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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몸 가르침 한 수
    몸 가르침 한 수 절에 있을 때 이야기다. 참 오래된 이야긴데 나는 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갈 곳이 없었다. 집에 있자니 부모님 보기도 민망하고 나가 돌아다니자니 어느 대학에 갔냐는 질문이 무서워 사람 만나는 것도 겁나고, 혼자 빈둥거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어서 작은 보따리 하나 들고 무작정 절로 들어갔다. 그 길로 거의 1년을 절집에서 살았는데 그해 여름의 일이었다. 그곳은 서래선림(西來禪林)이라는 비석이 입구에 서 있는 지장암(地藏庵)이라는 절이었는데 해안(海眼) 큰스님이 돌아가시고 사부대중의 발길이 끊기고 상좌들도 밖으로 나가 있어서 말 그대로 절간처럼 조용한 절이었다. 때는 한 여름이라 녹음이 짙을 대로 짙어져 숲 그늘에 누워 잔잔한 바람에 책이라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달콤한 낮잠에 빠지곤 하던 시절이었다. 그 여름 어느 날 객승이 한 분 오셨는데 작달막한 키에 별 말이 없는 얼추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스님이었다. 대개 스님들은 객으로 묵을 때면 예의상 곧잘 예불도 드리곤 하는데, 그 스님은 아침 예불이건 저녁 예불이건 한 번도 불당에 오르는 일이 없고, 도통 방에만 틀어박혀 나올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방에서 공부를 하거나 참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거의 종일토록 잠을 자거나 방에서 빈둥거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부턴가 그 스님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한 낮에도 쉬지 않고 해가 질 때까지 죽어라고 일만 하였다. 특별히 할 일이 없는데도, 이를테면 아랫마당에서 법당까지 놓여 있는 돌계단을 괜히 파헤쳐 놓고 다시 하나하나 계단을 맞추어 쌓는 그런 일이었다. 내가 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멀쩡한 돌계단을 부수고 쌓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더우니 보통 이른 아침이나 저녁나절에 강한 햇살이 죽었을 때 일을 하는 법인데 이 스님은 태양이 이글거리기 시작하는 10시쯤에야 일을 시작하여 밖에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그런 뙤약볕에서 일을 하다가 해가 지는 무렵이면 일을 끝냈다. 정말 온몸이 땀에 젖어 금방 물에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젖은 채 하루 종일 일을 하였다.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났으나 스님은 매일매일 죽어라고 일만 했다. 그런 스님에게 나는 말 붙이기도 왠지 꺼려했는데 하도 궁금해서 언젠가 ‘스님, 왜 스님은 예불은 안 모시고 일만 한답니까?’ 하고 물었더니 스님은 별다른 표정도 없이 ‘나는 예불 드리는 거 몰라.’ 라며 마당으로 가서 또 괜한 돌계단을 허무는 것이었다. 진짜로 염불을 못하는 것인지 궁금했고, 염불도 못하면서 어떻게 스님이 되었는지도 궁금했다. 아니 무엇보다도 왜 그렇게 가장 더운 시간에 미친 듯이 일만 하는 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 스님은 나의 이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고 언젠가 말도 없이 훌쩍 지장암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30년이 지난 지금, 가끔 그 스님이 생각난다. 아니 그는 3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나를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일에 말만 앞세우고 말로만 해결하려 들며 몸은 까딱도 않는 나에게 말이 아닌 ‘몸’을 가르쳐준 스승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보다는 ‘몸의 행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강변하듯 그의 여름날 노동이 그의 수행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수행은 말보다도 공부보다도, 온몸의 행위로 진실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 위한 것은 아니었나 싶다. 입만 벙긋하면 거짓말이 튀어나오는 거짓 덩어리의 이 몸뚱어리, 살아온 세월만큼 두꺼워진 위선의 몸집, 거짓으로 가득 찬 비만의 몸뚱어리에게 ‘진실’이 무엇인가를 이처럼 명쾌하게 가르쳐주는 스승은 아직 없었다. 사실 요즘 현대인들은 가급적이면 모든 일을 ‘앉아서’ 처리하려고 한다. ‘몸으로 뛰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현대 과학기술문명과 컴퓨터 문화의 일반화로 사람들의 생활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져서 몸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치장’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사는 것 같다. 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상품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몸을 아름답게 가꾸려고 하는 것, 그 자체는 이해할 수는 있으나 그것의 궁극적인 지향은 결국 몸의 상품성을 높이는 것으로 귀착되는듯하여 씁쓸하다. 요즘 세태를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사실 인류의 역사가 자본주의의 역사로 넘어 오면서 전 지구적 시장경제를 통해 지상의 모든 것은 이미 상품이 되어 버렸으니 ‘몸’인들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즘 부쩍 더 30년 전의 그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나는 스님이 자주 내 앞에 나타나 어른거린다. (박두규. 시인) -노루귀 /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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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8
  •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학의 길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학의 길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 박 두 규 (시인) 1 코로나 국면을 맞고 보니 그동안 꾸준히 거론되어 오던 기후변화에 따른 전 지구적 위기라는 것이 코앞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문학은 무엇인가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우리는 문학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논의를 해왔지만 지금의 현실상황을 보면 ‘지구 위기, 인류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문학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학도 과학이나 기술처럼 현실에서 우선적으로 ‘지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삶 문학에 일정 부분 복무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도 문학은 문학대로 지금껏 확장해온 영역이 있고 인류사 속에서 다양하게 그 역할을 해왔으며 또 어떤 특별한 상황 속에서는 그 상황에 맞게 대응해왔기 때문에 지금처럼 그렇게 하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이 상상력의 문학이고 영적 문학이라는 점과 ‘지구의 위기, 인류의 위기’의 현실에 대한 복무를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100년의 지구, 100년의 인류를 염두에 두며 글을 통해 더 세밀하게 그려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의 과학과 기술보다 100년의 현실을 앞서 이야기하고 노래하며 올바른 방향의 길을 찾는 더듬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 요즘 쏟아져 나오는 학자들의 글들을 읽어 보면 기후 환경으로 인한 지구의 위기 상황은 현실의 감도보다 훨씬 심각하다. 지금 우리가 해마다 역대 기록을 갱신하며 겪는 자연재해는 단순한 재해가 아니라 대량학살의 위기이며 재앙의 시작이라고 봐야 옳다는 것이다. 인류가 자본주의 문명의 현행 기조를 고수할 경우 2100년에는 탄소배출량으로 인해 지구의 기온이 약 4도 이상 상승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북극의 빙상은 이미 붕괴된 지 오래고 알프스의 만년설은 70% 이상 녹으며 해수면은 최대 2.4미터 상승할 수 있다고 한다. 인구 천만의 자카르타 같은 도시가 물에 잠기며 세계의 주요도시는 거의 2/3가 해안에 위치해 있으니 그에 따른 발전소, 항구, 농경지 등 주요시설도 함께 위험해질 것이다. 그리고 적도 지방의 주요 도시들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한다고 한다. 