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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몸 가르침 한 수
    몸 가르침 한 수 절에 있을 때 이야기다. 참 오래된 이야긴데 나는 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갈 곳이 없었다. 집에 있자니 부모님 보기도 민망하고 나가 돌아다니자니 어느 대학에 갔냐는 질문이 무서워 사람 만나는 것도 겁나고, 혼자 빈둥거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어서 작은 보따리 하나 들고 무작정 절로 들어갔다. 그 길로 거의 1년을 절집에서 살았는데 그해 여름의 일이었다. 그곳은 서래선림(西來禪林)이라는 비석이 입구에 서 있는 지장암(地藏庵)이라는 절이었는데 해안(海眼) 큰스님이 돌아가시고 사부대중의 발길이 끊기고 상좌들도 밖으로 나가 있어서 말 그대로 절간처럼 조용한 절이었다. 때는 한 여름이라 녹음이 짙을 대로 짙어져 숲 그늘에 누워 잔잔한 바람에 책이라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달콤한 낮잠에 빠지곤 하던 시절이었다. 그 여름 어느 날 객승이 한 분 오셨는데 작달막한 키에 별 말이 없는 얼추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스님이었다. 대개 스님들은 객으로 묵을 때면 예의상 곧잘 예불도 드리곤 하는데, 그 스님은 아침 예불이건 저녁 예불이건 한 번도 불당에 오르는 일이 없고, 도통 방에만 틀어박혀 나올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방에서 공부를 하거나 참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거의 종일토록 잠을 자거나 방에서 빈둥거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부턴가 그 스님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한 낮에도 쉬지 않고 해가 질 때까지 죽어라고 일만 하였다. 특별히 할 일이 없는데도, 이를테면 아랫마당에서 법당까지 놓여 있는 돌계단을 괜히 파헤쳐 놓고 다시 하나하나 계단을 맞추어 쌓는 그런 일이었다. 내가 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멀쩡한 돌계단을 부수고 쌓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더우니 보통 이른 아침이나 저녁나절에 강한 햇살이 죽었을 때 일을 하는 법인데 이 스님은 태양이 이글거리기 시작하는 10시쯤에야 일을 시작하여 밖에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그런 뙤약볕에서 일을 하다가 해가 지는 무렵이면 일을 끝냈다. 정말 온몸이 땀에 젖어 금방 물에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젖은 채 하루 종일 일을 하였다.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났으나 스님은 매일매일 죽어라고 일만 했다. 그런 스님에게 나는 말 붙이기도 왠지 꺼려했는데 하도 궁금해서 언젠가 ‘스님, 왜 스님은 예불은 안 모시고 일만 한답니까?’ 하고 물었더니 스님은 별다른 표정도 없이 ‘나는 예불 드리는 거 몰라.’ 라며 마당으로 가서 또 괜한 돌계단을 허무는 것이었다. 진짜로 염불을 못하는 것인지 궁금했고, 염불도 못하면서 어떻게 스님이 되었는지도 궁금했다. 아니 무엇보다도 왜 그렇게 가장 더운 시간에 미친 듯이 일만 하는 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 스님은 나의 이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고 언젠가 말도 없이 훌쩍 지장암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30년이 지난 지금, 가끔 그 스님이 생각난다. 아니 그는 3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나를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일에 말만 앞세우고 말로만 해결하려 들며 몸은 까딱도 않는 나에게 말이 아닌 ‘몸’을 가르쳐준 스승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보다는 ‘몸의 행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강변하듯 그의 여름날 노동이 그의 수행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수행은 말보다도 공부보다도, 온몸의 행위로 진실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 위한 것은 아니었나 싶다. 입만 벙긋하면 거짓말이 튀어나오는 거짓 덩어리의 이 몸뚱어리, 살아온 세월만큼 두꺼워진 위선의 몸집, 거짓으로 가득 찬 비만의 몸뚱어리에게 ‘진실’이 무엇인가를 이처럼 명쾌하게 가르쳐주는 스승은 아직 없었다. 사실 요즘 현대인들은 가급적이면 모든 일을 ‘앉아서’ 처리하려고 한다. ‘몸으로 뛰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현대 과학기술문명과 컴퓨터 문화의 일반화로 사람들의 생활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져서 몸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치장’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사는 것 같다. 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상품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몸을 아름답게 가꾸려고 하는 것, 그 자체는 이해할 수는 있으나 그것의 궁극적인 지향은 결국 몸의 상품성을 높이는 것으로 귀착되는듯하여 씁쓸하다. 요즘 세태를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사실 인류의 역사가 자본주의의 역사로 넘어 오면서 전 지구적 시장경제를 통해 지상의 모든 것은 이미 상품이 되어 버렸으니 ‘몸’인들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즘 부쩍 더 30년 전의 그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나는 스님이 자주 내 앞에 나타나 어른거린다. (박두규. 시인) -노루귀 /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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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8
  •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학의 길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학의 길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 박 두 규 (시인) 1 코로나 국면을 맞고 보니 그동안 꾸준히 거론되어 오던 기후변화에 따른 전 지구적 위기라는 것이 코앞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문학은 무엇인가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우리는 문학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논의를 해왔지만 지금의 현실상황을 보면 ‘지구 위기, 인류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문학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학도 과학이나 기술처럼 현실에서 우선적으로 ‘지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삶 문학에 일정 부분 복무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도 문학은 문학대로 지금껏 확장해온 영역이 있고 인류사 속에서 다양하게 그 역할을 해왔으며 또 어떤 특별한 상황 속에서는 그 상황에 맞게 대응해왔기 때문에 지금처럼 그렇게 하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이 상상력의 문학이고 영적 문학이라는 점과 ‘지구의 위기, 인류의 위기’의 현실에 대한 복무를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100년의 지구, 100년의 인류를 염두에 두며 글을 통해 더 세밀하게 그려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의 과학과 기술보다 100년의 현실을 앞서 이야기하고 노래하며 올바른 방향의 길을 찾는 더듬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 요즘 쏟아져 나오는 학자들의 글들을 읽어 보면 기후 환경으로 인한 지구의 위기 상황은 현실의 감도보다 훨씬 심각하다. 지금 우리가 해마다 역대 기록을 갱신하며 겪는 자연재해는 단순한 재해가 아니라 대량학살의 위기이며 재앙의 시작이라고 봐야 옳다는 것이다. 인류가 자본주의 문명의 현행 기조를 고수할 경우 2100년에는 탄소배출량으로 인해 지구의 기온이 약 4도 이상 상승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북극의 빙상은 이미 붕괴된 지 오래고 알프스의 만년설은 70% 이상 녹으며 해수면은 최대 2.4미터 상승할 수 있다고 한다. 인구 천만의 자카르타 같은 도시가 물에 잠기며 세계의 주요도시는 거의 2/3가 해안에 위치해 있으니 그에 따른 발전소, 항구, 농경지 등 주요시설도 함께 위험해질 것이다. 그리고 적도 지방의 주요 도시들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한다고 한다. 이미 2018년 폭염 시에 로스엔젤레스 42도, 파키스탄 50도, 알제리 51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물 부족과 폭염으로 북위도 지역마저도 해마다 수천 명이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가 끝날 무렵이면 코로나와 같은 새로운 질병들, 상상을 초월하는 산불과 홍수의 증가, 수천만 명에 이르는 기후 난민, 경제 대공황과 지역 간의 기후분쟁, 농산물 생산이 크게 줄면서 일어나는 자원전쟁 등 한 해 기준 100조 달러의 세계 피해규모가 예상된다니 앞으로 80년 안에 변화될 지구의 모습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지금의 자본주의적 개발과 소비 패턴에서 조금도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진행되었을 경우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코로나19가 해결된다 해도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 예전의 일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지구와 인류는 이미 변화의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새로운 문명이 일어나는 시점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기존의 자본주의를 토대로 이루어낸 과학기술문명, 물질문명의 틀에서 벗어나 이전의 의식에서 한 단계 점핑된 도덕적 과학기술과 새로운 정신문명으로의 판짜기 변화가 절실해진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현재 소비와 개발성장의 자본문명에서 전환하여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 갈 것인가를 이야기해야 된다. 