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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몸 가르침 한 수
    몸 가르침 한 수 절에 있을 때 이야기다. 참 오래된 이야긴데 나는 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갈 곳이 없었다. 집에 있자니 부모님 보기도 민망하고 나가 돌아다니자니 어느 대학에 갔냐는 질문이 무서워 사람 만나는 것도 겁나고, 혼자 빈둥거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어서 작은 보따리 하나 들고 무작정 절로 들어갔다. 그 길로 거의 1년을 절집에서 살았는데 그해 여름의 일이었다. 그곳은 서래선림(西來禪林)이라는 비석이 입구에 서 있는 지장암(地藏庵)이라는 절이었는데 해안(海眼) 큰스님이 돌아가시고 사부대중의 발길이 끊기고 상좌들도 밖으로 나가 있어서 말 그대로 절간처럼 조용한 절이었다. 때는 한 여름이라 녹음이 짙을 대로 짙어져 숲 그늘에 누워 잔잔한 바람에 책이라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달콤한 낮잠에 빠지곤 하던 시절이었다. 그 여름 어느 날 객승이 한 분 오셨는데 작달막한 키에 별 말이 없는 얼추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스님이었다. 대개 스님들은 객으로 묵을 때면 예의상 곧잘 예불도 드리곤 하는데, 그 스님은 아침 예불이건 저녁 예불이건 한 번도 불당에 오르는 일이 없고, 도통 방에만 틀어박혀 나올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방에서 공부를 하거나 참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거의 종일토록 잠을 자거나 방에서 빈둥거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부턴가 그 스님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한 낮에도 쉬지 않고 해가 질 때까지 죽어라고 일만 하였다. 특별히 할 일이 없는데도, 이를테면 아랫마당에서 법당까지 놓여 있는 돌계단을 괜히 파헤쳐 놓고 다시 하나하나 계단을 맞추어 쌓는 그런 일이었다. 내가 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멀쩡한 돌계단을 부수고 쌓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더우니 보통 이른 아침이나 저녁나절에 강한 햇살이 죽었을 때 일을 하는 법인데 이 스님은 태양이 이글거리기 시작하는 10시쯤에야 일을 시작하여 밖에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그런 뙤약볕에서 일을 하다가 해가 지는 무렵이면 일을 끝냈다. 정말 온몸이 땀에 젖어 금방 물에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젖은 채 하루 종일 일을 하였다.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났으나 스님은 매일매일 죽어라고 일만 했다. 그런 스님에게 나는 말 붙이기도 왠지 꺼려했는데 하도 궁금해서 언젠가 ‘스님, 왜 스님은 예불은 안 모시고 일만 한답니까?’ 하고 물었더니 스님은 별다른 표정도 없이 ‘나는 예불 드리는 거 몰라.’ 라며 마당으로 가서 또 괜한 돌계단을 허무는 것이었다. 진짜로 염불을 못하는 것인지 궁금했고, 염불도 못하면서 어떻게 스님이 되었는지도 궁금했다. 아니 무엇보다도 왜 그렇게 가장 더운 시간에 미친 듯이 일만 하는 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 스님은 나의 이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고 언젠가 말도 없이 훌쩍 지장암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30년이 지난 지금, 가끔 그 스님이 생각난다. 아니 그는 3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나를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일에 말만 앞세우고 말로만 해결하려 들며 몸은 까딱도 않는 나에게 말이 아닌 ‘몸’을 가르쳐준 스승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보다는 ‘몸의 행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강변하듯 그의 여름날 노동이 그의 수행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수행은 말보다도 공부보다도, 온몸의 행위로 진실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 위한 것은 아니었나 싶다. 입만 벙긋하면 거짓말이 튀어나오는 거짓 덩어리의 이 몸뚱어리, 살아온 세월만큼 두꺼워진 위선의 몸집, 거짓으로 가득 찬 비만의 몸뚱어리에게 ‘진실’이 무엇인가를 이처럼 명쾌하게 가르쳐주는 스승은 아직 없었다. 사실 요즘 현대인들은 가급적이면 모든 일을 ‘앉아서’ 처리하려고 한다. ‘몸으로 뛰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현대 과학기술문명과 컴퓨터 문화의 일반화로 사람들의 생활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져서 몸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치장’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사는 것 같다. 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상품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몸을 아름답게 가꾸려고 하는 것, 그 자체는 이해할 수는 있으나 그것의 궁극적인 지향은 결국 몸의 상품성을 높이는 것으로 귀착되는듯하여 씁쓸하다. 요즘 세태를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사실 인류의 역사가 자본주의의 역사로 넘어 오면서 전 지구적 시장경제를 통해 지상의 모든 것은 이미 상품이 되어 버렸으니 ‘몸’인들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즘 부쩍 더 30년 전의 그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나는 스님이 자주 내 앞에 나타나 어른거린다. (박두규. 시인) -노루귀 /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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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8