이미 2018년 폭염 시에 로스엔젤레스 42도, 파키스탄 50도, 알제리 51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물 부족과 폭염으로 북위도 지역마저도 해마다 수천 명이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가 끝날 무렵이면 코로나와 같은 새로운 질병들, 상상을 초월하는 산불과 홍수의 증가, 수천만 명에 이르는 기후 난민, 경제 대공황과 지역 간의 기후분쟁, 농산물 생산이 크게 줄면서 일어나는 자원전쟁 등 한 해 기준 100조 달러의 세계 피해규모가 예상된다니 앞으로 80년 안에 변화될 지구의 모습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지금의 자본주의적 개발과 소비 패턴에서 조금도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진행되었을 경우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코로나19가 해결된다 해도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 예전의 일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지구와 인류는 이미 변화의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새로운 문명이 일어나는 시점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기존의 자본주의를 토대로 이루어낸 과학기술문명, 물질문명의 틀에서 벗어나 이전의 의식에서 한 단계 점핑된 도덕적 과학기술과 새로운 정신문명으로의 판짜기 변화가 절실해진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현재 소비와 개발성장의 자본문명에서 전환하여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 갈 것인가를 이야기해야 된다. 포스트 코로나를 맞아 변화되어야 할 의, 식, 주, 의료, 교육 그리고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까지 기존의 질서와 그 틀을 어떻게 바꿔가야 할 것인지를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문학은 이 현실 변화의 중심에서 어떤 마음, 어떤 영혼을 가진 인간이어야 하는 것을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3 지금껏 지구와 인류의 위기를 초래해온 자본문명을 벗어나 새로운 문명을 꿈꾼다면 먼저 기존의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세계관 등 일상 속의 대중들에게도 정신적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생각이 바뀌어야 그 삶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정제 없이 그대로 반영된 이데올로기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그렇게 이익을 극대화하며 개발과 성장의 경제논리로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 자본주의다. 자본은 배고픔과 위험한 환경 조건에서 풍요로움과 안전함과 편리함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 도를 넘어 인간의 끝없는 탐욕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렇게 인류는 풍요와 편리를 거느린 현실 자본주의를 앞세워 공존공생을 위한 사회적 도덕과 윤리의 경계를 깨고 탐욕과 욕망을 당연하고 정당한 인간 정서로 편입시켰다. 단순하게 이야기 했지만 사실 이런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자본주의와 잘 어울려 끝없이 달려온 결과 현재의 지구와 인류의 위기를 맞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개인의 인간도 그 탐욕이 지나치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반성과 성찰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 인류는 21세기가 끝나는 지점부터는 지금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혹독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사피엔스의 종말을 향해 추락해 갈 것이다. 그래서 문학예술은 지금의 시점에서 좀 더 집중적으로 21세기 이후의 현실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한 새로운 문명, 새로운 문학예술에 복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문명에 대응하는 문학을 생각하려면 자본주의의 속성인 탐욕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철학, 새로운 문화를 궁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어쩌면 삶의 본질과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총체적 근원으로부터 오는 것이어서 그것은 현실 자본주의를 벗어나 근본 진리의 삶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본래 모든 생명들은 함께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공존공생의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과 그것을 위해 인간은 가장 경계해야 할 본성인 ‘탐욕’을 꾸준히 정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4 나는 이것을 문학이라는 영역에서 생각한다면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는 ‘단순한 삶’과 ‘소박한 삶’을 하나로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인데 ‘단순한 삶’의 문학은 개인 스스로를 전체의 한 부분이면서, 그렇기 때문에 전체라는, 그래서 전체를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라는, 이미 붓다나 예수 등 많은 현자들이 발견했던 동체대비, 궁극과의 합일 등 진리의 삶과 연계되어 있는 것이며 이를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문학을 말한다. 이는 ‘단순성’이라는 진리의 영역을 문학으로 가져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실현할 수 있는 ‘단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삶은 당장 그렇게 살려는 스스로의 결단과 실천만 있으면 되는 ‘단순성’에서 시작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진리에 의해 사는 삶’은 어떤 거창한 것은 아니고 현재의 실상을 바로보고 그것에 어긋남 없이 사는 것, 다시 말하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의 실상은 모두가 있는 그대로 어울려(연기적 관계를 가지고) 전체가 하나의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있는 그대로(본질 그대로) 어울려 순환하고 진화하는 것이 바로 ‘단순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변곡점에서 문학이 주시해야 할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소박한 삶’은 이런 ‘단순한 삶’을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 사실은 방법이면서 그 본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를 진화시켰던 인간의 탐욕은 끝없는 집착을 가져와 현재 지구의 기후재앙과 함께 모든 문제의 화근이 되었고 이 탐욕과 집착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소박한 삶’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본의 끝없는 성장 시나리오는 이제 그 한계에 왔다. 대체 에너지 등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과학기술의 노력과 성과가 있다하더라도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충족시킬 수는 없다. 결국은 소박한 삶으로 가지 않으면 해결 될 수 없는 것이다. ‘소박한 삶’은 스스로의 탐욕을 다스리는 삶이고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을 조화와 균형으로 이끄는 해답이라고 본다. 이‘소박한 삶’을 통해 모든 생명과 지구가 하나의 완결체로 존재할 수 있는 공존, 공생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하고 새로운 문명의 길로 가는 길목에 이러한 물질 중심의 삶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 문학적 화두를 통해 개인의 이기(利己)를 극복하고 무아(無我)와 탈에고(脫ego)의 수준까지 의식을 확장하여 탐욕을 순치(順治)하는데 기여해야 하는 것이 현재의 문학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코로나19와 같은 새로운 질병들과 지구의 기후재앙을 막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첫눈이 내린 노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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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16

실시간 지리산 편지 기사

  • 지리산 빨치산 태동의 배경과 몰락
