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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지리산 편지 기사

  • 마음과 나
    마음과 나 “인간을 속박하는 것도, 해방시키는 것도 마음(Mind)이다. 왜 마음이 속박과 해방을 일으키는가? 왜냐하면 인간보다 덜 발달된 존재들은 독립적인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은 타고난 본능에 의해 이끌린다. 그러나 인간은 독립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속박이나 해방으로 향하는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인 차이다. 마음은 언제나 어떤 대상을 가지고 있다. 여러 경전에서, 대상을 “아보거(ábhoga)”라고 한다. 아보거는 마음에 음식을 주는 대상, 즉 정신적 양식을 의미한다. 만약 이 양식이 제한적이라면 마음 또한 제한된다. 만약 이 양식이 무한하다면, 그 무한한 양식을 얻기 위해 애씀으로써 마음도 무한해진다. 제한적이든 무한하든 어떤 양식을 마음의 대상으로 삼을지는 오로지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다. 인간이 위대해질지 평범해질지는 온전히 그가 무엇를 바라는가에 달려있다.” 슈리슈리 아난다무르띠의 『아난다 바차나므리땀』에서 위는 인도의 ‘아난다 마르가 요가 명상 수행공동체’의 창시자 아난다무르띠(P.R. 사카르)의 말씀이다. 위 내용이 실려있는 『아난다 바차나므리땀』이라는 책은 아난다무르띠가 매일 방문하는 대중들을 친견할 때 했던 짧은 말들을 책으로 묶은 것으로 30여 권 출간되었으며 그중 제1권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위에서 말한 인간을 속박하는 것도 해방 시키는 것도 마음이라고 하는 그 마음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독립적인 마음이라고 한다. 이 독립적인 마음은 동물에게는 없으며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에고(ego)’에 다름 아니다. 동물에게는 에고가 없다. 그래서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의지’라는 것도 없고 ‘자존심’ 따위도 없다. 그저 본능만이 있어서 먹고 자며 생명을 지키고 번식시키는 것만이 삶의 전부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독립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개체의식이라고나 할 수 있는 이 ‘에고’는 ‘나’라는 존재 의식을 갖게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사람은 존재의 한계를 갖게 되기도 한다. 그것이 속박이고 개체가 존재적 사고를 하는 범주이고 한계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에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만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그 속박 속에서 살다가 그것이 속박인지도 모른 채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렇다고 에고를 버려야 하는 것으로만 인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에고는 우리를 ‘나’라는 감옥에 갇히게 하는 속박의 주범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에고로부터 개체의 의식을 확장 시키는 수행을 통해 해방, 대자유의 길을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내 안의 신성을 발견하고 지고의 의식과 합일에 이르기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반드시 어떤 대상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이 돈이든 이성이든 어떤 다양한 대상으로부터 마음이 나온다. 그 대상을 “아보거(ábhoga)”라고 하는데 다시 말하면 그 마음의 대상, 마음이 취하는 먹이, 정신적 음식이 아보거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내 생각을 이 순간 물들이고 있는 대상인 것이다. 우리 육체가 음식이 필요하듯 우리 마음도 늘 음식이 필요하고 그 음식을 끊임없이 취하고 있는데 그것이 곧 생각의 대상이고 마음의 대상이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 방금 사라지거나 때론 길게 머물기도 하는 그 모든 마음의 대상, 그것이 바로 아보거인 것이다. 그런데 이 아보거는 인간의 의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이 마음의 양식이 제한적이라면 마음 또한 제한되며 이 양식이 무한하다면 그 무한한 양식을 얻기 위해 애씀으로써 마음도 무한해진다. 제한적이든 무한하든 어떤 양식을 마음의 대상으로 삼을지는 오로지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은 대부분 물질적인 대상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것은 유한한 것이기 때문에 궁극의 기쁨을 주지 못하고 순간적인 즐거움만을 줄 뿐이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데 이처럼 유한한 대상에 집중하면 그것을 얻을 수 없다. 