  •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학의 길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학의 길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 박 두 규 (시인) 1 코로나 국면을 맞고 보니 그동안 꾸준히 거론되어 오던 기후변화에 따른 전 지구적 위기라는 것이 코앞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문학은 무엇인가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우리는 문학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논의를 해왔지만 지금의 현실상황을 보면 ‘지구 위기, 인류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문학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학도 과학이나 기술처럼 현실에서 우선적으로 ‘지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삶 문학에 일정 부분 복무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도 문학은 문학대로 지금껏 확장해온 영역이 있고 인류사 속에서 다양하게 그 역할을 해왔으며 또 어떤 특별한 상황 속에서는 그 상황에 맞게 대응해왔기 때문에 지금처럼 그렇게 하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이 상상력의 문학이고 영적 문학이라는 점과 ‘지구의 위기, 인류의 위기’의 현실에 대한 복무를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100년의 지구, 100년의 인류를 염두에 두며 글을 통해 더 세밀하게 그려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의 과학과 기술보다 100년의 현실을 앞서 이야기하고 노래하며 올바른 방향의 길을 찾는 더듬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 요즘 쏟아져 나오는 학자들의 글들을 읽어 보면 기후 환경으로 인한 지구의 위기 상황은 현실의 감도보다 훨씬 심각하다. 지금 우리가 해마다 역대 기록을 갱신하며 겪는 자연재해는 단순한 재해가 아니라 대량학살의 위기이며 재앙의 시작이라고 봐야 옳다는 것이다. 인류가 자본주의 문명의 현행 기조를 고수할 경우 2100년에는 탄소배출량으로 인해 지구의 기온이 약 4도 이상 상승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북극의 빙상은 이미 붕괴된 지 오래고 알프스의 만년설은 70% 이상 녹으며 해수면은 최대 2.4미터 상승할 수 있다고 한다. 인구 천만의 자카르타 같은 도시가 물에 잠기며 세계의 주요도시는 거의 2/3가 해안에 위치해 있으니 그에 따른 발전소, 항구, 농경지 등 주요시설도 함께 위험해질 것이다. 그리고 적도 지방의 주요 도시들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한다고 한다. 이미 2018년 폭염 시에 로스엔젤레스 42도, 파키스탄 50도, 알제리 51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물 부족과 폭염으로 북위도 지역마저도 해마다 수천 명이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가 끝날 무렵이면 코로나와 같은 새로운 질병들, 상상을 초월하는 산불과 홍수의 증가, 수천만 명에 이르는 기후 난민, 경제 대공황과 지역 간의 기후분쟁, 농산물 생산이 크게 줄면서 일어나는 자원전쟁 등 한 해 기준 100조 달러의 세계 피해규모가 예상된다니 앞으로 80년 안에 변화될 지구의 모습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지금의 자본주의적 개발과 소비 패턴에서 조금도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진행되었을 경우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코로나19가 해결된다 해도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 예전의 일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지구와 인류는 이미 변화의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새로운 문명이 일어나는 시점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기존의 자본주의를 토대로 이루어낸 과학기술문명, 물질문명의 틀에서 벗어나 이전의 의식에서 한 단계 점핑된 도덕적 과학기술과 새로운 정신문명으로의 판짜기 변화가 절실해진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현재 소비와 개발성장의 자본문명에서 전환하여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 갈 것인가를 이야기해야 된다. 포스트 코로나를 맞아 변화되어야 할 의, 식, 주, 의료, 교육 그리고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까지 기존의 질서와 그 틀을 어떻게 바꿔가야 할 것인지를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문학은 이 현실 변화의 중심에서 어떤 마음, 어떤 영혼을 가진 인간이어야 하는 것을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3 지금껏 지구와 인류의 위기를 초래해온 자본문명을 벗어나 새로운 문명을 꿈꾼다면 먼저 기존의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세계관 등 일상 속의 대중들에게도 정신적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생각이 바뀌어야 그 삶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정제 없이 그대로 반영된 이데올로기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그렇게 이익을 극대화하며 개발과 성장의 경제논리로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 자본주의다. 