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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늘
    바늘 김 경 옥 쇠를 갈고 남은 몸이다 매끈한 은빛 몸매 뾰족한 침 끝, 더는 아무것도 없다 저 침에 닿을 때까지 사방 팔방 십이방 모서리 없어지고 이웃마저 사라질 때까지 얼마나 제 몸을 깎아냈을까 이 악물고 덜어내어 물러설 수 없는 절벽에 이르렀을까 갈고 닦는 일의 무한함이여 깎고 덜어내는 일의 은은한 아픔이여 가는 몸속에서 들리는 소리 하나에 기울이며 작은 귀 하나만 열어놓은 세월이여. --------------------------------------------------------------- 죽을 때까지 배우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는 말은 그저 지식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무엇이며 왜 존재하고 있으며 이 세상은 또 무엇인가 하는 궁극적 질문을 안고 사는 존재다. 세상을 살아내는 일의 첫 번째가 나의 존재와 나를 존재하게 하는 이 세상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느티나무의 작은 박새 한 마리도 알에서 깨어나 날개를 퍼덕이며 제가 날짐승인지 들짐승인지부터 가늠하고 바람이 불면 어디로 날아야 한다는 것을 눈치 채며 자란다. 그렇게 모든 생명은 구체적 생활세계 속에서 자기 존재와 세상을 일치시켜내는 것이 세상을 살아내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그 답을 말하고 죽는다. 태어나 죽기까지의 삶 자체가 스스로의 답일 것이니 그렇다. 다시 말하면 삶에는 정답이 없고 우리는 스스로를 살다가 죽을 뿐이다. (박두규. 시인)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11-13
  • 안개 유감
    「섬진강 편지」 -안개 유감 2023년 10월 22일 안개, 10월 23일 안개, 10월 24일 안개, 10월 25일 안개, 10월 26일 안개, 내리 닷새 아침 안개가 점령군처럼 구례를 장악했습니다. 안개가 옅은 날은 9시쯤이면 걷히지만 독한 날은 11시가 되어서야 해를 볼 수 있습니다. 섬진강과 서시천, 그리고 지리산 골짜기 아래마다 하나씩 있는 저수지들이 봄가을이면 구례를 안개의 마을로 만듭니다. 구례로 이사를 와서 8년이 지나고 나서야 안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구례 사람이면 다 알고 있는 안개의 피해를 모르고 아침마다 안개 예찬론을 펼쳤으니 얼마나 철부지로 보였을까요! 봄, 가을이면 일조량이 현저히 부족하고 습도가 높아 농작물들은 병에 취약하고 강마을 노인들은 기관지, 천식 등으로 고통을 받는답니다. 오죽하면 안개를 피해 산동으로 이사를 가려고 하겠느냐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그런데 최근에 지자체가 유치 신청한 양수발전소가 건설되게 된다면 구례는 그야말로 안개공화국이 되고 말겠지요. 섬진강댐보다 큰 규모의 댐이 2개나 들어선다면 1년 내내 안개에 시달리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거기다가 양수발전에 부족한 물은 섬진강에서 끌어 쓰게 된다니 그렇지 않아도 바닥으로 겨우 기어가는 섬진강물은 더 마를 것이고 가둬둔 물을 흘려보내게 되면 섬진강 하류의 오염은 뻔하지요. 구례는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들어 내는 때 묻지 않은 풍광들이 있어 귀촌자들이 선호하는 지역입니다. 귀촌 인구가 감소 추세인 최근에도 705명(2022년, 구례군 자료)이 귀촌했을 정도로 구례는 3년간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나를 포함한 구례지역 귀촌자들의 특성은 주로 자연환경을 중시하는 사람들로 최근 우리 마을에 7명의 젊은이가 이사를 왔는데 다들 구례의 천연 풍광에 매료되어 온 친구들입니다. 진정 애향 애민의 위정자들이라면 국비 1조 원이란 곶감으로 지역민들을 현혹하지 말고 “자연으로 가는 길, 구례”의 본심을 잊지 않도록 고심해야 할 것입니다. 댐이 들어서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어 30여 년 전에 댐이 건설된 순천 주암댐 주민들의 호소를 들어보시라! "자욱한 안개에 폐암까지"‥주암댐 주민 피해 호소 https://ysmbc.co.kr/article/d4H__7afKF797La-l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3-10-27
  • 몸 가르침 한 수
    몸 가르침 한 수 절에 있을 때 이야기다. 참 오래된 이야긴데 나는 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갈 곳이 없었다. 집에 있자니 부모님 보기도 민망하고 나가 돌아다니자니 어느 대학에 갔냐는 질문이 무서워 사람 만나는 것도 겁나고, 혼자 빈둥거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어서 작은 보따리 하나 들고 무작정 절로 들어갔다. 그 길로 거의 1년을 절집에서 살았는데 그해 여름의 일이었다. 그곳은 서래선림(西來禪林)이라는 비석이 입구에 서 있는 지장암(地藏庵)이라는 절이었는데 해안(海眼) 큰스님이 돌아가시고 사부대중의 발길이 끊기고 상좌들도 밖으로 나가 있어서 말 그대로 절간처럼 조용한 절이었다. 때는 한 여름이라 녹음이 짙을 대로 짙어져 숲 그늘에 누워 잔잔한 바람에 책이라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달콤한 낮잠에 빠지곤 하던 시절이었다. 그 여름 어느 날 객승이 한 분 오셨는데 작달막한 키에 별 말이 없는 얼추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스님이었다. 대개 스님들은 객으로 묵을 때면 예의상 곧잘 예불도 드리곤 하는데, 그 스님은 아침 예불이건 저녁 예불이건 한 번도 불당에 오르는 일이 없고, 도통 방에만 틀어박혀 나올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방에서 공부를 하거나 참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거의 종일토록 잠을 자거나 방에서 빈둥거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부턴가 그 스님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한 낮에도 쉬지 않고 해가 질 때까지 죽어라고 일만 하였다. 