    지리산 빨치산 태동의 배경과 몰락 지리산 파르티잔 이야기는 한반도 해방 국면의 정치적 상황과 민족사적 흐름, 그리고 국민적 정서를 정확히 인식하는 배경에서 다뤄져야 한다. 당시의 모든 항쟁적 사건들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진행된 것들이다. 해방 직전 일본의 패망이 짙어지던 1944년에 미국은 당시 막 시작되던 세계적 냉전체제 국면에서 한반도를 미국의 전초 기지화 하려는 계획을 진행하였다. 그래서 여론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 해방이 되면 어떤 체제의 국가가 건설되기를 희망하느냐는 질문에 자유민주주의국가 14%, 사회주의 국가 70%, 공산주의 국가 7%, 기타 9% 였다. 이에 미국은 해방 후 승전국의 입장에서 38도 선 남쪽으로 들어와 미군정을 시작했다. 북쪽은 소련이 직접 국가운영을 하지 않고 조력자의 입장에 있었던 반면 미국은 여론을 토대로 사회주의 국가 건립을 우려하여 군정으로 직접 남한을 통솔 운영했다. 그러면서 토지개혁과 일제 잔재 청산, 공평한 사회를 꿈꾸던 민족의 흐름을 역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시 조선공산당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46년에 대구철도노조가 깃발을 들고 대구 10월 항쟁이 일어난다. 10월 항쟁은 미군정 반대가 가장 큰 이유였다. 이후 10월 항쟁 수배자들은 산으로 들어가 야산대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파르티잔의 시작이라고 본다. 이후 미군정이 끝날 무렵 1948년 5.10 단선 단정에 반대하는 2.7 구국투쟁이 일어난다. 전국 총파업으로 진행되며 이때도 수배자들이 산으로 들어가며 야산대가 더욱 강화된다. 지역사령부를 두며 체계화 된다. 그리고 이어서 제주 4.3항쟁과 10.19 여순 항쟁이 일어난다. -1948년 10월 여순항쟁 이후 김지회, 홍순석, 지창수 등이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 문수골로 들어옴. 48년 11월 이현상 지리산으로 투입 -1949년 야산대를 인민유격대로 재편성하여 토벌대와 전투. -1950년 한국전쟁으로 8월에 인민유격대는 북한 정규군과 합세하여 작전을 펼침 -1951년 남부군 활동 전성기로 열차습격, 은행습격 등, 하지만 12월 들어 본격적인 토벌로 -1952년 토끼몰이식으로 대성골로 유인하여 박격포, 공군기 투입으로 빨치산 궤멸. 사살 300명, 포로 250명, 혹은 800여명이 죽었다고도 하는 등, 자료의 부정확 -1953년 7월 휴전협정 시 지리산 잔여 빨치산 언급 없음. 이현상 9월 사망 (이현상은 북으로 갈 수도 있었으나 스스로 지리산에 남음. 북에서 김일성의 권력투쟁으로 남노당 출신의 박헌영, 이승엽 등이 모두 처형 당함. 박현영은 여순때 병력노출 혐의 미군스파이로 몰려 죽음) -1954년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 전남도당 박영발 사망으로 토벌 종료. 5월 정식 토벌대는 해산하고 지역에서 토벌 계속 -1955년 지리산 입산통제 해제 -1956년 43명 빨치산 생존 떠돌이 -1963년 11월 정순덕 총상 입고 체포 -지리산의 여명 / 사진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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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13
  • 지리산에서 온 편지 6
    ☐지리산에서 온 편지 6 선한 바람에 일렁이는 연두와 초록의 물결들 - 왕실봉 칠순 노인네 이야기 모처럼 지리산에 오르니 어린 나무 건 고목이건 모든 나무들이 새잎을 피워 올리고 있다. 온통 연둣빛 초록물결로 산이 일렁인다. 바람이 한번 훑고 지나가면 초록의 파도가 한차례 밀려오는 듯한 서늘함과 그 상큼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초록빛은 마음을 가장 편안하게 해주는 색깔이라고 하는데 초여름의 산에 오르면 이 초록의 신록에 묻혀 몸 안에 쌓여 있는 스트레스와 강박과 두려움 등 세속의 삶이 만든 정신적 생채기들이 모두 치유될 것만 같다. 사람들은 보통 몸의 건강을 위해 산을 많이 오른다. 그리고 몸이 건강하고 편해야 마음도 편안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요즘은 그 생각에도 많은 변화가 오고 있다. 몸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으며 오히려 마음을 잘 다스려 불치의 몸을 극복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선진의학에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정신적인 영역을 치료에 활용하고 있으며 인간의 영성까지 의학은 확대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예전에는 별 생각 없이 산행을 했으나 요즘은 산을 오르는 일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합일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특히나 요즘과 같은 신록이 우거지기 시작하는 계절이면 아무리 바빠도 산행을 한다. 숲의 모든 생명들이 가장 활발하게 생명력을 발현하는 시기여서 그런지 신록에 묻힌 나도 그 기운에 합류하여 내면의 에너지가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살아있음’의 순수한 생명력을 깨인 의식을 통해 접할 수 있는 명상의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오랜만에 그렇게 왕시루봉에 올랐다. 지리산 왕시루봉 정상 바로 아래에 쯤에 가보면 외국인 선교사들의 산장이 있다. 말이 산장이지 지금은 오래되어 거의 폐허 상태이며 남장로교회 쪽 사람들이 주도하여 문화재 등록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외국인 선교사 산장의 문화재 등록은 사실 많은 생태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어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왕시루봉은 정상이 해발 1240m이니 이 산장들도 해발 1000m는 넘나들 것이다. 원래는 노고단에 있었는데(선교사 산장 터는 노고단 대피소 바로 옆자리에 있었으며 아직 그 흔적이 남아있다.) 한국전쟁 때 폭파되어 비슷한 고도의 이곳 왕시루봉 자락으로 옮겨와 다시 여러 채의 방갈로를 짓고 삼각형의 조그만 예배당도 만들고 지형을 다듬어 작은 둑을 쌓고 물줄기를 막아 간이 풀장까지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풀장이 연못처럼 남아있다.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와 산장을 지은 것은 외국인들이 무더운 여름에 풍토병을 피하기 위해 에어컨 바람 정도의 적정 온도의 높이에 피서지로 지었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지리산 호랑이라는 함태식 선생께 들은 이야기인데 구례에 살던 자신이 10대 초반 때 여름에 노고단 외국인 산장에 가면(당시에는 노고단을 동네 뒷산 오르듯 쉽게 올라 다녔다 한다) 놀랄만한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우선 구례 사람들이 노고단 산장의 외국인 선교사 가족들에게 팔려고 나물이며 과일 등 다양한 먹을거리와 잡화를 이고 지고 가져와 작은 장이 섰다고 한다. 그리고 이 높은 노고단 산중에 발가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비키니 차림의 금발머리 여자들이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니 그 일제 강점기 시절에 어린 소년의 눈에는 별천지 세상에 온 것만큼이나 놀랐을 것이다. 80년대 후반 즈음이었을까. 내가 왕시루봉의 외국인 선교사 산장에 갔을 때 칠십이 넘은 산장지기 노인 한분이 계셨다. 하얀 수염이 덥수룩한 70대 중후반의 노인이었는데 작은 키에 산에서 다져진 다부진 몸을 가진 노인이었다. 산 아래는 고로쇠 물을 받아내는 2월의 봄이 시작되었건만 이곳은 아직도 한 겨울이었다. 식수로 쓰는 작은 물줄기가 꽁꽁 얼어 아직 다 풀리지 않아서 노인은 도끼로 풀장의 얼음을 깨어 물을 길어와 밥을 짓는다고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산장지기 노인이지만 이런저런 말을 붙여보니 산전수전 다 겪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신 분이었다. 이 노인은 왕실봉 아랫동네인 토지면에 사시는 분이었는데 젊은 시절 토지에서 왕실봉 산장까지 지게에 외국인 선교사 부인들을 지고 올라왔다고 했다. 70년대만 해도 서울역에서 짐을 나르며 생계를 유지하는 지게꾼이나 리어카꾼들이 있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사람을 지게에 올려 산을 올랐다는 말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지게에 널빤지를 올리고 방석을 깔아 편안히 앉도록 해서 종종 선교사 부인들을 산장까지 데려다 주었다고 했다. 돈벌이가 귀한 시절이라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마다하지 않고 그 일을 했다고 하는데 맨몸으로 오르기에도 버거운 해발 1240m의 왕실봉을 올랐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상당히 비만한 선교사 부인을 지게에 싣고 올라가는데 너무 무거워 중간에 쉬는 일이 잦았다. 점심 먹고 한참 후에 오르기 시작했으니 산장에 갔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올 일이 걱정이었다. 어디쯤에서 쉬어 가게 되었는데 부인을 내려놓고 나무 그늘에 앉아 담배 한참을 하면서 혼자 푸념처럼 ‘아이고 뭘 처먹었는지 디지게 무겁네. 서양 년들은 다 저런가?’ 라고 내뱉었단다. 담배를 다 피우자 저만치에 앉아서 쉬던 선교사 부인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지게에 올랐고 다른 때보다 늦게 산장에 도착하여 내려가다가 지는 해를 볼 것 같았다. 그런데 지게 값을 달라고 하자 같이 올라온 그 선교사 부인이 한국말로 ‘저 사람이 올라오면서 나한테 욕 했어요. 돈 주지 말아요.’ 그러지 않은가. 우선 한국말을 할 줄 알았다는 것에 깜짝 놀랐고 돈을 안 준다는 말에 사색이 되었다. 어디에 호소할 수도 없는 힘없는 백성이 되어 노인은 터덜터덜 어두워진 산을 내려왔다고 했다. 그는 멀리 노을이 지는 아름답고 슬픈 섬진강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직도 왕시루봉 정상에는 낡은 방갈로들이 산재해 제국의 그늘이 가득하다. 나는 그 그늘 아래서 점심으로 가져온 주먹밥을 베어 물었다. 간단한 점심을 끝내고 지리산의 능선들과 계곡들을 바라보며 그 일을 떠올리니 새삼스레 아메리카라는 나라가 생각 속에 자리 잡는다. 인류 역사 속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이라는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종주국 아메리카, 한때는 우리도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환상 속에 살았었지. 과연 인간이라는 종이 만들어낸 삶의 정답이 그곳에 있는 걸까? 나이 60을 넘어 알만큼 알고 살만큼 살아온 인생들에게 물어본다면 아마도 ‘천만에’라고 입을 모을 것이다. 돈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에 매달려 돈보다 더 훌륭한 가치, 더 아름다운 가치를 모르고 인생을 다 소진한다면 그것 또한 우물 안의 개구리로 살다 가는 것하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지는 해를 바라보며 산을 내려왔다. 저무는 빛을 받아 아스라이 보이는 섬진강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선한 바람에 연두 초록의 물결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삶의 정답은 아마도 이 풍경의 어디쯤에 숨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끝> -왕시루봉에서 바라본 섬진강 / 사진 김인호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2-04-13