자본은 배고픔과 위험한 환경 조건에서 풍요로움과 안전함과 편리함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 도를 넘어 인간의 끝없는 탐욕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렇게 인류는 풍요와 편리를 거느린 현실 자본주의를 앞세워 공존공생을 위한 사회적 도덕과 윤리의 경계를 깨고 탐욕과 욕망을 당연하고 정당한 인간 정서로 편입시켰다. 단순하게 이야기 했지만 사실 이런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자본주의와 잘 어울려 끝없이 달려온 결과 현재의 지구와 인류의 위기를 맞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개인의 인간도 그 탐욕이 지나치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반성과 성찰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 인류는 21세기가 끝나는 지점부터는 지금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혹독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사피엔스의 종말을 향해 추락해 갈 것이다. 그래서 문학예술은 지금의 시점에서 좀 더 집중적으로 21세기 이후의 현실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한 새로운 문명, 새로운 문학예술에 복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문명에 대응하는 문학을 생각하려면 자본주의의 속성인 탐욕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철학, 새로운 문화를 궁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어쩌면 삶의 본질과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총체적 근원으로부터 오는 것이어서 그것은 현실 자본주의를 벗어나 근본 진리의 삶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본래 모든 생명들은 함께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공존공생의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과 그것을 위해 인간은 가장 경계해야 할 본성인 ‘탐욕’을 꾸준히 정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4 나는 이것을 문학이라는 영역에서 생각한다면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는 ‘단순한 삶’과 ‘소박한 삶’을 하나로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인데 ‘단순한 삶’의 문학은 개인 스스로를 전체의 한 부분이면서, 그렇기 때문에 전체라는, 그래서 전체를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라는, 이미 붓다나 예수 등 많은 현자들이 발견했던 동체대비, 궁극과의 합일 등 진리의 삶과 연계되어 있는 것이며 이를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문학을 말한다. 이는 ‘단순성’이라는 진리의 영역을 문학으로 가져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실현할 수 있는 ‘단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삶은 당장 그렇게 살려는 스스로의 결단과 실천만 있으면 되는 ‘단순성’에서 시작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진리에 의해 사는 삶’은 어떤 거창한 것은 아니고 현재의 실상을 바로보고 그것에 어긋남 없이 사는 것, 다시 말하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의 실상은 모두가 있는 그대로 어울려(연기적 관계를 가지고) 전체가 하나의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있는 그대로(본질 그대로) 어울려 순환하고 진화하는 것이 바로 ‘단순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변곡점에서 문학이 주시해야 할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소박한 삶’은 이런 ‘단순한 삶’을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 사실은 방법이면서 그 본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를 진화시켰던 인간의 탐욕은 끝없는 집착을 가져와 현재 지구의 기후재앙과 함께 모든 문제의 화근이 되었고 이 탐욕과 집착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소박한 삶’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본의 끝없는 성장 시나리오는 이제 그 한계에 왔다. 대체 에너지 등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과학기술의 노력과 성과가 있다하더라도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충족시킬 수는 없다. 결국은 소박한 삶으로 가지 않으면 해결 될 수 없는 것이다. ‘소박한 삶’은 스스로의 탐욕을 다스리는 삶이고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을 조화와 균형으로 이끄는 해답이라고 본다. 이‘소박한 삶’을 통해 모든 생명과 지구가 하나의 완결체로 존재할 수 있는 공존, 공생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하고 새로운 문명의 길로 가는 길목에 이러한 물질 중심의 삶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 문학적 화두를 통해 개인의 이기(利己)를 극복하고 무아(無我)와 탈에고(脫ego)의 수준까지 의식을 확장하여 탐욕을 순치(順治)하는데 기여해야 하는 것이 현재의 문학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코로나19와 같은 새로운 질병들과 지구의 기후재앙을 막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첫눈이 내린 노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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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16