영원한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을 영원한 대상에 집중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명상의 원리이기도 한 것이다. 많은 사람은 궁극의 기쁨을 원하면서도 무한한 지고의식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대상에 집중하는 모순에 빠져 살고 있다. (박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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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편지
    2024-03-11
  • [숲샘의 지리산통신] 주민 스스로 열어가는 산청 목화장터
    어느새 141번째 산청 목화장터, 오늘은 산청의 자랑 '큰들' 식구들까지 함께해서 더 흥겨웠던 장터였다. 관의 간섭 일절 받지 않고 지역 주민들 스스로 꾸려가고 있어 더 의미 있는 장터로 매달 둘째 넷째 일요일 오후 산청 신안면 원지 소공원에서 왁자지껄하게 열린다. 필자는 그 장터의 사람들을 폰카로 남기고 있는데 이 사진 속 한 사람 한 사람이 산청의 역사란 생각이다. -20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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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편지
    2024-03-11
  • [숲샘의 지리산통신] 지리산 둘레길 안녕기원제
    105주년 삼일절에 진행된 지리산 둘레길 안녕기원제, 필자는 행사에 합류하기 전 둘레길이 지나는 곳에 계신 산청 평화의 소녀상에 먼저 인사 올리고는 길동무들과 함께 지리산 둘레길을 걸었다. 산청 성심원을 출발해서 선녀탕과 내리 저수지 지나 다시 성심원으로 돌아오는 12Km 남짓한 웅석봉 자락 둘레길을 함께 걸었던 길동무들과 그 길에서 만났던 풍경들을 사진으로 남긴다. 비록 강풍주의보가 내리긴 했지만 산&청이란 이름에 걸맞게 맑고 푸르렀던 하늘은 지리산의 선물임이 분명했다. 아무튼 올 한해도 지리산 둘레길이 생명과 평화의 길로 아픈 대한민국을 어루만져주길 간절히 빈다. -202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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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3
  • [숲샘의 지리산통신] 환한 꽃등불을 켠 히어리
    비 내리는 2월의 끝날에 올해 첫인사를 나눈 지리산 깃대종 히어리, 성심원 둘레길 길섶에서 그 자리 잘 지키고 있었다는... 널리 퍼져 멸종위기종에서 벗어났기에 더 기특하다. -2024.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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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편지
    2024-02-29
  • [숲샘의 지리산통신] 우수에 꽃을 피운 남명매
    비 그친 雨水, 산천재 앞마당의 남명매도 드디어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450년 넘도록 단 한 해도 거르지 않은 그 의식을... 하지만 오늘에서야 알았다. 지리산의 정신 남명을 지켜오고 있는 이들이 누군지를... -20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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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편지
    2024-02-19
  • [숲샘의 지리산통신] 풀천지 우리 집 마당 봄소식
    광양 소학정 매화와 통도사 자장매가 핀다고 난리들이지만 풀천지 우리 집 마당에서 꼼지락거리는 봄의 실마리가 더 반갑다. 낮게 엎드려 그 추운 겨울을 견디더니 이렇게 봄의 실마리를 선사하는 상사화야, 달맞이야, 봄동배추야, 개망초야~ 고맙고 또 고맙다. -2024.02.15 별을 품고 있는 달맞이꽃의 꽃방석(로제트) 봄이 오면 장다리꽃을 피울 봄동은 잎마다 한 그루 나무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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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편지
    2024-02-15
  • 지극정성至極精誠