특별히 할 일이 없는데도, 이를테면 아랫마당에서 법당까지 놓여 있는 돌계단을 괜히 파헤쳐 놓고 다시 하나하나 계단을 맞추어 쌓는 그런 일이었다. 내가 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멀쩡한 돌계단을 부수고 쌓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더우니 보통 이른 아침이나 저녁나절에 강한 햇살이 죽었을 때 일을 하는 법인데 이 스님은 태양이 이글거리기 시작하는 10시쯤에야 일을 시작하여 밖에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그런 뙤약볕에서 일을 하다가 해가 지는 무렵이면 일을 끝냈다. 정말 온몸이 땀에 젖어 금방 물에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젖은 채 하루 종일 일을 하였다.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났으나 스님은 매일매일 죽어라고 일만 했다. 그런 스님에게 나는 말 붙이기도 왠지 꺼려했는데 하도 궁금해서 언젠가 ‘스님, 왜 스님은 예불은 안 모시고 일만 한답니까?’ 하고 물었더니 스님은 별다른 표정도 없이 ‘나는 예불 드리는 거 몰라.’ 라며 마당으로 가서 또 괜한 돌계단을 허무는 것이었다. 진짜로 염불을 못하는 것인지 궁금했고, 염불도 못하면서 어떻게 스님이 되었는지도 궁금했다. 아니 무엇보다도 왜 그렇게 가장 더운 시간에 미친 듯이 일만 하는 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 스님은 나의 이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고 언젠가 말도 없이 훌쩍 지장암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30년이 지난 지금, 가끔 그 스님이 생각난다. 아니 그는 3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나를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일에 말만 앞세우고 말로만 해결하려 들며 몸은 까딱도 않는 나에게 말이 아닌 ‘몸’을 가르쳐준 스승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보다는 ‘몸의 행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강변하듯 그의 여름날 노동이 그의 수행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수행은 말보다도 공부보다도, 온몸의 행위로 진실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 위한 것은 아니었나 싶다. 입만 벙긋하면 거짓말이 튀어나오는 거짓 덩어리의 이 몸뚱어리, 살아온 세월만큼 두꺼워진 위선의 몸집, 거짓으로 가득 찬 비만의 몸뚱어리에게 ‘진실’이 무엇인가를 이처럼 명쾌하게 가르쳐주는 스승은 아직 없었다. 사실 요즘 현대인들은 가급적이면 모든 일을 ‘앉아서’ 처리하려고 한다. ‘몸으로 뛰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현대 과학기술문명과 컴퓨터 문화의 일반화로 사람들의 생활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져서 몸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치장’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사는 것 같다. 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상품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몸을 아름답게 가꾸려고 하는 것, 그 자체는 이해할 수는 있으나 그것의 궁극적인 지향은 결국 몸의 상품성을 높이는 것으로 귀착되는듯하여 씁쓸하다. 요즘 세태를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사실 인류의 역사가 자본주의의 역사로 넘어 오면서 전 지구적 시장경제를 통해 지상의 모든 것은 이미 상품이 되어 버렸으니 ‘몸’인들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즘 부쩍 더 30년 전의 그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나는 스님이 자주 내 앞에 나타나 어른거린다. (박두규. 시인) -노루귀 /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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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편지
    2023-03-08
  • 겨울 산에서
    ■ 시 겨울 산에서 이건청 나는 겨울 산이 엄동의 바람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서서 겨울밤을 견디고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큰 그늘 속에 빠져 기진해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작은 암자에 며칠을 머물면서 나는 겨울 산이 살아 울리는 장엄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대개 자정을 넘은 시간에 시작되곤 했는데 산 아래, 한신계곡이나 칠선계곡 쪽을 지나 대원사 스쳐 남해 바다로 간다는 지리산 어느 골짜기 물들이 첫 소절을 울리면 차츰 위쪽이 그 소리를 받으면서 그 소리 속으로 섞여 들곤 하였는데 올라오면서 마천면 농협 하나로마트 지나 대나무 숲을 깨우고 산비탈, 마천 사람들의 오래된 봉분의 묘소도 흔들어 깨우면서 골짜기로 골짜기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오를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곡진한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었는데 산 중턱을 넘어서면서 홍송들이 백 년, 이 백년씩 그들의 가지로 서로의 어깨를 걸친 채 장대한 비탈을 이루고 있는 곳까지 와서는 웅장한 코러스가 되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내가 사순절의 어느 날, 대성당에서 들었던 그레고리 찬트의 높은 소절과 낮은 소절이 번갈아 마주치는 어느 부분과 같았다. 