실시간 지리산 편지 기사

  • 지리산 이야기1 - 그리움
    지리산이야기1- 그리움 그 옛날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왔다. 그들은 자신의 깊은 어둠을 산에 풀었고 산은 그들의 어둠을 품어주었다. 스스로 고립된 만큼의 세월이 지리산의 그리움이 되었다. 그리움은 해마다 수수꽃다리며 때죽나무 같은 꽃으로 무리지어 피어났다. 그리하여 지리산 어느 산길에서 동자꽃 한 송이를 만나도 우리는 그 아름다움의 탄식 뒤에 숨어있는 오랜 그리움을 읽어내야 한다. 손바닥만 한 논배미라도 얻기 위해 함박꽃 다 지고 서리 내리도록 축대를 쌓고 계단처럼 논을 올렸다. 초승달 같은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아슬아슬한 계절들을 그렇게 건너고 누군가가 또 들어오고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고 그들은 잃어버린 시간과 그리움을 데리고 말없이 살았다. 외로울 때면 산이 먼저 푸른 대답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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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9
  • 지리산 ‘의신 옛길’을 가다
    지리산 ‘의신 옛길’을 가다 박 두 규 (시인) 지리산은 많은 길들을 품고 있다. 지금은 탐방로라고 하는 이름으로 등산객들에게 허용한 길만을 다니게 하고 있지만 지리산엔 아직도 지역민들이 고로쇠를 채취하러 다니는 길이 있고 약초꾼들이 다니는 길, 지능선을 가로질러 옆 마을로 가는 길까지 다 살아있다. 그리고 옛적부터 장꾼들이 주능선을 넘나들던 계곡길이나 빨치산들이 다녔던 지능선을 가로지르는 길들도 이어지고 끊어지면서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 모든 산길들은 산의 규모나 위치에 따라 사정은 조금씩 달랐겠지만 크게 보면 산은 옛사람들에겐 삶터였고 생활의 현장이었고 일상의 길이었다. 이번에 다녀온 지리산 길도 옛 사람들에게는 일상생활 속의 길이었던 일명 ‘서산대사 길’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의신 옛길’이다. 물론 지금은 묻혀 진 길이고 의신 사람들은 건너편의 포장도로로 차를 타고 다닌다. 지리산 주능선에서 보면 의신 마을은 벽소령이나 선비샘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의 끝자락에 위치한 마을이다. 역으로 말하면 의신에서 빗점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벽소령이 나오고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덕평봉의 선비샘에 이른다. 말하자면 의신마을은 지리산 안 자락에 위치해 있는 세속의 끝점이면서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는 시작점인 것이다. ‘의신 옛길’은 그야말로 옛날에는 화개에서부터 시작한 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화개는 섬진강 가에 위치해 있으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이기 때문이다. 화개에는 지금도 화개장터가 있지만 과거 섬진강 하류에 있던 화개포구의 오일장은 해방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5대 시장중 하나로 전국의 어느 시장보다 많은 사람들이 붐볐던 곳이다. 육로로는 구례, 하동 지역에서 곡식들이 들어오고, 해로로는 여수, 광양, 삼천포, 충무, 거제 등에서 황포돛배들이 수산물을 가득 싣고 왔으며 보부상들은 전북 남원지역이나 경남 함양지역으로부터 지리산을 넘어왔다 하니 화개장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의신 사람들은 이 화개장의 저자거리에 나와야 비로소 세상을 만나게 되고 장이 끝나면 다시 지리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의신 옛길’은 서산대사가 수행했다는 원통암으로 가는 길이기도 해서 ‘서산대사 길’이라고도 불린다. 화개에서 지리산을 향해 화개천을 따라 걷다보면 쌍계사가 나오는데, 지금 그 길은 아름드리 벚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어서 봄이면 상춘객들과 그 차량으로 몸살을 앓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서산대사가 걷던 당시만 해도 오솔길이었을 그 길옆에는 은어 떼가 유영하는 청정한 화개천이 흐르고 호젓한 길가에는 많은 들꽃들이 피어 있었을 것이다. 쌍계사를 지나 한참을 더 지리산 안으로 들어가면 신흥이라는 마을에 이르고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지금의 ‘의신 옛길’이 시작된다. 여기서 의신으로 가려면 의신계곡을 따라 포장도로로 올라가는데 ‘의신 옛길’은 의신계곡 건너 반대쪽에 있는 4.2km의 산길을 말한다. 지금은 이 길을 걷는 의신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말 그대로 ‘의신 옛길’이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굴곡진 이 길을 걷자면 계곡의 물소리만 따라올 뿐 숲속의 적막감에 홀로 놓여 마음이 가라앉고 스스로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지리산의 깊고 험한 산중에 홀로 남은 외로움이나 두려움 같은 느낌이 아닌, 가볍고 고요하며 차분한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 평온하고 안정된 상태의 그런 느낌으로 걸을 수 있어서 좋다. 