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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똥이라면 그것도 작품이 될 수 있는가?
미술이나 문학이나 뭐든 작품의 원작은 무엇일까? 소설은 이 질문을 던진다. 사진이 작품이 되었다면 그 사진의 원작은 배경으로 나온 자연? 아니면 그 속의 인물? 아니면 찍은 사람? 원작은 반드시 불태워 없애버리는 재단에 초대를 받은 작가의 여정은 흥미롭다. 실수와 사고로 일이 꼬이는데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듯 초조하다. 그 유명한 캘리포니아의 화재를 통과하는데 과연 경험일까 상상일까도 궁금하다. 가끔 신문보도에서 접하는 뉴스이기는 하지만 많은 재산을 개에게 물려주는 사람들이 간혹있다. 개를 싫어한다면 혹, 좋아한다면 읽는 기분이 달라질까도 궁금하다. 난 개를 키우지만 개가 신기한 동물인건 인정한다. 하지만 나를 너무 좋아해서 싫다. 하필 작품의 이름의 'R의 똥'!(R은 개 이름의 첫자) 윤고은 만세!! 작품을 불태우진 않았지만 내 가슴 속에서 이렇게 잊혀지지 않고 불타고 있으니 내게로 넘어온 그녀의 작품이 원작이 되었다. 이 똥같은, 내가 끄적거리는 이런 독후감은(읽는 사람도 없고, 또 없길 바래지만) 나를 떠나 누구에게 불이 아니라 쓰레기통에 쳐 박히기를 바라며 독후감은 똥통에! ** 다른 이야기 작품명: 예술가의 똥 정량 30그램 신선 보관됨 생산및 밀봉 일자: 1961년 5월 이 작품은 작가의 진짜 똥이 들어있고 다 팔렸고 아직 유수의 미술관에 전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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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묘의 추억
초등학교 6학년쯤 파묘하는 것을 직접 본 기억이 있다. 동네 앞산에서 놀고 있는데 아저씨 몇 분이 일을 하고 있었다. 궁금해서 봤더니 파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파묘> 다른 친구들은 모두 무섭다고 도망갔는데 호기심이 강했던 나는 상세하게 옆에서 지켜봤다. 아주 오래전 무덤인데 뼈가 그대로 있었다. 당연히 해골도 그대로였다. 머리카락도 보였다. 보는 것은 별로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에 그 산에 지나칠 때마다 항상 생각이 났고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빨라졌다. 그리고 생각나는 장면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초장(초분)이다. 회 먹을 때 먹는 초장이 아니라 사람이 죽었을 때 나무나 땅 위에 평상처럼 만들어 그 위에다가 시체를 두고 풀로 덮어 두는 것이다. 오래전 정읍에 어느 산에서 초분을 본 적이 있다. 외사촌 형과 사냥을 갔다가 혼자 산을 돌아다니는데 초분을 발견하고 기겁했던 기억이 있다. 초분은 삼국사기에도 나와 있는 오래된 풍습 중에 하나이고 초분에다 시체를 두었다가 살이 썩고 나면 뼈만 취해서 무덤에 묻는 방식이다. 초분이 정식 명칭이고 전라도 서쪽에서는 아마도 초장이라고 했던 것 같다. 내가 산에서 풀로 덮은 시체를 봤다고 했을 때 동네 어른들이 초장이라고 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장면을 봤을 때가 1980년대였는데 그때까지도 초분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1970년대까지 섬이나 서해안 지역에서 많이 행해졌고 새마을 운동 이후에 금지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1980년대에도 꽤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장면들은 결코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파묘도 무섭지만 오래된 초분은 더 무섭다. 초분은 보통 2-3년 이후에는 묘를 써야 하는데 그 초분은 거의 시체가 다 보였기 때문이다. 어두운 숲에서 초분을 만났을 때 내 달리기는 그 어느 때보다 빨랐던 것 같다. 검색해 보니 초분이라는 영화가 1970년대에 있었다. 이두용감독의 김희라가 주연이었다. <영화초분> [영화초분 남해 초도의 어부 소돌은 5년전 친구 살해사건으로 복역하던 중에 모친상을 당해 간수와 동반하여 7일간의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난데없이 5년전의 시체가 떠올라 미역밭에 미역이 썩자 인심이 흉흉해져서 모든 것을 소돌이의 탓으로 여긴다. 소돌의 난처함을 보고 간수는 5년전의 사건을 조사한다. 뭍으로 나가려는 젊은이와 관광개발지로 팔려는 섬의 정신적인 지배자인 당무당과, 섬과 초분을 지키려는 노인들간의 대립이 한창일 때 간수가 당무당의 부정을 당국에 알리자, 당무당은 혼령의 환영에 쫓겨 벼랑에서 떨어져 죽고 소돌의 조카 임자만이 소돌을 대신하여 섬을 지킨다.] 초분을 행하는 이유는, 마땅한 묘자리가 없어 임시로 밭 어귀나 마을 뒷산 등에 가매장(假埋葬)하고자 할 때, 죽은 사람과 묘를 쓰고자 하는 땅의 운세가 서로 맞지 않을 때, 죽은 사람이 초분으로 만들어 달라고 할 때 등 다양하다. 또한 음력 정월과 2월에 사망한 경우, 이 시기에 흙을 파헤쳐서는 안 된다는 속신 때문에 초분을 행하기도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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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나무 해방일지
20여년전 일본에서 살 때였다. 나는 도쿄와 치바의 중간쯤에 살았다. 내가 사는 맨션 옆집은 주택이었다. 그 집 마당은 3평 정도였다. 어느 날 심심해서 그 3평의 공간에 몇 그루의 나무가 있는지 세어 본적이 있다. 무려 50그루가 넘었다. 저 작은 평수에 저렇게 많은 나무를 심을 수 있지... 그것도 아주 조화로운 모습이었다. 큰 나무와 작은 나무 그리고 더 작은 나무가 심겨진 3평짜리 정원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나도 땅이 있으면 양껏 심어 보자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300평이 조금 안 되는 땅에 집을 짓게 되었다. 그 때 생각대로 심고 싶은 나무는 다 심었다. 그러다 보니 집에 나무가 너무 많아졌다. 그래서 겨울 마다 더 이상 공간이 없어 겹치는 나무를 잘라내는 일을 하고 있다. 올해도 5그루의 큰 나무를 잘라냈다. 대부분 10년 이상 큰 나무들이고 한 때는 내가 애정하는 나무들 이었지만 속절없이 잘려 나가 땔감이 되고 있다. 나는 그 일본인처럼 조화롭게 나무를 심거나 가꾸는 것에 실패한 것이다. 우선 정확한 계획이 없었다. 아니 지식이 없었다. 그냥 무작정 심고 싶었던 나무를 심을 터가 있는 곳에 심었던 것이다. 다시 해보라고 하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한번 채워진 욕망은 다시 채울 필요가 없다. 어느 해 "욕망해도 괜찮아"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내용은 기억 나지 않는다. 그냥 당신이 꿈꾸던 욕망을 해도 괜찮다는 그 문구가 맘에 들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욕망이 있다. 채울 수 있는 욕망이 있고 채울 수 없는 욕망이 있다. 욕망을 충족하지 못한 인간은 결핍이 생기고 결핍은 결국 불행을 만들거나 불안한 심리 상태를 만든다. 프로이트는 그 결핍이나 욕망은 꿈에서 발현되고 그것은 결코 이루어 질 수 없기에 무의식 어두운 하드디스크에 꽁꽁 숨겨 두었다가 어느 날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고 했었다. 내가 나무를 좋아하거나 많이 심으려고 했던 것도 어느 한 곳의 무의식 속에 결핍에서 나타난 증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다. 내 고향집엔 나무들이 많았다. 뒷마당에는 아주 큰 나무들이 많았다. 키 큰 전나무와 오동나무 복숭아 나무 그리고 울타리는 탱자나무였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나무는 큰 감나무였다. 그 나무를 좋아해서 자주 올라가 멀리 해지는 지평선을 바라 보곤 했었다. 저 멀리 바다를 넘어가면 뭐가 있을까? 감나무는 가지가 약해서 잘 부러진다고 어머니는 나무에 올라가 있는 나를 혼냈지만 나무 위에서 나는 항복했었다. 어느 해 키 큰 나무가 잘려 나갔다. 그리고 탱자나무 울타리는 시멘트 블록으로 교체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무가 많은 집을 욕망했는지도 모른다. 경제학에서는 “한계효용체감의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어느정도 한계에 이르면 더 이상의 소비를 해도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나무를 매년 사고 싶은 만큼 심었으나 결국 점점 만족감이 떨어졌다. 어느 순간 나는 더 이상 나무를 심어서 얻는 만족감은 0에 수렴했을 때 나무에 대한 욕망은 더 이상 욕망이 아닌 것이 되었다. 지난 장날에 나가 보니 벌써 묘목이 나와 있었다. 묘목을 살펴보며 오래전 매번 장에서 묘목을 구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 많은 묘목 중에 이젠 더 이상 나를 유혹하거나 내가 욕망하는 나무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드디어 내 욕망을 채워졌음을 확인했다. 어쩌면 나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드디어 해방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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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봉 소리에 뒤집어진 크리스마스의 추억
곧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어린시절의 추억이 하나 있다. 40여 년 전만 해도 특별하게 놀이가 없었던 시골마을에서 동네 교회에서 펼쳐지는 크리스마스 연극은 꽤 인기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연극은 대부분 아기 예수가 태어나는 날의 상황을 연극으로 만드는데 내가 그 연극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교회에 다니지도 않던 내가 연극에 참여하게 된 배경은 이랬다. 당시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는데 친구 녀석이 자꾸 교회에 가자고 하여 딱 하루 간 적이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바로 그날 크리스마스 연극의 배역을 정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여관주인을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태어나는 바로 그 여관 주인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이들이 나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관 주인의 부인 때문이었다. 부인 배역을 맡은 아이는 당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공부 잘하고 예쁘기로 소문난 아이였다. 모두들 부러워한 이유는 바로 그 아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딸 역할로 나오는 아이도 너무 예쁜 아이여서 모두들 부러워 했다. 결국 나는 그 역을 하게 되었다. 나 역시 교회에 나가지도 않는데 모세나 동방 박사 역을 맡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이다. 그날부터 학교가 파하면 교회로 달려 가서 한 달 동안이나 연습했다. 특별하게 대사도 많지 않았지만 난생 처음 해보는 연극인 데다 첫 장면이 바로 나부터 시작해서 긴장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당시 최고 미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즐겁기만 했다. 나의 첫 대사는 "여보"였다. 막이 오르고 여관 주인이 중앙에 앉아 있으면 내가 달려가서 '여봉'하고 최대한 간지럽게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목적은 당연히 사람들을 웃기는 것이었다. 40년 전 당시 상황에서 동갑내기 여자아이에게 '여봉~~'하면서 간지럽게 대사를 하는 것은 파격적인 대사였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연습을 한 대사도 바로 그 대사다. 사실 지금 기억나는 유일한 대사도 바로 그 여보 소리였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시골 마을의 크리스마스…. 흰 눈이 펑펑 내렸고 오후 7시가 되면 연극은 막을 올리게 되었다. 연극 의상은 아랍인들의 전통 의상인 머리에 두르는 헤자브를 해야 하는데 헤자브를 할 것이 없어서 집에서 사용하는 커다란 보자기를 둘러 썼는데 나일론 보자기가 미끌미끌해서인지 일반 끈은 자꾸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인 바로 고무줄이었다. 탄탄하게 검정 고무줄로 고리처럼 만들어서 머리에 단단히 조여맸다. 시간이 가까워지자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연극이 시작되고 잠시 장내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막이 오르고 내가 뛰어가서 다소곳이 앉아 있는 당대 우리 학교 최고 미인에게 '여보옹…'이라는 대사를 해야 한다. 드디어 연극이 시작되었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헤자브의 끝이 밟혔다. 그 순간 머리를 죄고 있던 고무줄이 총알처럼 관중석으로 날아가 버렸다. 다시 헤자브를 할 수도 없어 헤자브로 사용했던 보자기를 관중석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달려가서 '여봉~~' 외쳤다. 내가 너무 느글 거리는 소리로 여보 소리를 외쳐서 그런지 관중석에서 웃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됐어, 역시 난 연극을 잘해"라고 속으로 흡족해 했다. 연극이 끝나고 왜 그렇게 웃었냐고 물었더니 매년 동일하게 진행되는 연극에서 내가 헤자브로 사용하던 보자기를 던져버리고 달려가는 모습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내 대사로 웃긴 것이 아니라 보자기를 던진 것 때문에 웃겼다는 것 때문에 실망이었지만 결과는 웃겼으니 내 역할은 제대로 한 것이었다. 그날 밤새 눈이 펑펑 내렸고 새벽까지 노래를 부르면 보냈던 크리스마스 이브는 유일하게 교회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낸 날이 되었다. 연극이 끝나고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 날의 긴장하고 있던 어린 나의 모습과 처음 여보 소리를 하면서 느꼈던 묘한 흥분과 부끄러움이 생각난다. 그때 나랑 함께 연극에서 부인으로 나왔던 동창은 지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고 한다. 그 아이는 지금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런데 그 검정 고무줄을 어디로 날아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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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시간
