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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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새해
    김석봉 자문위원 밀레니엄의 종소리가 귓가에 생생한데 벌써 스무 해가 지났다. 도시의 거리에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던 그날이 새삼 떠오른다. 무엇인가 커다란 변화가 있을 거라는 설렘과 기대에 부풀었던 날들이었다. 세상이 확 바뀔 것 같은 예감이 가득 찬 시절이었다. 그리고 한 해 두해 새해를 맞이하면서 어느새 스무 해를 꽉 채웠다. 그렇게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무엇이 얼마만큼 달라졌나를 확인하곤 했다. 해마다 그랬듯 결과는 절망이었다. 우리네 삶의 문명은 언제나 더 높은 곳을 지향했고, 더 많은 것을 탐해 왔다. 지리산도 내내 몸살을 앓았다. 곳곳에서 케이블카를 놓겠다며 덤벼드는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한 물 간 양수발전소 건설계획이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하더니 성삼재까지 고속버스가 운행하는 상상할 수조차 없던 일이 현실이 됐다. 태풍과 폭우로 섬진강이 범람하여 주민들 삶의 터전을 할퀴는 사이 정부는 산등성을 파헤치는 산악열차 관광사업 프로젝트를 툭 던져놓았다. 주민들이 갈라서고 공동체가 너덜너덜해질 지경에 이르러서야 언제 그랬냐는 듯 그들은 발을 뺐고, 끝내 주민들만 멍든 상처를 안고 견뎌야 했다. 우리네 삶의 문명이 대개 이랬다. 이런 문명의 한복판을 코로나 바이러스가 휘젓고 있다. 벌써 한 해가 다 되었다. 점포는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집으로 숨어들었다. 직장동료라는 이유로 한 번 만나보지도 않은 그이의 어버이 문상을 한답시고 밤 새워 달려갔고, 친척이라는 이유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몇 촌 조카 결혼식장 찾아 다녔다. 그렇게 경조사 챙기고 상부상조하는 것을 미덕이라 여겼다. 그렇게 만나 축하하고 달래는 것이 사람 사는 정이라고 여겼다. 그런 일에 빠지면 눈 밖에 났고, 외톨이로 지낼 수밖에 없어 어떻게든 눈도장을 찍어야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여기 지리산 구석구석도 많이 달라졌다. 명절마다 자동차로 가득 찼던 마을공터엔 추석인데도 썰렁했다. 일가친척들 다 모이던 선산벌초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음력 시월 묘사를 지내는 곳도 보이지 않았다. 도시 사는 아들딸들 김치 통 들고 줄줄이 모여들던 김장철 풍경도 사라졌다. 자식들은 그저 오붓하게 온 듯 만 듯 다녀갔다. 도시의 삶에 지친 이들이 하나 둘 귀향의 보따리를 싸들고 동구 밖을 기웃거린다. 늙은 부모를 봉양하며 대대로 내려온 다랑이논에 삽질하는 낯선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필경 음식점을 하다 망했거나 실직한 아들에게 자신의 삶터를 물려주고 낙향한 중늙은이들일 것이다. 어렵고 힘든 시절이다. 인류에 기생하며 함께 진화해온 이 바이러스를 어쩌겠는가. 피해 갈 수 없으면 받아들여야하고 아픈 만큼 새로운 무엇을 창출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이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많은 변화를 강요했다. 그동안 우리가 향유해온 소비중심적인 우리네 삶의 양식에 경종을 울렸다. 마천루로 상징되는 21세기 삶의 문명, 삼천 포인트를 향해 질주하는 주가지수와 황새가랑이도 찢어놓을 듯 치솟는 집값에 매달려온 허접한 삶의 문명을 내려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그동안 만나고 모이는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 왔다. 올해는 그 많던 동창회도 송년회도 열리지 않았다.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그동안 경조사를 온라인으로 챙기다보니 굳이 만나야하냐는 생각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에게 친숙해진 많은 것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 빈자리를 새로운 것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앞만 보며 빠른 속도로 짓쳐가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며 천천히 걸어가는 발걸음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였다. 가까이에 있는 것들에 온정을 쏟고 정성의 손길을 보낼 줄 아는 삶. 저 덤불 속 작은 새와 풀숲의 꽃들과 돌담 위에 오두마니 자리 잡은 길고양이와 그 담 너머 늙은 이웃들이 다 나와 같다고 여기면서 살아야 한다고 일러주고 있다. 그런 세상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올해는 바이러스를 넘어 그 길을 나서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 이야기
    • 여기저기 민들레
    2021-06-01
  • 구례에서 산다는 것, 살아낸다는 것