  • 『지리산 운동』에 대한 작은 생각
    『지리산 운동』에 대한 작은 생각 ‘지리산 운동’이라는 용어는 아직은 좀 낯설지만 지리산 권에 있는 많은 단체나 소모임, 그리고 개인의 다양한 영역의 사회 변혁적 활동과 삶들을 하나의 큰 지향으로 엮어낼 수 있는 ‘지리산 공동체’적인 용어로 자리 잡았으면 하는 바램에서 몇 마디 거들까 한다. 21세기에 들어서기 전까지 우리 사회 변혁운동은 크게는 군부독재라는 반정부 투쟁 속에서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을 통합한 전국 단위의 조직력을 가지고 명확한 하나의 전선에 복무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현실사회주의가 실패하면서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되고 동구권이 몰락하는 국면 속에서 변혁운동의 중심주체들이 흔들리면서 운동의 내용과 형식에도 많은 변화가 왔다. 이전(반정부 투쟁 당시)의 운동은 당장 눈앞의 위중한 현실(열사들과 동지들의 죽음 등) 속에서 오로지 현실을 타개해야 하는 절박함으로 스스로의 내면을 성찰할 여유도 없이 비민주, 반인권 반통일을 대상으로 한 투쟁의 현실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전국적 상황을 보면 집단적, 지역적, 인적 구성에 따라 전선이 형성되고 그 내용이 매우 다양해지면서 운동의 폭이 좁아지고 조직 이기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지리산권의 많은 단체와 소모임 또는 개인적 활동까지 포함해서 ‘지리산 운동’이라고 명명해본다면 그것은 지금까지의 여타운동과 크게 두 가지의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나는 넓게 보면 ‘대안적 삶 운동’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리산 권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 단체나 모임의 구성원들은 지역 주민들도 있지만 귀농, 귀촌인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자본주의 문화에 염증을 느끼고 대안적인 새로운 삶을 찾아 도시에서 지리산 자락으로 삶터를 옮겨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이 관심을 갖는 운동영역은 환경, 생태, 생명, 평화, 공동체, 등의 문제의식을 바탕에 둔 대안문화, 대안문명 찾기라는 운동적 성격을 갖는다. 이것은 크게 보아 인간 소외나 인간성 상실이라는 자본 중심적 삶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지리산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다양한 사업과 활동의 바탕에 자리 잡고 있는 문제의식의 공통분모라고 할 것이다. 근대 500년은 모든 삶이 자본으로 집중되는 과정으로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전, 그리고 자본주의의 확장과 함께 진행되었다. 근대의 과정 속에서 추구해온 물질의 풍요와 생활의 편리 뒤에 숨어 있던 인간의 탐욕이 근대화라는 명제 속에서 자연의 순환 질서를 깨기 시작했고 그런 과정 속에서 자본주의는 인간의 ‘탐욕’이라는 것을 구체적 일상 속에서 일정부분 정당화시켜 주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인간의 심성이 피폐되고 사회적 가치관과 개인 삶의 목표는 선과 진실로부터 멀어졌으며 현대인들의 삶의 중심에는 물질이 자리 잡게 되고 사회생활은 보다 많은 물질을 얻기 위한 시스템으로 구조화되어 갔다. 이렇게 물질만능주의 사고가 사회에 만연되면서 생명경시와 함께 개인의 평화 또한 심하게 위협받게 되었다. ‘지리산 운동’은 이러한 사회적 문제의식 속에서 태동하였기 때문에 자본가치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인본가치 중심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근본 운동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새로운 삶의 문화, 문명을 꿈꾸는 대안 운동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지리산 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사회의 구조를 바르게 변혁하려면 ‘인간의 본래 심성을 되찾는 운동’과 함께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직이나 단체 모임들이 이 부분을 직접적으로 표출하고 있지는 않지만 본래 심성을 되찾는 노력을 통해 개인의식과 사회의식의 확장을 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사회의 변혁은 어렵다는 생각들이 많은 사업 속에 녹아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간디가 식민지 상황에서 벌인 사탸그라하(진리파지眞理把持) 운동이 그러했다. 간디는 자신이 바라는 진정한 해방은 영국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보다도 자신으로부터 해방(절대자유)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한 사회의 변혁은 식민지에서 벗어나고 제도가 바뀌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회와 사람들의 의식이 함께 확장되어야 진정한 변혁이라고 했다. 그리고 간디는 종교를 통해 확장된 개인과 사회의 의식을 토대로 비폭력 투쟁이라는 전대미문의 운동방식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이는 성찰과 수행을 통해 개인의 의식을 확장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의 단군시절에도 그러했다. 그 시절의 사회적 삶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성통공완性通功完이라는 말이 있다. 본성을 꿰뚫어 공덕을 완성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본래 심성을 되찾는 수행을 통해 개인의 의식을 확장시키고 사회적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독이 가능하다. 성통공완이나 샤타그라하 모두가 개인의 자기완성과 사회적 실천을 하나로 인식하고 진행시킨 높은 의식의 사회적 삶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완성의 노력과 사회적 실천이 병행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사회적 제도를 바르게 고치고 바르게 운용하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이 그만한 역량과 수준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지리산 운동’은 지금껏 우리 변혁운동사에서 특별히 거론된 적이 없는 ‘개인의 자기완성’이라는 측면을 사회적 실천운동과 동등한 무게로 병행시키는 운동이어야 하고 그래야만 ‘지리산 운동’다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개인의 의식을 확장시키는 것과 사회적 실천이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기존의 우리 사회운동 방식보다는 한 단계 진화된 운동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본의 문제를 자본의 관점과 방식으로 풀지 않고 모든 생명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며 순환할 때 진정한 평화가 있다는 자연 중심의 사유와 철학을 바탕에 두고 풀려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 현실에서 민주적 제도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리산 자체가 모든 생명의 집합체인 것처럼 그래야만 개인과 전체의식의 확장을 기대할 수 있고 그러한 토대에서의 사회적 실천이 올바른 사회변혁을 가져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박 두 규 시인)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2-03-09
  • 지리산에서 온 편지 5
    ☐지리산에서 온 편지 5 내원골 박처사 내원골 박처사를 만난 것은 지리산을 열심히 타던 시절, 아마 30대 후반이거나 40대 초반 쯤이 아니었나 싶다. 계곡의 얼음이 녹아내리고 산 구석지의 지저분한 잔설들이 바닥을 드러내는 봄의 초입이었을 것이다. 어느 주말, 지도를 보며 코스를 잡았는데 쌍계사 뒤쪽으로 들어가 내원골을 타다가 불일폭포로 넘어가는 코스였다. 쌍계사 조금 못 미쳐 오른쪽으로 계곡을 따라 오르면 내원골로 들어서게 된다. 이 내원골을 계속 타고 오르면 내원재를 만나게 되고 내원재에서 왼쪽으로 능선을 타고 오르면 생불재 삼거리를 만난다. 세석평전에서 내려오는 남부능선의 끝자락에 있는 삼거리인데 세석에서 삼신봉을 거쳐 내려오는 길과 불일폭포에서 오는 길과 청학동에서 오는 길이 만나서 생불재 삼거리다. 하지만 사실은 사거리였다. 이 내원재에서 생불재 삼거리에 이르는 능선길이 있기 때문에 사거리가 맞다. 그런데 생불재에서 내원재를 거쳐 원강재, 혜경골로 내려가는 길이 묵어버린 것은 사람들이 모두 유명한 쌍계사나 불일폭포를 찾아오기 때문이고 토착 주민들이 늙고 수가 줄어 내원골은 들어갈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나는 내원재까지 올라갈 생각은 없었고 내원골를 타다가 왼쪽의 능선을 가로질러 바로 불일폭포의 옆 사면길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내원골로 들어서 한참을 걸었는데 얼마나 되었을까. 갑자기 계곡 왼편 위에 자리 잡은 허름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불일폭포로 가기 위해 계곡을 벗어나 지능선으로 길을 갈아타야 하는 지점이었다. 가까이 가니 낡고 초라한 집이었지만 두 채가 더 있었다. 집을 들여다보니 잡초가 무성한 마당가에 늙은 감나무 하나가 지금은 없는 집주인의 한 때를 상상하게 해준다. 부엌문을 열어보니 먼지가 수북한 낡은 찬장에 아직도 가지런히 놓여있는 젓가락들이 보였다. 