    지극정성至極精誠 저희 『생명평화결사』의 평생교사이신 송기득 선생님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선생님은 수년 전 사모님께서 돌아가시자 자신의 삶도 이런저런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셨는지 그동안 발행해오던 잡지 『신학비평』을 폐간하시겠다고 하셨지요. 그때 주변에서 제자들이며 지인들이 극구 말려서 『신학비평』은 끝났지만 이후 그 여운을 담아내는 부록처럼 『신학비평 너머』라는 제호로 전보다 규모가 작아진 책을 내며 마음을 달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신학비평 너머』 원고를 청탁하시면서 말씀 뒤 끝에 이 『신학비평 너머』도 올해 겨울호를 끝으로 폐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왠지 그 말씀이 삶의 모든 것을 정리하겠다는 말씀처럼 들려 매우 당황스러웠습니다. 어쩌면 『신학비평』은 당신의 모든 일상을 길어 올리던 두레박 같은 것이며 여생의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할 것인데 이를 그만둔다는 말은 예삿말이 아닌 것이지요. 그래도 선생님의 판단인데 내가 이런저런 짐작을 해서도 또 말려서도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연기緣起에 의한 것이어서 오늘의 행위가 내일을 결정하게 되니 내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해야만 운명도 나의 운명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선생님의 『신학비평 너머』 폐간 결정이 그러하신 것 같았습니다. 생성하는 것은 반드시 소멸이 따르는 것이라 하니 선생님께서 그 시기를 보시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어쨌거나 나는 『신학비평 너머』를 더 하시라는 말도 못 꺼내고 글이나 더 열심히 써서 보내겠다는 말을 하며 전화를 끊었지요. 그리고 나는 선생님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마음을 집중하니 성誠이라는 글자 하나가 떠올랐지요. 선생님의 삶 자체를 이 글자 하나가 오롯이 떠받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군 때의 경전인 『참전계경參佺戒經』을 보면 성誠에 대해서 이러한 말이 나옵니다. 誠者 衷心之所發 血性之所守 (성이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타고난 참 본성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誠에 대한 연변대학에 있던 최민자 교수의 해설을 보면 “일념으로 誠을 다할 때 자신의 誠門이 열리면서 스스로의 신성과 마주치게 된다. 매순간 정성을 다하는 것이 타고난 참 본성을 지키는 것이요 인간의 중심에 내려와 계신 ‘하나’님(‘삼일신고’에 나오는 一神降衷의 의미)을 경배하는 것이다.” “정성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고 마음을 바르게 갖는 것이며 잊지 아니하는 것이고 쉬지 않는 것이며 지극한 감응에 이르는 것이다.” 라는 글들이 나옵니다. 내가 송기득 선생님을 자신의 일상 삶 자체를 오롯이 성誠으로 사신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수년간의 지극한 돌봄과 그 죽음 이후 현재 삶만 보더라도 그렇고 선생님의 삶 전체를 한마디로 평한다 해도 성誠이라는 말이 가장 적합한 말인 듯싶습니다. 젊은 날 구도행의 시절도 성誠이요 학자로서 학문을 할 때도 성誠이요 가르침이나 모든 삶 행위도 성誠이요 사모님에 대한 극진한 모심도 성誠이었으니 그 지극정성의 삶 자체가 이미 참 본성으로 세속을 살아내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위의 책 내용에서 “정성이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으면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우러나오게 된다. 정성이 더욱 깊어져 우리의 몸 세포 하나하나에 그것이 각인되는 단계에 이르면 호흡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이는 존재의 전 과정이 정성의 발현인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가히 정성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역사상 알려졌거나 혹은 알려지지 않은 밝은이(覺者)들이 이에 속한다. 이는 한마디로 ‘나’(에고)를 잊고 ‘나’(참 본성)를 잃지 않는 경지이다.” 라는 대목을 보면 더욱 선생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선생님은 현재 아파트에서 두유나 과일주스 등으로 식사를 하시며 불편한 몸으로 혼자서 하루를 보내고 계십니다. 나는 그 선생님의 심정을 헤아려보다가 시를 한편 만들었습니다. 새는 낮게 날아 나무의 그늘로 그늘로만 옮겨 다니며 아무런 지저귐도 없이 폭염을 견디었다. 견딘다는 것은 영역과 영역의 경계를 사는 일이기도 해서 한편으론 외롭고 쓸쓸한 일이기도 했다. 모든 경계를 지우고 순일純一한 하늘을 보게 되는 어느 날이 온다면 오늘이겠지. 오늘이겠지. 그렇게 막연한 설렘 하나로 또 하루가 갔다. (박두규의 시 「또 하루가 갔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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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 강을 바라보다