나는 서산대사나 된 것처럼 2km 정도를 그런 마음이 되어 걸었다. 이어서 살짝 언덕진 고개를 넘으니 서산대사의 ‘의자 바위’가 나왔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의신사의 범종을 가져가려 하자 도술을 부려 돌 의자로 바꾸어 놓았다는 설화를 가지고 있는 바위다. 우리 주변의 많은 설화들은 대부분 그곳 민중들의 어떤 염원이 담겨있다. 그런데 왜 굳이 ‘의자’였을까. 물론 잠시 편하게 쉬어가자는 의미도 있겠지만 ‘서산대사의 의자’라는 점에서 보면 단순히 쉼터의 의미만을 담은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의자는 민초들이 아무 때나 쉽게 앉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며 그들의 문화와는 거리가 먼 물건이다. 보통은 존경할만한 지체 높으신 어른이 앉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돌 의자는 서산대사께서 민중들을 높이 보고 이 길을 다니는 민초들이 잠시 앉아 쉬면서 미천한 신분이지만 자기 스스로를 귀하고 높게 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天上天下唯我獨尊)을 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미천한(?) 나는 서산대사를 떠올리며 한참이나 의자바위에 앉아 쉬었다. 이렇게 2시간 정도를 걸으면 의신 마을이 보인다. 나는 의신마을에 들어가 점심을 먹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식당을 찾았으나 겨울 초입이라서 그런지 밥 먹을 곳이 없었다. 그때 작은 가게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곳의 한 귀퉁이 누렇게 변색된 종이에 ‘식사 됩니다’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점심을 먹으며 원통사로 가는 길도 물어볼 겸 들어가니 웬 사내가 감을 깎고 있었다. 수염을 기르고 있었지만 작은 키에 다부진 체격이 60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주방에 있었는데 식사는 김치찌개만 된다고 하여 시키니 그야말로 평소 집에서 먹는 집밥 식단이 펼쳐졌다. 봄에 채취한 듯한 산나물과 함께 김치찌개가 한 냄비 나왔는데 그 새콤달콤한 맛이 제법이었다. 그 부부도 마침 점심을 먹으려는 참이었는지 내 옆에 나와 똑같은 상차림으로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외지로 일보러 나갔다 돌아온 그 집 식구나 된 것처럼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한 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밥을 먹고 나니 12시 30분이었는데 쌍계사로 내려가는 버스 시간을 물으니 4시 20분이라고 했다. 무려 4시간의 시간이 있는데 원통사를 다녀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여기에서 1km 정도를 더 덕평봉 쪽으로 올라가야 서산대사의 수행처였다는 원통암이 나온다고 했다. 원통암으로 가는 길은 본격적으로 지리산을 오르는 것이어서 의신옛길보다는 가파른 길이고 조금 전에 밥을 먹어서 그런지 힘이 들었다. 50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니 원통암 문 앞에 이르렀는데 그곳에는 ‘서산선문西山禪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문고리 옆에는 조그마하게 ‘나는 누구인가’라고 쓰여 있었다. 서산대사와 같은 고승대덕들의 수행처였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암주의 의중이 읽혀졌다. 문을 열고 들어섰으나 인기척은 없었다. 지금껏 혼자서 숲길을 걸어 올라오며 그 정적을 충분히 느꼈는데 이 문의 안과 밖은 그 정적에 있어서 어떤 차이도 없이 고요 그 자체였다. 도량은 법당 끝의 채마밭까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이곳에 있는 수행자의 마음가짐을 짐작하게 했는데 앞마당에 서보니 멀리 아련히 보이는 섬진강의 S자 굴곡이 오랜 그리움처럼 걸려 있었다. 나는 헛기침도 하며 인기척을 내보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오지 않았다. 혹시 참선 중은 아닌지,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려다가 생각을 바로 접었다. 서산대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 툇마루에 따뜻한 햇볕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래, 스님을 만나 멋쩍은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는 혼자서 저 툇마루에 앉아 지리산의 능선들과 아스라이 보이는 섬진강을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따뜻한 햇볕을 정면으로 받으며 툇마루에 앉았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니 온몸이 섬세하게 깨어나는 듯했다. 귀밑머리를 스치는 여린 바람결이며 청량한 숲 내음이 온 몸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는데 그것이 그냥 너무 편했고 그 느낌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30분 정도를 앉아 있었으나 간간히 풍경소리가 들렸을 뿐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님도 공양보살도 없는 텅 빈 암자에서 나는 홀로 있는 기쁨을 잠시 느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혼자서 참으로 호젓한 시간이었다. 아니, 아니다. 혼자는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따뜻한 어머니의 품 같은 지리산에 안겨 자애로운 눈길을 종일토록 받았으니 어찌 혼자였겠는가. 내 오랜 어머니와 함께 한 하루였다. <끝> -빗점골 단풍/ 김인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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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편지