거미줄과 함께 벽에 그대로 걸려있는 망태기며 녹슨 호미도 그렇지만 방구들에 까지 올라온 잡초들을 보니 사람이 백년을 산다 해도 저렇듯 흐르는 세월의 한 과정일 뿐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한 집을 보니 초라한 양철 지붕집이지만 집 주변이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어서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담 너머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툇마루에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고 턱수염이 길게 자란 웬 도인이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봄볕을 가득 받은 툇마루에 고적한 산중의 고요 그 자체가 되어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 기운이 도저하여 말 한마디 붙이려는 생각도 못하고 문밖에서 망설였다. 그러다가 그래도 인사라도 나누고 갈 요량으로 사립문 옆에 주저앉아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의 명상은 꽤 길었다. 깜박 잠을 잤어도 잤을만한 시간이 지나고나니 명상을 끝낸 듯 했다. 내가 조심스럽게 기척을 내고 인사를 하니 들어오라 한다. 가까이서 보니 간간히 섞인 흰머리에 수염은 길었지만 노인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마른 몸매에 기름기 없는 건조한 얼굴이었지만 눈빛이 맑고 강한 느낌의 이목구비가 반듯한 중년의 사내였다. 먼저 인사를 하니 그는 긴 머리를 뒤로 묶으며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느냐고 묻는다. 불일폭포를 가는 중이라고 했더니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불일폭포는 쌍계사 쪽으로 가면 되는데 왜 이 위험한 길을 타려는 거냐고 물어왔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질문과 너무 흡사했다. 나는 그가 명상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무슨 사연이 있어 살기 좋은 세상을 두고 왜 이런 궁벽한 곳까지 흘러들었는지를 묻고 싶었던 것이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을수록 오히려 그에 대한 의문이 점점 더 많아졌고 흥미로웠다. 그가 바로 박처사라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다시 한 번 찾아올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불일폭포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우선 경사가 심했고 그 경사면의 길이 매우 좁고 미끄러워 잘못하면 굴러 떨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경관은 참으로 비경이어서 최치원이 은거했다는 설화가 괜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날 항상 정면 아래에서 올려다보기만 했던 불일폭포를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 길은 바로 능선에서 폭포의 위쪽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 뒤로 나는 배낭에 쌀 한 말이나 라면 한 박스 등을 넣어가지고 박처사를 찾아가곤 했다. 그러다 조금 친해지는 즈음에 나는 박처사를 구례로 불러 식사 대접을 하면서 술을 한 차례 먹게 되었는데 말수가 적던 그의 말이 봇물처럼 터지고 말았다. 평소 하던 대화는 주로 그가 수련하는 도道에 대한 것이나 약초에 대한 것, 지리산 구석구석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 그날은 자신이 살아온 과거 이야기였다. 우리는 오랜 친구나 되듯이 서로 깊어져 많은 술을 마셨다. 그 후 바쁜 세속의 날들이 지나가고 다시 겨울이 오려는 즈음 내원골의 그를 찾아갔는데 집이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원래부터 박처사의 물건이라고는 옷가지 몇 벌이 전부여서 절방처럼 소박한 살림이었는데 그것마저 깔끔하게 치워진 빈집이었다. 나는 박처사가 떠난 것을 직감하고 편지라도 한 장 남겨놓지 않았나 찾아봤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왜 말도 없이 떠났을까? 아니, 왜? 왜 떠났을까. 물론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이제 짐작할 수는 있다. 그는 아마도 나를 만나는 1년 동안 즐겁기도 했겠지만 자신의 가던 길을 멈추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잠시 멈추었던 그 길을 갔던 것뿐이다. 진속불이眞俗不二라고는 하지만 그는 아직 속俗에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진眞에 이른 것도 아니었을 것이니 나하고 어울리는 것이 스스로에게는 무척 큰 갈등이었을 것이다. 나는 겨울 초입에 그렇게 그를 잃고 허전한 마음으로 겨울을 맞았다. 그리고 그 겨울 어느 날 내원골을 찾았다. 골짜기의 침묵만큼이나 눈이 쌓여 있었다. 사람을 생각하는 일이 그리 겨운지 대숲에 쌓인 눈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후두둑 쏟아졌다. 볕 좋은 툇마루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깜박 졸았는데 잠 속의 깊은 골짜기에도 세속의 눈은 내리고 처사는 먼 길을 돌아와 토방에서 홀로 눈을 털고 있었다. 그 뒤에도 몇 번인가 내원골을 찾았지만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나도 언젠가부터 내원골에는 들지 않았고 그 후 지금껏 박처사의 소식조차 접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마도 그의 성품과 의지를 짐작하건데 이미 성통性通을 하고 진속불이眞俗不二의 경지에 이르러 세속의 저자거리를 활보하고 있을 것이다. <끝>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2-03-09
  • 지리산 빨치산의 시작과 끝 연대
    지리산 빨치산의 시작과 끝 지리산 파르티잔 이야기는 한반도 해방 국면의 정치적 상황과 민족사적 흐름, 그리고 국민적 정서를 정확히 인식하는 배경에서 다뤄져야 한다. 당시의 모든 항쟁적 사건들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진행된 것들이다. 해방 직전 일본의 패망이 짙어지던 1944년에 미국은 당시 막 시작되던 세계적 냉전체제 국면에서 한반도를 미국의 전초 기지화 하려는 계획을 진행하였다. 그래서 여론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 해방이 되면 어떤 체제의 국가가 건설되기를 희망하느냐는 질문에 자유민주주의국가 14%, 사회주의 국가 70%, 공산주의 국가 7%, 기타 9% 였다. 이에 미국은 해방 후 승전국의 입장에서 38도 선 남쪽으로 들어와 미군정을 시작했다. 북쪽은 소련이 직접 국가운영을 하지 않고 조력자의 입장에 있었던 반면 미국은 여론을 토대로 사회주의 국가 건립을 우려하여 군정으로 직접 남한을 통솔 운영했다. 그러면서 토지개혁과 일제 잔재 청산, 공평한 사회를 꿈꾸던 민족의 흐름을 역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시 조선공산당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46년에 대구철도노조가 깃발을 들고 대구 10월 항쟁이 일어난다. 10월 항쟁은 미군정 반대가 가장 큰 이유였다. 이후 10월 항쟁 수배자들은 산으로 들어가 야산대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파르티잔의 시작이라고 본다. 이후 미군정이 끝날 무렵 1948년 5.10 단선 단정에 반대하는 2.7 구국투쟁이 일어난다. 전국 총파업으로 진행되며 이때도 수배자들이 산으로 들어가며 야산대가 더욱 강화된다. 지역사령부를 두며 체계화 된다. 그리고 이어서 제주 4.3항쟁과 10.19 여순 항쟁이 일어난다. ▶1948년 10월 여순항쟁 이후 김지회, 홍순석, 지창수 등이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 문수골로 들어옴. 48년 11월 이현상 지리산으로 투입 ▶1949년 야산대를 인민유격대로 재편성하여 토벌대와 전투. ▶1950년 한국전쟁으로 8월에 인민유격대는 북한 정규군과 합세하여 작전을 펼침 ▶1951년 남부군 활동 전성기로 열차습격, 은행습격 등, 하지만 12월 들어 본격적인 토벌로 ▶1952년 토끼몰이식으로 대성골로 유인하여 박격포, 공군기 투입으로 빨치산 궤멸. 사살 300명, 포로 250명, 혹은 800여명이 죽었다고도 하는 등, 자료의 부정확 ▶1953년 7월 휴전협정 시 지리산 잔여 빨치산 언급 없음. 이현상 9월 사망 (이현상은 북으로 갈 수도 있었으나 스스로 지리산에 남음. 북에서 김일성의 권력투쟁으로 남노당 출신의 박헌영, 이승엽 등이 모두 처형 당함. 박현영은 여순때 병력노출 혐의 미군스파이로 몰려 죽음) ▶1954년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 전남도당 박영발 사망으로 토벌 종료. 5월 정식 토벌대는 해산하고 지역에서 토벌 계속 ▶1955년 지리산 입산통제 해제 ▶1956년 43명 빨치산 생존 떠돌이 ▶1963년 11월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총상 입고 체포 -천왕봉 설경(사진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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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편지
    2022-02-07
  • 지리산에서 온 편지 4 - 문수골 문수 이야기
