220816091613427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2-08-26
  • 그 길은 아름답다
    그 길은 아름답다 신경림 산벚꽃이 하얀 길을 보며 내 꿈은 자랐다 언젠가는 저 길을 걸어 넓은 세상으로 나가 많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가지리라 착해서 못난 이웃들이 죽도록 미워서 고샅의 두엄더미 냄새가 꿈에서도 싫어서 그리고는 뉘우쳤다 바깥으로 나와서는 갈대가 우거진 고갯길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이제 거꾸로 저 길로 해서 돌아가리라 도시의 잡답에 눈을 감고서 잘난 사람들의 고함소리에 귀를 막고서 그러다가 내 눈에서 지워버리지만 벚꽃이 하얀 길을, 갈대가 우거진 그 고갯길을 내 손이 비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내 마음은 더 가난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면서. 거리를 날아다니는 비닐 봉지가 되어서 잊어버리지만 이윽고 내 눈앞에 되살아나는 그 길은 아름답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아니어서 내 고장으로 가는 길이 아니어서 아름답다 길 따라 가면 새도 꽃도 없는 황량한 땅에 이를 것만 같아서 길 끝에서 험준한 벼랑이 날 기다릴 것만 같아서 내 눈앞에 되살아나는 그 길은 아름답다 - 하동공원 벚꽃 /사진 김인호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2-06-12
  • 만물이 지나가는 길
    만물이 지나가는 길 김영석 서리 낀 저녁 하늘 줄지어 철새들이 날아간다 어느덧 내 안의 길을 지나 하늘의 길 따라 날아간다 강물이 내 안 어딘가 물길을 지나 굽이굽이 벌 끝으로 흐르고 노루 사슴이 내 안의 오솔길을 벗어나 어드메 깊고 깊은 산길을 달린다 가랑잎도 바람에 불려 내 안 어느 공터를 구르다가 이슥한 뒤안으로 돌아간다 오늘도 돌탑에 기대어 서서 내가 바로 하나의 길이었다고 다시 한번 조용히 깨닫는다 내 마음의 밝음과 어둠 슬픔과 그리움과 쓸쓸함이 내 안의 길목을 지나가는 한갓 만물의 기척이었다고 다시 한번 조용히 깨닫는다 - 섬진강 노을 사진 / 김인호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2-05-10
  • 평화의 걸음걸이
    평화의 걸음걸이 나희덕 1. 1950년 늦여름 지리산 어느 마을에서의 일이다 새벽녘 동구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마을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그 외길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국군과 인민군이 총구를 겨누며 대치하고 있는 양쪽 산자락 사이 좁은 오솔길 주민들은 숨죽이고 총탄의 여울을 건너갔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외쳤다 아가, 뛰지 마라, 절대 뛰어서는 안 된다! 천천히, 천천히 걸어야 한다! 그 외침을 방패삼아 걷고 있는 소년 앞으로 한 청년이 겁에 질려 뛰기 시작했다 문득 총성이 들렸고 청년은 쓰러졌다 숨죽여 걷는다는 일 그것이 소년에게는 가장 어려운 싸움이었다고 한다 2. 평화의 걸음걸이란 총탄의 여울을 건너는 숨죽임과도 같은 것 두려워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두려움과 싸우며 총탄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나 기척으로 걸어가는 것 심장을 겨눈 총구를 달래고 어루만져 거두게 하는 것 양쪽 산기슭의 군인들이 걸어 내려와 서로손 잡게 하는 것 그날까지 무릎으로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내는 것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2-04-13
  • 쌀밥 먹는 시간
    쌀밥 먹는 시간 - 김은숙 경기도 여주땅을 지나다가 쌀밥집이라는 상호를 처음 보았는데 쌀밥이라는 낯익은 어휘가 한 집의 주인으로 반듯하게 서 있는 게 문득 새로워 차림표에 의젓하게 자리한 쌀밥 한그릇 반가이 청했는데 보통의 이런저런 반찬으로 차려진 밥상의 중심에 마지막으로 올라온 쌀밥 한 그릇 한참 동안 밥그릇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다가입 안 가득 담아 넣는 한 숟가락의 밥 사십여 년 지탱해온 내 몸의 모든 것이 때마다 떠 넣은 밥숟가락에 힘 입은 것이어서 내 디뎌온 발자국 하나하나가 이 쌀 한 톨 한 톨의 힘이 아닌 것이 없어서 앞에 놓인 쌀밥 한 그릇 한 숟가락의 밥이 새삼 가슴 뜨겁게 뭉클해지는데 뿌리 끝 흔들리는 절망에 닿아서도 서로를 부축하여 굳건히 어깨를 걸어온 벼들이 벌판 가득 일렁이고 불어오는 바람도 넉넉히 품은 서늘한 깊이가 고단한 일상의 허기를 채우는 이 땅의 가을 입안 가득 쌀밥을 꼭꼭 씹어 삼키며 한 톨 한 톨의 쌀알들이 뜨겁게 몸을 데우는 시간 영혼의 허기도 비로소 삭아들며 푸근해지고 한 그릇의 밥 앞에서 숙연해지는 가을 한나절 생활에 지치고 발걸음 무거운 이들에게도 나도 더운 김 솔솔 나는 뜨거운 밥 한 그릇 지어내고 싶다 -분홍노루귀 / 사진 김인호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2-03-09
  • 돌담
    돌담 김기홍 발길에 걸리는 모난 돌멩이라고 마음대로 차지 마라 그대는 담을 쌓아 보았는가 큰 돌 기운 곳 작은 돌이 둥근 것 모난 돌이 낮은 곳 두꺼운 돌이 받치고 틈 메워 균형잡는 세상 뒹구는 돌이라고 마음대로 굴리지 마라 돌담을 쌓다보면 알게 되리니 저마다 누군가에게 소중하지 않은 이 하나도 없음을 *김기홍 시인(1957~2019) 전남 순천 출생, 1984년 실천문학 등단, 시집 『공친날』 『슬픈희망』 -피아골 추동마을 (사진 김인호)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2-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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