이따금 이 산에 사는 산짐승들이 대합창의 어느 부분에 끼어들기도 하는 것 같았는데 그때마다 그레고리 찬트 속에서 짐승들의 푸른 안광이 빛나곤 하였다. 겨울 산이 울려내는 대합창이 온 산을 울리다가 서서히 함양 쪽으로 잦아들 때쯤 건너 쪽 지리산 반야봉, 제석봉의 윤곽도 밝아오는 것이었는데 날이 밝고 산의 윤곽들이 선연해지면 자작나무도 굴참나무도 그냥 추운 산의 일부로 돌아가 원래의 자리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는 것이었다. 그냥 겨울 산이 되어 침묵 속으로 잠겨드는 것이었다.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02-26
  • 지리산 법화종주
    「섬진강 편지」 -지리산 법화종주 천왕봉,제석봉,연하봉,촛대봉,영신봉,칠선봉, 덕평봉,형제봉,삼각봉,명선봉,토끼봉,삼도봉 2박 3일, 지리산 품으로 출가를 했습니다 40km 지리능선 수많은 봉우리를 오르내린 수행길 절뚝이며 휘청이며 30시간을 걸으며 우리네 삶도, 사랑도 이렇게 숱한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깊어지는 것임을 온몸으로 배웠습니다. 폐절제 수술 3년이 지나고 망설이던 지리산 종주까지 무사히 마치고 나니 폐가 잘려 나간 자리에 새로운 기운이 차오르는 것 같습니다. 넘어지면 손잡아 주고 가파르면 끌어주고 카메라 짐을 나누어지어 준 지리산사람들 길동무님들이 있어 힘들다는 겨울 지리산 종주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마칠 수 있어 참 행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모두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섬진강 /김인호 *지리산 법화종주 ; 법계사에서 화엄사까지 오는 종주길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3-01-26
  •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학의 길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학의 길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 박 두 규 (시인) 1 코로나 국면을 맞고 보니 그동안 꾸준히 거론되어 오던 기후변화에 따른 전 지구적 위기라는 것이 코앞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문학은 무엇인가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우리는 문학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논의를 해왔지만 지금의 현실상황을 보면 ‘지구 위기, 인류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문학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학도 과학이나 기술처럼 현실에서 우선적으로 ‘지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삶 문학에 일정 부분 복무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도 문학은 문학대로 지금껏 확장해온 영역이 있고 인류사 속에서 다양하게 그 역할을 해왔으며 또 어떤 특별한 상황 속에서는 그 상황에 맞게 대응해왔기 때문에 지금처럼 그렇게 하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이 상상력의 문학이고 영적 문학이라는 점과 ‘지구의 위기, 인류의 위기’의 현실에 대한 복무를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100년의 지구, 100년의 인류를 염두에 두며 글을 통해 더 세밀하게 그려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의 과학과 기술보다 100년의 현실을 앞서 이야기하고 노래하며 올바른 방향의 길을 찾는 더듬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 요즘 쏟아져 나오는 학자들의 글들을 읽어 보면 기후 환경으로 인한 지구의 위기 상황은 현실의 감도보다 훨씬 심각하다. 지금 우리가 해마다 역대 기록을 갱신하며 겪는 자연재해는 단순한 재해가 아니라 대량학살의 위기이며 재앙의 시작이라고 봐야 옳다는 것이다. 인류가 자본주의 문명의 현행 기조를 고수할 경우 2100년에는 탄소배출량으로 인해 지구의 기온이 약 4도 이상 상승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북극의 빙상은 이미 붕괴된 지 오래고 알프스의 만년설은 70% 이상 녹으며 해수면은 최대 2.4미터 상승할 수 있다고 한다. 인구 천만의 자카르타 같은 도시가 물에 잠기며 세계의 주요도시는 거의 2/3가 해안에 위치해 있으니 그에 따른 발전소, 항구, 농경지 등 주요시설도 함께 위험해질 것이다. 그리고 적도 지방의 주요 도시들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한다고 한다. 