    2021-10-26
  • 아버지의 고향, 나의 지리산
    ☐지리산에서 온 편지 1 아버지의 고향, 나의 지리산 - 「지리산에서온 편지」 연재를 시작하며 박 두 규 (시인) 내가 지리산에 발을 처음 디딘 것은 1964년 국민학교 1학년 어느 겨울이다. 그때만 해도 전북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제사를 모시러 가는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의 고향인 전남 구례군 산동의 어느 마을을 가게 되었다. 아침밥을 먹고 나선 길인데도 포플러 가로수가 늘어선 먼지 풀풀 나는 신작로를 달려 몇 번이나 완행버스를 갈아타며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남원에 닿았던 것 같다. 남원에서 산동을 가려면 지리산의 서북 능선자락을 따라 밤재를 넘어야하는데 겨울이고 어두워지자 눈길이 험하다고 노선버스가 끊어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망설임도 없이 이른 저녁으로 돼지국밥 한 그릇을 먹고 걸어가자고 했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엔 늘 걸어서 밤재를 넘었기에 너무도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던 것 같다. 나는 겨우 차 한 대가 다닐만한 벼랑끝 길을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남원과 구례의 경계라고 할 수 있는 밤재 고갯마루에 이르렀을 즈음 주변이 어두워지고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갈수록 어둠이 더 짙어지고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쳐왔다. 내가 추워서 못가겠다고 하면 아버지는 긴 옷자락 품으로 나를 감싸고 꼭 안아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 아버지의 그 따뜻한 품을 잊을 수 없다. 밖은 쌩쌩 눈보라가 몰아치건만 아버지의 품은 따뜻한 방 안처럼 아늑했다. 내가 ‘아버지 여기가 어디야?’ 라고 물으면 아버지는 ‘지리산이야’ 라고만 대답했다. 한참을 걷다가 또 ‘여기가 어디야?’ 물으면 ‘지리산이야’ 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결국 내가 더 걸을 수 없는 한계에 왔을 때 아버지는 나를 업고 자신의 겉옷을 덮어씌운 채 걸었다. 나는 아버지의 등 뒤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음메~ ’하는 소 울음소리에 눈을 뜨니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린 아버지의 고향집에 이르렀던 것 같다. 등에서 내려 아버지 손을 잡고 눈 덮인 마당에 발자국을 만들며 집으로 들어서자 모두가 반겨주었다. 제사는 잔칫날이나 다름없어서 백석의 시 「여우난골족(族)」처럼 온 가족 친지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이렇게 처음으로 지리산을 만났고 지리산에 묻혀있는 아버지의 고향집을 걸어서 갔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넛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동이, 육십 리라고 해서 파랗게 보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배나무 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촌, 삼촌 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 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 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 가는 집 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랫목싸움 자리 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서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로 샛문 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여우난골족(族) / 백석) 족(族)은 가족 친지들을 말하고 ‘여우난골’은 여우가 나온다는 곳이니 얼마나 궁벽한 곳인지 알만하다. 이 시는 명절날 여우난골 부근에 사는 일가친척들이 큰집에 모여 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어린 아이의 눈을 통해 담아내고 있다. 아버지의 고향처럼 훈훈한 정취와 일가친척의 넉넉한 인정, 풍요로운 가족 공동체의 모습을 담고 있어서 나는 아버지 따라 지리산자락을 넘었던 일을 떠올리면 반드시 이 시가 생각난다. 아버지 고향집은 지금 생각하면 지리산 서북능선에 있는 만복대에서 산동으로 내려오는 지능선의 끝자락에 있는 골짝 마을이었던 것 같다. 1964년 당시엔 너무도 깊은 지리산 산골마을이었다. 하루 종일 걸려서 가야하는 험한 노정인데도 어린 아들을 지리산 고향집에 꼭 데리고 가고 싶었던 아비의 마음을 이제는 알 것도 같다. 그 뒤로 나는 대학생이 되어 지리산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선배들을 따라 MT 때 노고단에 올랐고 그때만 해도 등산화도 배낭도 없이 낡은 운동화에 기타를 들고 박스에 먹을거리를 싸매어 철없이 올라 다녔다. 그러다 졸업 후 교사가 되어 아버지의 고향 마을이 있는 구례에 둥지를 틀게 되었고 월급이라는 것을 받으면서부터 그렇게 갖고 싶었던 등산화와 버너, 코펠을 장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2인용 텐트까지 구입해 야영을 하며 제대로 된 등산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지리산에 깊숙이 빠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엔 지리산에 관련된 책은 거의 전무 상태였다. 월간지 「산」이나 산행 안내서인 「지리산」이 있었기는 하지만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산행 안내 정도가 아니라 지리산의 역사와 문학이었다. 그래도 접할 수 있는 문학이라고는 ‘빨치산’에 관한 소설이나 실록 등이었다. 