엊그제는 영화보고 울고 오늘은 책보며 운다. 여인숙 달방에 사는 사람도 불쌍하지만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에게 마음 쓰는 작가 이강산 때문에 눈물난다. 이 사람은 아마도 천사의 변신 아니면 분신 아닐까 생각해본다. "생명의 가치는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인가. 모두가 한순간만이라도 평화로운 삶을 누리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이틀 내내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내게 던지면서 그 답변을 궁구하는데 몰입했다." p116 "마른 수세미처럼 생이 고갈된 자신을 살리는 이유는 죽이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p123 겨울 방에 물이 어는 곳에서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고 싶어하는 이사람에게 눈물이 난다. 그이 다큐 사진 여인숙 펀딩에 참여해 책을 받았지만 사실 보지 않았다. 보나마나 음울하고 우울한 인간의 삶이 흑백으로 찍혀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책을 읽다보니 그 사진책이 궁금해 펼쳐본다. " 행복, 희망, 자유, 평화, 인권.인간의 근원적 특성을 포괄하는 추상어들. 생명이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누릴 수 있는 삶의 가치가 담긴 낱말이다. 이것을 달방 가족들이 여인숙에서 살아가는 동안 입에 담을 기회가 올까. 그것은 언제일까. 어떤 방법으로 가능할까. 나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오전 내내 이 화두에 집착했다. 그러면서 내가 할 일이 좀더 명확해지는 듯해서 마음이 고무되었다.p102 "나는 휴먼다큐 기획 의도를 소리내어 읽었다. 사회적 소외와 외면의 시공간에서 살아가는 삶의 기록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가치를 환기하고 공존과 상생, 인권과 평화를 도모함"p195 이런 사람의 마누라의 심정을 헤아려보고 또 자기 마누라의 심정을 헤아리는 그를 보며 그러기에 부부로 살아가 것이라 생각도 해본다. 한때 존경했던 분은 고 제정구씨였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방법은 여러가지겠지만 나의 생활 터전을 버리고 그들의 열악한 환경 속으로 들어가 함께 사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 아닐까. 제정구가 그런 사람이었다. 역시 이강산이 그런 사람이다. "몇번을 생각해 보았으나 휴먼다큐 여인숙 촬영이 먼저가 아니었다. 나와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사람을 우선 살리고, 그들이 단 하루라도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일이 먼저였다. 그들은 내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나 아니라 내가 그들의 생존을 위한 수단이 되는게 옳다는 판단이었다."p159 내가 한때 같이 놀아줬던 소년원의 아이들과 공주치료감호소의 환자들과 카토릭워커하우스에 밥 먹으러 오던 미국인들 생각이 난다. 이들도 국가에서 주는 생활비를 받아 살아갔지만 와서 먹는 점심은 풍성했다. 또 저녁까지 가져 갈 수 있었다. 나라가 부자니 가난도 질이 다르다. 그곳이나 이곳이나 술과 담배가 문제다.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결국 최악으로 치닫는다. "인철 아우는 가방을 어깨에 둘러멘 채 휘청거리며 역전 쪽으로 난 여인숙 골목을 빠져나갔다. 우두커니 지켜보는 인철 아우의 뒷모습에 언뜻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보았던 짐승이 오보랩되엇다. 푹설로 양식과 길을 잃은 숲속의 짐승. 가슴속 어딘가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이 겨울, 나는 지금 어는 숲에 서 있는지, 나는 짐승인지, 인간인지,"p155 "승기 형은 운동을 핑계 삼아 여인숙 골목을 걸을 때 외에는 종일 방에 누워 지낸다. 어쩌다 맥주를 마시는 일도 잇으나 대개는 매월 생계급여 받는 날, 하루뿐이다. 맥주를 두 번 마시는 순간, 그 금액만큼의 밥을 굶어야 한다. 형이 자신을 유폐시킨것처럼 방에 누워 지내는 까닭을 나는 여실히 안다. 허기를 피하기 위해서다. 형을 비롯해 많은 달방 가족들이 외출이나 실내 운동 따위의 움직임을 최소로 줄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 p238 "형이 다리가 불편한 탓에 주차장 바닥에 앉혀두고 내가 바가지에 물을 떠서 흘려주는 식으로 한 시간 남짓 닦앗다. 발톱은 싯누런 무좀 기운이 화석처럼 굳어 있었다. 손톱깍기로 해결이 되지 않아서 다음주에 철사를 자르는 니퍼를 준비해주겠다고 했다. 발등부터 발바닥까지 덕지덕지 쌓인 때를 벗기는 일은 하루로 부족했다. 당장은 냄새를 지우는 정도로 끝냈으나 며칠 더 닦기로 약속했다. "p303 "진실한 인간관계는 시간과 정성을 먹고 자라는 나무다."p264 "진실이야말로 최고의 사진이며 최대의 프로파간다."p269 사람은 다 인간이라 불리지만 그 시간은 다 다르게 흘러간다. 인간다운 시간이란 어떤 시간인가.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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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변신 그리고 요양병원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헤르만 카프카는 체코에서 태어났지만, 체코인이 아니고 유대인이었다. 독일 국민은 아니었지만, 독일어를 사용했다. 태어나서부터 병약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런 카프카가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가 되기 직전까지 집안의 가장이었다. 그는 힘든 외판원을 하며 가족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 일이 무척 힘들었지만, 가족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벌레가 되어 버리자 가족은효용이 사라진 그레고르 잠자를 처음에 보살피지만 결국 냉대하고 사라지기를 원한다. 결국엔 그는 벌레로 죽는다. 고레고르가 죽자 가족은 평안함을 느끼고 산책하러 나간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품는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은 워낙 유명한 소설이다. 하지만 아마도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친절한 소설이 아니고 읽고 나서도 개운한 소설도 아닌 데다가 쉽게 해석되지도 않는다. 우리에겐 오히려 카프가의 소설보다는 무라까미 하루끼가 쓴 "해변의 카프카"를 읽어 본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다. 해변의 카프카의 주인공은 15살의 남자아이다. 그는 15살이 되자 본인의 이름을 카프카라고 불러 달라고 한다;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은 네 탓이 아니야. 내 탓도 아니고. 예언 탓도 아니고, 저주 탓도 아니지. DNA탓도 아니고, 부조리 탓도 아니고, 구조주의 탓도 아니고, 제 3차 산업혁명 탓도 아니야. 우리들이 모두 멸망하고 상실되어 가는 것은, 세계의 구조 자체가 멸망과 상실의 터전 위에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지. 우리의 존재는 그 원리의 그림자놀이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아. 바람은 불지. 미친 듯이 불어대는 강한 바람이 있고,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있어. 그러나 모든 바람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사라져. 바람은 물체가 아니야. 그것은 이동하는 공기의 총칭에 지나지 않아. 너는 귀를 기울이고 그 메타포를 이해하는 거야." - 해변의 카프카 중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허무함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언제가 자신의 효용이 다하는 날이 온다. 즉 인간 존재에 대한 상실하는 순간 말이다. 그것이 언제인가? 그레고르 잠자는 더 이상 가장으로 돈을 벌지 못하자 효용이 다한다. 효용이 다하자 그동안 사업에 실패하고 무기력했던 아버지는 다시 직장을 나간다. 어머니는 하숙을 한다. 활력이 없던 가족은 가장역할을 하던 그레고리가 벌레가 되어 버리자 다시 활력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그레고리는 하기 싫던 억지로 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사무실 주변엔 구례 병원 요양병원이 있는데 가끔 병원에 갈 때 요양병원 안 병실을 보게 된다. 한 방에 4~6명의 누워 있는 사람들 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이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 안에 있다. 누군가 죽어 나가면 빈 침대엔 새로운 인간으로 채워진다. 어쩌면 카프카가 이 병실을 보았다면 침대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말한 변신한 그레고리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대부분 가족은 요양병원에 가는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더 가족에서 돌보기 어려우므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한다. 처음에 자주 찾아가지만, 점점 방문이 줄어든다. 주말엔 항상 일이 있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하는 일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개월에서 수년을 요양병원에 있게 되면 슬슬 이제 죽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요양병원에 있는 가족이 죽게 되면 홀가분한 생각을 하게 되고 밀어둔 해외여행을 떠나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현대 사회의 인간은 효용을 가지고 있을 때 가치를 인정받는다. 효용이 없는 인간은 잉여 인간이 되고 쓸모가 없는 인간이 된다. 폐기 처분 되지 않는 방법은 병들지 않아야 하며 돈을 벌거나 돈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오늘도 노인들은 공공 근로를 신청하기 위해 바쁘다. 자신이 아직은 효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가장들이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휩싸여 평생 하기도 싫은 일에 매달린다. 인간다운 삶이라는 것이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어쩌면 폭력에 가까운 압박에 의해 어쩔 수없이 지친 하루하루를 숙주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가 벌레가 되어 버리면 폐기 처리가 될 운명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레고르의 시체를 확인한 어머니는, 비로소 그의 몸이 납작하게 말라 있음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신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누이동생은 이따금 아버지 팔에 얼굴을 묻었다. 그들은 가족 테이블에 앉아, 세 통의 결근계를 작성했다. 오늘 하루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전차를 타고 교외로 향했다. 여러 달 동안 하지 못했던 가족 소풍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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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과 지리산의 흙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이곳