이미 2018년 폭염 시에 로스엔젤레스 42도, 파키스탄 50도, 알제리 51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물 부족과 폭염으로 북위도 지역마저도 해마다 수천 명이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가 끝날 무렵이면 코로나와 같은 새로운 질병들, 상상을 초월하는 산불과 홍수의 증가, 수천만 명에 이르는 기후 난민, 경제 대공황과 지역 간의 기후분쟁, 농산물 생산이 크게 줄면서 일어나는 자원전쟁 등 한 해 기준 100조 달러의 세계 피해규모가 예상된다니 앞으로 80년 안에 변화될 지구의 모습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지금의 자본주의적 개발과 소비 패턴에서 조금도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진행되었을 경우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코로나19가 해결된다 해도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 예전의 일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지구와 인류는 이미 변화의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새로운 문명이 일어나는 시점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기존의 자본주의를 토대로 이루어낸 과학기술문명, 물질문명의 틀에서 벗어나 이전의 의식에서 한 단계 점핑된 도덕적 과학기술과 새로운 정신문명으로의 판짜기 변화가 절실해진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현재 소비와 개발성장의 자본문명에서 전환하여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 갈 것인가를 이야기해야 된다. 포스트 코로나를 맞아 변화되어야 할 의, 식, 주, 의료, 교육 그리고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까지 기존의 질서와 그 틀을 어떻게 바꿔가야 할 것인지를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문학은 이 현실 변화의 중심에서 어떤 마음, 어떤 영혼을 가진 인간이어야 하는 것을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3 지금껏 지구와 인류의 위기를 초래해온 자본문명을 벗어나 새로운 문명을 꿈꾼다면 먼저 기존의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세계관 등 일상 속의 대중들에게도 정신적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생각이 바뀌어야 그 삶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정제 없이 그대로 반영된 이데올로기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그렇게 이익을 극대화하며 개발과 성장의 경제논리로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 자본주의다. 자본은 배고픔과 위험한 환경 조건에서 풍요로움과 안전함과 편리함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 도를 넘어 인간의 끝없는 탐욕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렇게 인류는 풍요와 편리를 거느린 현실 자본주의를 앞세워 공존공생을 위한 사회적 도덕과 윤리의 경계를 깨고 탐욕과 욕망을 당연하고 정당한 인간 정서로 편입시켰다. 단순하게 이야기 했지만 사실 이런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자본주의와 잘 어울려 끝없이 달려온 결과 현재의 지구와 인류의 위기를 맞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개인의 인간도 그 탐욕이 지나치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반성과 성찰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 인류는 21세기가 끝나는 지점부터는 지금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혹독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사피엔스의 종말을 향해 추락해 갈 것이다. 그래서 문학예술은 지금의 시점에서 좀 더 집중적으로 21세기 이후의 현실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한 새로운 문명, 새로운 문학예술에 복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문명에 대응하는 문학을 생각하려면 자본주의의 속성인 탐욕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철학, 새로운 문화를 궁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어쩌면 삶의 본질과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총체적 근원으로부터 오는 것이어서 그것은 현실 자본주의를 벗어나 근본 진리의 삶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본래 모든 생명들은 함께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공존공생의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과 그것을 위해 인간은 가장 경계해야 할 본성인 ‘탐욕’을 꾸준히 정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4 나는 이것을 문학이라는 영역에서 생각한다면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는 ‘단순한 삶’과 ‘소박한 삶’을 하나로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인데 ‘단순한 삶’의 문학은 개인 스스로를 전체의 한 부분이면서, 그렇기 때문에 전체라는, 그래서 전체를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라는, 이미 붓다나 예수 등 많은 현자들이 발견했던 동체대비, 궁극과의 합일 등 진리의 삶과 연계되어 있는 것이며 이를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문학을 말한다. 