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반내골 정씨

 

박두규

 

 

구례를 떠나지 않았던 그의 마음을

이제는 조금 알만도 하다.

구례의 해방구 시절 이후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 시절을 기억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산은 끝내 산으로 남아

흐르는 세월을 견디면 그뿐이지만

사람의 한 세월은 끝내 머물고 마는가.

광주옥사를 나온 정씨는

놀림받는 빨찌산의 딸을 데리고

서울로 순천으로 떠돌다가

탯줄을 묻은 반내골에 다시 들어왔다.

꿈이라고 말하기엔

저 산들이 너무 가까이에 있고

동지였던 아내의 몸은 너무 무너져 있었다.

이제는 자본의 세월이 만들어준

평범한 촌로의 모습으로

시골 아파트 관리인이 되었건만

관리실에 앉아 조간신문을 뒤적이다

문득 고개를 들면

눈 덮인 노고단 너머로

 희뿌연 하늘이 아른거리곤 했다.

누구에게나 한 시절이 있는 거라며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면

이렇게 남아 있을 까닭도 없었다.

스스로 지울 수도 지울 필요도 없는

그 한 시절이 그리워서도 아니었다.

살랑이는 겨울강의 풋바람을 맞으며 걸어도

아직은 선선히 내놓을 목숨에 이르지 못했고

굼틀리는 산자락의 햇살을 보면

늙어빠진 몸뚱 어느 구석

이념도 사상도 아닌

사무치는 능선들이

아직도 따라서 굼틀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본 -C39A382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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