    구례에서 산다는 것, 살아낸다는 것. - 도서관 신축부지에서 노동자들이 측량하는 걸 바라보며 정태연 하아... 그래, 세월 참 빠르다. 구례 땅을 드나들며 집을 보러 다닐 때가 엊그젠데. 2007년 겨울이었나 보군. 그렇게 원하던 곳으로 이사하리라는 기대로 부푼 옆지기는 신나하며 쫑알거렸었다. 파도리는 이름이 참 예쁘고 어쩌고, 동해마을은 또 왜 바다이름일까? 저쩌고. 같이 돌아다니던 친구들은 하사, 상사는 있는데 중사는 없냐는 둥, 야동마을에 꼭 들어가 보고 싶다는 둥 실없는 소릴 날리고... 흠흠. 나의 고향은 전남 나주시. 함평이 고향이신 아버님은 조그만 사업체를 운영하고 계셨는데, 아 글쎄, 친구분 보증 서셨다 집이며 회사며 쏘 쿨~하게 내려놓으시고... 쫓기다시피 이사 와 초3 이후론 줄곧 광주에서 학교를 다녔다. 아시지 않나.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 전남의 이곳저곳에서 올라온 친구들이 많다는 걸. 고흥, 완도, 해남, 신안, 승주... 서울로 올라가 대학을 다니면서 알게 된 광주의 진실 이후, 나는 내가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한 광주 사람의 후예였음을 자랑스러워하며 이 세상의 모든 차별을 없애고 말리라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곤 했었다. 나는 평생 남도 사람이었고, 호남의 아들이었다. 벌써 떠나신 지 스물여섯해째인 아버님께는 네 분의 동생이 있으셨는데, 그 중 두 분이 구례에서 사셨다. 둘째 숙부님은 구례구역에서 압록 사이에서 식당을 운영하시며 섬진강 우렁이를 잡아다 대구에 내다 파셨고(내수면 어업허가 있으셨음!), 하나뿐이었던 고모님은 옛날 구례 차부(터미널) 밑쪽에서 식당을 하셨었다. 금천식당이라고, 정순자씨라고 하면 어른신들 중에 몇 분은 기억하실 지도. 근 30년 넘게 장사를 하셨고 손끝이 매시라워서 음식솜씨도 장난 아니었으니까.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방학 때 고모댁에 내려올 때면, 졸다말다 거북이 금호고속 차창의 때묻은 커텐 너머로 굽이굽이 빛나고 있던 섬진강의 그 고운 은모래들... 구례살이 올 해로 12년째인 나는 작년 이맘때쯤 우연히 읍내의 도서관 두 곳을 한꺼번에 한 부지로 신축이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어떻게 하는 게 바람직한 것일지 궁금했다. 주위의 몇 분과 전문가들을 모셔다 강연회를 하고 주민들과 모여 자료를 찾고 공부하고 고민했다. 말이 공부지, 이건 뭐 도서관에 파묻혀 살아본 적도 없는 처지인 나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어서 다른 전문가 분들의 의견을 주로 듣을 수밖에. 2018년 여름에 치러진 ‘매천 도서관 디자인 공모전’의 심사위원장이었던 전남대 유oo 교수님은 ‘아니, 아니예요. 그렇게 지금 정해진 그 부지에 두 도서관을 짓는 건 정답이 아니라’며 손사래치던 것이었고. ‘어린이와 작은도서관협회’의 박oo 이사장님은 지자체와 교육청이 운영하는 도서관 두 개가 한 부지로 신축이전하는 건 우리나라에선 처음 있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우연히 만나 말씀을 건넸던, 퇴직 전 구례읍장을 하셨던 김oo 선생님조차 그렇게 되면 도서관의 위치가 균형을 잃게 되어 구례읍의 동북쪽 주민들은 불편하게 될 거라고 대번에 꼬집어내는 것이었고. 3월 18일이었던가. 군에서 주민의견을 수렴하지 않으니 우리라도 할 밖에. 주민공청회를 하겠다 하니, 구례군에서 느닷없이 같은 날 주민설명회를 하던 날, 공공도서관의 운영위원장이라는 어떤 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여기 지금 도서관 문제에 딴지 거는 사람들 중에 구롓사람 있어요?’ 불행히도 아는 동생이 손을 슬쩍 들어버렸는데, 그 분 말씀, ‘허허이, 최소 4대는 살아야 구롓사람이지!’ 그랬다. 나는 구례사람이 아니었다. 호남의 아들이면 뭐하나, 구례사람이 아닌 걸. 구례장학생을 선발하는 심사위에서 역점사업이 일부 귀농귀촌인들 때문에 지지부진하여 힘들다는 군수님 앞에서 어떤 군의원은 이렇게도 말했다. ‘그깟 귀농귀촌인들 몇 명 되지도 않으니깐 군수님 힘내서 파이팅하세요, 자신있게 밀고 나가세욧!’ 군청의 문화관광과 공무원들은 우리가 도서관이전에 대한 제안서를 들고 갔을 때도, 통합설계를 촉구하는 주민 1,300여명의 서명을 받아 제출하러 갔을 때에도 소 닭 보듯 했다. 그 차가운 시선, 짐승인들 못 느끼겠나. 모르는 게 아니다. 어느 동네를 가도 ‘텃새’라는 게 있고, 사람 각자마다에도 ‘습’이라는 게 있는 법이거늘, 지금껏 몇 십년동안 알아서 잘(?) 해 오던 행정권력이 괜시리 양보하기 어렵다는 걸. 관급공사와 관련된 이러저러한 이해관계도 지금 거기에 누구누구가 관여되어 있고 어떻게 인맥이 형성되어 있는지도, 괜히 뜨내기들(?) 때문에 나름 정갈하게 운용되던 판이 어지러워질 걸 걱정하는 것, 전혀 모르는 바 아니다. 존중한다. 존중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견이 있으니, 주권자인 주민이 당신들 월급 주는 우리가 달리 생각하는 면이 있으니 좀 받아달라는 거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이 쓸 공간이니 제발 설계할 때 반영시켜 달라는 거다. 그게 그렇게도 힘든 일인가. 올 3월 기준으로 구례 인구 27,000 선이 무너졌다고 들었다. 청천초교에 입학생 수가 다섯도 아니 된다고 들었다. 지방소멸을 누구나 당연하듯 얘기한다. 과연 지금까지 보여온 고집스러운 태도로 이런 위기가 극복될 수 있을까. 군수님의 제1공약인 인구 3만 회복이 가능한 것일까. 이런 식이라면, 수십억씩 하는 건물을 와당탕 지어놓고 무책임하게 떠나버린 전 군수님과 무엇이 다르겠나. 아무런 운영프로그램이나 컨텐츠 없이 덩그러니 세금 잡아먹고 서있는 건물들을 보면, 아이고 국민들이 피땀 흘려 낸 세금인데, 좀 반성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가끔이라도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인가. 두 세 사람만 건너면, 서로 다 형이고 동생인 작은 고장에서 언제까지 이토록 편을 가르고 살아야겠나. 우리 이제, 무언가 조금씩 바뀌어야 하지 않겠나. 잘 살아보자는 거다. 함께 잘 살아보자는 거다. 선주민이건 이주민이건 서로의 지혜를 모아 따뜻하고 살기 좋은 고장 만들어보자는 거다. 노장청이 한데 서로 어울릴 수 있도록, 갓난아이들 울음소리가 골목마다 울려대게, 서로를 조금씩 존중하며 다가서자는 거다. 내가 지금껏 구례의 작은 마을들에서 만났던 어르신들의 모습이라면, 한없이 겸손하고 끝도 없이 너그러운 지리산과 섬진강같은 그런 모습이라면, 그게 무에 그리 힘든 일이겠는가.