이는 ‘단순성’이라는 진리의 영역을 문학으로 가져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실현할 수 있는 ‘단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삶은 당장 그렇게 살려는 스스로의 결단과 실천만 있으면 되는 ‘단순성’에서 시작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진리에 의해 사는 삶’은 어떤 거창한 것은 아니고 현재의 실상을 바로보고 그것에 어긋남 없이 사는 것, 다시 말하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의 실상은 모두가 있는 그대로 어울려(연기적 관계를 가지고) 전체가 하나의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있는 그대로(본질 그대로) 어울려 순환하고 진화하는 것이 바로 ‘단순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변곡점에서 문학이 주시해야 할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소박한 삶’은 이런 ‘단순한 삶’을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 사실은 방법이면서 그 본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를 진화시켰던 인간의 탐욕은 끝없는 집착을 가져와 현재 지구의 기후재앙과 함께 모든 문제의 화근이 되었고 이 탐욕과 집착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소박한 삶’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본의 끝없는 성장 시나리오는 이제 그 한계에 왔다. 대체 에너지 등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과학기술의 노력과 성과가 있다하더라도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충족시킬 수는 없다. 결국은 소박한 삶으로 가지 않으면 해결 될 수 없는 것이다. ‘소박한 삶’은 스스로의 탐욕을 다스리는 삶이고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을 조화와 균형으로 이끄는 해답이라고 본다. 이‘소박한 삶’을 통해 모든 생명과 지구가 하나의 완결체로 존재할 수 있는 공존, 공생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하고 새로운 문명의 길로 가는 길목에 이러한 물질 중심의 삶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 문학적 화두를 통해 개인의 이기(利己)를 극복하고 무아(無我)와 탈에고(脫ego)의 수준까지 의식을 확장하여 탐욕을 순치(順治)하는데 기여해야 하는 것이 현재의 문학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코로나19와 같은 새로운 질병들과 지구의 기후재앙을 막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첫눈이 내린 노고단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2-12-16

실시간 지리산문화 기사

  • 어머니
    「섬진강 편지」 - 어머니 강물이 얼마나 불어났나 보려 섬진강 문척다리를 건너 가는데 반대 차선에서 할머니가 위험하게 보행기를 밀고 온다. 서둘러 갓길에 차를 세우고 달려가 할머니의 보행기를 인도 쪽으로 옮겨 놓고 할머니에게 이쪽으로 가야한다하니 그쪽은 좁아서 그냥 차도로 가고 싶단다. 그냥 가시라고 하면 다시 차도 쪽으로 가실 것 같아 보행기를 밀며 한참을 할머니와 함께 걸었다. 98세 나이에 십리 너머 읍내에 사는 막내딸 주려고 장맛비 잠시 그친 틈으로 수박 두 덩이와 참외 다섯 개를 싣고 가시는 길이다. 십리 길이지만 할머니 걸음으로는 두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다. 장대비가 비가 쏟아지지 않은게 천만다행이었다. 딸에게 전화해서 가져가라 하지 그랬냐니까 딸은 먹고 사느라 바빠서 갔다 줘야 쓴단다. 아, 그랬지. 그랬었지요 우리는 늘 우리들 먹고 사느라 바빠서 어머니 전화도 서둘러 끊었지요 고맙소 고맙소 들릴 듯 말 듯 인사를 몇 번이나 건네며 가시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다 돌아왔는데 마을방송에서 누구 누구 어머니의 부음이 들려온다. 장마 틈사이 능청스럽게 푸른 하늘을 올려본다. 어머니! -섬진강/ 김인호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3-07-18
  • 재세이화 홍익인간
    재세이화 홍익인간 ► 一神降衷일신강충, 性通光明성통광명, 在世理化재세이화, 弘益人間홍익인간 (본래 신성이라고 할 수 있는 진성이 사람의 중심에 내려와 있으며 이 본성을 통하면 모든 것이 환하게 광명해진다. 이러한 근본 이치(진리)를 펼치는 세상을 이루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해야 한다) 위 구절은 『三一神誥삼일신고』의 내용과 목적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말인데 괄호 속 구절의 해석은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말을 조금 덧붙였다. 『三一神誥삼일신고』는 우리 상고사 속의 경전으로 진리의 모체가 되는 원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천부경’과 함께 단군 이전의 시절부터 백성들을 일깨우기 위해 쓰였던 경전인데 삼성기전과 단군세기, 태백일사 같은 책에서도 ‘백성들을 교화할 때 천경(천부경)과 신고(삼일신고)를 가르치고 환단의 옛 역사를 강론했다’고 나온다. 이 경전들은 처음에는 구전되다가 환웅시절에 녹도문자로 기록되었으며 단군시절에 와서 가림토 문자로 기록되었고 이후 한자로 전해져 지금에 이른다고 전한다. 이런 상고사 속의 경전들은 학계에서는 환국 7세, 신시의 환웅 18세, 그리고 단군 47세의 상고사 자체를 고증하기 어려워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나는 중국의 고서나 우리의 고문헌 속에 단편적으로 나오는 구체적 사실 언급들을 보면 존재했던 과거사임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삼일신고의 三一思想삼일사상은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이며 천지인(天地人) 우주만물이 하나라는 사상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는 좀 넓게 보면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인내천 사상과도 상통하며 모든 생명은 서로 뗄 수 없는 하나의 존재라는 생명평화결사의 ‘어울림 삶 무늬’의 의미와도 그 괘를 같이 한다. 