    강을 바라보다 강은 저무는 강이 가장 아름답다. 물론 이것은 매우 주관적인 나의 생각이다. 안개 자욱한 새벽 강인들 아름답지 않을 것인가. 나는 언제부턴가 강을 자주 바라보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거처가 강가에 있다보니 좋든 싫든 하루 종일 강을 힐끗거리며 살고있는 것이다. 그리고 딱히 일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일과가 끝나는 저녁이면 나도 모르게 툇마루에 앉아 붉은 노을이 내려앉은 강을 바라보게 된다. 검붉은 노을의 강을 건너는 새들도 뜸해지면서 서서히 어두워지는 시간에 비례해 강은 점점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멀리 마을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며 마침내 주변이 다 어두워져도 강은 홀로 반짝이며 흐른다. 어둠 속 적막을 흐르는 빛나는 강물을 보며 앉아 있으면 지상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사무쳐 온다. 이 시간이면 마음은 끝없이 깊게 내려앉아 저절로 명상의 상태에 이른다. 실제로 십여 년 전 이 두텁나루숲에서 ‘강을 바라보다’라는 이름을 붙이고 명상 캠프를 가졌었다. 그때 아난다마르가의 수행자 칫따란잔아난다 다다를 모시고 지역의 활동가들을 포함해 열댓 명 정도가 단식하며 ‘인간의 의식층’에 대한 강의를 듣고 명상을 배웠다. 명상은세상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상을 더 깊고 밝게 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명상은 자기중심적인 관점을 극복하고 세상을 하나로 만나기 위한 것이며 ‘지금 여기’에서 실천적으로 살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세상의 많은 현상과 그 지식의 현실은 당대의 삶을 규정짓는 환경이고 조건이지만 한편으로는 존재와 생명을 구속하는 것이기도 해서 이를 극복하고 삶과 죽음의 균형감각을 일구는데 명상은 매우 유효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고 떠나고 사라지는 것들의 무상함이 주는 생의 쓸쓸함과 두려움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러한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아픔을 이 나이토록 제법 훈련받아 왔지만, 나는 아직도 늘 그 무상의 끝자락에서 울음 운다. 세속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얼추 그렇지 않은가. 욕망과 집착의 낮은 의식층을 살고 있는 한 성인군자의 그것처럼 아무리 위선을 떨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지 않던가. 평생토록 많은 지식을 머리에 담아냈다 해도 실천이 없으면 삶의 지층에는 변화가 없듯이 우리는 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속절없이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무런 말 없이 어둠 속을 흐르는 강물은 어둠 속의 빛을 끌어모아 반짝이고 또 반짝이며 우리에게 이런 생의 왜곡과 허망함을 가르쳐준다. (박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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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9
  • [숲샘의 지리산통신] 사진으로 되돌아보는 2023년 지리산
    진부한 표현이라 해도 다사다난 말고는 달리 쓸 단어가 없을 2023년 한 해도 그 꼬리를 감추고 있다. 나라 안팎이 숨 가쁘게 돌아간 올 한해, 숱은 사람이 들고 나기도 했던 지리산 자락에도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풍운아처럼 지리산과 수도산을 넘나들던 반달곰 오삼이도 그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 우리 초록걸음 길동무들도 변함없이 지리산의 실핏줄 같은 그 길들을 걷고 또 걸었다. 2023년 지리산은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로웠고 그 위태로움은 쉬 끝나지 않을 듯싶다. 산청과 함양의 케이블카, 남원 산악열차, 구례의 골프장과 양수발전 댐에 최근엔 한동안 잠잠하던 덕천강 덕산 댐까지 온 지리산이 천박한 자본주의를 앞세운 개발 광풍에 휩싸이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지리산권 지자체들은 주민 공동체가 망가지든 말든 개발에 혈안이 되어 있고 현 정부 또한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사업 승인 과정에서 보여주듯 기후 위기의 시대에 역주행하고 있으니 더 절망적이다. 그렇지만 ‘있는 그대로의 지리산’을 지키려는 지리산 사람들이 아픈 지리산 곳곳을 누비며 지리산을 껴안고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들의 이런 몸짓이 비록 달걀로 바위 치기가 될지라도 우린 우리의 방식으로 뚜벅뚜벅 지리산을 걸어갈 것이다. 1월 산청 정취암에서 맞은 해돋이, 필자가 농장으로 향하는 그 길에서 날마다 이토록 장엄한 일출이 되풀이되고 있음을... 저 멀리 한우산과 자굴산 그리고 운무에 휩싸인 단계마을까지 신비로움을 연출한다. 4월 악양 평사리 들녘, 활짝 핀 자주구름꽃 자운영 뒤로 무딤이뜰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부부송이 정겹다. 5월 지리산 둘레길 마지막 고개 밤재의 초록 터널을 지나고 있는 초록걸음 길동무들 6월 구재봉 활공장, 섬진강을 적시는 노을을 바라보는 젊은 연인들의 뒷모습을 훔치다. 반짝거리는 평사리 무논들 또한 노을로 물들어간다. 