포스트 코로나를 맞아 변화되어야 할 의, 식, 주, 의료, 교육 그리고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까지 기존의 질서와 그 틀을 어떻게 바꿔가야 할 것인지를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문학은 이 현실 변화의 중심에서 어떤 마음, 어떤 영혼을 가진 인간이어야 하는 것을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3 지금껏 지구와 인류의 위기를 초래해온 자본문명을 벗어나 새로운 문명을 꿈꾼다면 먼저 기존의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세계관 등 일상 속의 대중들에게도 정신적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생각이 바뀌어야 그 삶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정제 없이 그대로 반영된 이데올로기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그렇게 이익을 극대화하며 개발과 성장의 경제논리로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 자본주의다. 자본은 배고픔과 위험한 환경 조건에서 풍요로움과 안전함과 편리함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 도를 넘어 인간의 끝없는 탐욕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렇게 인류는 풍요와 편리를 거느린 현실 자본주의를 앞세워 공존공생을 위한 사회적 도덕과 윤리의 경계를 깨고 탐욕과 욕망을 당연하고 정당한 인간 정서로 편입시켰다. 단순하게 이야기 했지만 사실 이런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자본주의와 잘 어울려 끝없이 달려온 결과 현재의 지구와 인류의 위기를 맞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개인의 인간도 그 탐욕이 지나치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반성과 성찰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 인류는 21세기가 끝나는 지점부터는 지금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혹독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사피엔스의 종말을 향해 추락해 갈 것이다. 그래서 문학예술은 지금의 시점에서 좀 더 집중적으로 21세기 이후의 현실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한 새로운 문명, 새로운 문학예술에 복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문명에 대응하는 문학을 생각하려면 자본주의의 속성인 탐욕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철학, 새로운 문화를 궁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어쩌면 삶의 본질과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총체적 근원으로부터 오는 것이어서 그것은 현실 자본주의를 벗어나 근본 진리의 삶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본래 모든 생명들은 함께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공존공생의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과 그것을 위해 인간은 가장 경계해야 할 본성인 ‘탐욕’을 꾸준히 정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4 나는 이것을 문학이라는 영역에서 생각한다면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는 ‘단순한 삶’과 ‘소박한 삶’을 하나로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인데 ‘단순한 삶’의 문학은 개인 스스로를 전체의 한 부분이면서, 그렇기 때문에 전체라는, 그래서 전체를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라는, 이미 붓다나 예수 등 많은 현자들이 발견했던 동체대비, 궁극과의 합일 등 진리의 삶과 연계되어 있는 것이며 이를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문학을 말한다. 이는 ‘단순성’이라는 진리의 영역을 문학으로 가져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실현할 수 있는 ‘단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삶은 당장 그렇게 살려는 스스로의 결단과 실천만 있으면 되는 ‘단순성’에서 시작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진리에 의해 사는 삶’은 어떤 거창한 것은 아니고 현재의 실상을 바로보고 그것에 어긋남 없이 사는 것, 다시 말하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의 실상은 모두가 있는 그대로 어울려(연기적 관계를 가지고) 전체가 하나의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있는 그대로(본질 그대로) 어울려 순환하고 진화하는 것이 바로 ‘단순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변곡점에서 문학이 주시해야 할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소박한 삶’은 이런 ‘단순한 삶’을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 사실은 방법이면서 그 본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를 진화시켰던 인간의 탐욕은 끝없는 집착을 가져와 현재 지구의 기후재앙과 함께 모든 문제의 화근이 되었고 이 탐욕과 집착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소박한 삶’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본의 끝없는 성장 시나리오는 이제 그 한계에 왔다. 대체 에너지 등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과학기술의 노력과 성과가 있다하더라도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충족시킬 수는 없다. 결국은 소박한 삶으로 가지 않으면 해결 될 수 없는 것이다. ‘소박한 삶’은 스스로의 탐욕을 다스리는 삶이고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을 조화와 균형으로 이끄는 해답이라고 본다. 이‘소박한 삶’을 통해 모든 생명과 지구가 하나의 완결체로 존재할 수 있는 공존, 공생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하고 새로운 문명의 길로 가는 길목에 이러한 물질 중심의 삶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 문학적 화두를 통해 개인의 이기(利己)를 극복하고 무아(無我)와 탈에고(脫ego)의 수준까지 의식을 확장하여 탐욕을 순치(順治)하는데 기여해야 하는 것이 현재의 문학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코로나19와 같은 새로운 질병들과 지구의 기후재앙을 막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첫눈이 내린 노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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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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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몸 가르침 한 수
    몸 가르침 한 수 절에 있을 때 이야기다. 참 오래된 이야긴데 나는 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갈 곳이 없었다. 집에 있자니 부모님 보기도 민망하고 나가 돌아다니자니 어느 대학에 갔냐는 질문이 무서워 사람 만나는 것도 겁나고, 혼자 빈둥거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어서 작은 보따리 하나 들고 무작정 절로 들어갔다. 그 길로 거의 1년을 절집에서 살았는데 그해 여름의 일이었다. 그곳은 서래선림(西來禪林)이라는 비석이 입구에 서 있는 지장암(地藏庵)이라는 절이었는데 해안(海眼) 큰스님이 돌아가시고 사부대중의 발길이 끊기고 상좌들도 밖으로 나가 있어서 말 그대로 절간처럼 조용한 절이었다. 때는 한 여름이라 녹음이 짙을 대로 짙어져 숲 그늘에 누워 잔잔한 바람에 책이라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달콤한 낮잠에 빠지곤 하던 시절이었다. 그 여름 어느 날 객승이 한 분 오셨는데 작달막한 키에 별 말이 없는 얼추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스님이었다. 대개 스님들은 객으로 묵을 때면 예의상 곧잘 예불도 드리곤 하는데, 그 스님은 아침 예불이건 저녁 예불이건 한 번도 불당에 오르는 일이 없고, 도통 방에만 틀어박혀 나올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방에서 공부를 하거나 참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거의 종일토록 잠을 자거나 방에서 빈둥거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부턴가 그 스님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한 낮에도 쉬지 않고 해가 질 때까지 죽어라고 일만 하였다. 특별히 할 일이 없는데도, 이를테면 아랫마당에서 법당까지 놓여 있는 돌계단을 괜히 파헤쳐 놓고 다시 하나하나 계단을 맞추어 쌓는 그런 일이었다. 내가 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멀쩡한 돌계단을 부수고 쌓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더우니 보통 이른 아침이나 저녁나절에 강한 햇살이 죽었을 때 일을 하는 법인데 이 스님은 태양이 이글거리기 시작하는 10시쯤에야 일을 시작하여 밖에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그런 뙤약볕에서 일을 하다가 해가 지는 무렵이면 일을 끝냈다. 정말 온몸이 땀에 젖어 금방 물에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젖은 채 하루 종일 일을 하였다.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났으나 스님은 매일매일 죽어라고 일만 했다. 그런 스님에게 나는 말 붙이기도 왠지 꺼려했는데 하도 궁금해서 언젠가 ‘스님, 왜 스님은 예불은 안 모시고 일만 한답니까?’ 하고 물었더니 스님은 별다른 표정도 없이 ‘나는 예불 드리는 거 몰라.’ 라며 마당으로 가서 또 괜한 돌계단을 허무는 것이었다. 진짜로 염불을 못하는 것인지 궁금했고, 염불도 못하면서 어떻게 스님이 되었는지도 궁금했다. 아니 무엇보다도 왜 그렇게 가장 더운 시간에 미친 듯이 일만 하는 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 스님은 나의 이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고 언젠가 말도 없이 훌쩍 지장암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30년이 지난 지금, 가끔 그 스님이 생각난다. 