장편소설로는 이병주의 「지리산」이나 이태의 「남부군」,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 등이었고 실록으로는 「남도부」, 「정순덕」 등이 당시에 읽을 수 있었던 지리산 이야기였다. 참으로 아픈 역사였다. 그렇게 책을 읽으며 혼자서 지리산의 모든 등산로를 섭렵했을 무렵 산행 파트너가 생겨 이후로는 주로 비등산로를 함께 다녔다. 그 친구나 나나 갓 문단에 등단한 시인이었고 무엇보다 지리산에 목말라 있던 우리는 매주 지리산에 올랐다. 당시만 해도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생기기 전후여서 비등산로에 대한 통제가 없을 때였다. 그래서 우리는 오만분의 일 지도인 군사작전용 지도와 나침판을(GPS가 없을 때여서) 가지고 다니며 지리산 어느 곳이나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산을 다니며 오늘에 이른 나에게 지리산은 아버지이고 스승이며 고락을 같이 하는 벗이고 사랑스러운 연인이다. 그리고 지리산은 오랜 옛날부터 갈 곳 없는 모든 사람들을 품어준 어머니나 고향 같은 곳이었다. 몰락한 백제 시절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추쇄꾼들을 피해 고향과 사람들을 등지고 지리산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고, 일상의 저자거리를 살 수 없는 사연을 가진 가난한 사람들이 가족을 데리고 들어왔으며, 조국의 해방을 꿈꾸며 겨울산을 헤매던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자본의 횡포로 인해 소외된 약자들이 도시로부터 내려온다. 그들은 자신의 깊은 어둠을 산에 풀었고 지리산은 그들의 어둠을 품어주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고립된 세월만큼 지리산의 그리움이 되어갔다. 그 그리움은 해마다 수수꽃다리며 때죽나무 같은 꽃으로 무리지어 피어났을 것이니, 지리산 어느 산길에서 동자꽃 한 송이를 만나도 우리는 그 아름다움의 탄식 뒤에 숨어있는 오랜 그리움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은 슬픔만이 아니라 얼마나 큰 生의 기쁨인가를 눈치 챌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이 흐르고, 흐르는 시간 중에 우리가 우리를 잃어버리고 있는 동안에도 지리산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늘 그곳에 있다. 지금도 지리산은 우리가 살면서 잃어버린, 역사 속의 시간과 그리움을 데리고 늘 그곳에 말없이 혼자 있다. 하지만 언제나 외로운 건 우리다. 그리고 우리가 흐르는 세월 속에 부표처럼 흔들리며 외로울 때면, 지리산은 늘 푸른 대답을 먼저 보내온다. 다만 우리가 그 오랜 침묵의 답변을 읽어내지 못할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산처럼 단 하루도 스스로 침묵해보지 못했고, 단 한 번도 지리산의 외로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처음 지리산에 발을 딛었던 때의 그 젊은 아버지보다 한참 더 나이를 먹었지만 아직도 지리산만 오르면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설렌다. 달궁계곡 수달래(사진 김인호) ================================================================ ■ 박두규(朴斗圭) ❏ 약력: 시인. 1985년『남민시(南民詩)』창립동인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1992년『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사과꽃 편지』,『당몰샘』,『숲에 들다』,『두텁나루숲, 그대』,『가여운 나를 위로하다』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生을 버티게 하는 문장들』,『지리산, 고라니에게 길을 묻다』등이 있다. 현재『한국작가회의』부이사장,『생명평화결사』운영위원장, 문화신문『지리산 人』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1-09-30
  • 지금은 사라진 하늘 아래 첫 동네
    ☐ 지리산에서 온 편지 지금은 사라진 하늘 아래 첫 동네 박 두 규(본지 편집인) 지리산 북서면 노고단 뒷자락에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심원마을이 있었다. 지금은 뱀사골 초입인 반선마을에서 노고단 성삼재로 해서 구례로 넘어가는 도로로 갈 수 있지만 오래 전에는 이 반선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노고단 쪽으로 한참을 올라가야 심원마을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참으로 궁벽한 곳이어서 집이 서너 채밖에 없었다. 하룻밤을 청하면 자연스럽게 민박이 되었는데 돈 받는 걸 어색해 하며 미안해 할 정도였다. 사람들의 출입이 거의 없는 골짜기였다. 처음에는 약초꾼들이 약초를 채취하며 임시로 거처하다가 겨울이 되면 철수하곤 하던 곳이었는데 차츰 나름의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와 자리 잡게 된 곳이었다. 나는 겨울 등반을 할 때는 피아골로 해서 반야봉에 올라 심원으로 내려가곤 했는데 그 쪽이 지리산 북사면이어서 눈이 녹지 않고 많이 쌓여 있기 때문에 그나마 구례에서는 겨울 지리산의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등산로였기 때문이다(지금은 폐쇄되어 갈 수 없다). 그 때 심원에 가면 묵는 곳이 민선생 댁이었다(그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그 삶을 존중하는 의미로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당시 민선생님은 60대 초로의 나이였는데 본디 강원도 출신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에는 김대중씨가 강원도에서 활동할 때 그 밑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도 군사정권의 엄혹한 시절을 보내며 이런저런 세파에 휘둘리다가 어찌어찌하여 이곳까지 들어와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창식이라는 이름의 나와 동갑인 아들이 하나 있었다. 