- [백두대간 마루금인 도로 : 사진 이완우] 남원시의 운봉읍과 주천면이 만나는 지역은 백두대간이 형성한 개성적인 지형이다. 운봉읍과 주천면이 맞닿아 있는 2km는 거의 평지 도로인데, 이 평지 도로가 지리산 자락 운봉고원의 외륜(外輪)으로 엄연한 백두대간 산맥의 마루금이다. 이 도로에서 정령치 방향을 바라보고 설 때, 이 도로의 왼쪽은 낙동강 수계이고 오른쪽은 섬진강 수계로서 이 지역은 곡중분수계(谷中分水界)를 이룬다. 백두대간 봉우리인 이곳의 수정봉 아래에 노치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백두대간 마루금이 관통하고 있다. 이 마을 앞의 운봉고원 곡중분수계 지역을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풍수적 관점에서 백두대간의 목 부분에 해당한다고 인식한 듯하다. 일제는 무게가 100kg 정도 되는 목돌을 6개 만들어 노치마을 앞의 평지에 깊숙이 묻었다. 일제가 이렇게하여 한반도의 백두대간에 흐르는 기맥을 누르려 했다는 이야기가 이 마을에 전해온다. 이곳 노치마을 회관 옆에는 이때 묻었던 목돌 중 5개를 파내어 보관하고 있다. 곡중분수계이며 백두대간 마루금인 2km 도로 구간의 중간 지점 가까이 낙동강 수계인 곳에 남원 백두대간 생태교육장이 있다. 이곳은 백두대간의 생태와 자연을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이다. 이곳 전시관은 한반도 지도 형상을 본떠서 지붕을 만들었다. [백두대간 노치마을 : 사진 이완우] 백두대간은 한반도에서 생명의 나무처럼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 어느 마을의 산줄기라도 백두대간의 13정맥에서 다시 뻗어 나온 작은 가지로 볼 수 있다. 백두대간으로 이해하는 한반도는 하나의 유기체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은 자연환경과 동식물이 어우러진 생태계의 보고이다. 백두대간은 동물들의 이동통로이자 서식처이며, 여러 강의 발원지로 생명이 시작되고 이어지는 중심지이다. [백두대간 생태교육장 : 사진 이완우] 구절초가 찬 이슬을 머금은 한로(10월 8일) 절기에 백두대간 생태교육장을 방문하였다. 전시관에 입장하면, 백두대간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에서 담아온 흙을 넣은 130개의 진공관으로 한반도의 조형물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위쪽의 40개 진공관은 비어 있는데, 북한 지역의 산봉우리들이다. 남한 지역 산맥의 사이에는 그 지역의 강물을 담은 진공관이 있다. 이 130개 진공관의 한반도 조형물은 한반도의 산봉우리 모든 흙과 강의 물이 한군데에 모이기를 염원하고 있다. 이 한반도 조형물에서 북한 지역은 백두산의 흙만 진공관에 소중하게 담겨 있다.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 당시 남북의 두 정상이 함께 한 기념식수 행사에 사용된 백두산 흙이라고 한다. 남원 백두대간 생태교육장은 백두대간의 시작과 끝, 백두산과 지리산의 흙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전국 최초의 곳이다. [ 한반도의 산흙과 강물 진공관 지도 조형물 : 사진 이완우] 숲은 이산화탄소의 흡수와 산소의 배출로 지구의 허파 역할을 한다.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는 숲이 사라지고 있어 기후위기가 심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숲과 공존하는 어울림은 절실하다. 우리가 행성 지구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자연은 더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 자연이 전하고 있는 신호와 메시지를 인식할 수 있다. 이곳 생태교육장 전시관에는 지리산 생태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동식물을 모형으로 실감 나게 연출하였다. 용모도 귀엽고 털도 아름다운 족제빗과의 담비는 자기보다 몸집이 큰 동물을 사냥할 정도로 용맹한데 멸종위기 야생동물 2급이다. 지리산 왕등재 습지는 참갈겨니, 돌고기와 쉬리가 물속을 헤엄치고 수달과 여우가 어슬렁거리며 생명력 넘치는 자연 생태계이다. 둥치 큰 은사시나무 아래 백두산 호랑이가 포효하려는 기상이다. 참매가 낮의 숲을 지배한다면 올빼미는 밤의 숲을 지배한다. 은사시나무 가지에는 올빼미과 여름 철새인 소쩍새가 앉아 있는데 개성 있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숲의 나무 모형 : 사진 이완우] 이곳 전시관은 백두대간의 생태 자연을 소개하면서 자연스럽게 백두대간의 환경 훼손과 기후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경보로 주제를 확대한다. 백두대간은 과도한 개발과 관광이나 등산으로 멍들고 식생이 훼손되어 동식물들이 생명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다. 대규모로 지형이 변형되면서 백두대간의 단절까지 초래하기도 하며, 등산로 따라 주변 식물이 말라 죽고 등산로의 노면 침식과 토사 유출이 발생하여 동식물의 서식지가 파괴되어 종 다양성이 감소하고 있다. 일상화된 전 세계적인 폭염과 산불, 최악의 가뭄, 대규모 홍수는 기후위기를 드러내는 현상들이다. 이제는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해야 할 때이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효과적인 해결책은 숲 복원이다. 숲은 인간의 활동으로 배출되는 탄소의 3분의 2를 포획할 수 있다. 기후위기와 숲을 중심으로 하는 생태계의 파괴는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계속 되풀이하고 있다.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기온이 상승하면서 숲의 나무가 폭염과 가뭄의 공격에 시달리며 내성을 잃어가고 있다. 멸종 위기에 직면한 수많은 동식물을 살려내는 것이 결국 우리 자신을 구하는 일이다. [지리산 왕등재 습지의 물고기 모형 : 사진 이완우] 이곳 전시관에서는 전 지구적인 기후위기의 경보를 게시물로써 잘 알려주고 있다. 여우가 새의 알을 물고 가서 겨울을 위해 저장하는 모습을 보면 동물의 생존을 위한 적응 변화가 처절하기까지 하다. 빙하가 녹아내리고, 동식물의 서식지가 변화하고 있다. 꼬리표가 달린 동물과 조류가 야생에서 발견되니 생물종이 감소하고 있는 반증이다. 고온 건조한 바람 등 기상 여건이 심상치 않아 재앙적인 폭염이 반복되며 심지어 겨우내 꺼지지 않는 산불이 발생하고 있다. 이곳 전시관의 포토 아크(photo ark)에는 생명의 방주를 타고 있는 동식물의 사진을 게시하고 있다. 창세기의 신화에서는 지구를 휩쓴 대홍수에 노아의 방주에 의지해 많은 생명이 멸종의 위기를 모면하였다. 현재 전 지구적인 기후위기에서 생명의 대멸종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한 지구 자체가 또한 생명의 멸종 위기를 모면하고 보호받을 수밖에 없는 생명의 방주가 되어 있는 역설적 상황이다. [숲속의 소쩍새와 올빼미 모형 : 사진 이완우] 인간의 역사 1만 년 동안에 지구상에 있는 산림의 3분의 1일이 사라졌는데, 지난 백 년 동안에 사라진 면적이 그중 절반에 달한다고 한다. 숲이 주는 혜택은 식량과 목재의 획득, 탄소 저장 등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숲을 찾으면 산림욕으로 정신적 신체적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으며, 숲과 나무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도 있다. 이곳 생태교육장에서 산림청에서 제작한 25쪽 분량의 백두대간 생태지도를 홍보물로 받았다. 이 생태지도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설악산 향로봉까지 10개 구간별로 동물, 식물, 식생, 대표 수종, 대표 동물과 대표 식물 등의 서식 위치를 지도에 표기하고 사진을 첨부한 책자였다. 백두대간 생태교육장과 전시관에서 우리가 지구와 공존하는 노둣돌은 숲과 나무임을 확인하였다. [백두대간 은사시나무와 호랑이 모형 : 사진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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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 류오선의 지리산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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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과 지리산의 흙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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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초 인류
- 나 같은 나이에도 나 스스로 스마트폰 중독이라 여기고 있으니 이삼십대 젊은 친구들과 스마트폰의 친밀 관계는 말 할 필요도 없다. 스마트폰 안에는 나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같이 애들이 멀리 사는 경우에는 더 그렇다. 폰을 들여다 봐야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얼굴을 볼 수 있고 손주의 움직이며 노는 모습을 옆에서 보는 듯 볼 수 있다. 누구에게 돈을 보낼 때도 돈이 들어왔나 확인 할 때도 그것을 봐야한다. 잊어 먹을까 메모도 거기에 녹음도 거기에 뭘 몰라 물어 볼 때도 거기에 한다. 노래를 들을 때도 영상을 볼 때도 그것을 찾는다. 그것이 손에서 떨어지면 금단 증상이 온다. 어딨지? 바로 옆에 놓고 가슴이 철렁! 큰일 난 듯 두리번댄다. 사진을 찍고 올리는 일이 이것을 통해야 쉬우니 일단 이것으로 사진을 올리고 컴터에서 글을 쓰던 뭘하던 한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그 안에 있고 내가 모르는 모든 것을 그것은 알고 있다. 외울 필요가 없으니 그것을 보고 있다 머리를 들면 바로 까먹는다. 지금 찾고 조금있다 찾고 내일 또 찾는다. 한 집에 살면서도 때론 문자가 더 편하다. 사진까지 같이 보내며 요런거라고 똑 부러지게 부탁한다. 내가 아는 사람은 물론 모르는 사람의 일상까지 읽으며 나 지금 뭐하지? 하며 스스로 끔찍스러워한다. 그리고 결심한다. 다시는 너와 가까이 하지 않겠다고! 그러나 마치 고기가 어항 밖으로 튀어나와 발버둥치듯 손을 덜덜 떨며 그것을 찾는다. 증상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다 비슷한 병을 앓고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300쪽 가까이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고 실험을 통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다. 근데 왜 뭐하러 읽고 난리야. 뭐 좋은 소리라도 있을까해서? 그 병이 확실한가 오진은 아닐까 확인해 보려고? 암튼 나는 뭘 몰라서 못하기 보다 삼일을 넘기지 못해서 못한다. 이 중독 증상이 병이라면 고쳐야겠지만 미리 단언한다. 고치지 못할 거라고 아니 안 고칠거라고! 그러나 정말 꼭 필요할 때만 쓰고 싶다고! 꼭 필요할 때만 쓰는거 아니였나? 그럴때가 많을 뿐이쥥 헤헤. 20분이 지나면 이미 우리는 공부한 것의 60퍼센트만을 기억할 수 있고, 1시간이 지나면 절반이 채 안 되며, 하루가 지나면 단지 3분의 1만 기억할 수 있다. 한달이 지나면 뇌 속에는 정보의 15페센트 밖에 남지 않는다. (헤르만 에빙하우스) p15 오늘날 지구상의 이동 전화 가입자 수는 79억명이다.(2019). 전 셰계 인구는 76억 명이니 사람보다 사용중인 심카드가 더 많은 셈이다. 매년 아이들보다 더 많은 심 카드가 탄생한다는 주장은 내게 적지 않은 우려를 불러일으킨다.((생략) 자랑할 만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탈리아는 한국(삼성의 본국)과 홍콩에 이어 인구 대비 모바일 기기 수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나라다. (생략) 지금 이 순간, 지구상에 집에 화장실이 있는 사람보다 주머니에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유엔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약 24억 명의 사람들만 화장실을 소유하고 있으며, 약 10억 명의 사람들은 야외에서 용변을 해결한다. p41 오늘날 평균적인 사용자가 아이푠을 잠금 해제하고 사용하는 횟수가 하루에 약 80회, 1년에 거의 3만회(지금은 이미 그 이상일 것이다)에 이른다는 애플의 데이터나 하루에 스마트폰을 만지는 횟수만 해도 2,617회에 이른다는 또 다른 연구의 결과는 더 이상 놀랍지 않다. 