아니 그는 3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나를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일에 말만 앞세우고 말로만 해결하려 들며 몸은 까딱도 않는 나에게 말이 아닌 ‘몸’을 가르쳐준 스승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보다는 ‘몸의 행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강변하듯 그의 여름날 노동이 그의 수행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수행은 말보다도 공부보다도, 온몸의 행위로 진실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 위한 것은 아니었나 싶다. 입만 벙긋하면 거짓말이 튀어나오는 거짓 덩어리의 이 몸뚱어리, 살아온 세월만큼 두꺼워진 위선의 몸집, 거짓으로 가득 찬 비만의 몸뚱어리에게 ‘진실’이 무엇인가를 이처럼 명쾌하게 가르쳐주는 스승은 아직 없었다. 사실 요즘 현대인들은 가급적이면 모든 일을 ‘앉아서’ 처리하려고 한다. ‘몸으로 뛰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현대 과학기술문명과 컴퓨터 문화의 일반화로 사람들의 생활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져서 몸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치장’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사는 것 같다. 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상품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몸을 아름답게 가꾸려고 하는 것, 그 자체는 이해할 수는 있으나 그것의 궁극적인 지향은 결국 몸의 상품성을 높이는 것으로 귀착되는듯하여 씁쓸하다. 요즘 세태를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사실 인류의 역사가 자본주의의 역사로 넘어 오면서 전 지구적 시장경제를 통해 지상의 모든 것은 이미 상품이 되어 버렸으니 ‘몸’인들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즘 부쩍 더 30년 전의 그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나는 스님이 자주 내 앞에 나타나 어른거린다. (박두규. 시인) -노루귀 /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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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8
  •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학의 길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학의 길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 박 두 규 (시인) 1 코로나 국면을 맞고 보니 그동안 꾸준히 거론되어 오던 기후변화에 따른 전 지구적 위기라는 것이 코앞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문학은 무엇인가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우리는 문학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논의를 해왔지만 지금의 현실상황을 보면 ‘지구 위기, 인류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문학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학도 과학이나 기술처럼 현실에서 우선적으로 ‘지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삶 문학에 일정 부분 복무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도 문학은 문학대로 지금껏 확장해온 영역이 있고 인류사 속에서 다양하게 그 역할을 해왔으며 또 어떤 특별한 상황 속에서는 그 상황에 맞게 대응해왔기 때문에 지금처럼 그렇게 하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이 상상력의 문학이고 영적 문학이라는 점과 ‘지구의 위기, 인류의 위기’의 현실에 대한 복무를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100년의 지구, 100년의 인류를 염두에 두며 글을 통해 더 세밀하게 그려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의 과학과 기술보다 100년의 현실을 앞서 이야기하고 노래하며 올바른 방향의 길을 찾는 더듬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 요즘 쏟아져 나오는 학자들의 글들을 읽어 보면 기후 환경으로 인한 지구의 위기 상황은 현실의 감도보다 훨씬 심각하다. 지금 우리가 해마다 역대 기록을 갱신하며 겪는 자연재해는 단순한 재해가 아니라 대량학살의 위기이며 재앙의 시작이라고 봐야 옳다는 것이다. 인류가 자본주의 문명의 현행 기조를 고수할 경우 2100년에는 탄소배출량으로 인해 지구의 기온이 약 4도 이상 상승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북극의 빙상은 이미 붕괴된 지 오래고 알프스의 만년설은 70% 이상 녹으며 해수면은 최대 2.4미터 상승할 수 있다고 한다. 인구 천만의 자카르타 같은 도시가 물에 잠기며 세계의 주요도시는 거의 2/3가 해안에 위치해 있으니 그에 따른 발전소, 항구, 농경지 등 주요시설도 함께 위험해질 것이다. 그리고 적도 지방의 주요 도시들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한다고 한다. 이미 2018년 폭염 시에 로스엔젤레스 42도, 파키스탄 50도, 알제리 51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물 부족과 폭염으로 북위도 지역마저도 해마다 수천 명이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가 끝날 무렵이면 코로나와 같은 새로운 질병들, 상상을 초월하는 산불과 홍수의 증가, 수천만 명에 이르는 기후 난민, 경제 대공황과 지역 간의 기후분쟁, 농산물 생산이 크게 줄면서 일어나는 자원전쟁 등 한 해 기준 100조 달러의 세계 피해규모가 예상된다니 앞으로 80년 안에 변화될 지구의 모습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지금의 자본주의적 개발과 소비 패턴에서 조금도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진행되었을 경우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코로나19가 해결된다 해도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 예전의 일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지구와 인류는 이미 변화의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새로운 문명이 일어나는 시점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기존의 자본주의를 토대로 이루어낸 과학기술문명, 물질문명의 틀에서 벗어나 이전의 의식에서 한 단계 점핑된 도덕적 과학기술과 새로운 정신문명으로의 판짜기 변화가 절실해진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현재 소비와 개발성장의 자본문명에서 전환하여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 갈 것인가를 이야기해야 된다. 포스트 코로나를 맞아 변화되어야 할 의, 식, 주, 의료, 교육 그리고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까지 기존의 질서와 그 틀을 어떻게 바꿔가야 할 것인지를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문학은 이 현실 변화의 중심에서 어떤 마음, 어떤 영혼을 가진 인간이어야 하는 것을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3 지금껏 지구와 인류의 위기를 초래해온 자본문명을 벗어나 새로운 문명을 꿈꾼다면 먼저 기존의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세계관 등 일상 속의 대중들에게도 정신적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생각이 바뀌어야 그 삶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정제 없이 그대로 반영된 이데올로기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그렇게 이익을 극대화하며 개발과 성장의 경제논리로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 자본주의다. 자본은 배고픔과 위험한 환경 조건에서 풍요로움과 안전함과 편리함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 도를 넘어 인간의 끝없는 탐욕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렇게 인류는 풍요와 편리를 거느린 현실 자본주의를 앞세워 공존공생을 위한 사회적 도덕과 윤리의 경계를 깨고 탐욕과 욕망을 당연하고 정당한 인간 정서로 편입시켰다. 단순하게 이야기 했지만 사실 이런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자본주의와 잘 어울려 끝없이 달려온 결과 현재의 지구와 인류의 위기를 맞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개인의 인간도 그 탐욕이 지나치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반성과 성찰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 인류는 21세기가 끝나는 지점부터는 지금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혹독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사피엔스의 종말을 향해 추락해 갈 것이다. 그래서 문학예술은 지금의 시점에서 좀 더 집중적으로 21세기 이후의 현실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한 새로운 문명, 새로운 문학예술에 복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문명에 대응하는 문학을 생각하려면 자본주의의 속성인 탐욕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철학, 새로운 문화를 궁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어쩌면 삶의 본질과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총체적 근원으로부터 오는 것이어서 그것은 현실 자본주의를 벗어나 근본 진리의 삶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본래 모든 생명들은 함께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공존공생의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과 그것을 위해 인간은 가장 경계해야 할 본성인 ‘탐욕’을 꾸준히 정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4 나는 이것을 문학이라는 영역에서 생각한다면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는 ‘단순한 삶’과 ‘소박한 삶’을 하나로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인데 ‘단순한 삶’의 문학은 개인 스스로를 전체의 한 부분이면서, 그렇기 때문에 전체라는, 그래서 전체를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라는, 이미 붓다나 예수 등 많은 현자들이 발견했던 동체대비, 궁극과의 합일 등 진리의 삶과 연계되어 있는 것이며 이를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문학을 말한다. 