    • 우리마을
    • 구례
    2021-06-01
  • 단순 소박한 삶을 위하여
    박두규 (시인) 가을이 왔다. 이번 가을은 유난히 반갑다. 지난 여름이 너무 혹독해서 그럴 것이다. 유래 없는 홍수로 섬진강이 범람하고 구례는 물속에 잠겼다. 그 피해와 슬픔, 복구와 고통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가을은 왔고 머잖아 또 계절이 바뀌고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일상은 계속 될 것이다. 문제는 이번 재해는 구례의 재해만이 아니라 지구의 재앙이었다는 것이다. 초록별 지구는 자본주의 문명의 극점을 찍고 급격하게 그 대가를 지불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과학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구의 재앙을 염려하고 정치권에 호소했고 그 심각성을 인지해 교토의정서(1997)며 파리 기후변화 협약(2020) 등을 채결하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은 눈앞의 이익 때문에 소홀히 하고 탄소배출량이 두 번째로 많은 미국(트럼프)은 미국경제에 해가 된다고 탈퇴를 선언했다. 탄소배출량을 줄여 지구의 온도를 2℃ 이상 상승하지 못하게 하자는 세계의 약속이 깨지고 이대로 방치되면 2100년에는 4~5℃ 이상으로 오르게 될 거라는 것이 정설이다. 4℃ 이상 오르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해수면은 최대 2.4미터 상승하며 인구 1000만의 자카르타 같은 도시들은 2050년에 잠긴다고 한다. 북극의 빙상은 이미 붕괴된 지 오래고 알프스의 눈도 70%가 녹고 적도 지방의 주요 도시들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하며 물 부족과 폭염으로 북위도 지역마저도 해마다 수천 명이 죽고 남부유럽은 영구적 가뭄에 시달리며 라틴아메리카에서만 뎅기열이 800만 건 이상 증가하고 전 세계의 식량 위기가 매년 닥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코로나와 같은 새로운 질병들, 상상을 초월하는 산불과 홍수의 증가, 수천만 명에 이르는 기후 난민, 경제 대공황과 지역 간의 기후분쟁, 농산물 생산이 크게 줄면서 자원전쟁 등 곳곳에서 전쟁까지 늘어나게 된다니 앞으로 80년 안에 변화될 지구의 모습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80년이면 사실 코앞에 온 현실이며 내 자식과 손자들의 시대다. 이번 여름 구례의 수해처럼 곳곳에서 일어나는 역대 급 재난들을 지구의 재앙과 연결해서 봐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과 국가 모두가 눈앞의 이익만을 계산하고 살 수는 없는 국면에 이르렀다는 것을 실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피해와 재앙이 구체적으로 먼저 오는 곳은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한 나라들부터이며 부자들과 부자나라들이 저지른 죄가를 목숨으로 막아주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공존 공멸하는 세기가 시작되었다. 지금 21세기에 전 지구적으로 기후에 대한 총체적 대응을 시작하지 않으면 인류의 멸망은 천년 안에 이루어지지 않을까. 이 불행의 씨앗은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이데올로기화 한 자본주의의 종말이 세상의 종말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제 우리는 이 자본의 욕망과 그 구체적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시작해야 한다. 그 방법과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다르게 이야기 한다면 단순 소박한 삶의 방식을 개인과 국가들이 과학적으로 그리고 전 지구적으로 함께 만들어 가야한다.
    • 이야기
    • 여기저기 민들레
    2021-06-01
  • 아이고, 고만 잊어버렸구만이라....
    언재 한성수 자문위원 아이고 노고단아! 외마디 부르짖음과 더불어 서둘러 컴퓨터 앞에 앉아 이 글을 쓰면서 장탄식을 토한다. 지리산인 구례 계간지에서 부탁한 짧은 글 하나 써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고, 쉽게 대답하고 나서 그만 잊어버리기만 3차례, 13일 마감을 약속하면셔 윤주옥님의 전화에 아주 미안하게 또 헛 약속을 날렸고, 오늘 17일 오후에 문득 다시 생각이 떠올라서 드디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 글이 이번 호 지리산인에 실리지 못해도 좋으나 일단 자신을 살피는 신세타령이라도 써 놓고 볼 일이다. 미국에서 나그네로 떠돈 30년 세월을 뒤로하고, 구례에 온 지 16년 반이란 세월이 지났고, 사람들이 나의 말투가 좀 다르다고 항상 되묻는 말, “고향이 어디세요?”에 똑같은 대답 “충청북도 제천요!” 여러 번 반복하다가 5년 전엔가 그만 구례로 호적을 옮겨버렸다. 이젠 여기서 살다가 전라도 사람으로 죽어갈 심산이었다. 제천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부산에서 고등학교, 서울에서 대학교, 미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는 동안 허망한 세월을 따라 노상 이사를 다녔다. 마지막 이삿짐은 지리산에서 풀게 되겠지.... 문제는 그 좋다는 한국의 명산 지리산 자락, 산 높고 물 맑은 구례에 살아온 어즈버 지난 16년이란 세월이 내 육신을 서서히 무너뜨려온 징조가 해마다 새롭게 목록을 더해간다는 점이다. 누군가 말하기를 60대엔 매년이 다르고 70대엔 매달이 다르고, 80대엔 매일이 다르다나? 그 말이 대충 맞는다고 맞장구를 치게 생겼다. 처음 구례에 정착했을 때 너무도 흥분해서 매년 그 좋은 지리산 종주를 6차례나 거듭했고, 매 주일 거의 한 차례씩 구례 화엄 계곡을 허덕이면서도 기어올라 노고단에 가서 노고 할망구에게 절도 많이 했는데, 어느 세월에 무릎이 시큰거리더니, 등산 금지령을 내리는 의사의 입술이 얼마나 야속하던지.... 그런데 요즘 새로 생긴 증상이 아주 고약하다. 뭔가를 자꾸 잊어버린다. 가까이 지내는 벗님이 여수에 계신데, 그 양반이 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전화를 받고, 곧 안타까운 마음에 문병을 가겠노라고 다짐을 하고는, 마이동풍! 그만 귀로 씹어버렸고, 두뇌 속에서 말끔히 청소를 해버렸다. 어떻게 구차한 변명을 한다? 뭔가 새로운 세월이 나를 향해 성큼 다가오는 발소리가 흉측하고 음산하게 들린다. 알츠하이머? 치매 전조? 아이고, 노고단아! 산 높고 물 맑고 바람 시원한 구례에 사는데, 웬 이상한 풍경 소리? 앞으로 살아가는 시간에 사람들 대하기가 미상불 조심스럽다 못해 끔찍스러운 짓도 거듭하고, 그러다 보면, “그 양반도 이제 그만 삭아가시네. 쯧쯧,” 하는 소리가 벌써 들려오는 것만 같다. 얼마 전에 누구와 대화를 하는 가운데, 공연히 아는 척하고 수학계의 최고 난제로 여기는 리이만 가설(Riemann)을 설명하면서, 리이만이란 이름이 가물가물 생각나지 않아 엉뚱한 사람 이름을 대면서 썰을 풀었겠다. 집에 와서 생각이 나는데, 아이고 왜 즉시 손 전화(요즘 손전화는 컴퓨터 축소판)에라도 조회를 하지, 어물쩡 저물쩡 떠들어제끼기는.... 뒤늦게 다시 전화를 걸어 온갖 변명을 해대는 나 자신이 불쌍해졌다. 정말 치매(Alzheimer's disease) 가 온거여? 아이고 노고단아! 나 이제 어떻게 해....