웹 전문가 니르 이얄은 <훅>에서 스마트폰 소유자의 79퍼센트가 매일 아침, 잠에서 깬 후 15분 이내에 기기를 확인한다는 자료를 내놓았는데, 내가 보기에 이는 사실과 다른 것 같다. 실제로는 그보다 더 짧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 는 잠이 완전히 깨기도 전에 숨 쉬는 것처럼 자동적으로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 스마트폰을 집어들 뿐만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문자를 찍고, 눈을 제대로 뜨지 않고도 페이스북 앱을 열 수 있다. 게다가 전화나 메시지가 온 것이 없는데도 스마트폰이 주머니 속에서 진동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것은 환각의 한 형태로 10명 중 9명에게 일어나며 심지어 '팬텀진동증후군'이라는 학술명까지 가지고 있다. 팔다리를 잃은 사람이 뇌의 잘못된 재조정으로 인해 여전히 팔다리가 있다고 느끼는 현상,마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지의 말단 신경으로부터 계속해서 자극과 신호를 받는 것처럼 느끼는 현상인 '환각지phantom limb'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놀랍다. 이것은 스마트폰이 어느 정도로 우리의 일부가 되어버렸는지를 보여준다. (생략) "스마트폰 진동처럼 작고 빈번한 세포의 경련인 진동들은 감지되고 서로 교루합니다. 이를 설명하는 데는 두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술이 우리의 두뇌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단순히 우리가 불안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메일과 메시지에 답장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우리를 초조하고 과민한 상태로 만든다는 것이죠."p46 8초는 오늘날 우리가 평소에 관심을 기울이는 평균 시간이다. 기사를 읽을 때, 음악을 들을 때, 영화를 볼 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이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집중력을 잃는다. 8초! 금붕어보다 짧은 시간이다. 단 8초의 집중력으로 인해 우리는 오해와 소통 불가능, 고독 그리고 침묵의 형을 선고받았다.p66 역사상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산만함을 '산만함'이라 부르기를 그만두었다. 이 말의 근저에 깔려 있던 모든 부정적 의미와 함께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멀티태스킹'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컴푸터의 기능에서 차용한 용어다. (생략) 안타깝게도 실제로 컴퓨터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없다. (생략) " 완전히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몸짓이 아닌 이상, 인간은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는 것은 전환입니다. 굉장히 빠르게 앞뒤로 왔다갔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매 순간 우리가 주의를 다시 집중시킨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하루 종일 이 업무 전환이 쌓이면 스트레스가 됩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는 집중력과 두뇌에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집중력이 낮아지는 것을 디대로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스마트폰은 그 물리적 존재만으로도 인지 능력을 저하시킬 수 있다. 사용하지 않고 주변에 두기만 해도 우리의 주의력은 분산된다.p91 인간의 기능을 기계가 대신할 때마다 우리의 삶에서 그리고 뇌에서 어떤 능력이 제거되는 것이다.p132 화면의 LED가 청색광을 방출하기 때문입니다. 뇌는 이것을 날이 밝은 하늘의 푸른빛으로 알고 잠이 깰 때를 알리는 신호라고 해석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디지털 기기가 뇌의 기억 능력에 미치는 첫 번째 직접적인 영향입니다."p154 2017년에 노벨 의학상은 일주기 리듬(대략 하루 24시간을 기준으로 하는)을 제어하는 분자 매커니즘을 발견한 공로로 세 명의 연구자에게 수여되었다. 태양광뿐만 아니라 스마트폰에서 방출되는 청색광과 같은 단파장에 노출되면 우리의 신체는 모든 관점에서 '활성화'되어 반응한다. 반대로 양초의 빛과 같은 붉은 빛의 긴 파장에 노출되면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잠이 들려는 성향이 있다. 24시간 주기의 리듬이 깨지면 당뇨병이나 비만, 우울증, 심부전, 천식과 같은 심각한 질병의 발병 위험이 높아진다. 특히 어두운 방에서 잠들기 전에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행동이다. p155 죽었다 다시 태어나는 것 정도의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한, '좋아요'와 '엄지 척' 사회는 계속될 것이다. 웹의 거인들에게 스스로를 개혁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빙산에서 타이타닉 호를 구하라고 요구하느느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p193 가끔은 무언가를 모른다는 것, 의심에 빠진다는 것이 참으로 위안이 되었는데,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단어들의 올바른 문자열을 입력하기만 하면 엄청난 양의 온라인 정보들 사이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p217 "독서는 정신의 학교입니다. 읽기 회로를 개발하면 점점 회로가 성장합니다. 깊이 읽을수록 생리학적으로 더 정교해집니다. 깊이 있는 독서는 수신하는 정보를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고 있는 것과 생각하고 있는 것을 연결하기 위한 네트워크를 지속적으로 구축하기 때문이죠. 두뇌는 이러한 네트워크에 의해 말 그대로 장악되며, 신경학적 관점에서 이 모든 네트워크들이 모여 분석 능력을 구축합니다." 즉 깊이 있는 방식으로 더 많이 읽을스록 '정교한' 과정을 더 많이 강화하고, 읽은 내용이 기억 속에 더 많이 굳게 자리 잡을수록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매이렁 울푸가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골똘히 생각하기think hard'였다.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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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초 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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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제목이 코믹하다. 부제는 '정치적 동물의 길'이다. ”사실 정치에 관심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일단 뉴스보면 기분 나빠지고 욕 나오니 싫다. 모든 정치적인 것에서 멀어지고 싶다. 사실 별 관심도 없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모든게 정치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사는게 정친데 정치가 싫다? 이 무슨 모순이고 비극인가? 그렇다면 정치가 재밌고 좋아지려면 어찌해야 하나? 뭐 내가 결론내는 건 언어도단이긴 하지만 최소한 내가 불행하지 않으려면 정치가 재밌어야 하겠지? 그런 일이 있을랑가는 몰겄지만 이런 재미있는 정치에세이는 어떤가! 이 책은 전문 정치학 책은 아니고 에세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1부 정치란 무엇인가? 로 부터 시작해 여러가지 정치 얘기를 한다. 쉽고도 재밌다. 또 영화 얘기도 많고 그림 얘기도 많다. 알고보면 이 모두가 정치라는 얘기다. 결국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고 정치 없이 인간은 없다. 뭐 그런 이야기? 당신을 위로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위로하는 좋은 말들처럼 평탄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의 인생 역시 어려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보다 훨씬 더 뒤처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좋은 말들을 찾아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중 P9 정치가 어디 있냐고?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이 세상에 태어나 있고, 태어난 바에야 올바르게 살고 싶고, 이것저것 따져보고 노력해보지만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다른 사람과 함께하려니 합의가 필요하고, 합의하려니 서로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합의했는데도 합의는 지켜지지 않고, 합의 이행을 위해 규제가 필요하고, 규제를 실천하려니 권력이 필요하고, 권력 남용을 막으려니 자유가 필요하고, 자유를 보장하려니 재산이 필요하고, 재산을 마련하니 빈부격차가 생기고, 빈부격차를 없애자니 자원이 필요하고, 개혁을 감행하자니 설득이 필요하고, 설득하자니 토론이 필요하고, 토론하자니 논리가 필요하고, 납득시키려니 수사학이 필요하고, 논리와 수사학을 익히려니 학교가 필요하고, 학교를 유지하려니 사람을 고용해야 하고, 일터의 사람은 노동을 해야 하고, 노동하다 죽지 않으려면 인간다운 환경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느닷없이 자연재해가 일어나거나 전염병이 돌거나 외국이 침략할 수도 있다. 공동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많고 쉬운 일은 없다. 이 모든 것을 다 말하기가 너무 기니까, 싸잡아 간단히 정치라고 부른다. 정치는 서울에도 지방에도 국내에도 국외에도 거리에도 집 안에도 당신의 가느다란 모세혈관에도 있다. 체지방처럼 어디에나 있다, 정치라는 것은. P23-24 정치 공동체는 자연의 산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본성상 정치적 동물이다. 우연이 아니라 본성상 정치 공동체가 없어도 되는 존재는 인간 이상이거나 인간 이하다. -아리슽텔레스 "정치학" 중 p25 폴리스 시민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던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 아테네 사람들은 공적인 일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초탈한 사람이라고 존경하지 않고, 쓸모없는 인간으로 간주한다." p29 모든 권력을 싫어한다는 말은 모든 욕망을 무시한다는 말이며, 모든 욕망을 무시한다는 것은 삶을 혐오한다는 것이다. 권력은 권력만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여러 일을 가능하게 한다. 사람은 종종 목표를 지향하고, 그 목표는 권력의 향사를 통해 달성된다. 아무 것도 도모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까. 체속을 초월하겨고 드는 선사도 해털을 도모한다. 마음의 고요를 얻기 위해서도 마음의 파도를 잠재우는 어떤 나직한 힘이 필요하다. 정말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겠다면 어딘가 조용히 숨어서 자신의 멸종 소식을 기다려라.p53 근대 정치 이론의 초석을 놓은 토머스 홉스는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그처럼 한갓 사적 인간이 정치적 존재로 변신하는 과정에 주목했다. 낱낱이 흩어져 있던 인간들이 어떻게 단일한 의지를 가진 권력체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정치적 존재로 변신하는 것일까? 그냥? 심심해서? 그렇지 않다. 그들은 죽지 못해서 변신하는 것이다. 변신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으므로. "지속되는 두려움과 난폭한 죽음의 위협"으로 인해 인생이 고독하고, 열악하고, 고약하고ㅡ 잔인하고, 짧아질까 봐" 변신하는 것이다.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정더로 괴롭기 때문에 정치적 존재로 변신하는 것이다. 그 변신 덕분에 인간은 비로소 삶을 견딜 수 있게 된다. 투표는 인간이 정치적 인간으로 변신했던 그 위대한 상상을 되살리는 축제다.p109 다민족 국가를 다스리는 일의 어려움은 피터 반 더 보트의 1578년 작품에 잘 드러나 있다. 온갖 짐승들의 머리가 달려 있는 거대 괴물을 정치 및 종교 지도자들이 당혹스럽게 바라보고 잇다. 이 괴물은 다민족 제국의 여정을 시작하던 16세기 후반의 (오늘날)네덜란드를 상징한다. 그러나 다민족 국가가 반드시 통치의 어려움만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잘만 소화하면 그것은 활력의 근원이 될 수 있다. 유럽 각국이 가톨릭이냐 프로테스탄트냐의 갈림길에서 탄압과 전쟁을 일삼고 있을 때, 네덜란드는 적극적으로 관용 정책을 택했다. 그에 따라 칼빈주의자뿐 아니라 가톨릭 루터교, 유대교, 재세레파 신자 등 타국에서라면 이교도로 낙인찍혀 핍박을 받았을 인재들이 네델란드에 몰려와 살게 되었다. 17세기 초 암스테르담 인구의 40퍼센트를 이민자가 차지할 정도였다. 다양해진 인구 구성을 장애물이 아니라 활력으로 승화시켰을 때, 네덜라드는 본격적인 번영을 구가하게 된다. 오늘날 많은 네덜란드 사람들은 자기 나라가 향유하고 표방해온 다양성과 자유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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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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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봄(春/見), 루이네