위의 ‘一神降衷일신강충’은 하나의 신이 몸 가운데 내려와 있다는 것인데 이는 삼일신고의 2장 一神에 나오는 구절인 ‘자성구자自性求子강재이뇌降在爾腦’의 구절에서 비롯된다. 자성自性은 자신의 본성이니 자성구자自性求子는 그 본성에서 하나님의 씨를 구하라는 것이고, 강재이뇌降在爾腦’는 너의 머릿골 속에 내려와 있다는 뜻이니 이는 곧 스스로의 본성(본래면목)은 신성의 그것이며 이미 가지고 태어났으니 스스로의 안에서 찾고 구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性通光明성통광명은 그 본성을 통하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는 빛과 같은 밝은 지혜가 생긴다는 것이며 在世理化재세이화, 弘益人間홍익인간은 이러한 이치와 진리를 통해 세상을 다스려서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일신강충과 성통광명’은 性通성통을 말한 것이고 ‘재세이화 홍익인간’은 功完공완을 말한 것인데, 요즘에 맞춰 말하면 性通성통은 인간의 참성품을 깨달아 자기완성에 이르는 것이며 功完공완은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적 실천을 완성한다는 사회적 삶에 관한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을 닦아서 진리를 깨달아 세상에서 실천을 완성하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삼일신고에서 말하는 性通功完성통공완의 진리다. 나는 『三一神誥삼일신고』를 보며 상고(上古)의 그 오랜 옛날 정신세계는 오늘날의 그것과 비교할 때 훨씬 높았으며 세상을 살아내는 구체적인 삶 또한 더 바르고 깊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날의 과학기술문명이 삶의 풍요로움과 편리함을 가져오기는 했으나 그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자본주의에 이르면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부추겼고 인류 역사의 모든 사건 사고가 이것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본다. 그리고 상고의 시대건 요즘과 같은 문명의 시대건 사람의 본질은 같은 것일 테니 삶의 근본 원리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사실 ‘나(우리)는 왜 사는가?’라는 근본 질문보다는 먹고 즐기는 것에 우선을 두고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다. 또한 진리가 삶의 바탕에서 운용되는 세상이야말로 진정한 유토피아이고 사랑과 평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진리가 책 속에만 있고 일상 삶 속으로 내려오지 않는 한 태어나면서부터 존재한다는 머릿골 속의 높고 귀한 신성의 자성은 자신의 것이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하면 끝내 먹고사는 일의 일차적 욕구만으로 세상을 살다 간다면 요샛말로 정작 메인요리는 먹어 보지 못하고 에피타이저만 먹고 끝나는 것이니 그 또한 얼마나 억울하고 손해 보는 일인가. (박두규/시인)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3-07-13
  • 반내골 정씨
    반내골 정씨 박두규 구례를 떠나지 않았던 그의 마음을 이제는 조금 알만도 하다. 구례의 해방구 시절 이후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 시절을 기억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산은 끝내 산으로 남아 흐르는 세월을 견디면 그뿐이지만 사람의 한 세월은 끝내 머물고 마는가. 광주옥사를 나온 정씨는 놀림받는 빨찌산의 딸을 데리고 서울로 순천으로 떠돌다가 탯줄을 묻은 반내골에 다시 들어왔다. 꿈이라고 말하기엔 저 산들이 너무 가까이에 있고 동지였던 아내의 몸은 너무 무너져 있었다. 이제는 자본의 세월이 만들어준 평범한 촌로의 모습으로 시골 아파트 관리인이 되었건만 관리실에 앉아 조간신문을 뒤적이다 문득 고개를 들면 눈 덮인 노고단 너머로 희뿌연 하늘이 아른거리곤 했다. 누구에게나 한 시절이 있는 거라며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면 이렇게 남아 있을 까닭도 없었다. 스스로 지울 수도 지울 필요도 없는 그 한 시절이 그리워서도 아니었다. 살랑이는 겨울강의 풋바람을 맞으며 걸어도 아직은 선선히 내놓을 목숨에 이르지 못했고 굼틀리는 산자락의 햇살을 보면 늙어빠진 몸뚱 어느 구석 이념도 사상도 아닌 사무치는 능선들이 아직도 따라서 굼틀리고 있기 때문이다.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07-13
  • 왕우렁이
     「섬진강 편지」 -왕우렁이 이제 뿌리를 내리고 제법 자리를 잡은 벼 줄기에 포도송이 모양의 섬뜩한 분홍빛 벌레알들이 여기저기 매달려있다. 논두렁의 풀밭에도 겁나게 매달려 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왕우렁이 알들이다. 지난 1992년 남아메리카에서 도입한 왕우렁이가 논의 잡초를 먹어 치우는 우렁이농법은 친환경 벼농사법으로 각광받아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왕우렁이는 한 번에 평균 320개 가량의 알들을 산란한다. 평균 수명 2~6년을 사는 동안 여러 번 산란한다. 게다가 부화 후 3개월 만에 성체가 될 만큼 성장력도 빠르다. 더 큰 문제는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동면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지금은 주로 남부지역에서 월동란(卵)이 발견되고 있지만 머지않아 전국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왕우렁이가 식성이 대단해 논의 잡초만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벼의 뿌리까지 먹어 치운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피해가 심해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에서 생태계 교란위해종으로 분류했다. 