당시 우리는 30대 중후반 무렵이었는데 그는 정신지체가 있어서 초등학생 수준의 나이에 머물러 있었다. 작은 키에 볼살이 붙어 있어 어려 보였으나 수염이 까칠까칠하게 돋아 나이를 숨길 수는 없었다. 나는 참으로 순진무구한 그와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심원마을을 갈 때면 반드시 챙기는 것이 있었다. 창식이에게 줄 두툼한 사탕 봉지를 맨 먼저 챙기고 민선생님에게 드릴 미역이며 말린 홍합, 새우 등을 바리바리 싸서 가져가곤 했다. 창식이는 내가 가면 반가움의 첫인사가 ‘사탕 줘!’였다. 그리고 심원은 산중인데다 당시는 차도 없어서 저자거리에 나오기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민선생님에게는 바다에서 나는 건어물 같은 것이 최고의 선물이었다. 창식이와 나는 아궁이에 같이 앉아 불을 때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주로 그가 궁금해 하는 것은 바깥 세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도시의 목욕탕 이야기며 백화점 이야기 등을 하면 귀가 쫑긋해져 들었고, 창식이를 놀리려고 도시의 아가씨들 이야기를 하면 그저 평범한 이야기인데도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하곤 했다. 창식이는 군불을 듬뿍 땐 후 꼭 내 방에 와서 같이 잤는데 사람이 그리웠는지 수염이 거친 얼굴을 내 볼에 비비며 잠들곤 했다. 창식이의 꿈은 부산에 한번 가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부산을 다녀온 듯 했는데 그 기억 하나가 지금껏 바깥세상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이었던 것이다. 참으로 내가 본 가장 순수한 영혼 하나가 그 깊은 심원마을에 있었다. 그리고 그 맑은 영혼이 그 나이토록 꿈꾸어 온 것이 부산에 한번 다녀오는 것이라니. 그래, 어쩌면 그것이 인생인 지도 모른다. 평생 부산에 한번 다녀오는 그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그 간절함이 너무 감동적이고 아름다웠다. 사는 일이 저리도 단순한 것인데, 저리도 소박한 것인데 우리는 욕망에 휘둘려 온갖 걱정과 두려움을 이고지고 살며 좌절하고 절망하며 슬퍼하는지, 그러구러 나이를 먹다 문득 돌아보면 찰나의 한 생인 것을. 인생을 걸만한 간절함도 없이 이런저런 손익계산이나 하며 늙어가는 것인가. 내 머릿속에는 지금도 창식이네 집이 있던 심원의 사계절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나무들이 일제히 연초록 새 잎을 올려 만드는 젊고 푸른 세상, 무성한 녹음의 그늘을 끊임없이 흐르는 힘찬 물소리의 벅찬 생명력, 붉게 물든 환희의 시간들, 순백의 고요에 묻혀 끝없이 깊어가는 구도자의 풍모, 그렇게 지능선의 봉우리들이 첩첩이 이어져 주능선으로 벋어 있는 심원의 지리산은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구례에서 천은사를 지나 성삼재에 이르고, 재를 넘어 심원을 거쳐 뱀사골에 이르는, 지리산을 남북으로 횡단하는 도로가 생기면서 심원은 관광지가 되어 갔다. 번듯한 숙박시설이 생기고 산천어 횟집에 노래방까지 들어서는 어느 즈음 심원을 찾았을 때 창식이네는 이미 어디론가 떠나고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창식이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부산으로 갔을까. 아니면 또 다른 하늘아래 첫 동네를 찾아 갔을까. 마을에 관광객과 피서객들이 붐비기 시작하면서 심원의 수려한 경관은 훼손되어 갔고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국립공원 관리공단과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이나 ‘지리산 사람들’ 같은 환경단체들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사실 심원마을은 지리산 국립공원 지역의 깊은 곳에 있어서 현행법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마을이었다. 하지만 약초꾼들의 임시 거처로 사용될 때만 해도 큰 문제가 없었으나 지금에 와서 지리산 깊은 곳에 관광지와 같은 마을이 형성되고 갈수록 도시형으로 발전한다면 심각한 문제임에 틀림없었다. 해가 바뀔수록 문제는 더 심각해질 것이니 지금이라도 어떤 조치가 필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국립공원 관리공단과 시민단체들의 오랜 노력 끝에 정착한 주민들을 설득하고 보상하며 이주시키기에 이르렀고 현재는 마을이 완전히 폐쇄되고 다시 자연으로 복구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끝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 거대한 바위나 산과 바다 또한 끊임없이 그 안과 밖에서 변화의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행성들과 우주 자체도 쉼 없이 변화하고 있으니 변화하는 질서 속에서 예외인 것이 어디 있으랴. 작은 씨앗 하나가 집채만한 느티나무로 변하고 또 언젠가는 소멸하는 것이니 사람의 나고 죽음 또한 그렇지 않은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인생이 무상하다는 말이 오히려 무색하다. 이러한 진리를 나의 현실로 조금만 당겨보면 찰나의 시간 속에서 나는 지금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질투하고 분노하고 평생 돈을 쫒아 다니며 마감하는 인생이 삶의 정답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리산의 심원이라는 공간은 나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다. 조금 더 세월이 흐르면 언제 이 곳에 마을이 있었으며 순진무구한 노총각 창식이가 군불을 때던 곳이라고 하겠는가. 우리네 삶도 그러할 것이다. 지금 현재야말로 아름다운 추억인 것이지 먼 훗날 누가 있어 나를 호명하며 기억할 것인가. 이 아름다운 세상, 기적 같은 삶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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