- 지리산 봄(春/見), 루이네 강회진(시인, 독립연구자) 마음이 아픈 줄도 모르고 어른이 되어 앞으로 운이 좋아 80살 까지 산다고 쳤을 때 내게 남은 생은 살아온 날 보다 적다. 마음이 아픈 줄도 모르고 어른이 되었다. 무엇을 견디는지도 모른 채 인생이 지나고 있다. 나의 욕심으로 때론 너무 왔거나 지나갔거나 눈치 채지 못한 관계에 지치고 하지 않아도 될 일들까지 하느라 몸과 마음이 늘 고단했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는 없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나 진짜 나만을 위한 시간,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더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드디어 나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하나. 오랫동안 지리산과 섬진강을 그리워했기에 구례, 하동을 꿈꾸었다. 언젠가 초여름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보았던 산내의 다랭이논 일렁이는 초록 물결과 손에 잡힐 것 같던 흰 구름, 고즈넉한 실상사의 저녁 예불 모시는 풍경들이 자꾸만 나를 불렀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집을 구하기 어렵다는 산내에 빈 집이 나왔고 내놓은 아파트는 금방 입주자가 나타났다. 마치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던 일처럼. 2. 세 가지면 충분하다 사람들은 내게 왜 그 먼 곳으로 가느냐 물었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먼 곳이라는 말일까? 나에게는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이곳이라 말하지 못했다. 마당에서 듣는 하루 두 번 실상사 범종 소리와 수달이 살고 있다는 람천의 우렁찬 물소리,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천왕봉. 이곳으로 이사를 위한 이유로 이 세 가지면 충분했다. 게다가 이곳은 내게 완벽하게 낯선 곳. 이사를 하는 날 고속도로에 눈발이 날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이사하는 날 눈이 오면 부자된다 안하요.”라며 애써 웃음을 보였다. 지리산 IC에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쿵쿵 뛰었다. 저 멀리 펼쳐진 지리산 자락이, 마을이 온통 눈으로 환하게 빛났다. 지리산에 곁들어 사는 일은 지리산이 허락해야 한다던데 드디어 나도 지리산의 선택을 받았구나. 다정한 지인들은 문패를 만들어 보내주었고 마당에 심을 꽃나무와 다양한 꽃씨를 보내주거나 어여쁜 커튼을 보내 새로운 출발을 기꺼이 응원해 주었다. 이사 후 두 번의 큰 눈이 내렸다. 저 멀리 눈에 덮인 천왕봉은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실상사 저녁 범종 소리를 들으며 구들방 아궁이에 불을 넣었다. 가끔 불씨가 아까워 고구마를 구워 강아지와 나눠먹었다. 그렇게 산내의 첫 겨울이 고요히 흘러갔다. 3. 산내는 산내말로 살래 맘씨 좋은 이웃이 밭 귀퉁이를 무상으로 빌려주셨다. 또 다른 이웃은 슬며시 거름을 부려놓고 가셨다. 감자를 심고 두둑 가에는 옥수수도 심어야지. 밭을 일궈 고랑 네 개를 만들고 거름을 뿌렸다. 다음날 맞춤비가 내렸다.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꽃씨를 담구고 씨감자 눈을 쪼개다보니 어느새 담장에 노란 개나리가 막 피어나는 춘분이 되었다. 밤마다 멀리 무논에서 개구리들이 정겹게 울어댔다. 어느 밤, 마당에 나가 올려다본 하늘, 선명하게 반짝이던 북두칠성이 말했다. 그래, 잘 찾아왔어. 너의 길. 이른 아침 단풍나무에 새가 날아와 한참을 앉았다 날아가는 흔하디흔한 그 풍경이 좋았다. 새들을 위한 모이를 뿌리고 수돗가 물을 갈아준다. 햇살이 길게 들어오는 이른 아침, 멀리 천왕봉을 게으르게 앉아 바라보는 그 시간을 놓칠까봐 아침 일찍 일어난다. 지리산에 와 매일 매일이 행복한 검은 개 루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면 이웃 어르신들이 묻는다. 어디사요? 놀러왔는가베? 아니요, 저 살래 살아요. 저 멀리 앞 산 노란 산수유 지면 대문 옆 감나무에도 반짝이는 새 잎 무성할 것이다. 마당에 정성껏 심은 모란이 피고 지는 깊은 봄이 흘러 옥수수를 따고 감자를 캐면 좋은 사람들 모아 잔치를 해야지. 지리산의 첫 봄, 살래의 첫 봄, 나의 첫 봄이 설렌다. -달궁수달래 /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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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봄(春/見), 루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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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째 산
- 작가 파울로 코엘료는 전 세계 170개국 이상 83개 언어로 번역되어 3억 2천만 부가 넘는 판매고를 기록한 우리 시대 가장 사랑받는 작가. 1947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태어났다. 저널리스트, 록스타, 극작가, 세계적인 음반회사의 중역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다, 1986년 돌연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로 순례를 떠난다. 이때의 경험은 코엘료의 삶에 커다란 전환점이 된다. 그는 이 순례에 감화되어 첫 작품 『순례자』를 썼고, 이듬해 자아의 연금술을 신비롭게 그려낸 『연금술사』로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출판사) 세상 모든 사람은 피하라 수 없는 일의 영향을 받는다. 어떤 이들은 극복했고 어떤 이들은 포기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비극의 날개가 우리 인생을 스쳐지나가는 경험을 한 적 있다. 이유가 뭘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나는 엘리야를 따라 아크바르의 시간 속으로 떠났다. 파울로 코엘료p12 "인간은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 천사가 대답했다. "결정을 내리는 힘이 바로 너의 능력이다."p192 "그보다 더 어려운 건 자신의 길을 분명히 정하는 것이다. 선택을 하지 않는 자는 아직 숨을 쉬고 길을 걷고 있다 하더라도 신의 눈에는 죽은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다. 누구도 죽지 않는다. 영원함은 모든 영혼에게 열려 있고 저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나갈 것이다. 태양 아래 있는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p193 하느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과 정면으로 맞서고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게 하신다. "왜 너는 그토록 짧고 고통으로 가득한 존재에 그토록 매달리느나? 너의 싸움의 의미는 무엇이냐?"p279 아이들은 항상 어른에게 세 가지를 가르쳐주죠. 별 이유 없이도 행복해하기, 무언가에 항상 몰두하기,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온 힘으로 매달리기. 제가 아크바르로 돌아온 것도 저 아이 때문입니다. p276 "주님의 말씀은 네 주변의 온 세상에 쓰여 있단다. 네 삶에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보면 너는 하루의 순간순간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과 뜻을 숨겨놓으신 곳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주님이 시키시는 일을 해내도록 노력하렴. 그것이 네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란다."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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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째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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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워 하는 마음
- 가여워하는 마음 박두규/시인 어김없이 새날이 오듯 새해도 온다. 그리고 사람들은 바쁜 연말이나 연시의 와중에도 한 번쯤은 가는 세월이나 오는 세월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거나 다짐하게 된다. 나는 인생 간판에 시인 딱지를 붙이고 살다 보니 연말연시가 되면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가끔 되짚어보곤 하는 것인데 그때마다 박수근(화가)이 했다는 말이 떠오르곤 한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 기억에도 없는데 느닷없이 날아온 돌멩이처럼 나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수시로 울림을 준다. 예술이 아름다움의 영역이라면 그 아름다움은 선함과 진실함의 바탕에서 이루어진다는 어떤 믿음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의 말처럼 정말 평범한 일상생활 속의 착함과 진정함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그냥 스치고 지나갈 수도 있는 이 말이 나에게 강하게 올 수 있었던 건 아마 당시 이런저런 경전들을 읽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경전의 바탕이 선함과 진실함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때 그것들을 읽어내며 스스로의 단어로 정리해낸 말은 ‘가여워하는 마음’이었다. 그 즈음에 나온 시집의 제목을 ‘가여운 나를 위로하다’라고 붙인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새 정부가 들어선 후 이런저런 부족한 짓, 말도 안 되는 짓, 터무니없는 짓들을 많이 한다고 하는데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은 윤가와 그의 사람들에게는 이 ‘가여워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이긴 자가 진 자에 대해 그리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 또는 민초들에 대해 ‘가여워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됨의 근본이 없는 것이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연민도 없이 살아가는 것들이 무슨 정치며 예술이며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마음을 학문이나 사상에 앞서 삶 속에서 잘 보여준 옛사람으로 퇴계 이황 선생이 있다. 요즘 자본주의 기후 위기에 연계된 이런저런 책들을 보게 되었는데 21세기에 들어 사상적 출구를 모색하는 세계의 석학들에게 주목받는 사람 중에 퇴계 선생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퇴계를 생각하면 그의 사상이나 학문보다는 그가 살아낸 구체적인 일상 삶과 그를 통해 보여준 ‘가여워하는 마음’이 먼저 떠오른다. 그는 스물한 살에 결혼하고 아내 김해 허씨와 함께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지만, 아내가 결혼 6년 만에 병사한다. 그리고 3년 상을 치른 후 재혼하는데 맞아들인 권씨 부인은 정신질환이 있는 병약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퇴계가 마음속으로 존경했던 권주(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사약)의 아들 권질의 딸이었다. 