이는 ‘단순성’이라는 진리의 영역을 문학으로 가져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실현할 수 있는 ‘단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삶은 당장 그렇게 살려는 스스로의 결단과 실천만 있으면 되는 ‘단순성’에서 시작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진리에 의해 사는 삶’은 어떤 거창한 것은 아니고 현재의 실상을 바로보고 그것에 어긋남 없이 사는 것, 다시 말하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의 실상은 모두가 있는 그대로 어울려(연기적 관계를 가지고) 전체가 하나의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있는 그대로(본질 그대로) 어울려 순환하고 진화하는 것이 바로 ‘단순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변곡점에서 문학이 주시해야 할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소박한 삶’은 이런 ‘단순한 삶’을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 사실은 방법이면서 그 본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를 진화시켰던 인간의 탐욕은 끝없는 집착을 가져와 현재 지구의 기후재앙과 함께 모든 문제의 화근이 되었고 이 탐욕과 집착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소박한 삶’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본의 끝없는 성장 시나리오는 이제 그 한계에 왔다. 대체 에너지 등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과학기술의 노력과 성과가 있다하더라도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충족시킬 수는 없다. 결국은 소박한 삶으로 가지 않으면 해결 될 수 없는 것이다. ‘소박한 삶’은 스스로의 탐욕을 다스리는 삶이고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을 조화와 균형으로 이끄는 해답이라고 본다. 이‘소박한 삶’을 통해 모든 생명과 지구가 하나의 완결체로 존재할 수 있는 공존, 공생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하고 새로운 문명의 길로 가는 길목에 이러한 물질 중심의 삶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 문학적 화두를 통해 개인의 이기(利己)를 극복하고 무아(無我)와 탈에고(脫ego)의 수준까지 의식을 확장하여 탐욕을 순치(順治)하는데 기여해야 하는 것이 현재의 문학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코로나19와 같은 새로운 질병들과 지구의 기후재앙을 막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첫눈이 내린 노고단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2-12-16
  • 구례군 지역의 빨치산 활동사
    구례군 지역의 빨치산 활동사 남조선 노동당 구례군당은 5. 10단선 반대투쟁에서 수배된 인물 25명으로 1948. 6월초에 지리산 인민유격대를 피아골 계곡에서 조직하여 당사상 교육과 유격전술에 의한 강도 높은 훈련이 시작되었고 훈련중에도 투쟁실습에서 유격대조직 1개월만에 엽총 2정 칼빈총 5정 일제의 九九식 소총 3정과 일본도 등으로 완전무장하여 지리산 인민 유격대가 활동을 개시하였다. 지리산 인민유격대가 조직되어 활동을 시작함으로서 친일파 민족반역자 및 우익 인사들은 자유로운 생활이 어려워 졌고 밤으로는 경찰지서로 가서 잠을 자야했다. 또한 경찰도 산간벽지를 함부로 출입할수 없었을 뿐아니라 단신으로는 행동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일반 주민들도 좌익인사들을 욕하거나 비판도 못하게 되었고 좌도 우도 반대 하지 못하고 밤으로 찾아오는 빨치산들에게 식량과 물품을 은밀히 제공하게 되었다. 지리산 인민유격대는 성장을 거듭하며 1948. 10. 19일 여수 14연대의 반란을 맞아 그들에게 지리산과 백운산의 익숙해진 지리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하여 14연대는 국군보다 지리적 잇점을 얻게 되었다. 1948. 10. 25일 미명에 김지회가 인솔한 14연대 병력 400여명은 지리산 유격대를 앞세워 구례경찰서를 점령함으로서 혈투는 시작되었다. 1948. 11. 19일 밤12시 14연대 후속부대 지창수가 지휘하는 200여명과 김지회 병력 400 구례유격대 50여명등 650여명은 구례읍 2차 점령작전을 감행 했으나 성과 없이 작전개시 10시간여만에 퇴각함으로서 그들의 사기에 큰 타격을 받았는데 그후 1948. 12월 초순 김지회와 박종하는 200여 병력으로 산동면 쐬약재에서 12연대장 백인기가 인솔한 12연대 1개중대를 매복작전으로 섬멸시켜 군용트럭 6대 짚차 1대, 스리쿼터 1대등을 노획하여 소각시켰고 기관총 소총등 150여정의 무기와 수만발의 실탄을 빼앗았다. 이 작전이 끝나자 이현상은 구례군 유격대의 절반인원을 14연대에 편입시켜 피아골에서 뱀사골로 거점을 옮겼고 구례유격대는 지리산 인민 유격대라는 본래의 명칭을 14연대에 빼앗기고 단순히 구례유격대로 격하 되면서 전투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당시 14연대의 지휘체계는 정치위원에 이현상 사령관에 부사령관에 김지회 중위였고 구례유격대장은 박종하(구례 간전 논실출신)였다. 박종하는 여수, 광양, 구례의 유격대를 규합하여 백운지구사령부 유격대를 조직했는데 총인원 50명 무장 13정이었다.박종하는 능란한 유격전술인 편의대 활동 매복작전등으로 부대창설 1개월만에 완전무장부대 50명을 만들었고 1949. 6월 하순 박종하는 50명의 병력으로 광양군 진상면 신항리에 주둔중인 15연대 중화기 중대를 기습하여 박격포 2문 기관총 5정 소총 70여정 실탄 수만발을 노획하여 대부대로 약진하였다. 1949. 9. 16일 박종하는 전남 동부지구 유격대 100여명의 지원을 받아 순천방면의 국군지원 병력 지원로를 막게하고 자신의 부대 50명으로 하여금 하동 방면에서의 지원군을 막게하고 박종하 자신은 150명 병력으로 광양읍 서국민학교에 주둔한 15연대 1개 대대 병력을 공격하여 포로 600명 소총 700여정등 대대병력 보급품 전부를 노획하는 유격투쟁 사상 초유의 대전과를 올렸다. 이리하여 박종하 백운산 부대는 지리산 14연대 병력을 능가했다. 이때 지리산 병력은 1949년. 3월말 남원군 산내면 금풍정이라는 마을에서 국방군의 기습을 받아 홍순석 김지회가 사살되고 300여 병력을 잃어 잔존세력은 환자까지하여 150명 내외로 줄었고 실탄도 떨어져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이현상은 9. 16광양작전후 박종하부대를 지리산으로 불러 14연대 잔존세력과 합쳐 부대를 재편하며 박종하를 총참모장으로 기용하여 지리산 빨치산 투쟁의 지휘권을 박종하에게 맡겼다. 1949 겨울 국군과 경찰은 지리산과 백운산에 고지마다 주둔하면서 빨치산 토벌작전을 지속적으로 전개함으로서 빨치산 투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현상은 1950. 6월초 잔여 병력 150여명을 인솔하고 월북을 결심하고 지리산을 떠나 북상중 무주에서 6. 25 소식을 듣고 부대는 덕유산에 두고 대전에 가서 인민군전선사령관 김책을 만나 낙동강을 도강하여 낙동강 방위군 후방에 가서 유격투쟁을 전개하라는 지령을 받고 귀대하여 즉시 행동을 개시 고령군의 모처에서 낙동강을 도강하며 9. 28까지 구를 중심으로 유격투쟁을 전개하다가 9. 28을 만나 北으로 후퇴를 개시하며 강원도 후평에서 인민군 전선사령관을 만나 다시 남하하여 적 후방에서 유격투쟁하라는 명령을 받고 1950년 12월 말경 850여명으로 남부군(南部軍)을 편성하여 다시 남하를 시작 청주를 점령하고 속리산과 추풍령을 지나 덕유산에서 태백산 전투경찰대 207부대를 완전섬멸하고 다시 남하 산청군 가회지서를 습격 점령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박종하가 전사하여 1948. 6월 피아골에서 조직한 지리산 인민유격대의 종말을 고했다 (자료제공, 빨치산 출신 정용호) -섬진강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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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편지
    2022-11-15
  • 세석평전細石平田의 추억
    ☐지리산에서 온 편지 11 세석평전細石平田의 추억 잔돌평전의 저물녘 풍경 세석평전은 지리산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곳이다. 지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을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경남의 중산리에서 바로 천왕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하나 있기는 하지만 그곳을 제외하고는 동서남북 어느 곳에서 오르건 세석평전을 거치지 않고는 천왕봉에 오를 수 없다. 그래서 지리산에 많은 대피소가 있지만 세석평전에는 늘 사람들이 많다. 세석평전은 오래 전엔 잔돌평전이라고 불렀다. 세細가 ‘가늘다’라는 뜻으로 세석은 작은 돌들이 많은 곳이라는 뜻이고, 높은 곳에 있는 펀펀한 땅을 평전이라 하니 세석평전은 작은 돌들이 많은 높고 펀펀한 땅이라는 뜻이다. 이 평전에는 철쭉이 군락을 이루며 피어 있고 지리산맥의 많은 능선들이 굽이치며 내리벋고 있어서 그 청량한 바람과 함께 펼쳐지는 풍광은 장엄 그 자체이다. 사람들이 지리산을 타면서 굳이 주능선 종주를 고집하는 이유는 노고단으로부터 천왕봉까지 서에서 동으로 전남과 경남에 걸쳐있는 첩첩 봉우리들이 만들어내는 긴 능선과 남과 북으로 여러 갈래 벋어있는 지 능선들의 유장한 지리산맥을 걷는 내내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곡과 능선을 넘나드는 구름들과 저물녘 빛을 받아 강하게 굼틀리는 산줄기들의 파노라마는 자신의 감옥에 갇혀 사는 이기적인 소인배를 벗어나 자연의 하나일 뿐인 알몸의 자신을 깊이 성찰하게 한다. 특히 겨울 산의 엄혹한 추위 속에서 수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지리산의 저물녘 풍경은 언제나 깊게 사무쳐 온다. 오만과 편견 그리고 세석대피소 뒤에 솟아있는 봉우리가 영신봉靈神峰이다. 그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아 한때는 무속적 신앙을 가진 무리가 영신대 아래 기도처를 잡고 집단생활을 하던 때도 있었다. 30년도 더 된 어느 해에 대성계곡의 작은세계골을 타고 영신대까지 오르는 계곡등반을 할 때였는데 세석평전에 텐트를 칠 요량으로(그때는 텐트 치는 것이 허용될 때여서 세석평전에 가면 울긋불긋한 텐트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곤 했다.) 천천히 계곡을 올랐다. 