    ☐지리산에서 온 편지 4 문수골 문수 이야기 그 옛날,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지리산 이 깊은 문수골에도 들어왔을 것이다. 문수보살님의 공덕 한 조각이라도 얻으려는 생각으로 왔겠나, 그저 저버린 목숨 하나 의지할 구석 찾으러 허위허위 들어왔겠지. 이 골짝에 겨우 몸은 숨겼으나 나물만 먹고 살 순 없으니, 손바닥만 한 논배미라도 얻기 위해 함박꽃 지고 단풍잎이 붉게 물들 때까지, 축대를 쌓고 그 계단 위에 삿갓배미 논두렁을 올렸을 것이다. 그러구러 초승달 같은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아슬아슬한 계절을 건넜을 것이다. 그러고도 또 한 세월이 지나 인공人共 때 지리산에는 오갈 데 없는 한 무리들이 들어오는데, 아래 이야기 시 한편은 그때 이후로 이야기이니, 세월은 덧없이 흘러간다 하나 사실은 숱한 사연들에 떠밀려 가는 세월이 아닌가 싶다. 문수골에 사는 문수어매는 문수암에 밥하러 다니는 공양보살인데, 인공 때 그 불그스름허던 단풍들 죄다 꼬실라지던 무렵, 구례군당이 문수골로 숨어들어오던 이첨저첨에 부모 잃고 거천헐 데가 마땅찮았다. 그러다 문수암 늦은목재 너머 피아골 평도리 아재집에 오가다가 심심찮게 얻어먹던 절밥이 인연되어, 엔간히 철들 무렵에 아예 문수암 공양보살로 들어서게 되었더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처님 고봉밥 올리며 이삼십 년 세월이 봄 한철 산벚꽃처럼 훌쩍 넘어가고, 소쩍새 청승맞은 울음소리에 밤은 그토록 깊어만 갔는데, 싸락눈 가물가물 내리던 어느 겨울 초입에 중년의 사내 하나가 문수암에 굴러 들어왔단다. 그는 하루에 두서너 마디 하는 말없는 불목하니가 되어 절마당에 널부러진 계곡 물소리도 쓸어내고, 남향받이 툇마루 밑에 잘 마른 장작개비 부처님들 가지런히 쌓아놓기도 하더니, 주지스님 세상구경 나가신 날이면 법당에 들어가 독경소리도 한 짐씩 져 나르는 것이었다. 한참 세월이 그렇게 또 가더니 어느 날, 공양보살이 사십구재 지내는 손님들 맞아 부산을 떨다가, 달빛도 없는 밤에 집에 가려고 지난 초파일날 쓸던 연등 하나 꺼내어 불을 밝히는데, 비가 오려나 바람이 불고 날은 심난한데 마침 그 말수적은 불목하니가 앞장을 서드란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중얼거리며 뒤를 따르는데, 그날따라 웬 미친바람이 그렇게 불어 나무 자빠지는 소리가 우지끈 계곡을 진동하고, 가물거리던 불빛마저 꺼지고 마니 허투루 사는 인생일망정 어찌 사연 하나가 없을 소냐. 물가에 풀 뜯는 흰 소 몰고 집에 들어와 애가 들어섰으니, 석씨 가문의 부처님 씨가 분명하고 문수골 문수암에서 태어났으니 애 이름은 석문수가 되어, 문수암 공양보살은 늙으막에서야 문수어매가 되었던 것인데, 문수는 계곡 날망 기슭에 비집고 자리잡은 집구석에서 뒹굴뒹굴할 때나, 애기나뭇짐 매고 문수골을 내려올 때도 말 한마디 붙여볼 놈이 없어, 저 혼자서 마당에서 푸덕이는 씨암탉이나 옷깃을 스치는 산죽, 자꾸만 다가오는 산그늘에게 무어라 중얼거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문수는 그 뒤로도 무어라 중얼거리기만 할 뿐, 세상 뭇놈들이 내는 소리는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 문수란 놈 문수암 절마당에서 장작 패며 코밑수염 꺼칠꺼칠해진지가 벌써 오래건만, 이적지 문수골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나무 자빠지는 소리만 들으며, 한 번도 이 골짜기 떠날 생각을 안 하고 중얼거리기만 하니, 누가 있어 어찌 그 속내를 알 수 있을 것인가. (졸시 「문수골 문수 이야기」 전문) * * 문수골은 구례의 유명한 아흔 아홉 칸 집 운조루가 있는 오미리 뒷고랑 물길을 따라 지리산을 올라가면서 시작되는 깊은 골짜기이다. 한참을 오르다 보면 문수암으로 오르는 길에서 물길이 나눠진다. 문수암 뒤편 능선이 왕실봉 능선인데 이 능선을 가로질러 늦은목재를 넘으면 바로 피아골이 나온다. 나는 언젠가 친구하고 이 늦은목재를 넘으며 왜 이 고개 이름이 늦은목재일까 생각했었다. 그 친구의 생각이 그럴 듯 했는데, 그것은 그 옛날 이 피아골 평도리 사람들이 구례에서 장보고 화엄사 뒷산 넘어 밤재마을로 와서 문수골을 건너 이 재를 오르면 해가 떨어지는 늦은 시간에 이를 것이니 늦은목재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랬다. 지금은 사라지거나 묻힌 길이 되었지만 능선을 가로지르는 길들은 당시 민초들에게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일상의 길이었다. 지리산 뿐 아니라 모든 산은 옛사람들에게는 삶터였고 생활의 현장이었고 일상의 길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산의 품성을 배우며 자랐다. 조급하지 않으며 숱한 생명들이 조화를 이루고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스스로도 모르게 얻은 그 자비의 품성으로 서로 나누며 모든 생명을 모시고 함께 살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오기 시작했고 자동차와 함께 속도문화가 일반화되면서 산은 사람들의 일상에서 멀어졌다. 속도의 걸림돌이 되어 파괴되었고 구경거리가 되어 짓밟혔으며 오히려 산을 내려와야만 삶이 풍요로워지는 세상이 되면서 사람들은 산에서 얻은 본래의 품성을 잃어갔다. 그리고 사람들의 삶은 공격적으로 변하였으며 불신과 분노와 증오가 증폭된 일상을 스스로 살게 되었다. 또한 지리산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애달프고 서러운 목숨들의 역사를 안게 되었다. 지금도 수많은 백골들이 녹슬은 총열들과 함께 묻혀있고 아녀자와 어린아이들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묻혀있는 산이 지리산이다. 역사를 바르게 사는 일이 현실 속에서는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는 일이며, 뭇 생명들의 삶과 평화를 헌납해야 하는 일인지를 지리산을 오르내리며 비로소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지리산은 그동안 잃어온 산의 품성을 되찾게 해주는 산이기도 하다. 지리산은 모성의 산으로 잃어버린 사람들의 착한 마음, 착한 품성에 대한 기억을 되찾게 해주는 산이기도 하다. 우리 본연의 품성과 근원에 대한 그리움을 짐작하게 해주는 산이다. 우리가 이 그리움의 마음, 그 자비의 품성을 일상 속에서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지리산을 이야기해야 한다. 지리산은 이러한 새로운 우리의 삶의 가치를 내장한 소중한 산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런 생각과 함께 지리산의 길을 열어준 친구가 있었다. 서둘러 이승의 길을 떠났지만 내 마음 속 오랜 벗, 지리산을 떠올릴 때면 어김없이 그가 함께 생각난다. 그 굳고 정하다는 갈매나무 같은 녀석, 윤동주의 시처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늘 괴로워했던 녀석,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사는 일의 전부라는 것을 깨우쳐준 나의 스승, 젊은 시절 쉼 없이 지리산을 함께 올랐던 그녀석이 오늘 따라 무척 보고 싶다. -형제봉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능선(사진 김인호)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2-02-07
  • 오랜 마음 속 어머니, 지리산
    오랜 마음 속 어머니, 지리산 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스스로 고립된 만큼의 세월이 산의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해마다 수수꽃다리며 때죽나무 같은 꽃으로 무리지어 피어났다 그리하여 지리산 어느 산길에서 동자꽃 한 송이를 만나도 우리는 그 아름다움의 탄식 뒤에 숨어있는 오랜 그리움을 읽어내야 한다 -지리산 동자꽃 / 사진 김인호 지리산은 오랜 역사 속에서 우리를 품어온 산이다. 그 옛날 더 이상 산 아래 세상에서 버틸 수 없었던 사람들이 지리산으로 왔다. 절망의 끝에서 차마 버릴 수 없는 목숨 하나 이끌고 이 산에 들어왔다. 그들은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 스스로의 어둠을 풀었고 산은 그들의 어둠을 품어 주었다. 지금도 세상살이에 지치고 힘든 자들이 지리산에 온다. 세상사람 모두가 등을 돌려도 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오랜 마음 속 어머니처럼 부르지 않아도 항상 먼저 따뜻한 말을 건네주고 품에 안아준다. 그 사무치는 그리움이 깊을 대로 깊어 산 빛 너울이 아프다. * 그래서 우리는 지리산을 어머니의 산이라 부른다. 실제로 그 품이 넓어 3개 도에 걸쳐 있으며 14억 5천 6백만 평이라고 한다. 이 산 속에 나무며 짐승이며 꽃이며 벌레들 그 무수한 생명들이 하나로 어울려 있는 생명공동체가 지리산이다. 그리고 이 지리산 자락 골짜기마다 그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과 자본의 폭력과 병든 도시를 외면하고 귀촌한 사람들까지 하나의 지리산이 되어 잘 어울려 살고 있다. 그들은 산이 거느린 어머니의 품성을 배우고 숲의 모든 생명들과 하나로 어울려 산다. 인간의 이기적 산물인 자본의 풍요와 편리함에 묻히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는 이런 이들이야말로‘지혜智慧로운 이인異人’이며 지이산智異山의 사람들이 아닌가. 지리산은 한자로는 지이산智異山으로 쓰고 지리산으로 읽는다. 지리산의‘지리’한자 표기는 智異, 智利, 知異, 地理, 地利, 地而 등 다양하지만 현재 쓰고 있는 지리산(智異山)이라는 이름은 쌍계사에 있는 국보 제47호 진감선사 대공탑에 보인다. 이 탑의 비문은 신라 정강왕 2년(887)에 최치원이 썼는데 '지리산(智異山)'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리고 고려시대의『삼국사기』나『삼국유사』, 조선시대에 편찬한『고려사』에도 다른 한자 표기와 함께‘지리산(智異山)’표기가 나온다고 하니‘智異山’표기가 그래도 오랫동안 일관되게 쓰인 듯하다. 그리고 특히 불교에서는 지리산을 문수도장으로 부르며 지혜의 문수대성이 이산에 머물며 불법을 지키고 중생을 깨우치는 도량으로 삼았다 하여 지리산의‘지리’는 ‘大智文殊舍利菩薩’에서 智와 利를 빌려 智利山이라 하나 이는 후대에 불가적 입장에서 불린 것이라 보인다. 이처럼 지리산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 어느 상황에서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름들을 가지게 되었다. 지리산은‘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불렸는데『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백두산에서 흘러나온 산맥이 지리산에서 멈추었다 해서 두류(頭流)로 한다고 했다. 또 도교적 입장에서는 봉래산(蓬萊山)으로 불린 금강산과 영주산(瀛州山)으로 불린 한라산과 함께 지리산을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불렀는데 신선들이 산다는 신령한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여겼던 것이다. 