권질은 조광조 숙청의 기묘사화 때 예안으로 귀양 와 있었는데 퇴계가 이따금 찾아가 문안 인사를 하며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권질은 병을 얻어 죽으며 여러모로 부족한 딸을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퇴계에게 딸을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퇴계는 마음속으로 존경하던 분의 집안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몰락하는데 자손들마저 불행해지는 것이 가슴 아파서 그 딸을 맞아들여 재혼하게 된다. 하지만 퇴계 선생의 진정 훌륭한 점은 결혼 후 그 정신적 질환이 있는 부인에게 ‘손님처럼 공경하는 법도’를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퇴계 선생이 공부하고 펼친 지식과 사상이 현실 속에 살아있는 학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또 그의 ‘가여워하는 마음’의 정도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알다시피 퇴계는 인간의 근본 마음 네 가지 중 앞세운 것이 측은지심(仁)이며 바로 ‘가여워하는 마음’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늘 4단四端의 마음을 중심에 두고 7정七情의 마음을 경계하는 것이 당시 선비들의 수행이고 공부였는데 선생은 삶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결혼생활도 16년 만에 권씨 부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퇴계의 ‘손님처럼 공경하는 법도’ 또한 그렇게 끝났는데 퇴계는 훗날 그 시절을 ‘결혼생활 16년 동안 더러는 마음이 뒤틀리고 생각이 산란하여 고뇌를 견디기 어려운 적이 없지 않았다’라고 술회한다. 이러한 고백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비록 퇴계가 그 시절을 자신의 덕을 쌓는 수양의 화두로 삼아 모범을 보였다고는 하나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나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퇴계의 ‘가여워하는 마음’을 짐작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일화는 그의 며느리 이야기다. 둘째 아들 채(寀)는 정혼한 상태였는데 그 아들이 결혼을 앞두고 급사하게 된다. 그래서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예식도 못 올린 며느리를 맞이해야만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퇴계는 당시 삼종지의三從之義의 엄격한 규율을 깨뜨리고 처녀의 몸으로 며느리가 된 여인을 친정으로 돌려보내 재가하게 한다. 퇴계 선생의 삶의 바탕에 있던 ‘가여워하는 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퇴계는 엄격한 유가의 선비였으나 깊은 인간애에 바탕을 둔 스스로의 삶을 꾸려내었으며 세상의 법도 이전의 ‘불법不法의 예’를 보인 진정한 유가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퇴계는 첫째 부인이 죽은 후 두 아들을 양육하기 위해 관례에 따라 첩을 들였는데 그 첩도 선생보다 먼저 죽게 된다. 첩에게서 낳은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 또한 자신의 호적에 올렸고 차후에 그 아들의 후손들이 적서의 차별을 받지 않도록 족보에 적서의 구별을 두지 않게 하였다. 또 퇴계 선생은 이런저런 굴곡의 가정사를 다 넘기고 홀아비 생활을 하는 중에 단양군수로 있을 때는 단종 복위에 참여했던 사대부의 후손으로 어린 나이에 관기가 된 기생 두향을 소실로 맞아 외로움을 달래고 남녀의 사랑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서자와 관기라는 당시 천한 신분의 사람에게도 시대의 법도를 넘어 사람의 근본에 있는 ‘가여워하는 마음’으로 차별 없이 대하였다. 나는 퇴계 선생의 아픈 가정사를 보면서 평범한 일상생활 속의 착함과 진정함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박수근이 말한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그 말의 깊이를 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황이라는 사람은 위대한 학자요 사상가이기 전에 ‘가여워하는 마음’이라는 존재의 근본을 깨달은 사람이고 그렇게 자신을 살아낸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작금의 우리 사회는 이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는가. 국정을 운영한 새 정부의 2022년을 보면서, 제 이익과 안위만을 생각하는 권력을 보면서, 그들의 치졸한 양아치 정치를 보면서, 윤가와 그 권력의 발뒤꿈치를 쪼아 먹고 사는 닥터피쉬들을 보면서, 그 언론과 정치권과 검찰과 윤의 사람들을 보면서, 언감생심焉敢生心 ‘가여워하는 마음’을 꿈꿀 수는 있을 것인가 하는 절망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나라를 맡긴 것은 국민이니 한편으론 할 말도 없다. 이는 모두 자본주의, 자유주의라는 왜곡된 이데올로기 안에서 돈만 있으면 되고 나만 살면 된다는 그릇된 가치관의 정서가 우리 사회 안에서 당위적 정당성을 얻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가치관의 변화 없이는 우리 사회의 ‘가여워하는 마음’은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퇴계 선생처럼 개개인의 진정성으로 실천하는 정도를 넘어 지난날 촛불처럼 온 국민이 지극정성으로 ‘가여워하는 마음’을 기원하는 계묘년이 되기를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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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스러운 사람
- 自然스러운 사람 13세기 지금의 터키 지역에 나스레딘 호자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당나귀를 잃어버려 울면서 하루 종일 찾으러 다니다가 갑자기 팔을 올리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신이시여. 참으로 감사드리옵나이다.” 이 모습을 본 어떤 사람이 물었다. “당나귀를 찾다 말고 웬 감사요?” 그러자 호자가 대답했다. “내가 그 당나귀 위에 올라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한다네. 만약 그랬더라면 내 자신도 잃어버렸을 것 아닌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당나귀는 그 지역의 특성상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살고 있는 집 다음으로 큰 재산이었을 것이다. 나스레딘은 현자였기 때문에 재물을 잃고서도 감사할 수 있었다. 재물을 잃은 것도 슬픈데 마음마저 잃고 자신을 잃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나귀 위에 올라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재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재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항상 일상생활에서 손해와 이익을 따지며 산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을 살아갈 수 없는 바보가 되고 무능력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하지만 나무가 손해와 이익을 따지면서 서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별이 반짝이는 것 또한 손해와 이익을 계산해서 빛나는 것이 아니건만 얼마나 아름답게 잘 살고 있는가. 우리도 그런 자연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아니 자연自然스러운 사람이라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언젠가부터 나는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어 자연스럽게 살자’는 슬로건 하나를 갖게 되었다. 옷차림이 참 자연스럽다고 하면 세련되고 멋지다는 말이고, 분위기가 자연스럽다는 것은 자유로우면서 편하다는 이야기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은 꾸밈이 없고 진실하다는 말일 것이다. 더 다양하게 쓰이고는 있지만 종합해보면 ‘자연스럽다’는 것은 진실하며 자유롭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스럽다’는 말의 뿌리는 ‘자연(自然)’이니 사실은 ‘자연’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산과 바다의 일상이나 비가 오고 꽃이 피는 일 등이 자연이고 자연의 현상인데 그것들에 무슨 거짓이 있을 것인가. 그래서 성현들은 자연은 진리요 도(道)이고 법(法)이며 생명 그 자체라고 말해왔다. 그러니 인간사 모든 문제의 답도 자연에 있다는 말은 틀림이 없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자연’보다는 ‘자연산(自然産)’만 좋아한다. 너 나 할 것 없이 자연산을 찾는다. 그리고 그것은 생태환경과 함께 사회적 문제의 본원에 있는 자본주의 대량생산이 가지는 문제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어쨌든 현대인들은 그렇게 자연과 거리를 두고 있고 자연이 가진 진리와 도(道), 법(法)이며 생명 그 자체와는 떨어져 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책에서 본 ‘호수 위를 날아가는 기러기가 제 그림자를 호수 위에 드리우되 일부러 그러지 아니하고, 호수는 기러기의 그림자를 비추되 일부러 비추려하지 않는다.’ 라는 구절이 생각난다. ‘자연스럽다’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지 않겠는가. 흐르는 물처럼 주어진 삶의 조건과 환경 속에서 자기 본연의 삶을 충실하게 살다보면 타자와도 저절로 어울리게 되고 하나의 완성된 아름다운 그림이 되니 ‘자연’이 바로 그러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 기러기나 호수의 마음에 근접해 있는 사람이 바로 ‘자연스런 사람’ 아니겠는가. -박두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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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천강을 지키는 사람들
- 지난 1월11일 오전 함양군 유림면 엄천강(임천) 가스공사 현장 기자회견 있었다 11일 오후 임천 복원에 대한 계획 수립과 남아 있는 공정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그 공정이 임천 환경에 끼칠 영향에관해 주민설명회를 할 때까지 공사를 잠정 중단하기로 했다. 2022년 1월 13일 오전 10시에 함양군 유림면사무소에서 ‘함양~산청 천연가스 공급설비 건설공사’에 관한 주민 설명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는 발주처인 한국가스공사, 시공사인 경남기업, 함양군 관계자, 낙동강유역환경청 관계자, 산청군 관계자, 그리고 지역주민 30여 명이 함께했다. 이 주민 설명회는 최근 ‘함양군 유림면 일대 임천 가스관로 부설공사’(이하 임천 공사)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긴급하게 만들어진 자리였다. 임천 공사는 2021년 9월에 작업이 시작될 때부터 환경단체들의 우려와 주민들의 민원 제기가 집중된 현장이었다. 이번 주민 설명회의 결과부터 말하자면, 지역주민들이 ‘주민협의체’를 구성하고 이 협의체가 제시하는 해결 방안에 맞춰서 시공사가 임천 공사를 재개하겠다는 것이다. 1월 11일에 지역주민들과 진주환경운동연합, 지리산생명연대, 지리산권남강수계네트워크, 함양군시민단체협의회 등 많은 시민단체가 공사 중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임천 공사는 1월 11일부터 잠정 중단된 상태다. 경남기업은 설명회에서 작업이 재개되면 대략 48일 정도 뒤에 공사가 마무리될 것이라고 밝혔다. 업체 측이 제시한 잔여 공사 내용을 보면, 먼저 하천 석분 슬러지부터 제거하고 작업구 터파기, 압입 공사, 가스배관 설치, 되메우기, 가시설 철거, 임시진입로를 철거하겠다는 계획이다. 석분 슬러지 제거는 25톤 준설차 한 대를 5일 동안 운용해서 현장의 석분을 수거하겠다는 것인데, 주민들은 이 계획에 대해 즉각 반발했다. 주민들은 석분 침전물의 양이나 두께, 석분이 퍼져나간 범위를 보면, 5일 만에 이 작업을 끝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국가스공사와 경남기업은 앞으로 구성될 주민협의체와 의논해서 5일이 아니라 기한을 정하지 않고, 지역주민들이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석분을 제거하겠다고 입장을 밝혔고, 주민들은 이번에는 약속을 제대로 지켜달라고 업체에게 주문했다. 그리고 한 주민이 석분 제거와 관련해서 무한 책임을 질 것인지 묻자, 경남기업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고 답변했다. 또한 이번 설명회에서 주민들은 지난 1월 7일에 있었던 갑작스러운 발파에 대한 사과와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해당 지역의 이장에게도 공지를 하지 않고 발파를 진행한 것은 누가 보더라도 무리한 공정이라는 의견이었다. 이에 가스공사와 경남기업의 관계자들은 주민들에게 사과하며 더 이상의 발파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설명회의 말미에 한 주민이 지난 1월 11일에 있었던 ‘멸종위기 어류 보호대책 마련을 위한 관계기관 회의’에서 나왔던 내용이 발표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1월 11일 오후 2시 30분에 유림면사무소에서 있었던 이 회의에서 관계기관들은 임천 생태계 복원 대책을 마련해서 주민 설명회에서 발표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가스공사와 경남기업은 이 부분에 관해서는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한 사안이라 아직 준비를 하지 못했다고 밝히며, 관계기관들이 어떤 방식으로 참여할지 물었지만, 자리에 참석한 함양군 관계자들과 낙동강유역환경청은 의견을 표명하지 않았다. 임천 공사는 일단 주민협의체가 구성되고, 이 주민협의체가 공사 재개 조건에 관한 의견을 모은 뒤, 관계기관들과 협의를 거쳐서 석분 슬러지 제거가 완벽하게 진행된 이후에 재개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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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농부에게 추천하는 아피오스