잡초제거용으로 보급한 왕우렁이 퇴치를 위해 각 나라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한다. 미국은 왕우렁이 방제에 소요된 금액만도 100억 달러에 이르고 일본은 지난 1994년 규슈지방 논의 16%가 벼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인간들의 얄팍한 욕심에 의해 강제적으로 변화시킨 자연의 이변이 어디 한둘인가? 일본의 후쿠시마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 문제도 그렇다. 지금 당장 처리비용이 적게 든다는 이유로 강제로 바다에 흘려보내겠단다. 그래도 과학적?으로 피해가 없을 것이라고 떠들어대지만 100년도 못사는 사람들의 얄팍함으로 수천만 년 대자연의 질책을 어찌 감당하려는가 기왕지사 마을 앞 논에 우렁이가 많으니 우렁이를 숙주로 하는 늦반딧불이라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랬더니 토종 우렁이와는 달라 왕우렁이가 오히려 반딧불이 유충까지도 먹어 치워 버릴 것이라니 참, 허참이다. -섬진강 / 김인호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3-07-12
  • 가장 아름다운 춤, 멈춤
    「섬진강 편지」 - 가장 아름다운 춤, 멈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이 멈춤이라는 말을 창문 너머로 산안개 춤추는 지리산중에서 들었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높이라는 욕망의 막춤을 끝내고 돌아봐야 할, 멈춤이라는 춤을 추어야 할 시간이란다 지구의 평균온도가 십 만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하며 날마다 뜨거워지고 있다. 밤이면 폭우주의보 낮이면 폭염주의보에 시달리고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르는 핵오염수 방류문제로 불안해야 하는 날들이다. 지역에서도 양수발전 건설로 찬반 의견이 분분하지만 명확한 것은 전기사용량이 늘어나고 거기에 대처하기 위해 또 산을 깎아내고 바다를 메워 발전소를 건설해야 하는 악순환을 멈춰야 한다. 춤 중에 가장 아름답다는 춤, 그 멈춤의 주인공은 네가 아닌 나다. 내가 쓰는 전기사용량은 줄이지 않으면서 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것도 이상기후를 걱정하는 것도 모순이다. 전기사용을 줄이는 실천이 그 멈춤의 첫걸음이다. 당장 내가 실천 할 수 있는 방법들은 그리 어렵지 않다 △ 사용하지 않는 전자제품 플러그 뽑기 △ TV시청시간 외에는 셋톱박스 전원 끄기 △ TV볼륨 줄이기 △ 자연해동 후 전자렌지 사용하기 △ 비데 온열 기능 끄기 △ 세탁물은 적정량 모아서 세탁하기 △ 에너지소비효율1등급 제품 사용하기 △ 외출 시 유무선 공유기 전원 끄기 △ 진공청소기 흡입강도 한 단계 낮춰 사용하기 △ 냉장고의 냉장실은 여유 있게 사용하기 이런 사소한 방법들로 하루 1kWh 줄이기를 실천할 수 있다니 당장 가장 아름다운 춤인 멈춤을 한번 춰보자 - 섬진강 / 김인호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3-07-11
  • 산내 가는 길
    「섬진강 편지」 -산내 가는 길 지구 평균 기온이 17도를 넘어서 사흘 연속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뉴스 폭염경보 아니면 폭우경보 두두두두 난사되는 경보 문자의 나날들 내일은 또 무슨 문자가 발사될지 비가 쏟아지는 정령치를 넘어 산내 실상사에 갔다가 구름 가득한 정령치를 넘어 돌아왔다 폭염의 날도 폭우의 날도 묵묵히 받아들이는 지리산 아무래도 우리의 미래는 이 푸른 산에 달려있다 - 섬진강 / 김인호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3-07-07
  • 무우루無憂樓
    「섬진강 편지」 -섬진강마을 무우루 천둥벼락 요란했던 밤 지새운 아침 큰 물난리가 났었던 2020년 그 아침과 흡사했다. 그날처럼 구례장날이었고 밤 내 비가 오다 아침에 말끔하게 개었다. 서둘러 강길로 나가본다. 섬진강 곳곳이 공사 중이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길 나선 김에 문척 죽연마을 무우루 능소화를 보러 갔다. 진즉부터 가보고 싶었는데 큰비가 지나간 다음이라 꽃들이 많이 졌다. 무우루無憂樓, 근심을 없애주는 집답게 벌겋게 녹슨 무우루 간판과 판자로 뚝딱 만든 표지판이 편안하다 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나 사치롭지 아니하다> 김부식 선생이 백제의 새 대궐을 미학적으로 평하며 남겼다는 문장이 떠오르는 무우루! 주인장과는 안면은 있지만 집안이 너무 조용하여 그냥 대문간에서 빼꼼 들여다 보고만 왔다. -섬진강 / 김인호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3-06-29
  • 하지모임 공연 - 소소한밴드, 오신체해방클럽
    소소한밴드 공연 - 자연스럽게/ 다시 돌아오게 해주는 곳/ free is not free 오신체해방클럽 춤 공연
    • 지리산문화
    2023-06-23
  • 편지