이외에도 오행사상과 함께 오악(五嶽)의 개념이 생겼는데 동서남북과 중앙지역을 대표하는 산으로 그 오악 중 지리산은 남악(南嶽)이어서 남악산이라고도 불렀으며, 불복산(不伏山)이나 반역산(反逆山)이라는 이름은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큰 뜻을 품고 명산을 찾아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만 거부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지리산은 여순사건과 6.25전쟁을 거치며 빨치산의 활동 근거지가 되면서 토벌작전이 벌어지던 시기에는 좌익과 우익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적구산(赤拘山)이라고도 불렀으니 지리산은 세파에 흔들리며 많은 이름들을 남기게 되었다. * 그 옛적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나 고승대덕의 길을 가려는 이들, 그리고 도망쳐 숨어들어온 노비, 살인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저자거리의 사람들, 혹은 동학 이후 성을 바꾸고 숨어든 자들, 이런저런 사람들이 제각기 사연 하나씩 가지고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온 곳이 지리산이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 좌우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빨치산이 되었고 하나의 조국을 꿈꾸며 목숨을 의탁한 곳이 지리산이었다. 지리산은 그렇게 어느 자식 하나 버리지 않고 모두를 품는 어머니였다. 해방 이후 지리산에는 빨치산의 역사가 강하게 새겨졌다. 그 시절, 빨갱이 가족이라는 것 때문에 시달리다가 더는 견딜 수 없어 산으로 올라온 노인도, 어린 조카도, 남편을 찾아 올라온 아내도, 아내 등에 업힌 간난아이도, 산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모두가 빨치산이 되었다. 그리고 빨치산의 역사는 아직도 살아있는 역사다. 만델라가 27년 옥살이 하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 대한민국 교도소에는 30년 넘게 옥살이를 하고 있는 빨치산들이 수두룩했었다. 살을 도려내듯 추웠던 그 겨울 지리산, 토벌대가 올라오면 ‘나무 하나 군인 하나’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병력이 올라왔다고 한다. 토벌대와 총격전이 벌어지고 도주로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돌고 돌아 그곳으로 다시 돌아오기도 해서 널브러져 있는 토벌대와 동지들의 시신을 만나기도 했다. 꽁꽁 얼어붙은 죽은 동지의 입 속에 남아있던 밥덩이를 꺼내 먹으며 달려야 했던 절망의 시절이었다. 한 달이면 보름도 넘게 굶으며 배고픔과 추위 속에 쫓겨야했고 잠깐 쉬며 앉아 있다 출발하면 움직이지 않는 동지들이 있었다. 어깨를 흔들면 앉은 채로 쓰러지던 벗들, 숨을 멈추는 마지막 순간 산 아래 늙으신 어머니 얼굴이라도 한번 떠올렸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빨치산들은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북으로 올라갈 수도 산을 내려갈 수도 없었다.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그들은 희망도 절망도 모두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지리산만이 그들을 품어주었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남과 북 누구 하나 그들의 생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그들을 버렸을 때에도 지리산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 하나 된 조국을 꿈꾸는 일이 그토록 서럽고 사무치는 일이었다. 그런 그들을 끝까지 품어준 것은 지리산뿐이었다. 그들에게 눈보라 몰아치는 지리산은 환한 미소를 짓는 늙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었다. * 산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늘 그곳에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역사 속의 시간과 그리움을 데리고 산은 늘 그곳에 혼자 있다. 하지만 언제나 외로운 건 우리다. 우리가 세파에 흔들리며 외로울 때면 산은 늘 푸른 대답을 먼저 보내온다. 다만 우리가 그 오랜 침묵의 답변을 읽어내지 못할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산처럼 스스로 침묵해보지 못했고 갈등과 대립, 경쟁의 일상 속에서 산의 너그럽고 따뜻한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수천 년 역사 동안 그곳에 있으면서 우리의 모든 아픔과 절망을 안아주고 품어준 산이다. 지리산에 가서 하루라도 그 숲의 숨소리에 자신을 맡기면 번잡한 현실의 고민들을 잊게 하여 스스로의 깊은 고요 속으로 침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리산 순례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존재의 근원적 질문에 대한 현실살이의 바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리산은 우리가 어리석은 생각으로 현실 속에서 헤맬 때 스스로의 지혜롭고 선한 마음을 깨닫게 해주는 스승 같은 산이다. 피폐해진 몸을 살려내고 잃어버린 자애로운 마음을 회복시켜주는 산이며 현실사회의 바른 역사와 삶에 대한 지향을 잃지 않게 해주는 산이다. 이 모든 것이 지리산이 가진 어머니의 사랑과 자비의 품성으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지리산의 이러한 품성은 모든 것을 품어내고 삭여내어 새살을 만드는, 그렇게 끝없는 생명력을 분출하는데서 생겼으며 그것은 산을 이루고 있는 모든 생명들의‘어울림 삶’에 다름 아니다. 크고 작은 능선과 계곡들의 어울림, 그 속의 작은 숲길과 고라니와 딱따구리와 구상나무나 얼레지 같은 꽃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사람들까지 인드라망처럼 촘촘하게 엮긴 생명공동체가 만들어내는 사랑과 자비의 힘인 것이다. 동과 서가 어울리고 남과 북이 어울리며 온 누리가 하나 되는 세상은 이 모든 생명들의‘어울림 삶’으로부터 비롯되며 그 속에서 진주처럼 만들어진 결정체, 바로 사랑과 자비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지리산은 그런 상징이 되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끝> 『불광』(2022.1) -지리산 주능선 / 사진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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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편지
    2022-01-06
  • 지리산 둘레길
    성찰을 위한 숲길-지리산 둘레길 온 세상이 초록으로 물드는 봄날, 문득 산과 들 또는 한적한 강둑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쯤은 누구나 할 것이다. 도심의 번다한 일상을 빠져나오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의식의 세계 너머에 있는 생명의 본질적 요구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나’라는 생명이 봄이라는 순환적 시간에 순응하려는 몸짓 같은 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만큼 억지를 부리며 사는 생명들도 없다. 막히면 돌아가고 높은 곳으로 역행하지 않고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강물처럼 지구상의 자연과 모든 생명들은 순리대로 살아가지만 유독 인간만이 자연을 거스르고 순리에 역행하며 산다. 어쨌든 우리는 이 화사한 봄날, 주체할 수 없는 생명력의 발현에 순응하기 위해서라도 한번쯤은 자연의 착한 자식이 되어 걸어야 한다. 지리산 둘레길은 태생부터가 좀 다른 데가 있다. 2004년 도법스님이 생명평화탁발순례를 시작하면서 지리산 전체를 한 바퀴 돌았다. 그때 스님은 자본주의 물질문명 속에서 영성을 잃어가는 현대인들이 이 지리산 숲길을 걸으며 참된 자신을 회복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셨다. 그래서 지리산 주변의 사회단체들과 힘을 모아 ‘지리산 숲길’이라는 사단법인을 만들고 산림청과 지자체를 설득하여 둘레길이 만들어졌다. 다시 말하면 지리산 둘레길은 단순히 건강을 위한 산책길이나 관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명상과 성찰을 위한 숲길이며, 이익과 탐욕으로 점철된 자본문명을 벗어나, 자신을 치유하고 정화하며 서로가 존중하고 섬기는 모두가 하나의 생명공동체라는 새로운 문명에 대한 기획에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보면 이러한 요구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된다. 둘레길은 지리산 자락 깊이 숨겨져 있는 마을과 마을이 서로 오가던 길이고, 수령 300~600년의 당산 나무들이 곳곳에 있는 길이고, 원촌 총각이 숲속으로 나무하러 가서 탑동 처녀 만나고 오던 숲길이고, 파장 술 한 잔에 취해 넘던 고갯길이고, 삽 들고 물꼬 보러 가던 농로이고, 강바람에 천렵하던 강변길이다. 순박한 산골 사람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퇴적되어 있는 길이고, 삶의 순정성이 풍경으로 박제되어 있는 곳이다. 이렇게 둘레길은 전남, 전북, 경남에 3개 도에 걸쳐 5개 군을 아우르고 있으며 얼추 300km에 이른다. 2012년 3월 현재 16개 구간으로 되어 있으며 앞으로 3개 구간이 완성되면 지리산 둘레 전체가 하나의 길로 연결되는 것이다. (박두규 시인) -지리산 둘레길의 당몰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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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편지
    2021-12-20
  • 지리산에서 온 편지3
