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7(토)
 

 

 

이런저런 지리산 이야기 2

 

 

 

칠불암이 칠불사가 된 것은 전씨의 5공 시절 실세 중의 실세라는 쓰리 허의 작품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그 옛적 인도에서 시집 온 허황후의 일곱 왕자가 성불한 곳이 칠불암이고, 나머지 중 두 왕자가 어머니의 허씨 성을 퍼뜨렸으니 쓰리 허가 그 자손이라는 것이다. 지리산 중턱까지 관광버스가 오르내리는 길을 만들고 그 비싸다는 기와로 모든 지붕을 씌워 권세를 자랑했으나 오히려 그 치적으로 인해 역사 속에 두고두고 욕을 먹게 되었다.

 

피아골의 끝 마을은 직전마을이다. 피 직()에 밭 전()을 쓰니 그 옛날 곡식이 귀한 시절의 이름이다. 그 피밭골이 피아골로 불려지게 되었으나 그 골짜기에서 전쟁 이후 한 트럭분의 유골이 나왔다고 하니 피아골은 피()와 아()가 싸워 계곡이 핏빛으로 물들었던 전쟁의 상흔이 담긴 이름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이 피아골을 오르다 보면 삼홍소(三紅沼)가 나오는데 김시습이 이곳에 앉아 술 한 잔 하며 단풍이 붉고 그것을 비추는 맑은 계곡물이 붉고 제 얼굴이 붉어 삼홍이라 하였으니 이래저래 피아골은 붉은 골짜기라는 이미지를 버릴 수 없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남부능선을 내려오다 능선 끝자락의 원강재로 하산하려는데 길이 묵어 없어지는 바람에 늦은 적이 있다. 이미 어두워진 시루봉 근처에서 길이 끊겼는데 친구와 나는 지도를 보며 의견이 달랐다. 친구는 더디더라도 길을 찾아 가자는 것이었고 나는 여기서 곧바로 직선으로 길을 뚫자는 거였다. 가시덩굴이 우거진 길을 억지로 뚫어 새벽 2시가 넘어서야 힘들게 내려와 생각했다. 내 스스로 길이 되었던 고단한 하루였다고. 하지만 그것 또한 나의 오만이라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왕실봉의 외국인 산장을 지키는 보살님에게 점심으로 비빔밥을 얻어먹은 일이 있다. 따뜻한 보리밥에 근처에서 방금 끊어온 산나물을 넣고 참기름 한 숫갈에 여러 봄꽃들의 꽃잎들을 낱낱이 따서 얹어 주었다. 그 형형색색의 꽃잎 비빔밥은 먹기엔 너무 아름다웠다. 아름다움 자체를 먹는다는 사실에 흥분했으나 나는 결코 아름다워지지 않았다.

 

상선암으로 해서 차일봉을 오르다 멧돼지 네 식구를 만났다. S 곡선을 돌아 갑자기 조우했는데 나도 놀랐지만 그 가족들이 더 놀랐던 것 같다. 그들이 먼저 순간적으로 등을 돌려 왔던 길로 돌아갔는데 그 찰나에 마주친 어미 멧돼지의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아마 그녀도 그럴 것이다.

 

 

지금 야간산행은 벌금이 50만 원이지만 예전에 밤으로 걷는 즐거움은 제법 컸었다. 지상의 모든 것들이 달빛에 젖어 조용히 스스로를 성찰하는 시간에 나는 홀로 깨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껏 고무되었던 철없는 발자국 소리였다. 달빛에 촉촉이 젖은 구상나무며 이슬 머금은 동자꽃, 숲의 어둠을 얼핏 스쳐가는 고뇌까지도 경이로웠던 밤, 그렁그렁한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밤, 불무장등의 작은 봉우리들과 피아골의 들리지 않는 물소리마저도 모두가 나를 향해 밀려오는 것만 같던 그 치기어린 감상의 밤이 그립다.

 

 

대설주의보가 해제되기를 기다려 산에 오르곤 했다. 티 없이 맑은 하늘,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누구도 밟지 않은 새로운 길에 발자국을 남기고 싶었다. 눈꽃을 가득 피운 나무 사이로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맨 처음 길을 열다보면 외로움도 슬픔도 세상의 고단함도 내 안의 두려움까지도 모두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까닭모를 그리움 하나가 발자국처럼 질기게 따라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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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 설경 / 사진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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