그리고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 영신대 근처에 이르러 나는 깜짝 놀랐다. 바위 틈새마다 촛불들이 켜져 있고 군데군데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텐트와 작은 비닐하우스들이 좁은 공간 여기저기 있는 걸 봐서 이들은 집단 기거하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말을 붙일 엄두도 나지 않아 조용히 그들을 방해하지 않고 그곳을 빠져 나왔다. 대피소 쪽으로 올라와 보니 불빛도 보이지 않은 구석진 곳이었는데 기도처로써는 참으로 명당자리였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엄격하게 관리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을 위하여 이 높은 산에까지 올라와 무리지어 기도를 할까. 기도로 자신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것일까. 그 원하는 무엇이라는 것이 겨우 자신이나 가족의 부富나 안위 정도의 이기적인 것은 아닐까. 젊은 치기가 앞서 있던 당시로는 순전히 자의적인 짐작만으로 그들을 재단하고 무시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니 나의 오만과 편견이 얼마나 심했었나를 알 수 있다. 요즘 세태를 보면 개인이건 단체건 기업이든 정당이든 혹은 지역과 나라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역만을 최우선적으로 옹호하고 챙기는 것이 일반화된 정서인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고 전혀 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법으로 위법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괜찮다는 생활정서가 이미 우리의 구체적 생활에 깊이 들어온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 양심이라는 것이 불편해 하는 것이다. 사람다운 무엇인가를 팽개치는 것 같아 어떤 헛헛함이 밀려오는 것이다. 세석대피소의 추석 그 시절에는 세석 대피소도 그야말로 조그만 대피소였다. 지금은 증축하여 넓은 공간에 난방도 되어 그때에 비하면 호텔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때는 매우 좁고 한 겨울에도 난방 없이 잠을 잤다. 그리고 추석연휴가 되면 세석대피소는 만원이었다. 언젠가 그 시절 추석연휴에 지리산에 올랐다. 여러 명이 갔는데 텐트 가지고 가기 귀찮아서 대피소를 이용하려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올랐는데 예상 외로 대피소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대피소 수용 정원이 몇 명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한 다섯 배는 많은 인원이 들이닥쳤던 것 같다. 전에 혼자 잘만한 공간에 다섯 명이 누워야 했기 때문이다. 대피소 직원들은 바로 눕지도 못하게 하고 옆으로 몸을 세운 채로 칼잠을 자듯 꼭 끼워 눕게 했다. 날이 너무 추워 밖에 재울 수는 없었던 거다. 지금은 반드시 예약을 해야 대피소를 이용할 수 있으며 예약이 안 된 사람들은 아예 하산 시간이 확보되지 않으면 산 아래 출발지점 관리소에서 올려 보내지 않고 있다. 어쨌든 화장실에라도 다녀오면 누울 공간이 없어지기 때문에 화장실에도 갈 수 없었다. 그래도 그 정도는 고마운 축에 들었다. 왜냐하면 복도 공간에도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서 밤을 새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상상할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시쳇말로 육이오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도 밖에서 추위에 떨면서는 잠도 오지 않을 뿐 아니라 몸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어서 그냥 안에서 버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많은 인원이 좁은 공간에서 함께 자다보니 코고는 사람들도 많았고 더욱이 땀 냄새며 발 냄새가 지독해서 웬만한 사람은 잠을 들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잠을 자기 위해서는 독한 술이라도 몇 잔 마시고 떨어져야 하는데 또 그런 사람들 때문에 고약한 술 냄새까지 합세해서 여간해서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어찌하다 두서너 시간 잠들 수 있다면 그것만 해도 고마운 것이었다. 하지만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도 다음 날 산행에 큰 지장은 없었다. 아침에 약간 찌뿌듯했던 몸은 한 시간 정도 산을 타며 땀을 흘리면 바로 말끔해졌기 때문이다. 한 겨울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겨울 산을 오르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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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8
  • 피밭마을의 골짜기
    지리산에서 온 편지 10 피밭마을의 골짜기 어머니의 단풍구경 나이 80대 중반 무렵이었을까, 어머니는 바람이 쌀쌀해지는 가을이 오면 단풍구경 가자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나는 그때만 해도 바쁘게 밖으로만 돌던 때여서 ‘네, 그래요. 언제 피아골에라도 한번 가게요.’ 하면서도 그냥 스쳐지나가기 일쑤였다. 구례에 살 때여서 한두 시간만 시간을 내도 금방 다녀올 수 있다는 생각에 더 소홀했던 것 같다. 막상 이제 돌아가시고 나니 가을이 오고 피아골에 단풍이 곱게 물들기라도 하면 그 말씀이 늘 밟힌다. 그래도 언젠가 한번 어머니를 모시고 피아골에 갔던 적이 있었다. 피아골 초입의 단풍잎들이 처연하리만큼 붉게 물든 나무 아래로 모시고 가면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은 고작 ‘야, 참 곱다’ 한마디였다. 그리곤 별 말씀도 없이 그냥 한참을 앉았다 돌아오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만 해도 노인네의 짧은 한마디에는 한 생이 다 담겨있기도 하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젊은 것들은 지금 여기의 현재를 살아내기도 바빠서 울긋불긋 현란한 색들을 보며 그저 가을이니까 하는 정도의 계절감각을 가졌었다면 어머니 같은 노인네들은 저 화려한 시절의 절정기 뒤에 있는 인생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절절하게 느끼셨을 것이다. 지금 여기의 붉디붉은 절정의 단풍이지만 당신에게는 젊은 날의 과거로만 보였을까. 씁쓸한 듯 가늘게 뜬 눈빛과 오랜 풍상의 눈가 잔주름이 아직도 생생하다. 붉은 골짜기 피아골 피아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끝 마을은 직전마을이다. 피 직(稷)에 밭 전(田)을 쓰니 그 옛날 곡식이 귀했던 시절의 이름이다. 그 피밭골이 육이오 전쟁을 거치면서 너와 나, 적군과 아군, 좌익과 우익의 갈등과 대립을 함축하고 있는 이름인 피아골로 불리게 되었다. 피아골은 전쟁 당시 한때 인민공화국의 구례 군당이 숨어들었던 곳이며 그 비트는 피아골 삼홍소에서 계곡 좌측의 지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지금도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전투가 잦았을 것이니 계곡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피아골의 피아는 한자로 상대방(피)과 나(아)를 뜻하는 말이건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붉은 피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떠도는 말로 전쟁 이후 이 골짜기에서 한 트럭분의 유골이 나왔다고도 하니 어쨌거나 그 상처가 골짜기만큼이나 깊다고 할 것이다. 전쟁 훨씬 전에도 피아골의 붉은 골짜기 이미지는 있었다. 골짜기의 중간쯤에 있는 삼홍소가 그렇다. 삼홍소는 한자로 三紅沼라고 쓰는데 ‘셋이 붉은 물웅덩이’라는 뜻이다. 조선조의 생육신이며 선도의 맥을 이었다는 김시습이 이곳에서 시를 한 수 지었는데 단풍이 붉고, 그 빛이 물에 어려 계곡물이 붉고, 도도한 흥취에 술 한 잔 걸친 얼굴이 붉다하여 삼홍이라고 노래했다는 것이다. 온 천지가 붉은 이 삼홍소의 계곡에 앉아 있으면 당시 왕권을 둘러싸고 진행되던 피비린내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뇌하는 지식인 김시습이 보이는가 하면 한편으론 현실을 극복하고 인생을 관조하며 지혜롭게 한 생을 건너는 현자 김시습의 풍모가 그려지곤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혹은 어느 시대라 할지라도 현실의 삶과 이상의 삶은 늘 함께 하는 것이 아니던가. 어느 한쪽에 빠져 허우적이는 것이 어리석은 삶이라면 어쩌면 김시습은 자신이 처한 현실과 자아가 추구하던 이상을 아우르며 균형 잡힌 삶을 꾸려낸 각자覺者가 아니었나 싶다. 계곡등반의 허와 실 20년도 훨씬 전이었을 젊은 시절, 한동안 계곡등반을 즐겨했는데 피아골도 계곡등반을 했던 적이 있다. 직전마을에서 피아골 대피소까지는 등산로로 가고, 대피소를 지나서 바로 등산로를 벗어나 계곡만을 타고 주능선까지 오르는 길이었다. 대피소에서 지정 등산로를 타고 오르면 주능선의 피아골 삼거리에 이르지만, 계곡을 타고 오르면 반야봉 바로 밑에 있는 주능선의 노루목 근처에 이르게 된다. 계곡등반을 하는 것은 다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계곡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 그 물줄기의 시원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줄기의 처음은 어떻게 시작될까, 어디서부터일까, 하는 일반적인 궁금증과 함께 어떤 존재의 시원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같은 것이 강했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모든 자연의 사물에 대한 존재의 근원은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설화나 전설 같은 상상력들이 포진하게 된다. 그래서 더 궁금증을 자극하고 괜한 동경이 생기는 것 아니던가. 하지만 계곡등반 같은 경우에는 반드시 분명한 그 처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나름 후련한 맛은 있었다. 하지만 ‘처음’이라는 막연한 시원에 대한 그리움의 의미는 깨지게 된다. 계곡의 끝자락에 이르게 되면 물도 없는 그저 돌멩이 몇 개 있는 평범한 지형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삶의 균형감각 나의 계곡등반은 어쩌면 이런 미화되고 포장된 의미들을 깨고 싶은 심정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한 세상을 살며 이상과 동경은 꿈과 희망이라는 단어로 치환되면서 답답한 현실을 헤쳐 나가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환상과 비현실 속의 막연한 기대감으로 현실적이고 실질적 삶을 꾸려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계곡등반으로 계곡의 끝 지점을 확인하며 나의 현실인식을 다그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문학의 허구적 상상을 앞세워 살며 현실을 나의 에고로 왜곡하여 인식하거나 또는 그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하지는 않고 있는가 하는 자기점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떤 뚜렷한 인식과 의도성을 가지고 계곡등반을 하지는 않았지만 돌아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얼마나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으로 살고 있을까. ‘실사구시’라는 말은 도법스님께서 많이 쓰시던 말씀이다. 나는 나름대로 ‘주어진 이 생生의 현실을 진리의 눈으로 바로 보고 그렇게 세상살이를 해내야 한다’는 말로 해석하며 들어왔다. 계곡등반을 그렇게 철학적으로 했다는 말은 아니고 그 행위의 저 깊은 안쪽에 그런 무의식적 발로가 있었기를 바라는 심정인 것이다. 모든 존재의 본성이 가지고 있다는 삶의 균형감각 같은 것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피아골을 자주 올랐다. 구례에 있는 가까운 곳이어서 그러기도 했지만 팔구십 년대라는 시대적 격동기를 살았던 내 존재의 현실을 올바로 가늠하고 또 그렇게 살기 위한 몸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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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편지