    • 이야기
    • 여기저기 민들레
    2021-06-01
  • 나의 우리, 우리 속의 나
    박두규 (시인) 현재(6월3일) 우리나라 코로나19 확진환자는 11,590명 사망자는 273명이다. 그리고 현재(6월2일) 세계의 확진자 누적 인원수는 6,330,848명이고 사망자는 376,008명이다. 그리고 국가별 사망자를 보면 미국 106,195명 영국 38,489명 이탈리아 33,415명 브라질 29,314명 프랑스 2,8802명 스페인 27,127명 중국 4,634명 일본 891명 한국 270명이다. 이 수치는 이 글을 읽게 될 즈음이면 훨씬 더 올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코로나 국면은 앞으로 코로나보다 더 진화된 또다른 바이러스의 유사상황을 예고하는 시작일 뿐이며 단순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사피엔스라는 종의 멸종을 예감하는 전조현상으로까지 말하는 미래학자도 있다. 이제 코로나19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 예전의 일상 삶을 살 수는 없을 것이며 지구인들의 삶은 큰 변화를 가져올 거라는, 아니 변화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충분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자본주의를 토대로 이루어낸 과학기술문명, 물질문명의 틀에서 벗어나 한 단계 확장된 의식을 토대로 한 도덕적 과학기술과 정신문명으로의 새로운 판짜기 변화가 절실해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포스트 코로나의 지구상황을 예견하고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 갈 것인가를 이야기해야 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변화되어야 할 의, 식, 주, 의료, 교육 그리고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까지 기존의 질서와 그 틀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변화의 국면에서 한국의 위상과 기대치는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그동안 자본의 논리, 물질적 가치로만 삶의 모든 것을 판단하다가 코로나19를 맞아 인간 본연의 존재가치와 정신적 가치로 삶의 문제를 판단하게 되면서 드러난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와 서구의 선진국들은 이번 코로나 국면에서 그 의식의 수준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그동안 그들을 선망하게 했던 자유주의, 개인주의적 가치가 이런 생명존재라는 근본적 문제에 있어서는 단순히 사피엔스라는 종의 욕망, 욕심, 탐욕이라는 이기적 범주 속에 있는 통속적인 것 이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서구 석학들의 반성적 성찰은 그래서 동양의 유교적 전통과 사상, 특히 한국의 이번 코로나 대응 국면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 국면을 대응하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다행히 이 국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민주적 시민성과 공동체 의식, 그리고 그 속에서 형성된 수평적 개인주의, 공동체적 자유주의 등 코로나 방역 성공의 필수적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식민지와 전쟁, 군부독재 등 일련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자연스레 축적된 것이며 많은 피를 흘리며 얻어낸 값진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프랑스혁명보다 더 진화된 촛불혁명이라는 인류사적 의식의 확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고 그 확장된 선진의식이 코로나 국면 속에서 발휘되면서 한국이 코로나 대응의 모범적인 극복모델로 부각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사회의 내면을 돌아보면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에 시사IN과 KBS가 공동기획한 대규모 웹 조사 중 하나로 한눈에 무엇인가를 짐작하게 하는 재미있는 결과가 있다. 그것은 코로나19 이후 한국사회 신뢰도를 묻는 질문이었는데 결과는 이렇게 나왔다. ‘질병관리본부(+75) 의료기관(+72) 가족(+67) 대한민국(+53) 친척(+41) 청와대(+29) 정부(+27) 한국국민(+21) 이웃 사람(+11) 지방 정부(+3) 민주당(-3) 국회(-33) 낯선 사람(-36) 언론(-45) 종교기관(-46) 미래통합당(-56)’ 이 신뢰도 결과는 단순히 신뢰만이 아닌 코로나 국면을 맞아 드러난 현재 한국사회의 삶 자체의 여러 단면을 생각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코로나 국면에서 보여준 서구의 사회의식보다 앞선 자유로운 개인인 동시에 공동체에 기여하려는 시민의식을 잘 보여주었다. 격동의 근현대사 과정을 거치면서 개인과 사회의 내면에 축적되어졌던 ‘나의 우리, 우리의 나’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코로나 국면에서 나타난 의료진들의 헌신성과 타인을 배려하는 시민성, 진정으로 국민을 우선했던 정부의 모습 등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들과 직접 비교되어 서양 우월주의를 탈피하는데 충분했다. 그리고 한국과 한국인의 위상이 세계의 표준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생각과 한국이라는 브랜드를 창출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의 높은 시민의식, 민주주의 정신을 이미 세계가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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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저기 민들레
    2021-06-01
  • 우리가 원하는 도서관