- 초보 농부에게 추천하는 작물 "아피오스" 귀농해서 어떤 농사를 지을까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피오스는 농약이나 특별하게 관리가 필요가 없는작물입니다. 단 판매가 힘들 수도 있으니 지인이 많은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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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농부에게 추천하는 아피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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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으로 들다
- 한신으로 들다 사람들은 나무를 참 좋아한다. 지리산에서 나무를 만나고 싶다던 누군가가 지난여름에 뜬금없이 ‘목동반’을 만들자고 한다. ‘목요일은 나무 동무’를 줄여서 ‘목동’이란다. 이름이 귀엽다. 매주 목요일마다 숲으로 깃들면 좋으련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에만 들기로 했다. 2021년 9월 구례를 시작으로 하동, 산청, 함양, 남원 방향으로 매월 지리산을 돌아보기로 했다. 12월은 함양 한신계곡으로 들었다. 한신은 깊고 넓은 계곡으로 인해 여름에도 한기를 느끼게 하는 계곡이라는 뜻이란다. 겨울 숲의 나무는 잎이 없어 여간해서는 알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겨울에 나무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나뭇잎이 없는 나무는 일단 눈높이에서 보이는 줄기로 시선이 간다(줄기가 벗겨지는지, 갈라지는지, 모양, 색깔, 상처에 흐른 수액의 색깔, 껍질눈의 모양 등을 봐야 한다). 그리고는 시선을 올려 잔가지(나무초리)를 본다. 나무초리가 마주나는지 어긋나는지고 봐야 한다. 그리고 지난가을의 열매가 있는지 찾아본다. 겨울눈도 들여다봐야 한다.(겨울눈과 나무초리에 털이 있는지, 맨눈인지 비늘로 쌓여있는지, 비늘 조각은 몇 쌍인지, 모양과 크기, 색깔도 살펴야 한다.)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 나무를 볼 때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은 위아래로 훑어보면 기분 나빠하는데, 나무는 위아래로 훑어봐야 한다”라고 항상 강조한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나무마다 찬찬히 훑어보고 들여다보며 길을 걷는다. 고로쇠나무, 고욤나무, 산뽕나무, 느티나무, 느릅나무 등을 읽어본다. 걸음이 느리다. 그러다 보니 한신계곡 입구에서 벌써 간식을 풀었다. 마침 지나가는 등산객이 웃는다. 시작부터 먹고 가는 모습이 재밌어 보이기도 보인듯하다. 느리게 나아가다 보니 해가 들지 않는 계곡은 더욱 춥다. 손과 발이 시리다. 속도를 내어 걸어본다. 재촉하는 걸음에도 계속 나무는 눈에 들어온다. 층층나무와 곰의말채나무를 비교해본다. 가로로 껍질눈을 가진 산벚나무와 개회나무도 비교해본다. 지각변동을 하듯 껍질이 벗겨지는 박달나무, 아주 얇게 그물 모양으로 껍질이 벗겨지는 피나무를 본다. 그리고 한신계곡에서 가장 많은 나무인 서어나무를 만난다. 서어나무의 이름은 유래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한자로 서목(西木)이라 하여 ‘서쪽 나무’라는 의미란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다른 유래가 있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나의 시선을 남원시 운봉읍 행정마을의 마을 숲으로 서 있는 서어나무숲에 머문다. 우리나라의 마을숲은 풍수지리학으로 보통 설명이 된다. ‘마을을 보호하는 숲’이란 뜻의 비보림(裨補林)은 마을의 액과 재난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물고기가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어부림(魚付林), 마을의 기운을 담아주는 역할을 하는 수구막이 등이 있다. 이중 행정마을의 서어나무 마을숲은 마을의 액을 막기 위해 만든 숲이다. 키가 20~30m에 달하는 서어나무는 밝은 색의 껍질을 가지고 있다. 엄청난 위용의 서어나무는 마을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쉬이 막아낼 듯싶다. 서어나무는 우리 문화에서 실용적으로 사용되는 곳이 없다. 불땀이 없어 장작으로는 매력이 없고 껍질이 얇아서 표고목으로 활용도가 높지 않다. 줄기가 곧지 않아 목재나 가구를 만드는 용도로도 쓰지 않는다. 하지만 행정마을의 마을숲처럼 마을의 중요한 자리에 서 있는 모습으로는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냥 서 있으면 된다. ‘서 있으면 되는 나무’라는 뜻에서 ‘서나무’가 되고 지금은 ‘서어나무’라 불리는 듯싶다. 목재나 가구재로도 사용이 안 되는 이유는 울퉁불퉁한 줄기가 한몫을 한다. 그 줄기가 아주 특이해서 사람들은 ‘근육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왜 이런 줄기를 가지고 있을까? 줄기의 굴곡은 양분이 모여서 생긴 것이다. 양분은 한 곳으로 모이는 것은 힘을 준 모양을 말해준다. 커다란 나무의 줄기가 굴곡이 생기려면 어린 나무 시절부터 울퉁불퉁하게 힘을 주던 것이 누적되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서어나무는 숲이 변해가는 천이과정에서 마지막 단계에 들어오는 나무이다. 서어나무가 우점한 숲은 안정된 숲이라는 말이다. 서어나무는 숲에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200년의 천수를 누린다. 그러나 숲의 주인으로 위풍당당한 서어나무는 사실 겁쟁이 나무였다. 다른 나무에는 별거 아닌 바람에도 어린 서어나무는 두려워서 반응을 했다. 이리저리 불어오는 바람마다 에너지를 쓰면서 줄기의 굴곡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위풍당당한 모습에는 두려움에 떨던 어린 시절이 숨어있었다. 이제 2022년 임인년이 시작되었다. 지난해처럼 우리는 한 해를 보낼 것이다. 2021년이 그랬듯이 어떤 상황은 나를 힘들게 할 것이고, 또 어떤 관계는 나에게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 관계, 상황들이 삶의 근육을 만들어준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날들을 지나왔지만 또 어떤 바람에 흔들릴지도 모르는 시간을 살아갈 터이다. 수 십 년을 버텨 근육이 가득한 서어나무는 이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까? 두렵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가는 내내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면서 살아내는 것. 그것이 삶일 것이다. 서어나무와 다르지 않은 나의 삶.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별에도, 서어나무에도, 그리고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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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 지리산 생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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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으로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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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극한체험 수달 만나기
- 지난 19일 엄천강 람천 1박2일 수달 만나기 극한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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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극한체험 수달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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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달은 도시에 왜 모여들까?
- 도시에 수달이 모여드는 이유는? 관심은 보는 눈이 많아야 한다 도시의 수달은 관심의 대상이고 시골의 수달은 무관심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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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달은 도시에 왜 모여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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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를 만나다
- 지리산자락으로 귀촌하게 되면서 ‘자연’이 마음으로 흘러들어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풀이름 하나, 나무이름 하나씩 배우다보니 숲해설이라는 일을 하며 약 십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4살 유아부터 80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숲’이라는 공감대로 만났다. 나무를 이야기하고, 풀을 이야기하고 그 숲에 깃들어 사는 곤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 귀하고 소중했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배움 없이 다양한 자연의 하나하나를 풀어내는 시간들에 방전되어 가는 나를 보며 그만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고, 멈췄다. ‘잠시 멈춤’의 시간에 전북자연환경연수원에서 하는 『나비생태학교』에 참여하게 되면서 내가 멈춘 자연에 대한 마음이 다시 일렁였다. 약 7개월간 나비를 만나러 가깝게는 지리산둘레길 구간, 뱀사골 계곡, 약수암 가는 길, 교룡산성 둘레길을, 멀리로는 무주와 의성, 오대산과 평창 등을 다니며 나비와 조우하는 행복한 시간에 빠져 보냈던 2021년이었다. 1년동안 153종의 나비를 만났고 37종의 나비를 키워 보았다.(우리나라 나비는 토착종기준 220여종이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나비는 알과 애벌레와 번데기 그리고 성충의 단계를 거친다. 성충인 나비는 애벌레들이 좋아하는 식물에 알을 낳고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좋아하는 먹이식물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초보 나비관찰자가 식물에 있는 알을 찾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고, 번데기는 어딘가 사라져 번데기를 트는 통에 찾기가 쉽지 않고, 성충인 나비는 가만히 내 눈앞에 ‘그대로 멈춰’있는 게 아닌데다 고기능의 카메라가 없는 나에게,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은 대부분 애벌레인 경우가 많았다. 하여 도감을 들고 길을 걸으며 알만한 나무의 잎을 뒤지고 살피며 애벌레 찾기가 시작되었다. 장항리에 있는 팽나무에서 홍점알락나비 애벌레와 수노랑나비 애벌레, 뿔나비 애벌레를 찾았다. 동네 길 옆 돌담에서 자라는 인동덩굴에서 제이줄나비 애벌레를 찾았다. 회덕에서 개미정지로 가는 길에서 청띠신선나비 애벌레를, 동강 길에서 제일줄나비의 산란장면을 목격하고 알을 데려왔다. 