    2022-09-08
  • 옥황님, 나는 못가오
    옥황님, 나는 못 가오 박 두 규(시인) 나는 지금도 가끔 혼자서 이 노래를 청승맞게 부르곤 한다. 아무도 없으니 마음이 풀어져 눈물이 촉촉해질 때도 있다. 몸이라는 것이 참 신비하기도 해서 생각만으로도 반응을 한다. 이 노래를 돌아가신 이광웅 시인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에 그렇다. 술이 몇 순배 돌면 시인은 축 처진 어깨에 고개가 기웃해져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시키지도 않은 노래를 부르곤 했다. 멀리 개울 물소리가 들려오듯 저절로 노래가 흘러나왔다. 군부독재 시절에 오송회 사건으로 억울하게 7년 옥살이를 하고 남은 것이 있다면 그곳에서 배운 이 노래뿐이라고 했다. 그는 옥살이를 비전향장기수 어른들과 함께 했는데 운동 시간에 늘 자신이 부축해서 함께 다니던 분이 있었다. 그분의 두 눈은 전투 중에 총알이 스쳐가 멀게 되었다는데 운동하러 나갈 때는 곁에 누군가가 있어야 했고 그 일을 이광웅 형이 했다고 한다. 그 분의 손을 잡고 운동장을 오갈 때면 그분이 중얼중얼 노래를 하곤 해서 북쪽의 노래들을 배우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작고한 박배엽 시인이랑 늘 어울려 다니며 술을 했는데, 어느 날 배엽이네 집에서 그 아내가 술상을 마련해놓고 이광웅 시인의 노래가 귀하니 녹음을 해놓자고 해서 우리는 함께 술을 마시며 테이프 녹음을 했다. 그 후 이광웅 시인이 죽고 그의 노래가 그리워질 때 그 테이프가 생각났다. 그래서 당시 전주MBC 라디오 피디로 있던 소설 쓰는 이병천에게 부탁해서 가지고 있는 테이프를 더 좋은 음질로 다시 여러 개를 만들었다. 그래서 주변의 지인들과 당시 활동가들이 나눠 가졌다. 그때만 해도 그 테이프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국가보안법에 해당되는 거여서 나는 당시 끌고 다니던 차의 바닥 시트 밑에 숨겨 놓고 차 속에서만 그 노래들을 들었다. 그렇게 그 노래들을 혼자서 차속에서 부를 때면 저절로 눈물이 나곤 했다. 그때 녹음한 노래가 한 열 곡정도 될 터인데 모두 이광웅 형이 부른 노래다. 그때 부른 노래들을 소개한 시를 훗날 첫 시집에 실었다. 월미도의 하얀 사과꽃 향기나/ 날개옷을 잃어버린 금강산녀/ 원수를 찾아 눈 덮힌 영을 내리던 반짝이던 눈빛의 헐벗은 전사들/ 그리고 얼어붙은 하늘을 휘날리던 모스크바의 붉은 깃발과/ 흰점꽃이 인정스레 웃는 고향의 하늘/ 당신은 이런 노래를 불렀지요/...중략...// 나는 산에 올라/ 원추리가 무리지어 피어나는 평전에 누워 쉴 때면/ 당신의 나직한 노래를 만나곤 합니다/ 가장 우울했던 시절에/ 가장 아름다운 꿈을 품고 있었다는 죄목으로/ 세상을 버리신 당신/ 당신의 노래가 이 산을 흐르며 떠나지 않으니/ 이제 저 산봉우리 어느 하나에 당신이 머무르셨군요/,,,하략... (「지리산10 -이광웅」 부분) 이광웅 시인을 만나 술 마시고 노래 부르던 때가 선생이 옥살이 마치고 나와 전주에서 학원선생으로 밥벌이를 하던 때였다. 이광웅 시인이 군산에서 나와 덕진 쪽에서 살던 때였는데 나는 늘 박배엽 시인과 함께 광웅이 형을 만나 술 마시며 그의 노래를 들었다. 우리는 덕진 왕릉 근처 숲이나 광웅이 형 집 등에서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배엽이는 검은 산만 떠가네 하는 ‘밤뱃놀이’라는 김민기의 노래를 쥐어짜듯 불렀고 광웅이 형은 ‘지리산녀’나 북한영화 월미도에 나오는 ‘나는 알았네’를 주로 불렀다. 그리고 나는 고 유희태 형의 집에서 복사해서 배웠던 ‘내 정성 부족함이 아니오’ 하는 김종률의 노래를 부르곤 했다. 광웅이 형이 ‘금강산녀’라는 노래를 부르면 꼭 당시 그의 심정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1절) 내 옷은 어디로 갔나. 그 누가 가져갔나./ 오늘 꼭 올라가야 내일부터 베를 짜는데/ (2절) 날개옷 잃고 서야 저 하늘 어이 날으리./ 날 두고 가는 선녀 말이나 전해다오./ (후렴) 직녀는 옷을 잃고 울면서 보낸다오./ 이 일을 어이하랴 옥황님 나는 못 가오. 천상의 사람 이광웅이 어쩌다 이 모진 세상에 내려와 부러진 날개를 붙잡고 옥황님, 나는 날 수 없다오 하며 하늘에 대고 하소연 하는 것만 같았다. 작은 어깨가 흐느끼듯 들썩이며 가늘게 새어나오는 한숨 같은 그의 노래를 들으면 슬픔이 목까지 차올랐다. 이광웅은 당시 폭압적이고 살인적인 군부독재가 앗아간 자유와 민주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그 상황 속에 자신이 처한 심정을 담아 이 노래를 불렀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의 나 또한 이광웅과 그때의 그리움에다 지금 내 문학과 세상살이의 상황에 처한 심정을 담아 이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노래라는 것이 늘 부르는 이의 심정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이 노래 자체가 본원적으로 담고 있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노래를 30년 가까이 부르다 보니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인데 아마도 이 노래는 인간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가진 본연의 슬픔과 그리움을 그리고 인간 존재의 절대 자유를 갈망하는 노래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 노래는 북한노래라는데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인데 어찌 이런 노래가 있을까? 하면서 내 사고의 편협함과 무지를 탓하곤 한다. 나는 이광웅 시인이 죽은 후 첫 시집을 냈는데 그 제목이 『사과꽃 편지』다. 이광웅 시인이 주로 불렀던 또 다른 노래 「나는 알았네」의 첫 구절 ‘봄이면 사과꽃이 하얗게 피어나고’ 에서 따온 제목이다. 첫 시집에는 이광웅에 대한 시를 두 편 실었다. 하나는 위에 소개한 「지리산 10 -이광웅」 이고 다른 하나는 첫 시집 제목으로 붙인 이 시다. 선생님, 사과꽃이 피었어요./ 은은한 갯바람 따라/ 새 한마리 날아와 앉았고요./ 눈부셔 하면서도 애써/ 하늘을 올려보던 모습이 생각나네요./ 사람들은 모두 잘 있어요./ 작은 어깨들 맞대고/ 오손도손 징역살이 잘 하지요.// 어제는 볕이 하도 좋아/ 그곳에 갔어요/ 선생님이 좋아하던/ 향그러운 술 하나 들고./ 햇볕으로 종일/ 몸 씻었어요./ 선생님 흉내내어/ 노래도 나직이 불러 보았지요./ 세상이 참으로/ 새털처럼 가볍게 느껴졌어요./ 서러운 사람들/ 무거운 세상이/ 금강산녀 날개옷처럼/ 가볍고/ 또 가벼웠어요. //선생님. 올해도 사과꽃은 피었어요./ 그 향내음/ 햇살 하나 휘감아/ 눈부셔/ 눈부셔/ 하늘도 볼 수 없네요./ 선생님의 하늘/ 올려다 볼 수 없네요. (「사과꽃 편지」 전문) 그가 옥살이 후유증과 함께 위암으로 죽고 1년 후 군산교도소 근처 어디에 있던 그의 무덤을 찾아가 소주 한잔 음복하던 그때의 풍경을 담은 시다.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술자리에서 이광웅의 노래를 불러왔다. 당시는 작고한 이광웅을 생각하며 부르던 노래였건만 세월이 흐르고 흘러 생전의 그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된 언제부터는 나의 노래가 되었고 나의 슬픔이 되었다. 사람들도 술자리에서 나에게 이 노래를 청하며 ‘박두규의 노래는 그 노래야’ 하니 얼추 나의 노래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광웅 시인도 그랬을 것이다. 옥에서 나와 쓸쓸해진 세상의 술자리를 전전하며 이 노래를 부를 때는 이미 장기수들의 슬픔이 아니라 자신의 슬픔을 노래했을 것이다. 가사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긴박한 상황의 월미도에서 고향과 조국을 생각하던 인민병사의 심정이 담긴 것이다. 가사를 첨부하며 글을 맺는다. (1절) 봄이면 사과꽃이 하얗게 피어나고/ 가을엔 황금이삭 물결치는 곳/ 아아 내 고향 푸른들 한 줌의 흙이/ 목숨보다 귀중한 줄 나는 나는 알았네/ (2절) 불타는 전호 가에 노을이 비껴오면/ 가슴에 못 잊어서 그려보는 곳/ 아아 내 고향 들꽃 피는 그 언덕이/ 둘도 없는 조국인 줄 나는 나는 알았네 (3절) 살아도 그 품속에 죽어도 그 품속에/ 언제나 사무치게 불러보는 곳/ 아아 어머니라 부르는 나의 조국이/ 장군님의 그 품인 줄 나는 나는 알았네/ (북한영화 『월미도』의 삽입곡 「나는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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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8
  • 이런저런 지리산 이야기 2