    우리가 원하는 도서관 박 애 숙(좋은도서관모임 대표) 지난 6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 구례 콩장이 열리는 서시천변 잔디밭은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콩장과 함께 ‘좋은도서관모임’에서 주관한 ‘제1회 좋은 도서관 문화제 - 광장으로 나온 00도서관’ 행사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사전행사로 책 나눔이 있었고, 본 행사는 토크쇼, 오픈마이크, 꽁트와 노래공연 그리고 우리의 요구 제창으로 이루어졌다. 잔디밭에 길게 진열된 책을 앉아서 혹은 서서 읽는 사람, 나무그늘 아래 돗자리를 깔고 엎드려서 혹은 누워서 책 읽는 어린이들, 만화책을 주제로 가족부스를 만들어 야외의자에 앉아 책보다가 낮잠 자는 아저씨, 하늘에 울려 퍼지는 어린 아이들 웃음소리, 이른 새벽부터 서둘러서 감자를 쪄오고, 시원한 생수를 배달해 오고, 도시락을 가져와 나누어 먹고, 노랫소리가 울려퍼지고...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가 모두를 하나로 만들었고, ‘광장으로 나온 ㅇㅇ도서관’은 자유롭고 편안하고 평화로왔다. 그것은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구례군의 도서관 행정을 경험하면서 조금은 지쳐버린 사람들이, 그렇지만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 도서관의 지향점을 스스로 찾고 만들어가려는 즐겁고도 새로운 시도였다. 구례에는 두 개의 도서관이 있다. 교육청에서 지은 공공도서관과 군립인 매천도서관이 그것이다. 둘 다 지은 지 오래되어 노후하고, 장서와 서비스도 취약하다. 급변하는 사회변화와는 동떨어진 도서관의 모습에 많은 문화적 갈증을 느끼던 중, 작년 12월에 두 개의 도서관이 동시에 신축이전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금도 반갑지 않은 신축 이전이었다. 왜냐면 지리산의 아름다운 풍광을 마주하고 옆으로는 서시천이 흐르는, 시설은 낡아도 입지는 대한민국 최고인 매천도서관이 읍내의 좁은 부지에 공공 도서관과 함께 동시에 신축 이전되기 때문이었다. 주민들의 의견 수렴도 미흡했고, 최근의 복합문화공간이자 경계가 없는 도서관을 강조하는 흐름과도 완전히 배치되는 이전이었다. 우리라도 무언가를 해야 되지 않을까...?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좋은도서관모임’이 만들어졌다. ‘좋은도서관모임’을 중심으로 한 구례의 주민들은 한 부지에 두 도서관이 들어가는 것이 온당한지를 알아보고 의견을 모아나갔다. 반 년이 넘도록 주민토론회, 공청회, 주민서명 등을 통해 도서관 신축에 주민들의 참여와 의견을 반영할 것을 요구했지만, 결과는... 부지변경도 불가, 한 부지 두 도서관의 통합설계도 불가 입장을 밝힌 구례군의 완강한 불통 행정에 부딪히고 말았다. 지금 도서관은 끊임없이 진화해가고 있다. 지식정보사회, 4차 산업혁명을 거치며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읽는 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정보와 지식을 얻고 새롭게 창조하는 곳이 되었다. 또한 복합 문화공간으로서 각종 공연, 전시, 강연, 평생교육 등이 이루어지며, 각종 편의 시설로 편안한 휴식의 공간을 제공한다. 최근에는 메이커스페이스 등 창작공간들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인의 가능성을 실현해가는 곳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제3의 공간으로서 도서관은 지역사회에서 참여와 소통의 플랫폼으로서 다양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활동이 이루어지는 삶의 활력이 넘치는 심장과 같은 곳이기도 하다. 도서관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소외되고 어려운 이들도 평등하고 안락하게 정보를 이용하고 쉴 수 있는 관용과 민주주의의 정신이 실현되는 곳이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도서관이 농촌지역에서는 그림의 떡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서관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부족하다 보니, 예산도 부족하고 투자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신축을 한다 해도 대부분 이용자인 주민의 참여 없이 짓다 보니 주민의 요구는 뒷전인 채, 지역적 특색이 없는 천편일률적인 도서관이 되기 마련이다. 가뜩이나 정보환경은 급변하고 있는데 도시와 농촌 간의 정보 불평등과 격차, 정보 소외는 더욱 심화되고, 문화적 환경의 격차도 심해지며, 이러한 격차는 자녀교육과 문화생활 갈증으로 인한 인구 유출을 낳고, 인구는 더욱 감소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농촌지역에서도 도서관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좋은 도서관으로 인해 인구가 늘어나고, 마을이 다시 살아나며 활기를 되찾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전북 완주군은 지자체장의 적극적인 도서관정책으로 인해 인구 유입이 크게 늘어나고, 지역에 활력이 넘치게 된 대표적 사례이다. 완주군수는 “사람이 스스로 성숙해지고, 이웃들과 소통하며, 행복지수가 오르는 공간이 도서관‘이라고 말한다. 영월 월담도서관은 주민들의 적극적인 신축의지에 따라 국민은행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작은 도서관이다. 작지만 장서 큐레이션이 잘 되고, 알차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의 운영으로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주민들의 이용과 참여가 늘어나고 힐링 명소로 알려지면서 관광객도 늘어났다. 도서관으로 인해 마을공동체가 살아나고 활기를 찾게 된 것이다. 이 도서관 앞에는 빌게이츠의 ‘오늘날 나를 있게 한 것은 동네 도서관이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가까운 순천 역시 기적의 도서관이 만들어진 이래 적극적인 도서관정책으로 살기좋은 도시, 품격있는 도시로 변모하였다. 크고 작은 특색있는 도서관들은 인구 증가뿐만 아니라 지역경제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 지역의 미래를 알고 싶으면 도서관에 가보라’는 경구에서 보듯, 개인의 행복과 지역의 미래를 위해 좋은 도서관의 존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정말 구례군민의 행복과 미래를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구례군은 도서관에 대한 주민들의 자발적인 열기를 구례발전의 긍정적 신호로 생각하고 도서관신축 및 운영에 주민들의 요구와 아이디어를 반영해야 할 것이다. 삶의 질의 완성은 도서관에서 이루어진다. 좋은 도서관은 소멸해가는 농촌에 생명을 불어넣고, 문화적 소외지역인 농촌을 살맛나는 곳으로 변모시킬 것이다. 인구 27,000선도 무너졌다는 구례군이 정작 주의깊게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 우리마을