삼신암 가는 길에서 큰멋쟁이나비 애벌레를 인월센터 근처 탱자나무에서 호랑나비 애벌레를 찾았다. 또한 붉은점모시나비를 만나러 의성으로 왕나비를 만나러 평창으로 새벽12:30에 일어나 다녀오기도 했다. 노고단에 올라가 조흰뱀눈나비를 만났다. 이제껏 알지 못했던 나비를 만나는 일은 연애 때처럼 가슴 설레는 매일이었다. 아마 자연을 알게 된 후 이렇게 멀리, 다양한 장소로 관찰을 하러 다닌 적이 없을게다. 그래서 더 행복했다. 먼 곳으로 가서는 도감에서만 보던 귀한 나비를 만났다면, 인근에서는 일상적으로 만나는 다양한 나비들을 만났다. 그 중에서도 집 입구의 돌담에서 자라던 제이줄나비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한다. 제이줄나비 애벌레는 인동을 먹이식물로 한다. 볕 잘드는 돌담에서 뿌리를 깊게 내리고 살아가던 인동에게 제이줄나비가 찾아와 알을 낳았다. 오가가는 길에서 인동 잎을 보니 애벌레의 식흔이 보였고 그것으로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몇 마리는 집에서 관찰하고 나머지는 현장에서 관찰하며 지켜보던 어느 날, 집 앞의 도로확장공사가 있음을 마을방송을 통해 알게 되었다. 지금도 충분히 통행 가능한 길인데도 마을에선 더 넓고 편안한 길을 원했던 것 같다(마을의 숙원사업이었다고 함). 도로공사는 이미 확정이 되어 결정된 사항이라 되돌릴 수 없었다. 길이 확장되면 돌담은 사라질 것이라 마음이 급해졌다. 일단 애벌레가 보이는 대로 집의 관찰통으로 옮겼다. 인동에는 제일줄나비, 제이줄나비, 검정황나꼬리박각시가 산다. 아는게 그것뿐이지만 그 외에 더불어 살아가는 개체들이 더 있을게다. 집으로 데리고 온 애벌레만 10여마리가 넘었다. (다행히 구조한 애벌레들은 무사히 나비로 우화해 날아갔다) 계획대로 돌담은 부서지고 나무는 뽑히고 찍혀 사라졌다. 모든 것이 찰나였다. 나비는 날개라도 달려서 날아간다지만 몇 센티 안되는 애벌레들이 거대한 기계로 인한 파괴의 움직임 앞에 어떻게 빨리 이동할 수 있을까! 인간의 편리에 대한 욕망에 너무 쉽게 희생되는 순간이었다. 어디 나비만 그러할까. 인동을 먹이로 하는 검정황나꼬리박각시는 번데기시절을 땅속에서 보낸다. 흙이 필요한 이 나방에게 나무가 있다 해도 사방이 시멘트로 덮여 있다면 제대로 된 성충으로 우화할 수 없을게다. ↑ 제이줄나비 종령 애벌레 ↑ 제이줄나비 알 ↑ 제이줄나비 동물은 말이 없다. 조용히 도태되고, 조용히 희생되고, 조용히 사라져 갈 뿐이다.(우동걸, ‘숲에서 태어나 길 위에 서다’.) 크고 작은 건설과 개발에 의해 땅이 파헤쳐지고 건물이 들어서며 나비가 사라지는 일도 있지만 예초기에 의해 식물이 잘려지며 순간 사라지는 일도 있다. 일반적으로 나비는 꽃꿀을 찾지만(물론 나무의 진이나 똥에서 미네랄도 섭취한다) 애벌레는 먹이식물이 필요하다. 배추흰나비는 십자화과 식물을, 호랑나비는 운향과 식물을, 암끝검은표범나비는 제비꽃을, 네발나비는 환삼을..... 즉 식물과의 관계성 속에서 살아간다. 식물이 사라지면 나비도 사라지는 관계다. 사향제비나비와 꼬리명주나비를 키울 때의 이야기다. 사향제비나비애벌레와 꼬리명주나비애벌레를 분양받았다. 쥐방울덩굴을 식초로 하는 나비들이다. 주위를 수소문하여 쥐방울 덩굴을 찾는다. 입석리 어디 고사리 밭에 쥐방울 덩굴이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금씩 구해 와서 먹이로 주었다. 내가 사는 주위엔 잘 자라지 않아 내년에는 “꼭” 집 뜰 안에다 쥐방울 덩굴을 심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애벌레를 키워 나비로 날려주면서도 살짝 걱정이 된다. 짝을 찾는 것도, 알을 낳을 식초를 찾는 것도.... 장수의 아는 선생님은 어느 댐 주위에서 쥐방울덩굴 군락을 찾았다고 했다. 먹이걱정도 짝을 찾고 알을 낳을 장소도 걱정 없다고 했다. 부러웠다. 그러나 몇 주 뒤에 들은 소식은 슬펐다. 애벌레 먹이를 찾아갔던 그 자리는 깨끗했다고 했다. 예초를 하여 쥐방울덩굴은 남김없이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예초질에 거기서 살아가던 애벌레들은 작별을 고했다. 우동걸 박사는 ‘숲에서 태어나 길 위에 서다’란 글에서 “우리 곁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 우리 사회는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할 것이다. 알면 사랑하게 되고 알아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생태연구는 자연을 보는 해상도를 조금이라도 높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000과 000의 삶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라도 넓히기를, 바람과 새와 꽃의 은밀한 신호를 읽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썼다. 나비를 배우며 ‘그저 아름다운 개체다’란 생각에서 사랑하는 대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내가 나비를 사랑하게 되면서 더 찾아보게 되고 더 곁에 머물게 되는 것 같다. 나비를 곁에 더 다가오게 만들고 싶어 내년 집 안 뜰에 심을 꽃과 나무도 구상하게 된다. 정원이 있는 주택에 사는 많은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팽나무를 심으면 왕오색나비, 홍점알락나비와 흑백알락나비, 수노랑나비, 뿔나비를 만날 수 있다. 제비꽃이 있으면 암끝검은 표범나비, 암검은 표범나비 등 다양한 표범나비들을 만날 수 있다. 십자화과 식물이 있다면 흰나비 종류를, 콩과의 아까시나무에는 애기세줄나비를...그리고 식초가 아니라도 다양한 꽃들이 많으면 꽃꿀을 먹으러 다양한 나비들이 날아올 것이다. 마당의 풀을 뽑을 때도 누군가의 먹이로 조금은 남겨두자. 농약과 제초제는 치지말자. 더불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조심히 의견을 내본다. 더불어 사는 길이 결국 우리가 잘 사는 일이니까. *토리는 어쩌다 살게 된 지리산자락. 그곳에서 만난 자연을 늦틔게 품으며 눈맞춤하고 배우고 있다. 숲해설가 시절,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연을 이야기하며 씨앗하나 심는 마음으로 도토리의 토리라 이름지어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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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 지리산 생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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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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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 대책으로 심은 블랙 사파이어 포도
- 구례 현근종 농부는 노후 대책으로 블랙 사파이어 포도를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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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 지리산자락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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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 대책으로 심은 블랙 사파이어 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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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이 미쳤어요?
- 보험 많이들 가입하셨죠? 자동차 보험에, 생명보험이나 아이들의 건강에 관한 보험 등. 이 글을 읽는 분 중에도 1개 이상의 보험에 가입하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보험은 혹시나 일어날 수 있는 여타의 일에 대해 개인적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선택한 사회적 보장제도입니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보험은 뜻밖에도 사람이 아니라 ‘소’입니다. 조선 시대에 소 한 마리에 1냥씩 강제로 보험에 가입시켰습니다. 보험 가입이 안 된 소는 매매할 수 없도록 했지만, 농가의 반발에 소 보험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폐기되고 맙니다. 요즘 여기저기서 봄꽃이 피었다는 얘기가 들립니다. 대표적인 봄꽃인 노란 개나리는 해마다 가을이면 꽃을 보여줍니다. 이제는 벚나무도 꽃을 보여주고, 사과도 꽃을 보여주지요. 이런 봄꽃을 가을에 만나면 반가움보다는 의아한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쉽게 철없는 것들, 혹은 꽃들이 미쳤다고 말합니다. 과연 꽃들이 미쳤을까요? 봄에 피는 꽃은 춘화현상을 겪은 후에 꽃이 핍니다. 춘화현상은 겨울의 추운 자극을 받고 난 후에 꽃을 피우는 현상을 말하고 봄에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겨울의 혹한을 견디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느 드라마 제목처럼 겨울이 따뜻하면 봄꽃은 어찌 될까요? 모든 식물은 온도의 영향이 중요하지만, 햇빛의 양에도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이렇듯 햇빛의 길이에 따른 영향을 광주기성이라 합니다. 식물은 광흡수센서인 피토크롬으로 빛의 양을 측정해서 겨울눈이 꽃으로, 잎으로 피어납니다. 우리가 아는 흔한 나무 중에 느릅나무가 있습니다. 느릅나무 형제들은 비술나무, 느릅나무, 참느릅나무, 시무나무 등이 있는데 모두가 봄에 5월까지 꽃이 다 피어요. 그런데 그중에 하나 참느릅나무가 9~10월에 꽃이 핍니다. 느릅나무와 형제 종인데 꽃피는 시기가 너무 다릅니다. ‘참느릅나무는 왜 이렇게 가을에 꽃필까?’ 라는 질문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의문이었습니다. 봄하고 가을은 많이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한 것이 있어요. 해의 길이가 비슷해서 즉, 일조량이 비슷해서 빛의 세기와 강도가 비슷합니다. 우리는 계절을 알기에 봄과 가을이 완전히 다른 것을 알지만, 식물은 온도나 일조량 등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계절을 안답니다. 앞서 말했듯이 봄에 꽃 피는 식물은 춘화현상이라고 해서 차가운 겨울을 느껴야 봄에 꽃을 피웁니다. 그런데 빙하기와 간빙기를 넘나들었던 지질학적 시간으로 보면 지금보다 훨씬 따뜻한 겨울이 있었던 적도 있어요. 그래서 혹여 따뜻한 겨울에 대해 대비도 해야 합니다. 가을과 봄은 태양 빛의 길이가 비슷하기 때문에 여름을 따뜻한 겨울이라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일조량은 비슷한데 뭔가 다르니까 봄처럼 꽃을 많이 피우지는 않고 몇 개만 피우는 거예요. 몇 개만. 정말 따뜻한 겨울이면 몇 개는 남아서 번식해야 하니까요. 식물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가을철에 뽕나무가 꽃을 피워서 열매 맺히는 걸 보신 적이 있을 거예요. 처음에는 참느릅나무도 다른 느릅나무 형제들처럼 봄에만 폈겠죠. 하지만 가을에 꽃을 피우고 열매 맺었던 느릅나무가 그런 식으로 해서 참느릅이란 종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요. 봄에 꽃 피는 식물 중에서 혹시나 따뜻한 겨울이 지난 줄 알고 가을에 피는 몇몇 식물들이 가을에 열매 달려서 떨어져 싹을 내린 애가 가을 꽃피는 애들로 이렇게 변화해서 나오지 않았겠느냐는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개나리, 벚나무, 우리가 봄에 핀다고 믿는 식물 중에서 이렇게 가을에 피는 애들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아는 에너지 과잉시대에 사는 인간이 생각하기에 미친 것처럼, 철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식물들 입장에서는 겨울이 따뜻했으면 어떡하지라는 보험을 든다고 본다는 거죠. 그래서 에너지 낭비가 아니라 번식할 수 없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조금씩만 꽃을 피워보는 이런 식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요. 저는. 그래서 꽃들이 미친것이 아니라, 꽃들이 철이 없는 게 아니라. 진화적으로 축적되어 온 삶의 또 다른 보험을 드는 하나의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멸종을 피하기 위한 전략인 거죠, 인간과 마찬가지로. 철없이 꽃 핀 아이들이 가냘프게 피운 그 삶의 몸짓은 우리와 같은 살아남으려는 치열한 삶의 현장인 듯싶어 애달프기도 하고 또 동지애도 느껴지는 이 가을입니다. * 글을 쓴 조숙경 님의 별명은 느림보입니다. 느림보는 <사단법인 숲길>에 근무하는 숲해설사입니다. 매월 마지막 목요일에 진행되는 목동반 소식을 전할 느림보는 매우 아름다운 목소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느림보의 목소리가 궁금한 분은 매월 마지막 목요일에 떠나는 목동반 답사에 함께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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