    이런저런 지리산 이야기 2 ◔ 칠불암이 칠불사가 된 것은 전씨의 5공 시절 실세 중의 실세라는 쓰리 허의 작품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그 옛적 인도에서 시집 온 허황후의 일곱 왕자가 성불한 곳이 칠불암이고, 나머지 중 두 왕자가 어머니의 허씨 성을 퍼뜨렸으니 쓰리 허가 그 자손이라는 것이다. 지리산 중턱까지 관광버스가 오르내리는 길을 만들고 그 비싸다는 銅기와로 모든 지붕을 씌워 권세를 자랑했으나 오히려 그 치적으로 인해 역사 속에 두고두고 욕을 먹게 되었다. ◔ 피아골의 끝 마을은 직전마을이다. 피 직(稷)에 밭 전(田)을 쓰니 그 옛날 곡식이 귀한 시절의 이름이다. 그 피밭골이 피아골로 불려지게 되었으나 그 골짜기에서 전쟁 이후 한 트럭분의 유골이 나왔다고 하니 피아골은 피(彼)와 아(我)가 싸워 계곡이 핏빛으로 물들었던 전쟁의 상흔이 담긴 이름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이 피아골을 오르다 보면 삼홍소(三紅沼)가 나오는데 김시습이 이곳에 앉아 술 한 잔 하며 단풍이 붉고 그것을 비추는 맑은 계곡물이 붉고 제 얼굴이 붉어 삼홍이라 하였으니 이래저래 피아골은 붉은 골짜기라는 이미지를 버릴 수 없다. ◔ 여름이 끝나갈 무렵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남부능선을 내려오다 능선 끝자락의 원강재로 하산하려는데 길이 묵어 없어지는 바람에 늦은 적이 있다. 이미 어두워진 시루봉 근처에서 길이 끊겼는데 친구와 나는 지도를 보며 의견이 달랐다. 친구는 더디더라도 길을 찾아 가자는 것이었고 나는 여기서 곧바로 직선으로 길을 뚫자는 거였다. 가시덩굴이 우거진 길을 억지로 뚫어 새벽 2시가 넘어서야 힘들게 내려와 생각했다. 내 스스로 길이 되었던 고단한 하루였다고. 하지만 그것 또한 나의 오만이라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 왕실봉의 외국인 산장을 지키는 보살님에게 점심으로 비빔밥을 얻어먹은 일이 있다. 따뜻한 보리밥에 근처에서 방금 끊어온 산나물을 넣고 참기름 한 숫갈에 여러 봄꽃들의 꽃잎들을 낱낱이 따서 얹어 주었다. 그 형형색색의 꽃잎 비빔밥은 먹기엔 너무 아름다웠다. 아름다움 자체를 먹는다는 사실에 흥분했으나 나는 결코 아름다워지지 않았다. ◔ 상선암으로 해서 차일봉을 오르다 멧돼지 네 식구를 만났다. S 곡선을 돌아 갑자기 조우했는데 나도 놀랐지만 그 가족들이 더 놀랐던 것 같다. 그들이 먼저 순간적으로 등을 돌려 왔던 길로 돌아갔는데 그 찰나에 마주친 어미 멧돼지의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아마 그녀도 그럴 것이다. ◔ 지금 야간산행은 벌금이 50만 원이지만 예전에 밤으로 걷는 즐거움은 제법 컸었다. 지상의 모든 것들이 달빛에 젖어 조용히 스스로를 성찰하는 시간에 나는 홀로 깨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껏 고무되었던 철없는 발자국 소리였다. 달빛에 촉촉이 젖은 구상나무며 이슬 머금은 동자꽃, 숲의 어둠을 얼핏 스쳐가는 고뇌까지도 경이로웠던 밤, 그렁그렁한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밤, 불무장등의 작은 봉우리들과 피아골의 들리지 않는 물소리마저도 모두가 나를 향해 밀려오는 것만 같던 그 치기어린 감상의 밤이 그립다. ◔ 대설주의보가 해제되기를 기다려 산에 오르곤 했다. 티 없이 맑은 하늘,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누구도 밟지 않은 새로운 길에 발자국을 남기고 싶었다. 눈꽃을 가득 피운 나무 사이로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맨 처음 길을 열다보면 외로움도 슬픔도 세상의 고단함도 내 안의 두려움까지도 모두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까닭모를 그리움 하나가 발자국처럼 질기게 따라올 뿐이었다 -노고단 설경 / 사진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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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2
  • 불무장등不無長嶝
    ☐지리산에서 온 편지 9 불무장등不無長嶝 불무의 꽃들 지리산의 8월이 오면 오르고 싶은 곳이 불무장등 능선이다. 숲은 무성하게 우거지고 숲의 오솔길엔 여기저기 여름 꽃들이 피어있을 것이다. 나는 꽃에 큰 관심 없이 산을 올라 다녔지만 불무장등을 다니던 어느 때부터 그 이름들이 궁금해졌다. 꽃이라기보다는 그 녀석들이 내 마음의 어느 구석을 침탈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가 마음에 새겨질 때면 이름부터 궁금해지는 것이 일상의 습習이어서 나는 그들의 이름을 찾아 불러주기 시작했다. 동자꽃, 솔나리, 수국, 꿩의다리, 비비추, 원추리...... 나는 평소 아름다움은 꽃이나 어떤 풍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행위,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깊고 그윽한 어떤 느낌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산을 오르며 특히 지리산의 여름 산을 오르며 숲을 고요히 호흡해내는 작고 여린 꽃들의 순결한 숨소리를 들었던 것일까. 그 존재 자체부터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인간의 어떤 한계점에 있는 것이기도 해서 늘 막연한 슬픔으로 이어졌다. 그 무렵에 써졌던 시가 생각난다. 숲에 들어 비로소 나의 적막을 본다./ 저 가벼운 나비의 영혼은 숲의 적막을 날고/ 하얀 산수국, 그 고운 헛꽃이 내 적막 위에 핀다./ 기약한 세월도, 기다림이 다하는 날도 오기는 오는 걸까./ 이름도 없이 서 있던 층층나무, 때죽나무도 한꺼번에 슬퍼지던 날/ 그리운 얼굴 하나로 세상이 아득해지던 날/ 내 적막 위에 헛꽃 하나 피었다. (「헛꽃」전문) 불무장등의 이름 지리산 불무장등은 주능선의 삼도봉에서 화개 쪽으로 벋은 남쪽 능선인데 한자로는 不無長嶝이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그 설명도 각각이다. 불교와 관련한 설명은 ‘지리산은 문수보살의 일신인데 문수는 오로지 반야般若를 주관하며, 반야는 제불의 어머니(諸佛之母)이다.’ 라는 것에서 불모佛母가 불무不無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불무장등 봉우리가 풀무 모양으로 생겨서 풀무잔등으로 불리다가 일제 때 국토의 우리말 지명을 한자화 시키는 과정에서 불무장등不無長嶝으로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무장등 능선을 올라가면 마지막에 주능선의 삼도봉에 이르는데 이 삼도봉도 본래는 날라리봉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그 형상이 낫날처럼 생겼다고 낫날봉인데 발음하기 쉽게 날라리봉으로 불리다가 한자화 과정에서 3개 도(전남, 경남, 전북)가 만나는 곳이니 삼도봉三道峰이라고 공식화 되어 지도에 올랐다. 하찮은 이름의 역사가 이렇듯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으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를 따질 새도 없이 세월은 흐르고 흐르는 시간 중에 모든 것은 그렇게 변해간다. 우리 스스로도 늘 변하여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니니 10대의 나와 50대의 내가 어찌 같은 ‘나’란 말인가. 위벽은 5일이면 바뀌고 피부는 한 달, 뼈의 골격조차도 3개월이면 모두 바뀌어 1년이면 몸속 원자의 98%가 바뀐다고 하니 사실상 고정된 ‘나’라는 실체는 없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오래된 기억만이 남아 세월을 왜곡할 뿐, 늘 새로워지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있을 뿐이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도계를 이루는 능선 불무장등 능선은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도계를 이루는 능선이다. 능선의 길을 오르다보면 발 한번 띄면 경상도요 또 한 발자국 옮기면 전라도일 때가 많다. 지금도 그렇지만 오래 전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동서 지역감정이 극에 있을 때 이 능선을 자주 올랐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왔다 갔다 도계의 경계를 지우며 이 능선을 오르면 마음의 지역 경계가 사라지는 듯도 하여 많은 위로를 받았던 것인데 한편으론 개인과 파당의 이익을 위해 남북으로 나뉜 나라를 다시 동서로 나누는 위정자들에 대한 분노가 증폭되기도 했었다. 내 주변에도 같이 NGO 활동을 했던 이들이 현실정치의 변화를 위해서라며 정가에 입문한 이들이 많이 있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는 것 같다. 물론 개인의 진정성이야 그대로 마음 속 어딘가에 있겠지만 일단 국회의원이 되었든 지방의원이 되었든 혹은 시장이 되었든 현실정치라는 것이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사람의 신념이라는 것도 수시로 변하는 일상 삶의 상황과 조건 속에서 원형으로 보존되어 그 신념에 의해 일상을 열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물며 정치에 있어서야 더 그렇지 않을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죽음을 담보로 그 신념을 지킨 자들도 없지 않았으니 희망이라는 단어도 빛을 잃지 않고 쓰이는 것 아니겠는가. 불무의 무덤들 하지만 내가 불무장등 능선을 오르며 가장 마음에 쓰였던 것은 죽음이었다. 이 능선에는 무슨 묘들이 그렇게 많은지 오르며 수시로 만나는 것이 무덤이었다. 누군가의 삶의 종지부들이 수없이 찍혀 있는 이 무덤들을 보며 숲의 살랑이는 무수한 이파리들만큼이나 많은 생령들의 부재를 떠올리곤 했다. 누군가는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라며 사는 것이 곧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삶, 그 자체만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 안의 어딘가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또 애써 무시하려는 것도 아니지만, 늙고 병든다 해도 삶 그 자체에만 집중하면서 사는 것만이 그나마 스스로에게는 답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불무장등을 오르며 많은 여름의 꽃들과 무덤들을 보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무심하게 지나쳐가는 것이다. -천마꽃 / 사진 김인호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2-06-12
  • 이런저런 지리산 이야기 1
    이런저런 지리산 이야기 1 ◔ 그 옛날,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이 깊은 문수골에 들어왔을 것이다. 나물만 먹고 살 순 없으니 손바닥만한 논배미라도 얻기 위해 함박꽃 지고 단풍잎이 붉게 물들 때까지 축대를 쌓고 계단처럼 논을 올렸을 것이다. 초승달 같은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아슬아슬한 계절을 건넜을 것이다. ◔ 쌍계사 등 뒤로 사람들의 발길이 없는 내원골을 한참 오르다 보면 서너 채의 빈집이 있다. 처사는 수년째 마당의 감꽃을 피우며 한 소식 기다리더니 어느 겨울머리에 나섰나 사립문조차 무너져 있다. 부엌문을 열면 낡은 찬장에 아직도 가지런히 놓여있는 숟가락과 젓가락이 슬프다. 먼지 수북한 망태기며 녹슨 호미도 그렇지만 방구들에 까지 올라온 잡초들의 인정머리가 또한 그러하다. ◔ 지리산 종주등반을 하다보면 전남, 경남, 전북이 만난다는 삼도봉을 지나 ‘화개재’를 만나게 된다. ‘화개’는 저 아래 섬진강 가에 있는데 왜 이곳을 ‘화개재’라고 부르는지가 늘 궁금했었다. 하지만 오로지 두 다리만이 민초들의 교통수단이던 시절, 남원 쪽 마을의 장꾼들에게는 뱀사골을 올라 지리산 주능선을 넘어 목통골로 내려가는 길이 화개장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등짐 하나 들쳐 매고 꼭두새벽부터 뱀사골을 올라 주능선을 넘어야 화개를 가니 이 주능선의 ‘화개재’는 뱀사골에서 올라오는 남원 쪽 사람들이 불렀던 이름일 것이다. 이 재에 이르면 쉴 참에 담배 한대 말아 피고 화개장 까지 한달음에 내달았을 것이다. 걸쭉한 탁배기 한잔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장국밥이 생각났을 것이다. ◔ 산을 가다보면 가끔 ‘등산로 아님’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이것은 지정된 등산로 외에는 모두 사람이 다녀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져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다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다. 