    • 구례
    2021-06-01
  • 다만 늙었어도 포기하지 않은 것뿐이다
    박 두 규 (시인) 오래 전에 읽은 고은의 소설 『선(禪)』을 보면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처음 갈 때 해로를 통해 베트남으로 상륙해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대목이 나오는데, 뱅골만을 벗어날 즈음에 이동 중인 수만 마리의 철새 떼들이 폭풍을 피해 달마 일행의 배로 내려앉는 일이 생긴다. 달마는 그 새떼들을 쫒거나 죽이지 말라고 지시한다. 선원들과 일행들이 그 말을 잘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종료된 후, 배에는 수백 마리의 새들이 죽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달마는 “저 새들은 늙어서 기력이 다해 죽은 것이다. 다만 늙었어도 포기하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대목에서 잠깐 호흡을 골라야 했다. 무언가가 깊게 마음을 질러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이 때문에 타자로부터 제재를 받기도 하고 스스로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는 중에 점점 무기력해지고 죽음의 그늘이 가까이 드리워진다. 이게 일반적인 일상의 ‘늙음’에 대한 인식이다. 하지만 ‘다만 늙었어도 포기하지 않았을 뿐이다’라는 말은 강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면서 늙음에 종속되지 않는 생명과 생명을 가진 한 존재의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다시금 각인시켜준다. 디팩 초프라가 말한 것처럼 ‘노화’란 하나의 개념일 뿐이고 실재는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오로지 자신의 생명을 끝까지 발현하다가 소멸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는 영장류만이 유일하게 생각하는 힘이 있어 늙음이나 죽음 따위를 가지고 고민하고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 것이지, 나무는 천년을 살아도 스스로 늙었다거나 죽을 때가 다 되었다거나 하는 생각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기만 할 것이다.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생명을 발현하는 즐거움과 기쁨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새들의 스스로 이상향을 향한 자유로운 날갯짓은 늙음과 무관하며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감동적이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면 그렇게 살 수 있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졸저 『生을 버티게하는 문장들』에서)
    • 이야기
    • 여기저기 민들레
    2021-06-01
  • 문정리(文正里)의 죽음들
    성염 자문위원 필자가 지리산 서북자락 문정리에 ‘휴천재(休川齋)’라는 누옥을 지은 것이 25년 전이고 주민등록을 옮겨 주민으로 살아온 것이 10여년 되는 사이 문하마을 남정네들은 대부분 세상을 떴다. ‘조합장’, ‘부면장’, ‘노인회장’ 등 직함으로 불리던 노인들도, ‘동호양반’, ‘거문골양반’, ‘용산양반’ 등 부인의 택호로 불리던 사람들도, 또 혼자 사는 아짐들의 상머슴 노릇을 해주던 맘씨 좋은 ‘인국이 아재’처럼 수줍던 사람도 세상을 등졌다. 내 또래 서넛이 아직 살아 있을 뿐. 아낙들은 열댓 남았지만 남편의 마지막 몇 해를 치매병간으로 보내다 떠나보내고 나면 ‘안방 아랫목에 누웠으나 앞산 양지에 옮겨 누우나 매한가지’라는 초연한 얼굴을 하고서, 서까래 내려앉는 집에 혼자들 살면서 대처로 살러 나간 아들, 손주 소식으로 연명한다. 대개 산비탈에 묻히지만 손수 쟁기질하던 밭에 묻히기도 하여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이생진, “그리운 바다 성산포”에서)는 구절처럼 되기도 하고. 휘영청 보름달이 아스라한 밤중에 잠을 깨면 필자는 하봉쪽 문장대를 창밖으로 올려다보면서 “다람쥐처럼 / 사랑 때문에 / 산에 가서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이생진 “행복한 사람”에서)을 그려본다. 우리 민족이 거쳤던 아픔 중에서도 사상과 이념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어느 편에 섰든 존경이 가는 까닭에, 저 능선에서 어둑한 골골에서 봉분 없이 스러진 이들이 긴긴 행렬로 만가(挽歌)를 부르는 듯한 환청도 들린다. 내가 사는 문정리 앞을 휴천강이 흐르고 강을 건너는 송문교 옆에는 문장대 일대 산허리를 안내한다면서 ‘빨치산 루트’라고 기록한 간판이 여러 해 서 있었기 때문이리라. 작년 8월이던가? 견불동 사는 조감독이 잠시 들러 냉수나 한 잔 마시고 가겠다고 전화하더니 시간이 되니까 ‘토벌대를 피해 도주하는 산사람들' 행색을 한 일행 열두 명이 나타나서 삽시간에 휴천재를 접수했다. 우리 분단의 역사를 현장답사로 배우는 젊은이들이란다. 무리를 인솔하던 분은 한 때 우리 부부와 친분을 나눴던 김인서(본명 김국홍) 노인을 직접 알고 있었다. 우리 동네 문정리가 1950년 말 남로당 유격대가 조직되고 출정한 곳이라는 연구발표가 있어 그 장소를 확인하러 다닌다 했다. 심심산골에 문정리(文正里)라는 지명도 귀에 설지만, 우리 집에서 100미터가 안 되는 거리에 고려조 이억년 선생의 묘소가 있고, 그가 문정리에 도정정사(道正精舍)를 짓고 사람을 가르친 내력이 ‘도정마을’이라는 이름에 남아 있다. 도정마을에는 일제하에서도 한지공장이 있어 그 자제들이 배우고 깨우친 민족주의자들이었는데 보도연맹으로 싸잡혀 희생당했다는 소문도 있어 그들의 추정도 제법 신빙성 있어 보인다. 거창과 함양-산청 양민학살을 자행한 11사단 최덕신의 소위 ‘견벽청야(堅壁淸野)’가 1951년 2월 8일 아침 9시에 개시된 마을이 이 곳 문정리였다는 점도 시사점이 있다. ‘시국강연’을 한다면서 논으로 끌려나온 주민 200여명이 국군의 기관총에 학살당할 찰나에 강경한 항의와 설득으로 사람들을 살려낸 당시 이장 김길동(金吉童)의 송덕비가 문하마을 초입에 서 있다. 필자가 이 동네로 살러 와서 장례를 치른 노인들은 저 운명의 날 10대의 소년들이었지만 필자에게 그 날 얘기는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바로 그 이튿날 첫 아이를 해산했다는 90대 여인의 눈초리에는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군경에 대한 깊은 공포가 서려 있음을 본다.