    편 지 1 네가 병을 얻은 뒤로 그래도 2주일에 한번은 전주에 올라가 너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듯 이것마저도 뜻대로 안 되는구나. 그래서 못 올라가는 날이면 편지라도 쓰기로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써 보는 편지다. 몸의 느낌은 좀 어떤지 모르겠구나. 감기만 좀 심하게 걸려도 그 무기력함이 온 생을 무너뜨리는 법인데 네 중압감이야 오죽하랴. 현실의 통증으로부터 오는 깊고 텅 빈 어둠과 그 속에 홀로 놓인 극한의 두려움들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다. 젊은 날 한때는 그 극한 상황을 일부러 찾아 떠나는 치기도 있었건만 이제 우리도 그 깊은 어둠을 생의 전면에서 관념이 아닌 현실로 만나야 하는 나이가 되었구나. 옛날처럼 이 현실을 두려움이 아닌 설렘으로 받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지만 너는 지금껏 잘 해 왔다는 생각이 든다. 병은 병대로 다스리되 평상심을 잃지 않고 하루를 새롭게 또 하루를 고맙게 맞이해야 할 것이다. 나처럼 일상에 끌려 다니는 놈이야 어찌 늘 새롭고 늘 고마운 세상을 느낄 수 있겠느냐. 하지만 너는 이전에도 나와는 달랐으니 이제 더 깊은 참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네 모든 것을 아내의 뜻으로 이루도록 해서 함께 병을 다스리기 바란다. 이미 너와 네 아내에게는 새로운 삶이 온 것이고 그 삶이 거느리는 또 다른 의미는 당연히 너희 몫이니 그것을 스스로 일구지 않으면 결코 현실의 누추한 절망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생의 이면에서 만나는 또 다른 소중한 체험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ㅇㅇ아, 네 이름을 불러 보고 싶다. 사랑한다. 2 그제 산에 다녀왔다. 눈이 무척 많이 내려 구례까지 가는 동안에도 길가에 차들이 서너 대 박혀 있더구나. 구례에서도 화엄사만 겨우 버스가 다녀서 화엄 골짜기를 오르기로 했다. 내일은 읍내에서 정운창 선생을(‘빨치산의 딸’을 쓴 정지아의 아버지)만나기로 되어 있어서 더 가깝게 택했다. 웃자란 시누대들은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활처럼 휘고 계곡은 하얗게 덮인 바위들 사이로 푸르게 시린 물줄기만 겨우 흐르고 있었다. 갑자기 네 생각이 폭포수처럼 밀려 왔다. 넌 나보다 앞서서 사람들과 세상의 어둠을 볼 줄 알았고 늘 그것들의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리고 그 사람과 세상에 대한 사랑도 나보다 깊었지. 순백의 화엄을 오르는 동안 너로부터 얻었던 그 어둠과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다. ㅇㅇ아, 네가 병을 얻은 이후로 스스로를 깊게 쳐들어온 생각 하나가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살아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물처럼 흐르듯이 살아내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관념의 끝에 놓인 목숨부터 세상의 사소한 욕심까지 다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리라. 물론 어려운 일이고 필생의 화두로 남아 끝내 얻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만 그것이 최선의 삶이고 사는 동안 스스로를 가장 잘 대접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직도 내 안에는 20대의 순도 높은 어둠과 40대의 어설픈 생활합리주의가 혼재해 있어서 혼란스럽구나. 이것들이 변주해내는 내 구체적 생활을 가라앉히는 일만 해도 쉽지 않은데 어쩌랴, 언제는 내 의지대로 세상의 시간이 흘렀더냐. 어쩌면 사는 일은 주어진 생을 그대로 받아 내야만 하는 숙명적인 형벌인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스스로의 生일지라도 스스로 깔끔하게 정리해낼 수 없다는 것을 요즘에야 느끼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겨울산의 엄혹한 추위를 느끼고 싶었다. 살을 도려내는 듯한 바람과 극한의 공포를 통해 지금의 너를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안일하게 늙어가는 나의 정신에 채찍을 드는 건 그래도 겨울산의 추위보다도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병들어 쉬어버린 너의 목소리였다. 우리가 늘 주고받으며 말했던 삶과 죽음이 우리의 관념과 현실을 수시로 넘나들었을 테지만 이제 이것들은 더 이상 관념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살아내야 할 현실이다. ㅇㅇ아, 누추한 내 사랑을 보낸다. 3 오늘이 49재구나. 이제 너를 영영 보내야만 하는구나. 49일을 중음신으로 떠도는 동안 네가 사랑한 이승의 것들과 석별의 정은 잘 나누었느냐. 너는 이제 가는 자가 되었지만 세상의 이별은 늘 보내는 자의 슬픔만 있을 뿐이다. 그래, 네가 이승을 뜨며 나에게 준 마지막 선물은 슬픔이다. 지난 백 년 동안 진정한 비극 한 편이 창작되지 못한 것은 사람이 영악해지면서 그 슬픔도 가벼워졌기 때문이라지. 너는 내 피폐해진 영혼을 위해 마지막으로 심연의 깊은 어둠으로부터 오는 슬픔 하나를 나에게 주었다. 네 육신을 사룬 한줌의 재와 함께. 하지만 나는 이 슬픔을 눈물 몇 방울로 받을 수밖에 없구나. 너의 죽음은 아직도 내 정면에 있고 나는 한 발을 움직일 수가 없으니 말이다. 잘 가라 벗이여, 내 사랑한 사람이여. 너는 세상의 부귀영화, 권력과 명예를 탐하지 않았어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 세상 놓기가 쉽지 않을 것이지만 이제 됐다. 그만 되었다. 그리움도 외로움도 사무치면 한이 되거니 49일 동안 곡진하게 보내는 의식을 치러낸 아내의 등도 이제 좀 다독여주려무나. 남은 날 동안 어둠이 올 때마다 초파일의 등불처럼 너를 걸리라. 어둠에 잠긴 꽃으로 네가 늘 숨쉬고 있을 것이니 나는 그걸 느끼리라. 아름다움은 말해 무엇 하리. 네가 그곳에 있는데. 강을 건너는 나비의 꿈은 말해 또 무엇 하리. 네가 그곳에 있는데. 벗이여 잘 가라. 내 사랑했던 사람이여.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3-06-10
  • 대답해 보아라
    대답해 보아라 관옥 사람이 없어도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무가 없으면 사람은 숨도 못 쉰다 그래도 사람이 나무보다 크냐? 사람이 없어도 강은 유유히 흐른다 강물이 없으면 사람은 목 말라 죽는다 그래도 사람이 강보다 크냐?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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