7월 운봉읍 행정마을 서어나무 숲, 필자의 어린 길동무가 지리산 둘레길이 지나는 서어나무 숲을 걸으며 숲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9월 노고단 가는 길, 아빠와 아들로 오해할 뻔한 할아버지와 아들의 뒷모습이 하도 부러워 뒤를 따라 걸으며 수없이 셔터를 눌렀다. 11월 실상사, 실상사 주변 오체투지를 마치고 보광전 앞에서 합장하면서 마무리하는 길동무들의 뒷모습을 보며 지리산의 깊고 엄숙한 울림이 그대로 전해져 왔음을... 12월 눈 쌓인 천왕봉, 지리산 둘레길이 지나는 산천재 앞 덕천강을 가로지르는 돌다리에서 신령스럽기만 한 천왕봉을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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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편지
    2023-12-27
  • 가여워하는 마음
    가여워하는 마음 어김없이 새날이 오듯 새해도 온다. 그리고 사람들은 바쁜 연말이나 연시의 와중에도 한 번쯤은 가는 세월이나 오는 세월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거나 다짐하게 된다. 나는 인생 간판에 시인 딱지를 붙이고 살다 보니 연말연시가 되면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가끔 되짚어보곤 하는 것인데 그때마다 박수근(화가)이 했다는 말이 떠오르곤 한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 기억에도 없는데 느닷없이 날아온 돌멩이처럼 나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수시로 울림을 준다. 예술이 아름다움의 영역이라면 그 아름다움은 선함과 진실함의 바탕에서 이루어진다는 어떤 믿음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의 말처럼 정말 평범한 일상생활 속의 착함과 진정함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그냥 스치고 지나갈 수도 있는 이 말이 나에게 강하게 올 수 있었던 건 아마 당시 이런저런 경전들을 읽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경전의 바탕이 선함과 진실함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때 그것들을 읽어내며 스스로의 단어로 정리해낸 말은 ‘가여워하는 마음’이었다. 그 즈음에 나온 시집의 제목을 ‘가여운 나를 위로하다’라고 붙인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새 정부가 들어선 후 이런저런 부족한 짓, 말도 안 되는 짓, 터무니없는 짓들을 많이 한다고 하는데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은 윤가와 그의 사람들에게는 이 ‘가여워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이긴 자가 진 자에 대해 그리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 또는 민초들에 대해 ‘가여워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 됨의 근본이 없는 것이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연민도 없이 살아가는 것들이 무슨 정치며 예술이며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마음을 학문이나 사상에 앞서 삶 속에서 잘 보여준 옛사람으로 퇴계 이황 선생이 있다. 요즘 자본주의 기후 위기에 연계된 이런저런 책들을 보게 되었는데 21세기에 들어 사상적 출구를 모색하는 세계의 석학들에게 주목받는 사람 중에 퇴계 선생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퇴계를 생각하면 그의 사상이나 학문보다는 그가 살아낸 구체적인 일상 삶과 그를 통해 보여준 ‘가여워하는 마음’이 먼저 떠오른다. 그는 스물한 살에 결혼하고 아내 김해 허씨와 함께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지만, 아내가 결혼 6년 만에 병사한다. 그리고 3년 상을 치른 후 재혼하는데 맞아들인 권씨 부인은 정신질환이 있는 병약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퇴계가 마음속으로 존경했던 권주(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사약)의 아들 권질의 딸이었다. 권질은 조광조 숙청의 기묘사화 때 예안으로 귀양 와 있었는데 퇴계가 이따금 찾아가 문안 인사를 하며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권질은 병을 얻어 죽으며 여러모로 부족한 딸을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퇴계에게 딸을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퇴계는 마음속으로 존경하던 분의 집안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몰락하는데 자손들마저 불행해지는 것이 가슴 아파서 그 딸을 맞아들여 재혼하게 된다. 