    • 이야기
    • 여기저기 민들레
    2021-06-01
  • 어찌할 수 없는 몸의 고통에도 평화를!
    임봉재 자문위원 황금돼지의 기운으로 2019년은 하늘 땅 사이의 모든 생명들을 포함하여 모두가 건강하고 웃으며 살 수 있는 행복한 일들이 많이많이 있으면 좋겠다. 지난해 4월 남북정상회담은 오랜 분단과 대립으로 얼어붙었던 한반도에 평화의 싹을 보여주었다. 이제 남북이 반목과 대립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들이 모여 한반도에 평화가 이루어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또한 오랫동안 몸살을 앓게 하던 지리산댐 건설문제가 다행히도 지난해 9월 백지화 되면서 지리산에 평화가 찾아왔다. 지리산 평화는 곧 지리산 주변에 사는 사람뿐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우리 모두의 평화이기 때문이다. 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평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니, 생명평화결사의 가르침이다. 나는 이 말을 내 남은 생의 화두로 삼고 산다. 2018년, 개인적으로 나에게 참 힘든 한 해였다. 40년 가까이 병원과 약물을 외면하고 살아오며 감기약 한 번 안 먹고 견뎌 왔다. 그런데, 몇 년 전에 감기 기운이 들더니 호흡곤란이 왔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이제 갈 때가 되었나보다 생각하며 죽는 순간까지 편안한 맘으로 기쁘게 살리라 바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밤에 잠을 자다 숨이 막혀 밤새도록 버둥대다 아침을 맞았다. 밤이 두려웠다. 증세가 심해지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러기를 한 달 넘게 하다가 결국엔 한의원을 찾았고 차츰 차츰 나아진 적이 있다. 아직은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일과 보속이 남아있어 하느님이 데려가지 않으시나 보다 생각하며 매일매일 주어지는 시간을 감사하며 살자고 다짐했다. 크게 드러나지 않는 속이 안 좋은 것은 견딜 만한데, 목 위의 기관에 이상이 생기니 견딘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해 초부터 나의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말이 잘 들리지 않아 이비인후과를 찾았고, 눈에 이상이 생겨 안과를 드나들며 약물치료 중이다, 치아가 저절로 부러지거나 아파 치과를 드나들고... 결국은 쓸 수 없는 치아를 뽑고 씌우고 하다가 의치를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70년 넘게 썼으니 탈이 나는 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이 들면 대충 보고, 대충 듣고, 대충 먹고 이 세상 사는 날까지 그렇게 살면 된다는 것이 평소 생각이었건만 대충 보고, 듣고... 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산다는 것 자체가 혼자 사는 게 아니어서 잠자는 시간 외에는 만나는 상대방에게 폐가 되고 불편을 주게 마련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치과 진료실에서 짧아야 한 시간씩 입 벌리고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하는 기분으로 반년을 넘겼다. 죽기보다 싫은 게 이를 뽑거나 신경치료 할 때 하는 마취였다. 그래서일까! 삶에 의욕이 없어지며 게을러지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특히 머리를 써야 하는 것은 더더욱 싫어졌다. 책에서 글 한 줄 읽는 것조차 쉽지 않다. 컴퓨터 작업도 쉽지 않고... 이전부터 글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고백하건대 이번 지리산人에 실을 원고가 늦어진 것도 온전히 나의 게으름에서 비롯되었다. 해야지 하고 자리 잡고 앉으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뭘 써야 할지... 머리가 멍한 상태로... 뭔가는 써서 보내드려야 하는데... 제 때에 보내드리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결국은 하찮은 내 자신의 이야기를 올리게 되어 담당 선생님께도 한없이 미안하고 부끄럽고 죄송하다. 나 하나 때문에 계간지로 나가는 지리산人이 제 때에 인쇄도 배포도 못하고 얼마나 애를 태우고 계실지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기에 더더욱 면목없고 부끄럽고 죄스러울 뿐이다. 지리산人 모든 분들께 건강과 평화가 넘치는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길 두 손 모읍니다.