나무하러 다니고, 장 보러 다니고, 능선 너머 이웃동네를 넘나들던 길이고 삶의 일상 속에 있었던 길이다. 지금은 멧돼지 가족들이 다니고 노루가 가다말고 서서 잠깐 뒤돌아보는 길이 되었지만 아직도 다 살아있는 길이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잃어버린 길이고 스스로 차단한 길이 되었을 뿐이다. ◔ 왕시루봉에 가면 외국인 산장이 있다. 80년대 후반 즈음이었을까. 그때만 해도 칠십이 넘은 산장지기 노인 한분이 있었다. 젊은 시절 외국인 부인을 지게에 지고 이 정상까지 올라왔다는 노인. 그 산장의 옆에는 물줄기를 막아 만든 풀장이 있다. 물줄기가 얼어버린 겨울이면 도끼로 얼음을 깨고 풀장의 물을 길어 저녁밥을 지었다고 한다. 멀리 노을이 지는 섬진강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직도 왕시루봉 정상에는 제국의 그늘이 가득하고 나는 그 그늘 아래서 점심으로 가져온 주먹밥을 베어 물었다. ◔ 한국전쟁 전에는 외국인 산장이 노고단에 있었다. 풍토병 치료를 위해서 라고는 하지만 수십 채의 산장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들이 올라와 쉴 때는 구례의 아낙네들이 보따리 짐을 싸들고 올라와 장이 섰다고 한다. 어린 함태식은 노고단에 올라 비키니 차림으로 햇볕을 쬐는 서양인들을 보았다고 했다. 한반도가 통째로 신음하던 그 일제식민지 시절의 한 풍경이다. ◔ 장터목은 장이 서던 곳이었다. 지리산 전체가 삼도를 잇는 길이었던 시절, 잠시 쉬던 장꾼들이 모여 서로의 물건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지금은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산이 되어 하루를 쉬어가라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장터목은 장터목일 뿐이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다리가 굳어졌을 뿐 장터목은 지금도 장이 서고 싶다. -반야봉 일출 -반야봉 철쭉 -지리산에서 보는 섬진강 -노고단에서 본 구례 <사진 : 김인호>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2-05-10
  • 지리산에서 온 편지 8
    ☐지리산에서 온 편지 8 남부능선이 준 옐로카드 틈만 나면 지리산에 오르던 그 시절, 산에 갈 때마다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힘들게 산에 올라가봐야 도로 내려올 것인디 머하러 그렇게 산에 대니냐?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쌀이 나오는 것도 아닌디.” 나는 어머니께 무어라 할 말이 없어 그냥 “다녀올께요!” 하고 나오곤 했다. 에베레스트 최초 등반을 꿈꾸며 수없이 목숨을 걸고 산에 올랐던 조지 맬러리의 ‘왜 산에 가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간단했다. ‘거기에 산이 있으니까.(Because it is there)’였다.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답이다. 그런 그에게 ‘왜 사느냐’라고 물었다면 아마도 ‘목숨이 붙어 있으니까’라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사는 동안 모든 행위들에 이유나 의미를 부여하며 산다. 그 이유나 의미가 불분명하면 어떤 행동이든 망설이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행위가 ‘자신의 존재(에고)’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그것 때문에 자신의 감옥에 갇히게 되기도 한다. 어쩌면 죽는 날까지 자신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종신형을 사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인류사 속에 성인이라고 하는 분들이 적은 것은 그것을 말해준다. 성인들이야말로 자신의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경지에서 타자를 위해 사신 분들이 아니겠는가. ‘에고’ 없는 순수의식으로 산다는 것이 그런 것일 터이다. 조지 맬러리는 오로지 에베레스트에 오르겠다는 일념으로 살다보니 그 집중력에서 오는 어떤 순수성을 감지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거기에 산이 있으니까’라는 답변이 나왔을 것이다. 그것은 말장난이 아닌 일관된 신념의 단순성의 삶에서 나온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리산을 오르게 된 것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성을 지닌 빨치산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산에 오르고 또 오르다보니 정신과 육체 모두에 어떤 강한 에너지가 생겨났고 그로 인해 당시 처해 있던 개인적인 어려운 상황과 조건을 극복하고 삶의 의욕과 열정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때 자주 올랐던 곳이 남부능선의 지능선과 계곡들이었다. 지리산의 남부능선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의 주능선 상에서 남쪽으로 내리벋은 긴 능선이다. 세석평전에서 시작하여 하동군에 이르는 능선으로 중간에 지능선들을 거느리고 있어 대성계곡과 단천계곡, 선유동계곡, 의신계곡 같은 지리산의 큰 계곡들을 형성하고 있고 그것들을 모두 품고 있는 지리산맥의 중요한 근간능선의 하나이다. 하지만 남부능선의 주능선 산행은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중간에 샘도 별로 없어 매우 지루한 등반로이다. 그렇다 보니 등산객들이 적어 길이 묵고 덤불이 우거졌으며 거미줄이 많아 더 불편하고 힘든 길이 되었다. 하지만 남부능선의 지능선과 골짜기들은 서로 잘 어울려 갈 때마다 새롭고 깊은 감동을 주었다. 어느 여름에 故 박배엽 시인과 함께 남부능선의 지능선에 있는 단천계곡을 타고 삼신봉에 올라 남부능선의 주능선을 따라 쌍계사로 내려오는 산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단천골은 현재 비등산로라서 다닐 수 없는 곳이지만 그 당시에도 7부 정도 오르면 길이 없어져서 나침반에 의지해 삼도봉을 향해 직선 구간을 치고 올라가야만 했었다. 어차피 길이 없어지면 스스로의 생각과 의지에 의해 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는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인생이라는 길을 걷게 된다. 그 길은 탐방로처럼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예측할 수 있는 길도 아니며 그저 나의 생각과 나의 의지에 따라 가고 있는 길일뿐이다. 그 생각을 이루려는 의지가 강하게 일어나는 순간 없던 길이 비로소 열리며 그 길이야말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오로지 나만의 길인 것이다. 물론 그것은 세상의 도덕률(야마)과 개인의 도덕률(니야마)이라는 바탕 위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야말로 세상을 제 홀로 사는 제멋대로의 길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단천골을 타고 남부 주능선의 삼신봉에 올랐고 하산을 위해 남부능선을 내려오는데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명의 청년을 만났다. 그런데 그들은 물병도 없이 알칼리성 음료 한 개를 달랑 들고 오는 것이다. 배낭은 매었지만 얼핏 보아도 산행 장비가 너무 허술하여 어디 가냐고 물으니 남부능선을 따라 세석평전까지가 오늘 산행이란다. 몇 마디 더 물어보니 산행 초짜들로 내 짐작으로는 그들의 산행이 좀 무리일 것 같았다.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해서 필요할 거라며 가지고 있던 물을 모두 내주었다. 그리고 삼신봉까지 가서 다시 생각해보고 세석까지 무리라고 생각하면 청학동으로 하산하라고 알려줬다. 삼신봉을 지나면 세석까지 가는 동안 하산할 길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들과 헤어지고 쌍계사로 내려가는 생불재(성불재, 상불재 등으로도 불린다) 삼거리에 이르렀는데 박배엽 시인이 여름해가 기니 바로 쌍계사로 내려가지 말고 능선을 더 타고 원강재를 지나 혜경골로 빠지자는 제안을 해왔다. 원강재로 가는 능선은 비등산로여서 길이 살아 있을지도 궁금하고 아직 안 가본 길이니 한번 가보자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산행과 체력에는 자신감이 있던 때라 원강재 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렇게 한참을 가는데 허리까지 올라오는 무성하게 자란 길가의 풀에 묻혀 길이 잘 안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희미하던 길마저 사라져 순전히 감각으로 능선을 찾아 걷게 되었는데 마침내 해가 기울고 말았다. 렌턴을 꺼내 지도를 보니 옛길은 능선을 타고 원강재를 지나 혜경골로 내려가는 길이 나와 있긴 했으나 현재의 상황에서 그 길을 찾아 내려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캄캄한 밤, 길이 사라진 지리산의 능선 위, 비축한 물도 식량도 없이 지치고 허기진 상태였다. 우리는 상의한 끝에 등산로는 어차피 사라졌으니 능선은 그만 타고 지금 이곳에서 바로 하산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신촌마을 쯤에 나침판 지표를 맞추고 화살표 방향으로만 직진하기로 하고 능선을 벗어나 바로 하산을 시작했다. 없는 길을 가려니 무성한 가시덩굴지대를 만나 얼굴과 온몸을 긁히고 헤쳐 나가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 벼랑을 만나 우회해야 했고 물도 못 마시고 비 오듯 땀을 흘리며 탈진할 지경에 이르렀다. 배가 너무 고파 시계를 보니 10시가 넘고 있었다. 낮에 대학생들에게 물을 다 준 것이 무척 후회가 되었다. 물이 없으니 계곡을 찾아 내려가며 물소리가 들리기만을 고대했으나 쉽지 않았다. 없는 길을 헤쳐 나가자니 평소보다 3~4배 정도 더 시간이 걸리지 않았나 싶다. 도저히 더 갈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쉬어가려고 앉았는데 어디선가 쫄쫄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때 물 한 모금의 기쁨이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원효의 해골물을 알고 마신다 해도 이처럼 꿀맛이었을 것이다. 물줄기를 따라 넓은 계곡으로 나오자 등산로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온 길에 비하면 너무 편한 길이었다. 속도를 내어 신촌마을 근처로 내려오니 거의 자정이 다된 시간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산에 자주 다녀 생긴 자신감이 오만으로 넘어가는 즈음 지리산은 우리에게 자연 앞에서 겸허한 자세를 갖추라고 옐로카드를 꺼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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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편지
    2022-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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