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1(수)
 

지리산 빨치산의 시작과 끝

 

 

 지리산 파르티잔 이야기는 한반도 해방 국면의 정치적 상황과 민족사적 흐름, 그리고 국민적 정서를 정확히 인식하는 배경에서 다뤄져야 한다. 당시의 모든 항쟁적 사건들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진행된 것들이다.

 해방 직전 일본의 패망이 짙어지던 1944년에 미국은 당시 막 시작되던 세계적 냉전체제 국면에서 한반도를 미국의 전초 기지화 하려는 계획을 진행하였다. 그래서 여론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 해방이 되면 어떤 체제의 국가가 건설되기를 희망하느냐는 질문에 자유민주주의국가 14%, 사회주의 국가 70%, 공산주의 국가 7%, 기타 9% 였다. 이에 미국은 해방 후 승전국의 입장에서 38도 선 남쪽으로 들어와 미군정을 시작했다. 북쪽은 소련이 직접 국가운영을 하지 않고 조력자의 입장에 있었던 반면 미국은 여론을 토대로 사회주의 국가 건립을 우려하여 군정으로 직접 남한을 통솔 운영했다.

 그러면서 토지개혁과 일제 잔재 청산, 공평한 사회를 꿈꾸던 민족의 흐름을 역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시 조선공산당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46년에 대구철도노조가 깃발을 들고 대구 10월 항쟁이 일어난다. 10월 항쟁은 미군정 반대가 가장 큰 이유였다. 이후 10월 항쟁 수배자들은 산으로 들어가 야산대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파르티잔의 시작이라고 본다.

 이후 미군정이 끝날 무렵 19485.10 단선 단정에 반대하는 2.7 구국투쟁이 일어난다. 전국 총파업으로 진행되며 이때도 수배자들이 산으로 들어가며 야산대가 더욱 강화된다. 지역사령부를 두며 체계화 된다.

 그리고 이어서 제주 4.3항쟁과 10.19 여순 항쟁이 일어난다.

 

194810월 여순항쟁 이후 김지회, 홍순석, 지창수 등이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 문수골로 들어옴. 4811월 이현상 지리산으로 투입

1949년 야산대를 인민유격대로 재편성하여 토벌대와 전투.

1950년 한국전쟁으로 8월에 인민유격대는 북한 정규군과 합세하여 작전을 펼침

1951년 남부군 활동 전성기로 열차습격, 은행습격 등, 하지만 12월 들어 본격적인 토벌로

1952년 토끼몰이식으로 대성골로 유인하여 박격포, 공군기 투입으로 빨치산 궤멸. 사살 300, 포로 250, 혹은 800여명이 죽었다고도 하는 등, 자료의 부정확

19537월 휴전협정 시 지리산 잔여 빨치산 언급 없음. 이현상 9월 사망

(이현상은 북으로 갈 수도 있었으나 스스로 지리산에 남음. 북에서 김일성의 권력투쟁으로 남노당 출신의 박헌영, 이승엽 등이 모두 처형 당함. 박현영은 여순때 병력노출 혐의 미군스파이로 몰려 죽음)

1954년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 전남도당 박영발 사망으로 토벌 종료. 5월 정식 토벌대는 해산하고 지역에서 토벌 계속

1955년 지리산 입산통제 해제

195643명 빨치산 생존 떠돌이

196311월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총상 입고 체포

 

사본 -IMG_0164.jpg

-천왕봉 설경(사진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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