    • 이야기
    • 여기저기 민들레
    2021-06-01
  • 지금은 사라진 하늘 아래 첫 동네
    ☐ 지리산에서 온 편지 지금은 사라진 하늘 아래 첫 동네 박 두 규(본지 편집인) 지리산 북서면 노고단 뒷자락에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심원마을이 있었다. 지금은 뱀사골 초입인 반선마을에서 노고단 성삼재로 해서 구례로 넘어가는 도로로 갈 수 있지만 오래 전에는 이 반선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노고단 쪽으로 한참을 올라가야 심원마을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참으로 궁벽한 곳이어서 집이 서너 채밖에 없었다. 하룻밤을 청하면 자연스럽게 민박이 되었는데 돈 받는 걸 어색해 하며 미안해 할 정도였다. 사람들의 출입이 거의 없는 골짜기였다. 처음에는 약초꾼들이 약초를 채취하며 임시로 거처하다가 겨울이 되면 철수하곤 하던 곳이었는데 차츰 나름의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와 자리 잡게 된 곳이었다. 나는 겨울 등반을 할 때는 피아골로 해서 반야봉에 올라 심원으로 내려가곤 했는데 그 쪽이 지리산 북사면이어서 눈이 녹지 않고 많이 쌓여 있기 때문에 그나마 구례에서는 겨울 지리산의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등산로였기 때문이다(지금은 폐쇄되어 갈 수 없다). 그 때 심원에 가면 묵는 곳이 민선생 댁이었다(그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그 삶을 존중하는 의미로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당시 민선생님은 60대 초로의 나이였는데 본디 강원도 출신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에는 김대중씨가 강원도에서 활동할 때 그 밑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도 군사정권의 엄혹한 시절을 보내며 이런저런 세파에 휘둘리다가 어찌어찌하여 이곳까지 들어와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창식이라는 이름의 나와 동갑인 아들이 하나 있었다. 당시 우리는 30대 중후반 무렵이었는데 그는 정신지체가 있어서 초등학생 수준의 나이에 머물러 있었다. 작은 키에 볼살이 붙어 있어 어려 보였으나 수염이 까칠까칠하게 돋아 나이를 숨길 수는 없었다. 나는 참으로 순진무구한 그와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심원마을을 갈 때면 반드시 챙기는 것이 있었다. 창식이에게 줄 두툼한 사탕 봉지를 맨 먼저 챙기고 민선생님에게 드릴 미역이며 말린 홍합, 새우 등을 바리바리 싸서 가져가곤 했다. 창식이는 내가 가면 반가움의 첫인사가 ‘사탕 줘!’였다. 그리고 심원은 산중인데다 당시는 차도 없어서 저자거리에 나오기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민선생님에게는 바다에서 나는 건어물 같은 것이 최고의 선물이었다. 창식이와 나는 아궁이에 같이 앉아 불을 때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주로 그가 궁금해 하는 것은 바깥 세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도시의 목욕탕 이야기며 백화점 이야기 등을 하면 귀가 쫑긋해져 들었고, 창식이를 놀리려고 도시의 아가씨들 이야기를 하면 그저 평범한 이야기인데도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하곤 했다. 창식이는 군불을 듬뿍 땐 후 꼭 내 방에 와서 같이 잤는데 사람이 그리웠는지 수염이 거친 얼굴을 내 볼에 비비며 잠들곤 했다. 창식이의 꿈은 부산에 한번 가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부산을 다녀온 듯 했는데 그 기억 하나가 지금껏 바깥세상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이었던 것이다. 참으로 내가 본 가장 순수한 영혼 하나가 그 깊은 심원마을에 있었다. 그리고 그 맑은 영혼이 그 나이토록 꿈꾸어 온 것이 부산에 한번 다녀오는 것이라니. 그래, 어쩌면 그것이 인생인 지도 모른다. 평생 부산에 한번 다녀오는 그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그 간절함이 너무 감동적이고 아름다웠다. 사는 일이 저리도 단순한 것인데, 저리도 소박한 것인데 우리는 욕망에 휘둘려 온갖 걱정과 두려움을 이고지고 살며 좌절하고 절망하며 슬퍼하는지, 그러구러 나이를 먹다 문득 돌아보면 찰나의 한 생인 것을. 인생을 걸만한 간절함도 없이 이런저런 손익계산이나 하며 늙어가는 것인가. 내 머릿속에는 지금도 창식이네 집이 있던 심원의 사계절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나무들이 일제히 연초록 새 잎을 올려 만드는 젊고 푸른 세상, 무성한 녹음의 그늘을 끊임없이 흐르는 힘찬 물소리의 벅찬 생명력, 붉게 물든 환희의 시간들, 순백의 고요에 묻혀 끝없이 깊어가는 구도자의 풍모, 그렇게 지능선의 봉우리들이 첩첩이 이어져 주능선으로 벋어 있는 심원의 지리산은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구례에서 천은사를 지나 성삼재에 이르고, 재를 넘어 심원을 거쳐 뱀사골에 이르는, 지리산을 남북으로 횡단하는 도로가 생기면서 심원은 관광지가 되어 갔다. 번듯한 숙박시설이 생기고 산천어 횟집에 노래방까지 들어서는 어느 즈음 심원을 찾았을 때 창식이네는 이미 어디론가 떠나고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창식이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부산으로 갔을까. 아니면 또 다른 하늘아래 첫 동네를 찾아 갔을까. 마을에 관광객과 피서객들이 붐비기 시작하면서 심원의 수려한 경관은 훼손되어 갔고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국립공원 관리공단과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이나 ‘지리산 사람들’ 같은 환경단체들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사실 심원마을은 지리산 국립공원 지역의 깊은 곳에 있어서 현행법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마을이었다. 하지만 약초꾼들의 임시 거처로 사용될 때만 해도 큰 문제가 없었으나 지금에 와서 지리산 깊은 곳에 관광지와 같은 마을이 형성되고 갈수록 도시형으로 발전한다면 심각한 문제임에 틀림없었다. 해가 바뀔수록 문제는 더 심각해질 것이니 지금이라도 어떤 조치가 필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국립공원 관리공단과 시민단체들의 오랜 노력 끝에 정착한 주민들을 설득하고 보상하며 이주시키기에 이르렀고 현재는 마을이 완전히 폐쇄되고 다시 자연으로 복구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끝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 거대한 바위나 산과 바다 또한 끊임없이 그 안과 밖에서 변화의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행성들과 우주 자체도 쉼 없이 변화하고 있으니 변화하는 질서 속에서 예외인 것이 어디 있으랴. 작은 씨앗 하나가 집채만한 느티나무로 변하고 또 언젠가는 소멸하는 것이니 사람의 나고 죽음 또한 그렇지 않은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인생이 무상하다는 말이 오히려 무색하다. 이러한 진리를 나의 현실로 조금만 당겨보면 찰나의 시간 속에서 나는 지금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질투하고 분노하고 평생 돈을 쫒아 다니며 마감하는 인생이 삶의 정답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리산의 심원이라는 공간은 나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다. 조금 더 세월이 흐르면 언제 이 곳에 마을이 있었으며 순진무구한 노총각 창식이가 군불을 때던 곳이라고 하겠는가. 우리네 삶도 그러할 것이다. 지금 현재야말로 아름다운 추억인 것이지 먼 훗날 누가 있어 나를 호명하며 기억할 것인가. 이 아름다운 세상, 기적 같은 삶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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