    ☐지리산에서 온 편지 3 지리산, 비트 산행 어린아이는 엄마에게 많은 질문을 한다. “엄마, 코끼리는 왜 코가 길어?” 또는 “엄마, 바다는 왜 푸르데?” 이런 질문을 받으면 참 난감하다.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니 애가 못 알아들을 것이고 아니 그런 지식도 별로 없다. 그런데 아이들은 왜 그런 질문을 할까? 그건 당연히 그것이 이상하고 또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에 눈 뜬지 갓 4,5년 된 생명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이상하고 신기하고 새로운 것들뿐이다. 그러니 외출하거나 여행을 할 때면 끊임없이 질문을 해대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낯선 이 세상은 얼마나 신기하고 즐거울까? 매일매일 주변에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면서 아직은 낯선 세상을 사니 그 세상이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울까? 하지만 많은 어른들에게는 늘 똑같은 풍경에 반복되는 세상이고 그래서 지겨운 세상일뿐이다. 다시 말하면 새롭지 않다. 그래서 어른들은 여행을 하게 된다. 어린아이들처럼 새로운 세상, 낯선 세상을 보며 세상을 새롭게 보고 싶은 것이다. 사실, 똑같은 세상을 늘 새롭게 볼 수 있고 새롭게 살 수만 있다면 그건 이미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옛 시에 ‘깨달음’이란 선시가 있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나무를 하고 물을 길었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다. 이 시를 보면 깨달음을 얻기 전이나 얻은 후에나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다. 그래서 깨달음은 물을 긷고 나무를 하는 일상의 현실에 있다는 것과 그 일상을 새롭게 보고 또 새롭게 사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지겨운 일상(현실)을 새롭게 볼 수만 있다면 세상은 신기롭고 즐거울 것이고 그렇게 늘 새롭게 현재의 일상을 살아낸다면 그런 행복이 어디 있으며 그것이 깨달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고 보면 우리 같은 범인들에게 여행이라는 것은 낯선 곳에서 삶의 새로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니 깨달음의 대리만족 쯤이나 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사실 여행을 많이 하지 못했다. 싫어하는 것은 결코 아니고, 돌아다니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편인데도 국내나 해외여행을 별로 하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마음의 변화나 위로나 생활의 어떤 새로움이 필요할 때면 혼자서 훌쩍 산으로 간다. 가까운 산이 지리산이니 늘 지리산을 다닌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한때 한 몇 년은 작고한 박배엽 시인과 함께 지리산의 비등산로를 주로 다녔다.(그때만 해도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들어서기 전후여서 단속이나 벌금이 없었다) 그 길들은 한국전쟁 전후의 빨치산들이 주로 다녔던 길들이기도 하고 그 이전에는 나무꾼이나 장꾼들이 다녔던 길이고 현재는 고로쇠꾼들이 자주 이용하는 길들이다. 그 지리산의 낯선 지능선이나 지계곡을 혼자서 자주 탔던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따지고 보면 다 내 안의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였다. 지리산은 전북, 경남, 전남, 3개도에 걸쳐있는 넓은 산이어서 한번 헤매기 시작하면 요샛말로 장난이 아니다. 지금이야 GPS가 있지만 그때는 나침반과 지도 한 장 믿고 그냥 갔다. 그리고 사라진 길의 흔적을 더듬어 산을 타는 동안은 모든 걸 다 잊을 만큼의 긴장과 두려움이 함께 했다. 그것은 어쩌면 내면의 깊은 어디에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생명력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일상에서 데리고 사는 크고 작은 두려움들을 말끔하게 지워주는 역할을 했다. 나중에 지리산을 오르며 즐겨 찾아간 곳은 산사람(빨치산)들의 비트(비밀아지트)였다. 물론 처음에는 빨치산 출신 장기수 어른들이나 관련자들의 도움을 얻어서 찾아 다녔다. 비트라고는 하나 무슨 문화유산처럼 특정의 흔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현상 비트나 박영발 비트, 구례군당 비트는 그래도 그 흔적과 생활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으나 그 외의 환자트나 무기, 식량 등을 숨겼다는 비트들은 그저 이 근처였다는 것만을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들은 빨치산이라고 불렸지만 나는 그들이야말로 하나의 통일조국을 꿈꾸고 진정한 인간해방을 꿈꾸었던 한국전쟁 전후 당대의 역사를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사회가 그렇듯 모든 빨치산들이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겠지만 역사라는 큰 흐름에서 조망한다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나는 열심히 산을 찾던 8,90년대만 해도 시대적 상황 탓도 있었지만, 산을 오르며 비극적인 역사와 이데올로기보다는 빨치산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 그 사람들의 삶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를 사는 시인의 몫이기도 하고 지리산을 오르는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리산 연작시를 썼고 ‘그리움’이라는 단어에 모든 걸 담고자 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죽은 동지들에 대한 그리움, 조국 해방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존재의 고독에서 오는 근원적 그리움까지 지리산은 그 모든 그리움을 내장하고 있는 산으로 그려지기를 바랐다. 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 오랜 마음 속 벗처럼 / 부르지 않아도 항상 / 푸른 대답을 보내오고 / 그리움이 깊을 대로 깊어 / 산빛 너울이 아프다. // 미친 눈보라, 갈 곳 없는 어둠에 묻혀 / 사십 년 징역을 곱게도 사는구나. / 물빛 하늘 얼굴들 / 살아서는 부둥킬 수 없었던 / 그리움 곁으로 가고 / 홀로 남아 / 상처 깊은 짐승처럼 / 우우우 웅크린 / 산. // 그대는 / 눈부신 억새꽃 바람결로 스미고 / 깊은 숲 그늘 돌 틈 / 철쭉으로 피어나 / 우리들 일상의 /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 다하도록 / 스스로가 다하도록 내려올 수 없어 / 산이 되었던 그대. // 우리 곁을 떠나간 벗들은 / 저 산 되었지. / 헐벗어 눈 덮인 저 산. / 그래, 바라던 조국을 만나 / 풀씨는 맺었나, / 슬픔은 없더나. // 저 산처럼 서야지. / 산이 거느리는 핏빛 그리움으로 / 살아남아야지. / 밤마다 이빨 빠지는 꿈을 꾸며 / 가버린 벗을 생각는 일은 / 이제 그만 두어야지. / 깊은 숲 그늘 바람, 숨 죽여 울면 / 아직도 너의 목소리가 들린다.// <졸시「지리산1-序」전문> 지리산 비트 산행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의 현장을 가는 것이기도 해서 어떤 묘한 비장감을 느끼게 해준다. 나는 그것이 매우 좋았다. 그리고 혼자서 하는 그 비등산로의 산행은 삶의 근원적 두려움과 외로움의 맨얼굴을 직접 만나게 해주었고 시종일관 긴장감과 어떤 설렘을 주는 신선한 것이어서 참으로 각별한 여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국립공원법이 정비되어 비등산로 산행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연구 목적이나 특별한 사유가 있다면 신고를 하고 허락을 받아 갈 순 있지만 쉽지 않다. 그래서 요즘은 정해진 탐방로만을 다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지리산을 오르는 일은 새롭다. 나무며 벌레며 새, 동물들, 그 모든 생명을 품은 산은 그 생명들이 뿜어내는 생명력으로 인해 하루하루가 모두 새롭고 신선하기 때문이다. -남부군 비트터 -남부군 학습장 -남부군 이현상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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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20
  • 지리산 이야기2 - 친구
    지리산이야기2- 친구 지리산을 늘 함께 오르던 친구가 있었다. 세상의 모든 빛 중에 저무는 빛이 가장 강한 빛이라는 것을 안 것은 친구의 죽음 때문이었다. 노을이 지는 동안 능선들이 모두 침묵 속에 숙연해지는 것도 저무는 빛으로부터 시작되는 시간의 죽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화려한 도시의 빌딩 사이로 저무는 강한 빛을 보며 문득문득 외로워지는 것도 까닭모를 그리움도 모두 여기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친구가 죽고 나는 혼자서 산에 다녔다. 산정의 차가운 샘물을 마시면 간절한 마음이 먼저 목젖을 적셨고 구상나무에 눈이 가득 내리면 눈밭에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술잔을 나누던 친구가 생각났다. 그를 잃고 여느 짐승들처럼 겨울잠에 들고 싶었고 스스로도 잊고 혹독한 바람에도 깨어나지 않는 오랜 침묵이 되고 싶었다. 무심한 계절이 숱하게 지나가고 저물어 가는 산들의 어둠 사이로 그와 함께 다녔던 길 하나가 살아남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홀로 빛나는 것들에는 언제나 슬픔이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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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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