하지만 퇴계 선생의 진정 훌륭한 점은 결혼 후 그 정신적 질환이 있는 부인에게 ‘손님처럼 공경하는 법도’를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퇴계 선생이 공부하고 펼친 지식과 사상이 현실 속에 살아있는 학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또 그의 ‘가여워하는 마음’의 정도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알다시피 퇴계는 인간의 근본 마음 네 가지 중 앞세운 것이 측은지심(仁)이며 바로 ‘가여워하는 마음’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늘 4단四端의 마음을 중심에 두고 7정七情의 마음을 경계하는 것이 당시 선비들의 수행이고 공부였는데 선생은 삶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결혼생활도 16년 만에 권씨 부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퇴계의 ‘손님처럼 공경하는 법도’ 또한 그렇게 끝났는데 퇴계는 훗날 그 시절을 ‘결혼생활 16년 동안 더러는 마음이 뒤틀리고 생각이 산란하여 고뇌를 견디기 어려운 적이 없지 않았다’라고 술회한다. 이러한 고백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비록 퇴계가 그 시절을 자신의 덕을 쌓는 수양의 화두로 삼아 모범을 보였다고는 하나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나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퇴계의 ‘가여워하는 마음’을 짐작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일화는 그의 며느리 이야기다. 둘째 아들 채(寀)는 정혼한 상태였는데 그 아들이 결혼을 앞두고 급사하게 된다. 그래서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예식도 못 올린 며느리를 맞이해야만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퇴계는 당시 삼종지의三從之義의 엄격한 규율을 깨뜨리고 처녀의 몸으로 며느리가 된 여인을 친정으로 돌려보내 재가하게 한다. 퇴계 선생의 삶의 바탕에 있던 ‘가여워하는 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퇴계는 엄격한 유가의 선비였으나 깊은 인간애에 바탕을 둔 스스로의 삶을 꾸려내었으며 세상의 법도 이전의 ‘불법不法의 예’를 보인 진정한 유가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퇴계는 첫째 부인이 죽은 후 두 아들을 양육하기 위해 관례에 따라 첩을 들였는데 그 첩도 선생보다 먼저 죽게 된다. 첩에게서 낳은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 또한 자신의 호적에 올렸고 차후에 그 아들의 후손들이 적서의 차별을 받지 않도록 족보에 적서의 구별을 두지 않게 하였다. 또 퇴계 선생은 이런저런 굴곡의 가정사를 다 넘기고 홀아비 생활을 하는 중에 단양군수로 있을 때는 단종 복위에 참여했던 사대부의 후손으로 어린 나이에 관기가 된 기생 두향을 소실로 맞아 외로움을 달래고 남녀의 사랑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서자와 관기라는 당시 천한 신분의 사람에게도 시대의 법도를 넘어 사람의 근본에 있는 ‘가여워하는 마음’으로 차별 없이 대하였다. 나는 퇴계 선생의 아픈 가정사를 보면서 평범한 일상생활 속의 착함과 진정함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박수근이 말한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그 말의 깊이를 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황이라는 사람은 위대한 학자요 사상가이기 전에 ‘가여워하는 마음’이라는 존재의 근본을 깨달은 사람이고 그렇게 자신을 살아낸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작금의 우리 사회는 이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는가. 제 이익과 안위만을 생각하는 권력을 보면서, 그들의 치졸한 양아치 정치를 보면서, 윤가와 그 권력의 발뒤꿈치를 쪼아 먹고 사는 닥터피쉬들을 보면서, 그 언론과 정치권과 검찰과 윤의 사람들을 보면서, 언감생심焉敢生心‘가여워하는 마음’을 꿈꿀 수는 있을 것인가 하는 절망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나라를 맡긴 것은 국민이니 한편으론 할 말도 없다. 이는 모두 자본주의, 자유주의라는 왜곡된 이데올로기 안에서 돈만 있으면 되고 나만 살면 된다는 그릇된 가치관의 정서가 우리 사회 안에서 당위적 정당성을 얻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가치관의 변화 없이는 우리 사회의 ‘가여워하는 마음’은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퇴계 선생처럼 개개인의 진정성으로 실천하는 정도를 넘어 지난날 촛불처럼 온 국민이 지극정성으로 ‘가여워하는 마음’을 기원하게 되기를 바란다. (박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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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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